25화
제1장 디오니스 (24)
“하아…….”
“아 한숨 좀 그만 쉬어!! 폐하 지금 그 한숨이 몇 번째인 줄 알아? 나 정말 한 번만 더 들으면 미쳐 버릴 것 같다고!!”
제 귀를 막으며 발작을 일으키는 라웅을 한번 서늘하게 바라본 유안이 탁자에 엎드려 있는 루드바하에게 물었다.
“혹시 그것을 찾는데 문제가 있으십니까, 폐하?”
유안의 물음에 루드바하는 저를 향해 의미 모를 미소를 짓던 녹색 머리의 꼬마 베이라를 잠시 떠올렸다. 그랬더니 속이 더욱 묵직해지더니 답답함이 더해졌다.
“…하아!!”
“아악!!”
다시 더해진 루드바하의 한숨에 결국 라웅이 소리를 내지르며 방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그런 라웅을 보던 유안이 루드바하를 다시 쳐다보며 제 외알 안경을 치켜올렸다.
언제나 한결같은 태도로만 살아온 루드바하였다. 그는 언제나 옅은 미소를 얼굴에 머금었고, 누구의 적대와 환대에도 그의 표정은 늘 한결같았다. 가장 가까이에서 곁을 지키는 라웅과 유안을 비롯한 몇 명의 측근들 앞에서도 그의 감정이나 표정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그런 그가 디오니스에 온 이후 조금씩 이상해졌다. 자꾸만 귀족들이나 왕족들과의 만찬과 티 타임을 미루었던 것이다.
물론 그거야 젠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었으니 아주 별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대신 외궁의 공주와 티 타임을 가지며 그들의 왕이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 게 문제였다.
최근 한껏 신이 나 있더니만 돌연 어제는 돌아와 하루 종일 뚫어지게 거울을 보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오늘은 내내 저렇게 한숨이다.
“…하-아.”
또다시 들려온 루드바하의 한숨에 보다 못한 유안이 말했다.
“유파시드, 이제 십여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어서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유안의 말에 다시 한번 한숨을 푸욱 내쉰 루드바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지… 그걸 찾으러 온 거니까. 한데… 왜 자꾸…….”
마치 울 것만 같은 루드바하의 얼굴이 창밖 너머 외롭게 서 있는 한 외궁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저 외궁이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탓이었다.
“오늘은 안 오시나?”
후원에 앉아 있는 르베나의 옆에서 고개를 빼죽 내미는 사나의 얼굴이 기대감으로 달아올랐다.
“누굴 말하는 거지?”
곧 들려온 르베나의 물음에 사나가 샐쭉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누구겠어요, 공주님! 당연히 유파시드시죠! 모든 귀족과 왕족들이 티 타임 하나 갖지 못해 안달인 분이 매일같이 이곳에 와 공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데!! 그렇게 매정한 말로 무안을 주며 쫓아내시다니……!”
사나의 말에 르베나는 그런 소리였냐는 듯 다시 읽던 책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눈은 제 손에 들린 책에 고정되어 있지만 생각은 눈이 보는 것을 쫓지 못했다.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처음에는 귀찮기도 하고 베이라인 아한에게 다른 마음이 있는 건가 싶어 경계도 했지만, 계속 지켜본 바로 그는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곧 제국으로 승격될 젠의 왕이자 세츠들의 우두머리임에도 그에게는 건방이나 허세 따위가 없었다. 언제나 옅은 미소를 짓는 그의 표정 덕에 특별한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드는 재주도 있었다.
또한 흘러나오는 신력 한 자락 볼 수 없을 만큼 대단한 실력의 세츠이기도 했고, 언제나 그를 따라오는 라웅은 후벤이 한 번 보고 대련을 신청할 만큼 뛰어난 실력의 기사이기도 했다.
그가 젠의 기사단장이라는 걸 알고는 르베나조차 놀랐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아한은 라웅을 곧잘 따랐다. 그것만으로 르베나는 이들의 방문을 내칠 마음 따위가 없었다. 또 아주 약간은 그에 대해 궁금하기도 했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게 되면 상대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가 지금 제 눈앞에 웃으며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신력의 흐름, 성격 등을 파악하면 연합군과의 대치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안전범위 안에서였다. 어제처럼 이아린 같은 불청객이 그를 핑계로 드나들면 그의 방문은 더 이상 묵과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 되고 만다.
앞으로 일주일 남짓.
르베나는 마지막 무도회를 마치고 ‘다니아’를 이용해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렇기에 세나르를 위시한 어느 위험도 이들에게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이전으로 돌아가면 없을 이들이 이곳에서는 행복했으면 하니까.
가스트가 만들어 준 마법 병정 인형을 가지고 노는 아한.
시녀들과 분주하게 움직이며 환한 미소를 짓는 사나.
연무장에 가면 기사들과 땀을 흘리며 엄한 표정을 짓고 있을 후벤.
그는 언제가부터 르베나만 보면 입꼬리를 실룩인다. 그에게 붙은 ‘공주 바보’란 별명도 모르겠지. 그리고 이곳에서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언제나 말없이 르베나에게 신뢰와 의지를 전해 주는 가스트.
순간 그들을 떠올리는 르베나의 심장께가 뻐근해졌다. 그리고 괜시리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 같아 가만히 눈을 감아 버렸다.
마치 이 감정, 이 기억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잊지 않겠다는 듯.
* * *
그 후로 르베나는 무척이나 바빴다. 보석이 나는 지방까지 왕복에만 3일, 또 돌아오고 나서 베이라를 색출하고 자백을 받아내는데 2, 3일. 그러고 나면 곧 무도회가 시작되기 때문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
그리고 어느새 내일, 르베나의 짧은 여정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여정이라고 해 봐야 단순히 인근 마을에 가는 것뿐이지만, 후벤의 공주 바보 기질 덕분에 별것도 아닌 여정에 제1기사단 정예 열 명이 모두 동원되었다. 그러고도 불안해하는 후벤을 안심시킨 것은 가스트의 몫이었다.
“제발 진정하게나! 저만한 정예 열 명에 공주님의 실력까지 함께하면 이 디오니스 내에서 위험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네.”
그렇게 곧 있을 이별을 앞두고 르베나는 오랜만에 아한과 함께 후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없는 동안 아한이 심심해할까 병정 인형을 잔뜩 만들어 주기도 했다. 물론 가스트의 마력을 기본으로 만들어 루드바하가 본다고 해도 가스트의 마력만을 느끼게끔.
적은 양의 마력을 불어넣은 인형들은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저들끼리 움직이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아한은 이 인형들과 놀기도 했지만, 그와 동시에 마력을 쓰는 법을 익힐 수도 있었다.
그렇게 아한이 인형 놀이에 심취한 사이 르베나 역시 검을 훈련했다. 조금이라도 더 몸에 익힌 걸 상기해 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의 귀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진 건 아침이 조금 지난 무렵이었다. 곧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던 르베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지금 보기에 꽤 반갑지 않은 손님이었기 때문이다.
* * *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젠의 중심이며 세츠의 중심이신 유파시드에게 언제나 신의 안배가 함께하시길.”
부복을 하고 인사를 올리는 이를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어쩐 일인지 평소와 같은 미소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추운 겨울밤의 바다처럼 시리고 지독하게도 차분한 느낌이 짙었다.
“수고했다. 어떻게 됐지?”
짤막하게 묻는 루드바하의 말이 익숙한 듯 복면을 한 이가 힘 있게 대답했다.
“모두 깨끗이 처리했습니다.”
그의 말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루드바하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고했다. 그대들 모두 나흘의 휴가를 주지. 편히 쉬도록.”
“감사합니다!”
대답을 끝낸 이는 연기처럼 사라져버렸다. 누군가 이 방을 보았다면 헛것을 보았나 할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곧 옆에 있던 유안이 무엇인가 생각에 잠겨있는 루드바하에게 정적을 깨며 말했다.
“그중에는 회유를 하면 넘어올 만한 자도 있었을 겁니다. 굳이 모든 이를 처리하라 명하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최근 젠의 서부에서 적은 수로 구성된 세츠들의 연합에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루드바하의 통치 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반란을 꿈꾸는 세츠들의 무리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루드바하 직속 조직 다섯 명에 의해 전멸했다.
“유안, 나는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칼을 겨눈 자에게는 자비를 베풀 수 있지만, 내가 아닌 유파시드에게 칼을 내민 자에게는 어떠한 동정도 베풀 수 없다.”
차가운 목소리가 주변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유파시드에게 칼을 내밀면 최소한 그들의 목숨 정도는 담보해야 계산이 맞지. 적어도 이 자리에는 그만한 무게의 피와 목숨이 담겨 있으니까.”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루드바하는 언제나와 같았다. 하지만 그의 푸른 눈동자는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 모습을 본 유안이 작게 고개를 저으며 생각했다.
‘저렇게 차갑고 날카로운 성격인 것을… 누군들 알까.’
순간 유안은 어쩐지 저 미소에 속고 있는 젠을 비롯한 모든 왕국의 레이디들이 불쌍해졌다.
그리고 그런 유안의 생각을 다 안다는 듯 미소 지은 루드바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쩌겠어. 나라고 이렇게 잘생긴 얼굴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씨익 웃어 보이는 루드바하의 얼굴에 유안은 갑자기 라웅에게 전해 들은 그 공주가 보고 싶었다.
유일무이.
아무도, 여느 여성도 거절하지 못하는 그를 가차 없이 쳐냈다는 그 도도한 공주가.
“공주님, 드록 왕자님과 이아린 공녀께서 오셨습니다.”
눈치를 보며 고하는 시녀 루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순간 차갑게 얼어붙었다.
‘귀찮게…….’
그들의 방문에 짚이는 것이 있던 르베나는 사나를 불러 아한을 외궁으로 데려가라고 했다.
아니, 하려고 했다. 그들의 발이 더 빠르지만 않았다면.
“여긴 언제와도 우중충한 게 기분 더러워.”
드록의 말에 말갛게 웃는 이아린의 청아한 웃음소리가 그 뒤를 이어 들려왔다.
“어머, 왕자님. 어쩜 저랑 그렇게 같은 생각을 하세요? 사는 이에 따라 같은 궁도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에요. 고모님의 궁과 비교하면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걸요!!”
사촌지간 정다운 이야기가 점점 가까워졌다. 감상 같은 험담을 늘어놓던 둘의 시선이 화원에 있던 르베나에게 향하는 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늘씬한 다리에 꼭 맞는 바지를 입고 가볍게 검을 휘두르던 르베나. 이를 본 드록의 눈에 어느새 경계심이 어렸다.
가뜩이나 르베나에게 사이한 힘이 있다고 의심을 하고 있는 드록으로서는 검을 들고 있는 르베나를 보며 순간 다른 이야기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기사, 후벤 경이 욕심낼 정도의 실력이라는 르베나의 검술을 말이다.
마력이 전혀 없어 그토록 동경하는 마법 대신 검술훈련을 받고 있는 드록에게 르베나의 검술 실력은 손톱 끝에 박힌 가시처럼 미묘한 신경을 자극하는 불쾌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마침 드록은 오늘 이아린의 청을 받고 르베나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주러 왔다.
그 생각이 들자 르베나를 보는 드록의 눈빛이 기이하게 빛났다.
꽤 재미있는 생각이 났기 때문이다.
다가오는 드록과 이아린을 보며 르베나는 눈짓으로 아한을 얼른 데려가라 사나에게 고갯짓했다. 이에 알아들은 듯한 사나가 빠르게 다가와 아한에게 다가가자 이를 본 드록의 눈이 그쪽을 향했다.
“저놈이 가스트의 손자인가.”
드록의 눈이 아한에게 향하자마자 르베나가 둘 사이를 막아서며 말했다.
“저에게 볼일이 있으시면 제게 말씀하시지요.”
순간 드록이 감히 제 앞을 막아선 르베나를 불쾌감이 어린 얼굴로 보았다. 그러고는 그녀의 어깨를 세게 밀쳐내며 소리쳤다.
“미천한 마녀 계집 주제에, 감히 내 앞을 막아서?”
털썩.
일부러 힘을 주지 않은 르베나의 몸이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리고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일어난 것 역시 그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