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제1장 디오니스 (23)
“모든 신들의 사랑을 받는 자, 세츠들의 중심 유파시드에게 이아린 드 루치아가 인사드립니다.”
르베나와 루드바하는 누군가의 인사에 자연스레 고개를 돌렸다. 특히 인사의 주인공인 루드바하는 방금까지 라웅의 웃긴 짓거리를 보고 미소 짓던 얼굴 그대로 이아린을 바라보았다.
멈칫.
그의 얼굴이 저를 향한 순간 이아린은 그만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조금 더 미소 짓고 있을 뿐이건만. 그의 휘어진 눈과 입이 그녀를 향할 때 느껴진 황홀함은 제 상상을 초월했다.
특히 이아린은 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같은 긴장감과 동시에 온몸이 전율하는 듯한 생소한 짜릿함에 제 손끝을 잘게 떨기까지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아, 이아린 공녀님. 이곳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이아린과 마주한 루드바하의 얼굴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옅은 미소만이 그림같이 걸려있었다. 그리고 항상 듣기 좋았던 그의 목소리마저 조금 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느낌에 이아린은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타고난 귀족. 아이린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웬만한 남자들이 눈을 떼지 못할 정도의 매혹적인 미소를 그려 넣으며 말했다.
“유파시드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통 뵐 수가 없어 염치 불고하고 이리 걸음 하였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함께해도 될는지요?”
아이린의 말에 순간 그 옆에 서 있던 사나의 몸이 놀라 잠시 떨렸다. 하지만 옆의 반응 따위와는 상관없이 이아린의 얼굴은 그저 평온했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거절을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글쎄요… 저 역시도 르베나 공주님의 허락하에 동석한 자리인지라… 허락을 구하려면 제가 아니라 르베나 공주님께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루드바하의 평온한 말투와 함께 그의 뜻이 분명하게 전달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말에 이아린의 얼굴 역시 분노로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어떤 모임의 중간에 초대받지 않은 이가 동석을 요구하는 것은 굉장한 결례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동석을 원할 경우엔 그 자리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허락을 구해야 했다. 더불어 그 장소가 누군가의 거주지나 궁일 경우, 신분이 가장 높은 사람뿐 아니라 거주지의 주인에게도 허락을 구하는 것이 예의이다.
하지만 이아린은 오직 루드바하에게만 의사를 물었다. 신분이 천한 공주 따위는 공작가의 귀한 손녀인 이아린에겐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에.
하지만 루드바하는 그 결정권을 자연스레 르베나에게 넘김으로써 이아린이 르베나에게도 의사를 물어야 하는 상황을 만들어 버렸다.
그 의도된 상황에 이아린의 눈이 수치심으로 떨려왔다. 지난 시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본 적이 없다.
게다가 르베나는 엄연히 말하면 공주도 아니었고 심지어 아비도 모르는 미천한 계집애였다. 고모님의 아량으로 궁에서 빌어먹는 마녀 같은 계집. 자신과는 근본부터 다르단 얘기였다.
한데 그런 계집에게 허락의 말을 구해야 한다니. 부들부들 떨리는 제 손을 꼬옥 쥔 이아린의 눈이 가만히 앉아 있는 르베나를 향했다.
저를 무시한 것을 뻔히 알고도 평온을 유지한 르베나의 붉은 눈이 이아린은 꼴도 보기 싫어졌다. 하지만 이아린은 유파시드를 놓치고 싶지 않은 욕심이 훨씬 더 컸다. 그가 이아린과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낸다면 그도 여느 남자들처럼 저에게 빠지리라 확신하고 있기도 했다.
‘그래. 이건 큰 그림을 위한 잠시의 수치일 뿐이야!’
이아린이 곧 능숙하게 만들어진 미소를 그려 내며 르베나를 향해 분홍빛 입술을 열었다.
“강대한 힘의 근원, 디오니스의 영광이 공주님과 함께하시길. 이아린 드 루치아라고 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동석을 해도 될까요?”
하지만 미소만 지었을 뿐 까딱 숙인 고개와 진심을 담지 않은 이아린의 태도는 누구 봐도 루드바하에게 인사했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말이 인사를 하고 허락을 구하는 것이지 그녀의 모든 언행에서 르베나를 무시하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어느새 새로운 이의 등장에 라웅과 아한도 다가와 이아린을 힐끔힐끔 구경하며 시녀가 내온 쿠키와 티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윽고 르베나가 제 앞에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 같지도 않은 인사를 건넨 이아린을 바라보았다.
이아린 드 루치아.
이전의 시간에서 세나르 왕비가 르베나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일가는 모두 몰락의 길을 걸었다. 그녀의 조카이자 루치아 공작의 손녀인 이아린 역시 공작가가 무너지며 변방의 늙은 귀족에게 강제로 시집을 갔었다.
‘그리고 채 일년을 살지 못하고 저택의 젊은 기사와 도망을 치다 남편의 손에 죽었다 했던가?’
하지만 그녀는 지금 디오니스의 고귀한 레이디로서 도도하고 건방진 눈을 한 채 르베나의 앞에 서 있었다. 감히.
‘재미있군.’
그녀를 한번 바라본 르베나가 무감각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제 궁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그러니 유파시드 님과 나누어야 할 대화가 있다면 장소를 옮겨 따로 하는 게 좋겠어.”
명백한 거절.
애초에 이아린은 당연히 르베나 따위의 허락을 바라지 않았다. 그녀 따위가 저를 거절할 것이라는 예상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저 천박하기 그지없는 공주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에 없던 바로 그 말이었다. 게다가 감히 제게 반말이라니.
이아린의 몸이 수치와 분노로 잘게 떨렸다.
‘유파시드만 없었다면… 그랬다면…….’
순간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이아린을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눈에 비소가 어렸다. 하지만 이를 알아차린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아린조차도 그가 제게 보내는 미소의 의미를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니.
“지, 지금… 제 동석을 거부하시는 건가요?”
지금 네가 제정신이냐는 듯한 말이 이아린의 떨리는 음성을 통해 전해졌다.
동시에 르베나를 향하는 이아린의 핑크빛 눈동자가 분노로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온 답은 조금 더 피곤함과 귀찮음을 담은 같은 대답일 뿐이었다.
“난 이아린 영애와 유파시드 님의 대화를 왜 내가 있는 이 궁에서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을 뿐이야. 그러니 자리를 옮겨 시간을 가지라 말한 건데… 문제가 있나?”
움찔.
순간 저를 향하는 르베나의 시선에 이아린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분명 르베나의 말에는 부정적 감정의 편린조차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너희 담화를 왜 내 궁에서 하냐는 당연한 질문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아린은 그 간단한 말에, 또 눈빛 하나에 순간 제 숨이 답답하게 막혀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도 신분도 미천한 상대에게. 다른 누구도 아닌 유파시드의 앞에서.
“고, 공주님께서는 제가 싫으신가 봅니다. 전 공주님과 가까워지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요. 유파시드 님, 제가 따로 찾아뵙는 것을 허락해 주실 건가요?”
본능적인 두려움을 감추며 겨우 하는 이아린의 말에 루드바하가 곧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그려내며 말했다.
“물론이지요.”
다행히 루드바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인 이아린이 그에게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르베나를 한번 살벌하게 노려보고는 유유히 외궁을 벗어났다. 우아한 자세답지 않게 조금은 조급한 걸음걸이가 우습다는 것도 모른 채.
곧 이아린의 자취가 사라지자 입 안 가득 과자를 문 라웅의 한숨소리가 여백을 메웠다.
“하아… 숨 막혀 죽는 줄 알았네. 무슨 레이디 기가 저렇게 세? 디오니스 여자들은 다 이렇게 무서운 거야, 폐하?”
“그런 거 치고 그 많은 쿠키는 다 먹어 치웠군.”
타박하는 듯한 루드바하의 말에 라웅이 얼굴을 붉히며 무언가를 구시렁거렸다.
그런 라웅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루드바하가 제 시선을 조용히 르베나에게 돌렸다.
“괜히 저 때문에 공주님께서 곤란해지신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걱정스럽다 말하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걱정의 ㄱ자도 없는 루드바하의 얼굴.
‘진짜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지 모르겠군’
순간 이 반질반질한 면상을 매일 마주 보다가는 아까와 같이 귀찮은 일들이 반복될 거란 짙은 확신이 르베나의 머리에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야. 게다가 난 곧 떠날 예정이니…
유파시드와 관련된 일을 더 이상 늘이지 않는 게 좋겠군’
짧게 생각을 끝낸 르베나의 말은 거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이제 걸음을 좀 자제해 주시죠. 전 귀찮은 일은 딱 질색입니다. 그러니 유파시드의 방문으로 생길 어떠한 일도 미리 거절하죠.”
여지없이 뱉은 말이 끝나자 르베나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아한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리저리 눈치를 보던 아한이 냉큼 르베나의 손을 답싹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르베나의 붉은 눈이 마지막으로 루드바하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등을 돌려 미련 없이 멀어졌다.
“푸흡……. 폐, 폐하… 지금 까인 거야? 푸하… 푸하하하~!!”
갑작스러운 홀대에 멍하니 남겨져 있던 루드바하의 귀에는 라웅의 큰 웃음소리가 들려왔고 그의 벽안에는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려 루드바하를 바라보는 아한의 얼굴이 들어왔다.
씨익.
승자의 미소를 지어 보인 아한이 다시 고개를 돌리며 작은 손에 힘을 주어 르베나의 손을 더 꼬옥 잡는 순간.
빠직.
루드바하가 들고 있던 커피잔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곧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식은 찻물과 같은 온도가 그의 전신을 휩쓸었다.
“역시… 맘에 안 들어… 저 꼬마 베이라.”
그런 루드바하의 옆에서 그를 비웃으며 남은 르베나의 쿠키를 우적대던 라웅은 별안간 몸에 소름이 돋는 기이함을 경험해야만 했다.
“디오니스가 진짜 기가 세구나…….”
눈치 없는 라웅의 중얼거림이 아담한 티 테이블의 적막을 조용히 채워 넣는 늦은 오후의 시간이었다.
“아악!! 아흑……!”
흐트러진 방 안.
깨어진 유리 조각이 여기저기 널려있고 그 가운데 피를 흘리며 앉아 있는 시녀에게 다시 사나운 보석함이 날아든 순간.
“윽……!”
그 모서리에 머리를 맞은 하녀가 비명을 채 지르지도 못하고 제 머리를 감싸 쥐며 벌벌 떨었다. 바닥에 잔뜩 웅크린 작은 하녀의 몸이 안쓰러웠다. 그리고 그런 하녀를 벌레 보듯 바라보던 이아린이 곧 제 옆에 선 채 벌벌 떠는 다른 하녀에게 말했다.
“치워 버려.”
이아린의 말에 피에 젖은 하녀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급히 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뚝뚝 떨어지는 피에 카펫이 젖어 갔다.
“아, 아가씨… 제발 제발… …….
상처 따위는 돌보지도 않고 연신 울며 비는 하녀를 본 이아린이 짜증스럽게 소리쳤다.
“안 치워? 치워 버리라고 당장! 안 그러면 너도 같이 치워 버리겠어!!”
이아린의 성질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하녀가 이아린의 말에 화들짝 놀라 쓰러진 하녀를 부축해 끌고 나갔다. 자연스럽게 끌려 나가면서도 계속 살려달라 소리치고 애원하는 하녀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겨우 소리가 잦아들자 이아린의 곁에 서 있던 또 다른 하녀가 눈치를 보며 빗을 들고 조심스레 다가왔다. 이아린의 고운 금발을 빗어 내리는 하녀의 손길이 공포로 떨려왔다.
방금 끌려 나간 하녀는 이아린을 5년이나 모셔 온 아이였다. 한데 조금 전 빗질을 아프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순식간에 치워진 것이다. 루치아가에서 치워진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를 뜻했다.
노예로 팔려 가거나 죽거나.
그중 여자 노예는 대부분 사창가나 취미가 고약한 귀족 변태에게 노예로 팔려 갔다.
이를 다시 상기하며 벌벌 떠는 손으로 세상 조심스럽게 빗질을 하는 하녀의 손길을 느끼며 이아린의 눈이 다시 사납게 빛나기 시작했다.
“감히 천한 계집 주제에……!!”
멈칫. 이아린의 독기 어린 말에 겁에 질린 하녀는 제발 이 빗질이 무사히 끝나기만을 바라며 덜덜 떨리는 제 손을 조심조심 움직였다. 이아린의 풍성한 머릿결의 개수만큼 두렵게 느껴지는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