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제1장 디오니스 (22)
“뭐? 또 외궁에 가셨다고?”
곤란해하는 시녀를 앞에 두고 이아린이 소리쳤다.
홱 고개를 돌린 소녀의 머리카락은 흡사 벌꿀을 녹여 만든 실처럼 달콤해 보였다.
하얀 얼굴에 자리 잡은 그녀의 이목구비는 새침하고 사랑스러웠다. 큰 키에 늘씬한 몸, 게다가 디오니스 왕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위치의 레이디.
그녀가 바로 디오니스 최고의 미녀라 불리우는 루치아 공작의 손녀, 이아린이었다.
이아린은 얼마 전 고모님인 세나르 왕비의 초청으로 유파시드와 티 타임을 할 수 있는 영광을 얻었다. 그리고 이아린은 그녀의 열일곱 삶 평생 처음으로 자기에게 완벽해 보이는 짝을 찾았다.
그의 머리는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가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조각 같은 외모에 박혀있는 그 짙푸른 색의 눈동자가 이아린을 향할 때, 이아린은 온몸에 전기가 오르는 것만 같았다.
또 그의 손끝 발끝까지 묻어나오는 그 귀품과 절제 그리고 짙고 매혹적인 남성의 모습은 도도하기로 소문난 이아린마저 단 한 번도 눈길을 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멋들어진 그의 미소. 언제나 옅게 지어져 있는 그 미소가 이아린을 향할 때, 이아린은 결심했다. 그를 얻기 위해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이후 이아린은 매일같이 그를 찾아갔다. 그와의 티 타임을 꿈꾸며 사들인 옷과 장신구의 가격만 해도 공작가로서도 꽤 큰 금액일 만큼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꾸미고 궁에 들어선 이아린을 보면 시종이고 기사들이고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내가 그분을 뵈러 왔었다는 걸 말씀드렸단 말이지?!”
짓씹듯 물어오는 이아린의 질문에 겁먹은 시녀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외궁… 이라고……?”
매일 찾아왔었단 기별에도 외궁을 향하는 그의 발걸음을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레이디의 품위가 있어 매일 발걸음을 돌렸건만. 오늘만큼은 그렇게 하기 싫었다.
일주일 뒤에 있을 무도회에 꼭 그의 파트너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도도한 이아린의 시선이 멀리 보이는 외궁에 꽂혔다.
“더러운 계집 따위에게 도대체 왜?”
순간 이아린의 하늘색 눈빛에 분노의 불꽃이 피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도도한 걸음이 단 한 번도 향하지 않았던 디오니스의 외진 궁을 따라 향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저놈이 나한테 뭘 바라는 거지…….’
의아함을 넘어 수상함을 느끼는 르베나의 시선이 와닿자 루드바하가 은근슬쩍 볼을 붉히며 말했다.
“공주님께서 그리 바라보시니 부끄럽군요.”
결국은 르베나가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루드바하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사실 디오니스에 온 후로 이 외궁에 있을 때가 유일하게 편안한 시간이니, 다소 불편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십시오.”
그의 말에 르베나는 어쩐지 약간의 동정이 들기 시작했다. 세 치 혀를 놀리는 귀족과 왕족들에게 모든 시간을 둘러싸여 보내는 그의 일상이 어떨지 르베나는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전의 그녀 역시 그런 시간을 보냈으니. 그리고 그녀 역시 아한을 비롯한 후벤과 가스트와 함께 보내는 잠깐의 시간이 유일한 휴식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이들을 내치고 죽게 하다니 난 정말…….’
문득 든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묘하게 변하는 르베나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보던 루드바하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웬일인지 그 꼬마가 안 보이는군요.”
루드바하의 말에 순간 르베나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사실 최근 르베나가 후원에 나올 때마다 아한은 그녀와 함께였고 루드바하와 함께 온 라옹은 아한과 곧잘 놀아 주고는 하였다. 그러니 그의 궁금증이 이해되었던 탓이었다.
루드바하의 옆에 서 있던 라웅도 아한을 찾는지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라웅은 딱히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작고 귀여운 그 베이라가 퍽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저기 오는군요.”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와 라웅의 시선이 외궁의 입구로 향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나의 손을 잡고 후원 쪽으로 오던 아한이 르베나를 보더니 다다다 달려와 그녀의 품에 폭 안기었다.
그리고 그걸 보고 있던 루드바하의 수려한 이목구비가 왠지 조금은 찡그려지는 듯싶었다.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이상해… 저 꼬마를 볼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라웅은 퍽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왜 그러는 거지… 베이라라 그런 건가…….’
심지어 본인조차도.
생각에 잠긴 채 아한을 지그시 바라보는 루드바하의 눈길이 차단당한 것은 금방이었다. 자신의 눈을 가로막은 이를 보자 그곳엔 르베나가 있었다. 경계를 감추지 않은 표정으로. 순간 루드바하가 변명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아… 아한은 어린데도 매일 그대와 붙어있는 듯하여… 어른과 놀기 싫을 나이가 아닌가 해서… 하하. 오해는 마세요. 난 정말 평범한 어린 베이라에게는 아무 감정도 없으니.”
어린 베이라인 아한에게 관심을 갖는 것에 경계심이 가득한 르베나의 눈빛을 보고 그가 거듭 변명하듯 말했다. 이에 루드바하와 르베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한이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당황한 표정의 루드바하를 한 번 바라본 후 르베나의 품에 더욱 제 얼굴을 깊이 묻으며 안겨 들었다.
그러고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루드바하를 보았다.
생긋.
아한의 눈이 루드바하와 마주친 순간 생긋 웃어 보였다. 그 천사 같고 말간 미소가 왠지 그에게 말하는 것 같았다.
신경 끄라고.
예상치 못한 아한의 반응에 루드바하가 당황해하는 사이,
“어찌나 공주님을 좋아하는지. 제가 공주님이 후원에 나갔다고만 하면 졸린 눈을 하고서도 뛰어나온다니까요. 도서관에 계시거나 다른 곳에 가셨다 그러면 안 그러는데… 참 신기하죠?”
르베나의 품에 안긴 아한을 보며 말하는 사나의 말에 르베나는 아한의 머리를 더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한도 그저 이곳이 좋은 거겠지.”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어딘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런가 봅니다. 아! 어쩌면 우리 라웅과의 시간이 좋은 건지도요.”
순간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그런가 싶어 라웅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라웅은 곧 침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그들 앞에 차려진 디저트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아앗……!”
그러다 갑자기 목 뒤를 따끔하다는 듯 문지른 라웅이 홱 고개를 돌려 루드바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뭇 여성들의 심장을 뛰게 할 옅은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곧 라웅이 작게 한숨을 쉬며 앞을 보다가는 르베나에게 안겨 있는 아한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힘껏 루드바하를 노려보더니 씁쓸한 시선을 디저트에게서 떼며 말했다.
“아한, 형이랑 놀까?”
조금은 풀이 죽은 라웅의 말에 르베나는 아한을 놓아 주려 했다. 아한 역시 라웅을 꽤 따르는지라 보통 이렇게 말하면 곧잘 따라가곤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기 싫으니?”
오늘따라 아한은 라웅에게는 시선 한 자락조차 주지 않고 르베나를 그저 안고만 있었다. 그러면서 슬쩍 루드바하에게 알 수 없는 시선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르베나가 그런 아한을 보았다가는 컨디션이 좋지 않은가 싶어 제 옆에 의자를 하나 더 가져오라 말했다.
그리고 같은 순간 루드바하는 알 수 없는 불쾌감에 왠지 눈앞의 꼬마가 또다시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지난번에 느꼈던 것보다 더 짙은 불쾌감이 느껴졌다. 특히 르베나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저 작은 손이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건지 그조차 알 수가 없었다.
‘저 베이라한테 뭔가 숨겨진 힘이 있나?’
루드바하가 저답지 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르베나와 아한, 그리고 루드바하와 라웅 사이에 이유를 알 수 없는 묘한 침묵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만의 정적이 감도는 이 티 타임이 르베나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이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른 채.
“이아린 공녀님……?”
외궁에서 절대 볼 일이 없을 것 같은 이의 등장에 놀란 사나가 서둘러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아린이 하늘색으로 빛나는 제 눈을 치켜떴다. 그러고는 사나를 바라보며 덩달아 고개를 높이 올려들었다.
“유파시드께서 여기에 계시다고 들었다. 그분께 용건이 있다.”
이아린의 말에 사나는 곤란한 듯한 표정을 애써 숨겼다.
궁 안 소식에 빠른 사나는 이 공녀님께서 유파시드에게 갖는 관심이 지극하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번 티 타임이 성사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린다는 것과 그 주인공이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을 찾는다는 것까지.
왜인지 아찔한 순간이 이제 다가온 것만 같아 사나의 눈앞이 순간 어두워졌다.
이에 사나가 머뭇거리며 곧장 안내를 하지 않자 이아린이 사나운 눈초리로 사나를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가까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아린은 모든 신경은 사나를 떠나 다른 곳에 빼앗겨 버렸다.
저음인 듯하지만 부드럽고 나지막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 낮게 울리는 그 소리를 들으면 왜인지 배 아래쪽이 간질간질 울려온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의 속도는 듣는 이의 집중을 모으기에 충분했고, 고요히 전해오는 소리의 진동은 어떠한 귀라도 붙잡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이곳, 외궁에서 퍼지고 있다.
그것도…….
‘웃음소리……?’
그는 이아린과의 티 타임 내에도 옅은 미소를 입가에 짓고 있었다. 다분히 귀족적인 그 미소는 보는 것만으로도 이아린의 심장을 뛰게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는 그 이상의 미소를 이아린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만의 티 타임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한데 지금.
‘이 천박한 것의 궁에서 그가… 웃는 거야?’
곤란한 듯한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사나를 제치고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급히 걸어간 이아린의 눈이 순간 충격으로 떨리어왔다.
작은 소리를 내며 웃는 그. 그 앞에서 어떤 아이와 놀아 주고 있는 그의 가신, 라웅.
그리고.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붉은 눈은 얼핏 무감각해 보였으나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심장이 떨릴 만큼 매혹적이었다. 무엇보다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는 이아린이 시녀들에게 지시한 화장법 그대로를 만들어 놓은 것만 같았다.
작고 하얀 얼굴에 빈틈없이 자리 잡은 이목구비는 디오니스 제일의 미인이라 칭송받던 이아린을 한순간에 초라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게다가 늘씬한 키와 굴곡진 몸매까지.
순간 이때까지 디오니스 제일의 레이디라 불린 이아린은 지금 제 눈에 비친 존재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짙은 패배감을 느꼈다.
아직 성인식을 치르기까지 남은 시간은 3년.
저와 같은 열일곱 살임에도 저렇게 숨 막히게 매혹적인 르베나의 앞날이 이아린은 문득 두려워졌다. 더불어 그 앞에 미소 짓고 있는 그의 모습마저도.
이내 눈가에 묻어있는 잔상을 털어내고 입가에 한 번 세게 힘을 준 이아린이 그들에게 지체 없이 다가갔다. 그리고 전에 없이 우아한 태도와 환한 미소로 완벽한 자세로 인사했다.
“모든 신들의 사랑을 받는 자, 세츠들의 중심 유파시드에게 이아린 드 루치아가 인사드립니다.”
옆에 있던 디오니스의 유일한 공주, 르베나를 완벽하게 무시한 이아린의 인사가 공기를 타고 전해진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