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제1장 디오니스 (21)
명백한 축객령. 하지만 더 이상 눈길조차 주지 않는 르베나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루드바하는 빙긋 웃으며 르베나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신분이 높아도 주인이 허락하지 않은 자리의 동석은 결례이거늘.’
순간 르베나가 불쾌함을 담은 눈으로 루드바하를 바라보자 제발 그가 봐달라는 듯 장난스레 웃으며 말하였다.
“여기까지 오느라 다리가 너무 아파서 말입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쉬다 가겠습니다, 공주님.”
왕이란 타이틀에 맞지 않는 그의 넉살에 르베나가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어보았다. 어디를 보아도 보통의 세츠답지 않게 완벽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그의 몸과 다리는 아주 단단해 보였다. 기사인 르베나조차 그의 몸이 탐 날 정도로. 다르게 말하면 이 정도 거리로 다리가 아플 만큼 그의 몸이 조금도 부실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했다.
르베나의 따가운 시선에 루드바하를 따라온 라웅마저도 기가 막히다는 듯 뻔뻔한 제 왕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간절한 시선으로 르베나의 허락을 구할 뿐이었다.
“전하… 유파시드로서, 또 젠의 왕으로써 체통 같은 건 어디 갖다 버린 거야?”
라웅의 말을 들으며 언제나와 같이 옅은 미소를 띠고 여유 있게 서 있는 그가 왠지 자신에게만큼은 눈치를 본다는 생각이 르베나만의 착각은 아닌 듯했다.
간절히 두 눈을 빛내는 루드바하의 모습에 르베나는 결국 못 이긴 척 승낙의 의미를 전했다.
“쉬시는 것뿐이라면… 알겠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루드바하의 곁에 서 있던 라웅은 단것을 꽤 좋아하는지 어느새 시녀가 따로 마련해 준 티 테이블에서 엄청난 양의 쿠키와 케이크, 그리고 차를 마시고 있었다. 저건 디저트를 먹는 게 아니라 흡사 며칠 동안의 밀린 식사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저건 식충인가…….’
진지한 르베나의 시선을 느낀 루드바하가 멋쩍게 웃으며 말하였다.
“죄송합니다. 식성이 워낙 좋은 친구인데다가 디오니스의 디저트는 젠의 것보다 훨씬 맛이 좋아서.”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는 라웅에게로 향하는 제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었나 싶어 느리지 않게 거두어들였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그녀의 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듣기로는 공주님께서… 검술 연습을 하신다지요.”
움찔.
순간 저를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을 마주하며 루드바하가 다시 물었다.
“실력이 굉장하여 기사단장인 후벤 경이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들었습니다.”
그들 사이 잠시 생긴 정적을 봄날의 햇볕을 담은 바람이 춤추며 메꾸었다.
여성 기사가 전무한 디오니스. 그곳에서 불운한 공주가 검을 잡는 이야기는 재미있는 안줏거리이자 그녀를 비웃고자 디오니스의 많은 귀족들이 쓴 대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들과 똑같은 이야기가 제 앞의 루드바하를 통해 흘러나왔다. 르베나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순간이었다. 르베나가 불쾌감을 담은 눈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나오는 르베나의 어조가 절로 차가웠다.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군요.”
르베나의 말투에 순간 놀란 듯한 루드바하가 뭔가를 깨달은 듯 당황해했다.
“아, 혹시나 오해는 마십시오. 절대로 공주님을 폄하하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전 그저 왕족의 신분으로 여성분이 검술을 배운다는 것이 멋져 보였을 뿐입니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가기도 했고.”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관심……?’
베이라인 그녀에게 유파시드의 관심만큼 필요없는 건 없다. 그건 마치 눈앞에 팔딱이는 생선에게 고양이가 관심을 갖는 것과 같은 이치였기 때문이다. 물론 르베나는 본인의 마력을 꼭꼭 갈무리해 놨지만 상대는 세츠들의 왕, 유파시드였다. 그가 무얼 알고 있는지 그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르베나조차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때였다. 한 인영이 그들에게 다가와 작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아한.”
짤막한 르베나의 음성에는 건너편에 앉은 루드바하가 놀랄 정도의 따뜻함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제 이름을 불린 아한은 이전에도 그랬듯 다다다 달려와 르베나에게 안기었다.
그런 아한의 머리를 쓰다듬던 르베나가 루드바하에게 예를 갖추어 말했다.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괜찮으신지요?”
이미 아한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난 르베나의 물음은 끝에 물음표만 있다 뿐이지 그냥 가겠다는 선언에 불과했다. 물론 말투는 정중하기 그지없었지만.
그 태도가 꽤 불쾌할 법도 한데 르베나와 아한을 한 번씩 본 루드바하는 오히려 말갛게 웃는 미소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아한의 손을 잡은 르베나가 그의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그의 미소는 점점 옅어져 갔다. 이내 그의 눈빛이 르베나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인영에게로 가 차갑게 박혔다.
* * *
“4일 후에?”
르베나의 물음에 후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대충 이곳에서 급한 일들을 처리하고 제가 기사 몇과 함께 마하렌으로 향할 예정입니다. 가서 그 보석을 캔다는 광부를 만나 누구에게 보석을 팔았는지 기록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보통의 광부들은 제 보석을 납품한 곳이나 사람의 기록을 철저하게 남긴다. 보석이라는 것이 취향이나 개성에 따라 납품되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보석을 누가 얼마나 사 갔는지를 알아야 그 손님이 왔을 때 더 좋은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르베나가 말했다.
“후벤, 아무래도 그곳은 내가 직접 가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르베나의 말에 후벤과 사나 그리고 가스트까지 모두 반대의 눈빛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오고 가고만 나흘이 걸리는 마하렌 지방은 디오니스의 북부에 위치해 있는 작은 곳이었다. 멀고 힘든 여정이 될 것이 분명한 일에 감히 그들의 공주님을 걸음 하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눈빛을 읽은 르베나가 예상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후벤, 말해 보지. 그 광부가 베이라일 확률은 얼마나 되지?”
생각지 못한 르베나의 말에 후벤의 눈이 떨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르베나의 말처럼 높은 가능성은 아니지만 그 광부 자체가 베이라일 확률도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이라면 광부가 베이라라는 건 지나가는 개가 웃을 만큼 어이없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종전 이후 살아남은 베이라들이 일반인처럼 몸을 숨긴 채 평범함을 위장해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디오니스 내에서 유명했다.
젠의 표적이 되고 싶지 않은 패배자들의 결말인 것이다.
그리고 시간을 거스르기 전, 디오니스의 왕이 된 이후 실제로 숨어 있던 베이라들을 규합했던 르베나는 그 사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르베나가 이를 지적할 줄은 몰랐던 것인지 후벤의 얼굴에는 난감함과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후벤과 그대의 기사들이 뛰어난 실력인 것은 안다. 하지만 만약 그가 정말로 베이라라면, 게다가 그대들의 방문을 미리 알고 있다면 그를 상대할 수 있는 건 같은 베이라여야 한다는 것도 알겠지.”
후벤이 순간 인정하기 싫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사실 르베나의 말이 맞았다.
그와 기사들은 눈앞의 적을 베고 가르는데 일가견이 있지만, 실력 있는 베이라가 먼 곳에서 마법을 난사하거나 덫을 만들어 놓으면 그들은 이를 피할 재간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대도 그들에게는 차선책이 있었다.
“그렇다면… 제가 가지요.”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르베나를 본지 이제 겨우 4, 5일 정도 된 가스트마저 르베나의 걸음을 막으려 하다니. 이들은 정말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에 르베나는 이상하게 짜증보다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 울렸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고 르베나 역시 준비해 놓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가스트, 자네가 이곳에 남아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만약 그가 베이라가 아니고 평범한 광부일 경우 난 그에게서 어떤 인상착의의 베이라에게 보석을 넘겼는지 물어볼 거다. 그래서 추려진 몇 명의 후보들은 어쩔 수 없이 가스트 자네나 내가 직접 확인할 수밖에 없지.”
“흠…….”
르베나의 말에 가스트가 선뜻 반박을 하지 못하고 낮은 침음을 흘렸다.
수요가 거의 없는 보석이라 그 보석을 사간 수상한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가스트가 가진 베이라들의 명단에서 인상착의로 추려내면 많지 않은 인물들이 걸러질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들의 주소로 일일이 찾아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만약 후벤의 기사들만 보낼 경우 상대가 베이라이기 때문에 잡아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명단을 추려 마법구로 전송하면 가스트 백작은 이곳 수도에서 가까운 곳부터 후벤과 함께 확인을 부탁하지. 나는 마하렌에서 가까운 곳부터 확인하며 수도로 돌아올 테니.”
“하지만 그럼 역할을 가스트 님과 반대로 해도 되지 않을까요, 공주님?”
어떡해서든 르베나의 발길을 막고 싶은 사나의 말에 르베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가스트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사나 양, 아마 공주님께서는 텔레포트가 가능하실 겁니다. 아마 저보다도 더 먼 거리를 말이지요.”
사나와 후벤의 놀란 눈이 르베나를 향한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이 시대의 텔레포트는 가스트 정도 실력의 베이라나 세츠들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조차도 아주 멀지 않은 거리를 본인 혼자만 이동하는 정도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 가스트의 말에 따르면 르베나는 그보다 더 먼 거리를 충분히 이동할 수 있는 베이라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히 먼 곳에 있는 용의자를 찾아다니기에 가스트보다는 르베나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놀란 후벤과 사나의 눈빛에도 르베나는 의식하지 않으며 화제를 자연스레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를 보는 가스트의 눈빛은 점점 더 깊어지기 시작했다.
‘예전에 태어나셨다면 디오니스 전체를 발밑에 둘 만큼 강한 베이라가 되셨을 거다. 거기에 나이답지 않게 점잖은 인품과 성숙함, 무엇보다 다른 이의 입장을 헤아릴 줄 아는 깊은 아량까지… 성군의 자질이신 건가…….’
가스트는 조금 전 가스트와 역할을 바꾸라는 사나의 말에 답하지 않은 르베나를 떠올렸다. 분명 르베나는 제 실력이 가스트보다 우위에 있기에 역할을 바꾸는 게 소용없다는 걸 알았을 거다. 하지만 본인의 입으로 그 질문에 답하지 않은 건 바로 가스트에 대한 배려였을 것이다.
어떤 때보면 제멋대로에 주변 사람들의 입장 같은 건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후벤의 말대로였다. 언제나 티 나지 않게 그녀 주변의 모두를 이해하고 배려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서툴기도 하고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그런 행동이 티 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르베나 혼자 뿐인 듯싶기도 했다.
가스트는 르베나를 처음 보았을 때의 전율을 기억한다. 또 그 전율만큼의 염려와 두려움도 기억한다. 하지만 이 순간 가스트는 한쪽의 감정을 조금 덜어내기로 했다.
어쩌면… 어쩌면 그녀는.
전혀 생각지도 않은 일로 그의 일생을 전율케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르베나를 보며 깊어지는 가스트의 생각만큼 이들의 역할 분담도 그 속도를 더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5일 뒤, 르베나는 후벤의 제1기사단과 함께 마하렌으로 떠나기로 하였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르베나의 외궁이 분주해졌다. 빌어먹을 드록 왕자와의 내기에 르베나 공주님께서 보석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왕국이라면 귀족들이나 기사들이 대신 보석을 구해주겠다 여기저기서 나서야 하지만 세나르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한 그들은 자신의 몸을 숨기기에 바빴다. 소수는 매우 흥미진진하게 뒤에서 이들의 내기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처음 떠나는 공주님의 행차에 차질이 없도록 외궁의 시종 시녀들은 그들 나름대로 사나의 지휘하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발 빠르게 준비하고 있었다. 르베나의 옷, 구두, 속옷은 말할 것도 없이 담요를 비롯한 이불, 식량, 간식까지.
오고 가고만 무려 사흘이 걸리는 여정에 그들 눈에는 연약하기만 한 공주님께서 노숙까지 하셔야 한다니. 외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들 모두 르베나가 오랜 시간 기사 훈련을 받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선이 가는 르베나의 몸은 모두의 마음을 애타게 만들기 충분했다. 게다가 함께 가는 제1기사단 몫의 음식까지 챙겨야 했기 때문에 모두의 분주한 발걸음은 매일같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은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하아… 또… 오셨습니까?”
귀찮다는 느낌이 아주 진득하게 묻어나는 르베나의 말에 앞에 앉은 이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하였다.
“제가 아무래도 이 외궁의 화원에 중독된 듯합니다.”
마치 제집 안방인 양 이제는 자연스럽게 시중을 받으며 찻잔을 들어 올리는 남자, 루드바하를 바라보는 르베나의 붉은 눈에 짜증과 귀찮음이 가득하였다.
처음 두 번 연달아 이곳을 방문하고 난 뒤로 그는 며칠간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유파시드를 보고 싶어 하는 디오니스의 왕족과 귀족이 몇 명인데 그가 버려진 외궁의 공주와 한가하게 티 타임을 즐기겠냐 이 말이다.
게다가 지난번에는 르베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명백한 퇴출령을 내렸으니 유파시드인 그도 기분이 상했을 것이다. 아니, 그랬어야 한다.
하지만 발걸음을 멈춘 것도 잠시, 그는 어느 날부터 매일 귀신같이 르베나가 후원에 나와 있을 때만 되면 이곳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끈질김을 보며 르베나는 그가 괜히 유파시드가 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