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제1장 디오니스 (20)
르베나 드 디오니스. 그녀의 표정은 언제나 한결같았다.
서늘한 적의를 품고 있는 적안. 은근한 경계가 품어져 나오는 분위기, 누구에게도 완벽히 곁을 내어주지 않는 거리감.
그것이 몇 번 본, 그리고 유안에게 전해 들은 르베나에 대한 루드바하의 단평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르베나의 모습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얼핏 보면 알지 못할 만큼 조금 휘어진 눈꼬리의 끝이 루드바하의 벽안을 진득하게 붙잡았다.
시리게 빛나던 적안에는 알 수 없는 깊이의 온기가 감돌아 그걸 바라보는 손끝이 찌릿하게 저려 왔다. 매혹적인 르베나의 입술 끝은 마치 누군가를 유혹하는 것보다 은근하고 아찔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르베나의 검은 머리카락은 그녀의 모습에 더없는 생동감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에 루드바하는 상념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흠칫 놀랐다.
방금의 제가 약간은 혼란스러웠는지 그의 눈빛은 그녀의 주위를 잠시 방황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느새 그의 벽안에는 어떠한 동요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빠른 전환이었다.
“가스트는?”
다가와서는 아무 말도 없이 제 앞에 서 있는 아한에게 르베나가 물었다. 르베나가 아는 한 가스트는 이유 없이 아한을 혼자 두지 않기 때문이다. 르베나의 질문에 아한이 르베나에게 쪽지를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급히 보석과 관련된 일로 궁을 비웁니다. 아한을 잘 부탁드립니다, 공주님.]
다소 무책임한 것 같은 가스트의 쪽지에 잠시 헛웃음이 났지만 르베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스승 가스트는 절대 못 믿는 사람에게 아한을 맡기지 않는다.
순간 그녀의 마음 끄트머리가 살짝 녹아내렸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그녀의 얼굴에는 잠시 난감함이 어렸다.
“아한, 어쩌지… 지금은 손님과 함께라 같이 있을 수가 없는데…….”
르베나는 곤란한 듯 대답하고는 서둘러 사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신분이 더 높은 사람과의 자리에서 애초에 얘기되지 않은 손님이 동석하는 것은 결례였기 때문이다. 물론 르베나의 마음만은 아한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다소 활달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사내아이는 제가 또 엄청 잘 놀아 주는데!”
루드바하의 뒤에 서 있던 기사, 라웅의 말에 르베나의 한쪽 눈썹이 의심으로 올라갔다.
‘저자는 유파시드의 호위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르베나의 눈이 의문을 담고 루드바하를 향하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라웅은 아이들을 정말 좋아합니다. 저 또한 호위가 필요한 상황이 아니니 공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라웅에게 그 아이를 돌보라 하겠습니다. 제가 공주님과 대화를 나눌 때까지만 말입니다. 물론 라웅의 신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아한에게 향했다. 의사를 묻는 것이었다.
아한의 눈동자가 르베나를 한 번, 루드바하를 한 번, 라웅을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짓궂게 활짝 웃은 라웅이 아한을 번쩍 안아 들고는 르베나의 시야에 잘 잡히는 화원의 앞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아한에게 큰 소리로 떠들며 하하 웃는 라웅과는 달리 아한의 표정은 별 변화가 없었지만, 싫었으면 냅다 다시 돌아왔을 아한이 가만히 있는 걸로 봐서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공주님의 궁에 저렇게 어린아이가 있는 줄은 몰랐군요.”
르베나의 시선을 따라 아한을 바라보던 루드바하가 말했다. 보통의 궁에는 왕가의 직계 혈육이 아닌 이상 어린아이는 잘 보이지 않았으니 물은 것이리라.
“베이라 가스트의 손자입니다.”
르베나의 말에 루드바하의 얼굴에 호기심이 어렸다.
“아… 그가 입궁했다는 소식은 저도 들었습니다. 그 저명한 베이라, 가스트의 손자라… 그렇군요. 그래서 저 아이에게서 희미하게나마 마력이 느껴지는군요.”
움찔.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뚜렷한 경계를 담고는 그에게로 향했다.
현재 아한의 마력은 웬만한 베이라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미미했다. 가스트가 본인의 마력으로 아한에게 결계처럼 힘을 둘러 마력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해 놓았기 때문이다.
르베나조차 아한에게서 나오는 마력을 가만히 보아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민하게 주위를 살필 줄 아는 자다.’
순간 저를 향하는 르베나의 경계 섞인 눈빛을 느낀 루드바하가 항복이라도 할 듯 두 손을 들고는 웃으며 당황한 채 말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유파시드라하여 베이라를 무조건 배척하고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단지 평화협정에 반기를 드는 존재들을 척결할 뿐입니다. 단지 그게 베이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거지요. 게다가 어린아이를 위협할 정도로 무뢰한이 아닙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은 경계 수위를 낮추었다. 동시에 다른 생각으로 깊게 침착되었다.
‘그래서 너는… 그때의 나를 어떻게 한 거지……. 난 너에게 평화협정에 반기를 드는 그런 존재였나?’
생각나지 않는 기억의 나머지 부분을 떠올리며 급격히 얼굴이 어두워진 르베나에게 루드바하가 화제를 전환하듯 말했다.
“디오니스는 참 재밌는 곳입니다. 한때 베이라들의 성지였던 곳, 디오니스에 최근에는 잘 탄생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어린 베이라의 출현이라니…….”
말을 하는 루드바하의 눈빛이 잠시 날카롭게 빛나는 듯했다.
문득 섬뜩함을 느낀 르베나가 긴장으로 몸을 굳히고 그를 바라보았다.
옅은 미소지만 누가 보아도 황홀할 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자에게서 순간 위험한 냄새가 났다.
이 순간 르베나의 본능이 경고했다. 그를 멀리하라고. 그렇지 않으면 무엇인가를 잃게 될 것이라고. 그건 그녀에게 아주 소중한 무엇인가가 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 * *
“마하렌?”
르베나의 말에 아한의 머리를 다정히 정리해주던 후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비싸고 희귀한 보석은 아니지만 디오니스에서 잘 채굴되는 보석도 아닌 모양입니다. 마하렌에서만 채굴된다더군요.”
루드바하와 잠시의 티 타임을 끝내고 아한과 저녁을 먹고 나니 후벤과 가스트 그리고 사나가 돌아왔다.
오늘 그들은 르베나의 말에 따라 그 보랏빛 보석의 채굴 지역을 알아보고 다닌 모양이었다.
르베나는 어제 후벤과 가스트에게 보석이 나올만한 출처를 찾아보라고 하고, 가스트에겐 추가로 별도의 서류 준비를 부탁했다. 또 사나에게는 왕궁 내 보석에 관련된 소문을 확인해 달라 부탁했었다.
잠든 아한을 보던 가스트가 후벤의 뒤를 이어 말했다.
“저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곳에서 이 보석을 채굴하는 광부도 오직 한 명이라고 합니다.”
“어째서지?”
“워낙 강도가 좋은 광물이라 예전에는 베이라들이 마석으로 많이 썼던 겁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신마전쟁 이후 베이라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 마석으로의 효용성이 거의 없어졌죠. 게다가 디오니스의 다른 광물들에 비해 워낙 채굴하기가 쉽지 않고 디오니스 귀족들 취향과는 거리가 머니… 그 수요가 많지 않다고 합니다.”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가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다 말했다.
“마석으로도… 보석으로도… 수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광물을 채굴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
르베나의 말에 후벤이 살며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네, 바로 그겁니다. 아마 그를 만나보면 혹시 이 마석을 만든 베이라가 누군지…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후벤의 말에 동의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의 눈길이 바로 가스트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가스트가 기다렸단 듯 아주 많은 양의 서류 다발을 내밀었다.
“오래전 놔둔 서류라 찾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다행히 있더군요.”
가스트가 내민 서류를 가져간 르베나가 한 장 한 장 넘기며 내용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신마전쟁의 종전 전까지 등록된 베이라들의 신상이 적혀 있었다.
“잘도 남아 있었군.”
보통의 베이라들이 마력을 인지하게 되면 디오니스의 마법 학교에서 그들에게 입학을 제의했었다.
입학한 베이라들은 마력을 운용하고 다스리는 법, 또 마력을 이용한 주문 등에 대해 공부하며 자랐고, 마침내 나라의 귀한 재산이 되었다.
학비는 모두 국고로 충당되며 일정 금액의 용돈까지 지불된다. 베이라가 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의 디오니스에서 마력을 가지고도 마법 학교에 가지 않는 건 바보들도 하지 않는 짓이었다.
대신 국가에서는 입학한 베이라들의 신상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 마치 기사단에서 기사들의 신상을 기입해 놓듯 말이다.
신마전쟁 종전 직전, 디오니스 마법 학교의 마지막 원장이었던 가스트가 그때까지의 모든 베이라들의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 짐작한 르베나가 어제 가스트에게 서류들을 부탁한 것이었다.
“아마 신마전쟁으로 많은 베이라들이 죽었겠지만, 새로 태어난 어린 베이라가 마석을 만들 수는 없을 테니, 그만한 실력자라면 그 안에 있는 인물일 겝니다.”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합군과의 대치 이후의 기억을 떠올린 후, 원래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것이 좀 불안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자신이 벌인 일이니 자신이 책임지는 게 르베나의 정의였다. 하지만 이들을 놔두고 무책임하게 돌아가 버릴 만큼 무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르베나는 마석을 함께 찾는 과정에서 그 배후로 짐작되는 드록 혹은 세나르의 약점을 이들에게 쥐여 주고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게 이들을 마석 찾는 과정에 개입시킨 가장 큰 이유였다.
어제까지의 회의 결과는 꽤 단순했다. 드록은 우연히 어디에선가 이 마석을 얻었으며, 이는 절대 유파시드에게 진상될 보석이 아니었다는 것이 그들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렇다면 르베나는 이 마석을 어떤 베이라가 만들어 어떤 목적으로 왕궁의 누구에게 넘겼는지가 조사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 준비는 얼추 끝난 것 같았다.
단 하나. 여전히 르베나의 머릿속을 쉽게 떠나지 않는 찝찝함이 있기는 했지만.
‘한 자락의 신력도 느낄 수 없었다. 심지어 아한의 마력을 쉽게 꿰뚫어 봤어.
세츠들의 왕, 루드바하라…….
연합군들의 중앙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던 그와 오늘 낮 여유롭게 차를 마시던 그의 상반된 표정이 어쩐 일인지 르베나의 머릿속에 옅은 그림자처럼 남아 있었다.
이제 보름날까지 남은 시간은 십여 일 남짓.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르베나는 언제나처럼 화원의 테이블에 앉아 혼자만의 티 타임을 갖고 있었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의 열기에 페퍼민트의 알싸한 향이 공기 중에 퍼져 오른다. 검을 만져 굳은살이 잔뜩 베인 르베나의 손은 비록 그 열기를 고스란히 느끼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입 안에 퍼지는 시원하고 깔끔한 차 향이 마음에 들었다.
머릿속의 생각도 이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일단… 세나르의 보석함에서 그걸 본 시녀가 있다고 하니 이쯤되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리겠어. 일국의 왕비와 왕자가 유파시드에게 저주의 마법이 담긴 마석을 건네려 했다, 라. 그 베이라만 잡아서 불게 한다면 꽤 괜찮은 패가 되겠군. 이 정도면 사나나 후벤, 가스트, 아한 모두 안전할 거야. 그리고 나면 나는 다시… 돌아가야겠지.’
순간 돌아간 이후의 일이 르베나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만의 대군 앞에 홀로 선 그녀만의 전쟁이.
‘나는 돌아가면 당연히 죽겠지… 죽으러 가는 건가. 그건 그거대로 웃기네.’
르베나가 머릿속으로 미래에 다가올 자신의 죽음을 그리며 길게 눈을 감은 순간이었다.
“또 만나게 되다니, 대단한 인연이군요.”
상념을 깨는 목소리에 르베나의 눈이 앞에 선 이를 향해 가만히 열렸다.
“인연이라고 하기에… 이곳은 제 궁입니다만.”
대단한 인연이라고 하기에는 르베나는 언제나처럼 외궁 후원에 앉아 있을 뿐이다.
그는 본궁에서 꽤 떨어진 이곳에 아마도 제 발로 걸어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르베나의 말에도 루드바하는 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것을 바로 인연이라 하지요. 제가 마침 딱 여기에 오고 싶었는데 마침 여기 계시니 말입니다.”
왠지 능글거리기까지 하는 그를 가만히 보다가 르베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가는 길은 저쪽입니다, 유파시드.”
잠시 두 사람의 사이로 싸한 바람이 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