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0화 (20/276)

20화

제1장 디오니스 (19)

가스트는 후벤이 진실한 기사라는 사실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어릴 때부터 봐온 그는 그의 부모를 닮아 정직하고 귀족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한 성실한 후작이자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그가 전하는 공주의 이야기에 사실 많은 허점이 있다는 것 또한 가스트는 놓치지 않았다.

가스트는 신마전쟁 전부터 수많은 베이라를 발굴하고 가르쳐 보았지만 스스로의 마력을 알아차리고 독학을 하는 베이라는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물론 가끔 독학을 하는 베이라도 있기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마력을 운용하는데 실패하거나 자신의 마력을 다스리지 못하여 반신불수가 되거나 사망하기 일쑤였다.

마력은 그것을 인지하는 것보다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훨씬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말도 안 되게 천재적인 베이라가 한 명 있긴 했다. 하지만 그는 범인과는 다른 신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어느 베이라도 마력을 독학으로 완벽하게 익히지는 못했다.

하지만 단순 독학을 넘어 남의 상처를 완벽하게 치료할 정도의 마력 운용이라니?

치료는 본래 신력의 영역이었다. 그걸 마력으로 운용하려면 공격과 저주보다도 더 많은 마력 운용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스트는 처음 후벤의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베이라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르베나의 손목을 잡았을 때에도 그는 별다른 기대가 없었다. 다만 디오니스의 귀족으로서 그들의 불운한 공주가 베이라라는 사실에 마음이 복잡했고 저주의 기운이 남았을까 염려되는 마음이 다였다.

한데……!

‘말이… 되지 않는군. 이 정도 양의 마력은 생애 처음이다. 이렇게 작은 몸에 이 정도 마력이 있다는 것도 놀라운데… 하아, 정말 엄청난 운용력이로군. 갈무리되지 못해 날뛰는 마력이 한 자락도 없다니! 열일곱 살 소녀가 독학으로 이 정도 양의 마력을 운용한다는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베이라를 스승으로 두어도 어지간한 이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스트는 르베나의 손목을 통해 홍수처럼 쏟아진 정보들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르베나라는 공주는 자신의 지난 마법사로서의 삶과 학식을 모두 뒤집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르베나의 몸속에 잠재된 마력은 실력 좋은 베이라 열 명… 아니, 스무 명을 합쳐도 모자랄 만큼의 양이었다. 게다가 그 마력은 모두 강아지라도 된 듯 르베나의 명에 온순히 몸을 사리며 그녀의 몸을 천천히 순환하고 있었다.

마력 운용을 30년 넘게 한 가스트마저 이렇게 마력을 운용하기까지 걸린 시간만 20여 년이었다. ‘디오니스의 별’, ‘디오니스의 천재’라는 수식어를 단 그조차 말이다.

순간 가스트의 떨리는 눈이 르베나를 향했다. 흔들림 없이 저를 바라보는 붉은 눈을.

가스트의 몸속에서 이제껏 알지 못했던 전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감히 미래를 예측하지 않았다. 그는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베이라였지 예언가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가 느끼는 어떠한 전율은 계속 그에게 한 가지 두려운 미래를 시사하고 있었다.

천천히 르베나의 손목에서 손을 뗀 가스트가 말했다.

“믿어지지 않는군요… 이 정도 양의 마력과 운용력이라니… 공주님은 이미 그 어떤 베이라의 가르침도 필요가 없으시군요. 하하…….”

가스트의 말에 이번에는 후벤과 사나가 숨을 들이켰다.

“그게 무슨……!!”

후벤의 놀라움에 여전히 무표정한 르베나를 바라본 가스트가 얼른 말을 이었다.

“후벤 경… 아무 걱정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네. 지금 공주님 정도의 실력이라면 유파시드 정도가 아닌 이상에야 일대일로 상대하기는 힘드니까 말일세 허허… 나도 정말 놀랍고… 또…….”

‘두렵구나. 불운한 공주가 가지기에는 너무 크고 무서운 힘이다.’

마음을 숨긴 가스트의 말에 이번엔 사나가 넋 빠진 얼굴을 하고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공주님… 한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사나와 후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가스트의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이에 르베나의 눈빛이 허락의 뜻을 담고 그를 향하였다.

“어째서… 저에게 손목을 내어 주신 겁니까? 분명 후벤 경에게 공주님께서는 마력과 관련된 일에 제 개입을 원치 않는다 들었습니다만.”

예상치 못한 가스트의 질문에 이번에는 르베나의 눈이 아주 잠깐 가볍게 떨렸다.

그래 분명 그랬다. 손목을 내어 줄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자신의 마력을 측정하게 할 생각 따위도 물론 없었다.

가스트의 입궁을 허락한 것도 단순히 혹시 모를 경우의 수를 대비한 패같은 거였다.

혹시라도 르베나의 마력을 유파시드가 알아차릴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베이라 정도.

그런데도 제 손목을 선뜻 그에게 내어 주었던 이유는…….

“내 실력을 알면 감히 내게 개입할 생각 따위 못할 테니까.”

르베나의 말이 생각보다 훨씬 더 딱딱하게 흘러나왔다.

분명 기분 나쁠 수 있을 만한 말이었건만, 가스트는 그저 허허 웃으며 ‘그러십니까.’라고 할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자연스럽게 고민하는 얼굴로 보석으로 향하는 그의 눈을 확인한 르베나는 슬며시 방금 가스트가 짚었던 제 왼쪽 손목에 다른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직도 제 손에 남아 있는 가스트의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듯다. 그 순간 르베나의 몸에서 알 수 없는 벅참이 솟아올랐다.

‘그는 살아 있다… 이곳에서… 이렇게 따뜻하게…….’

그리고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르베나의 전신을 따뜻하게 감싸 안기 시작했다. 동시에 묵직하고 뜨거운 돌덩이가 그녀의 목울대에 진득하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 순간 르베나는 보석에 대해 떠드는 세 사람을 두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침착하고 깊은 회색 눈이 그녀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두 사람이 떠난 후에도 한동안 방문 앞에 서 있던 가스트의 기척이 마침내 사라지자 르베나는 본인의 침대에 고이 잠든 아한을 바라보았다.

분명 처음 본 것일 텐데도 이전의 그때처럼 르베나를 편안해하는 아이. 곱게 잠든 아한의 얼굴은 꼭 그때처럼 맑았다.

곧 조심스러운 손길로 르베나가 아한의 회색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아이의 말간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 밤은 과할 만큼 충분했다. 온기가 느껴지는 가스트를 보았고 여전히 맑은 아한을 보았다.

르베나는 이제 정말 아무런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르베나의 손은 여전히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붙들려 오래도록 아한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쓰다듬고 있었지만 말이다.

* * *

“하아…….”

어제 모두가 떠나고나서 르베나는 뒤늦게 떠오르는 상념들에 늦은 새벽에 되고 나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그 여파가 이렇게 고스란히 전해지다니.

잠시 혼자만의 시간에 젖어 있던 르베나는 말단 시녀의 도움으로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단출한 복장을 한 채 외궁 후원에 앉아 있었다. 녹색의 얇은 벨벳 드레스는 딱히 파인 곳이 없었지만 고급스러운 금색 띠로 잘록한 허리를 강조해 르베나의 도도함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지나가는 시종 시녀들의 흐뭇한 시선이 티 테이블에 앉아 있는 르베나에게 향했다.

침착한 그녀의 표정과 다르게 그녀의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했지만.

‘…머리 아파.’

최근 이틀, 그녀에게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 몇 년 동안 기억나지 않던 부분들을 한순간에 떠올리는 바람에 그녀는 처음으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수만의 군대를 앞에 두고 혼자 남겨진 그곳 어디에도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은 없었다.

아니, 그녀를 사랑한 사람들이 없었다. 그들은 그녀의 오만함과 아둔함으로 이미 모두 생명의 빛을 꺼트렸기 때문에.

르베나는 그것이 쉬이 용서되지 않았다. 사나의 죽음 이후 절대로 그들을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언제나 르베나의 일이라면 만사를 제치고 달려들던 후벤도, 할아버지처럼 인자하게 르베나를 품어주던 가스트도, 빠른 속도로 차갑게 변한 르베나마저 좋다며 언제나 말간 미소를 한 채 안겨 오던 아한까지도.

모두 그녀가 지켰어야 할 그녀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실패했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에 도취되었고, 그 힘을 찬양하는 사람들만이 진실되다 믿었다. 어쩌면 그녀의 힘을 반대하는 후벤과 가스트가 사실 조금 미웠는지도 모르겠다.

르베나는 자랑하고 싶었으니까.

나는 베이라라고. 그 누구도 나를 예전처럼 함부로 할 수 없다고.

그래, 르베나는 마치 다섯 살 어린아이처럼 그저 자랑이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어린아이 같은 아둔함이, 성숙하지 못한 머리가,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지 못했던 귀가, 보고 싶은 것만을 바라보았던 눈이, 그녀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빼앗고 그녀마저도 끔찍하고 두려운 사지에 외따로 몰아내었다.

으득.

비릿한 피 냄새가 느껴질 틈도 없이 제 입술을 꽉 깨문 르베나의 눈이 깊은 분노에 차 떨리기 시작했다.

‘멍청한… 계집애… 오만한 계집애……. 다 망쳐놨어……. 네가… 네가……!!’

“여기가 그대의 궁이었군요.”

문득 들려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르베나의 입술은 오늘 만신창이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머리 위에서 난 소리에 르베나의 고개가 저절로 위를 향했다.

조금은 익숙한 목소리. 한 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목소리. 세츠들의 왕, 루드바하였다.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곧 제국의 황제가 될 남자.

루드바하의 깊은 벽안을 바라본 르베나의 눈이 저도 모르게 떨려왔다.

연합군의 가운데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르베나를 보며 왠지 생각에 잠긴 듯한 그 수려한 얼굴이, 어떠한 살생도 용납지 않겠다는 그의 울림 있는 목소리가, 그리고 르베나를 가만히 응시하던 그 벽안이.

이 순간 잔잔한 평온을 담은 채 르베나를 향하자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마지막 떠올랐던 연합군과의 대치가 떠오르며 르베나의 표정이 얼핏 고통으로 흐려졌다.

르베나는 정신을 차리려는 듯 제 입술을 꼬옥 물었다. 그의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루드바하의 짙은 푸른 눈은 피가 날 것만 같이 붉어진 르베나의 입술에 한참을 머물렀다.

“여기까지는… 어쩐 일이신지.”

약간은 잠긴 듯한 목소리로 겨우 말을 꺼내는 그곳에는 방금 본 것이 착각인 듯 어느새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이 놓여있었다. 이에 곧 보기 좋은 미소를 그려놓은 그가 물었다.

“산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이곳이군요. 실례가 안 된다면 동석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묻는 그의 태도는 여느 왕족처럼 깊은 품위가 있었으나 고압적이지는 않았다.

큰 키에 적당히 자리 잡은 힘 있는 근육들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움직였다. 깔끔한 화이트 셔츠에 그의 눈을 담은 짙은 미드나잇블루 바지, 그리고 바지와 같은 색의 재킷에는 금사로 유파시드의 표식인 검과 월계관이 수놓아져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급스러운 옷도 화려한 금사도 그의 외모에는 빛이 죽었다. 남자에게 관심이 없는 르베나라 하여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 만큼의 외모였으니.

그리고 저 미소.

옅지만 언제나 편안히 자리 잡은 저 미소는 상대방을 방심하게 하는 재주가 있어 보였다.

“제가 어찌 유파시드의 청을 거절하겠습니까. 앉으시죠.”

르베나의 다소 딱딱한 허락에도 여유 있게 웃어 보인 그가 자리했다. 그의 옆에는 드록의 방에서 봤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대신 초록 머리에 초록 눈동자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복장을 보니 젠의 기사인 모양이었다.

분주해진 외궁의 시녀들이 다과를 준비해 오며 루드바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것이 보였다. 루드바하를 보는 시녀들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이 그의 외모를 대변해 주었다.

“정말 아름답군요, 공주님의 화원은.”

어느새 준비된 얼그레이를 한 모금 머금고는 르베나의 화원을 둘러보던 루드바하가 말했다.

르베나는 이곳을 꽤 좋아했지만, 그래 봐야 이 화원이 본궁이나 제국의 화원과 비교하면 꽤 아담한 크기일뿐더러 굉장히 수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르베나는 그런 객관적인 말로 그의 감상을 흩뜨려 놓지 않았다. 그도 답을 원한 건 아니었는지 이어 질문을 보태었다.

“보석을 구하는 일은… 잘되고 계십니까?”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시선이 잠시 그에게 갔다가는 제 앞에 놓인 찻잔으로 향했다. 시녀들이 갓 내온 차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아직은 조금 차가운 봄의 아침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짤막한 그녀의 대답에 순간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듣기 좋은 음성으로 터뜨리는 웃음은 맑고 울림이 있었다.

“하하. 공주님은 말씀을 매우 간결하게 하시는군요. 드록 왕자와는 다르게 말입니다.”

“말이란 것이 의미만 통하면 되지… 라고 생각합니다.”

르베나의 말에 언뜻 멈칫하던 루드바하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미사여구는 듣는 이의 귀만 어지럽힐 뿐이죠.”

루드바하는 왠지 틀에 박힌 소리를 하지 않는 이 공주의 발언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앞에서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는 여자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무던하게 대하는 것에도 왠지 모를 편안함도 느껴졌다.

하지만 그와 달리, 호탕하겜 들리는 그의 웃음이 왠지 거슬린 르베나는 그를 향해 살짝 눈을 흘겼다가는 곧 다가오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아한, 가스트를 닮은 회색 머리에 맑은 녹안의 소년.

일순 르베나의 눈빛이 다가오는 아이를 향해 부드럽게 풀어졌다.

“……!”

동시에 루드바하의 벽안이 작게 흔들렸다.

불어오는 봄날의 미풍이 그의 마음을 간지럽힌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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