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제1장 디오니스 (18)
“이것을 외궁에 가져다 주거라.”
드록 왕자의 말에 시녀는 조심스럽게 싸여 있는 비단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고개를 숙여 공손히 인사를 한 시녀가 사라지자 드록이 제 앞에 앉아 차를 마시는 세나르에게로 눈을 향했다.
“이제 됐습니다, 어마마마, 저 근데… 만약에.”
조심스러운 드록의 말에 세나르가 말해 보라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만약 그것이 보석을 구해 오면… 어쩌지요?”
드록의 말에 넌 누굴 닮아 이리 멍청할까 하는 눈빛을 보낸 세나르가 한숨과 함께 찻잔을 내려놓고는 말했다.
“하아… 왕자 잘 들으렴. 이건 그 아이라 해도 절대 빠져나갈 수 없는 덫이란다. 그년이 이것과 똑같은 보석을 가져오면 유파시드에게 갈 수많은 보석 중에 묻혀 진상하면 그만. 만약 구해 오지 못한다면 너그러운 왕자의 자비로운 모습을 유파시드에게 보여 주면 그만이니.”
“하, 하지만… 그러면 그년을 벌할 수 없잖아요…….
“드록. 유파시드가 디오니스에 내내 죽치고 앉아 있다니? 그는 건국 기념 무도회가 끝나면 젠으로 돌아갈 거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부터 르베나 그년을 잡으면 된다 이 말이다.”
그래, 상관없었다. 보석을 구해오든 말든.
르베나가 보석을 구해 오면 유파시드의 앞에서 적당히 반응해 준 다음 그가 가고 나서 르베나와 그 시녀를 족치면 될 일이었다.
만약 똑같은 것으로 구해 온다면, 이것이 구하기 힘든 마석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 된다. 그 빌미로 외궁의 몇 년 치 예산을 끊어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니.
하지만 만약 보석마저도 구해오지 않는다면 약조를 지키지 못한 벌로 그 시녀의 손을 잘라 버릴 것이다.
그러면 아무리 독한 르베나라 하더라도 무언가 느끼는 게 있을 것이다.
생각을 마친 세나르의 화려한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차올랐다.
이제 보름 남짓 남은 무도회가 세나르는 미친 듯이 기다려졌다.
* * *
똑똑.
누군가가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르베나의 무감각한 붉은 눈이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문밖의 기척을 읽은 르베나의 눈은 순간이지만 큰 동요를 내비쳤다.
“들어와.”
그럼에도 허락을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곧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식을 들고 선 사나, 뭔가 어두운 표정의 후벤 경, 기대감과 호기심을 품은 언제나와 같은 기억 속 인자한 모습으로 나타난 가스트.
그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작은 그림자, 아한.
그녀가 이전의 시간에서 제일 사랑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녀의 아둔함으로 모두 잃었던 사람들. 그들이 제 앞에 서 있었다.
어디 하나 다치지 않고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멀쩡한 모습으로.
“공주님……?”
사나가 방에 들어서서는 조심스레 르베나를 불렀다. 누군가 방안에 들어서도 눈빛 한 번 준 적 없을 만큼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오늘의 르베나는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평소와 달리 들어오는 사람 하나하나를 조심스러운 눈으로 살펴보았다.
마치… 어디 아픈 데는 없는지 다친 데는 없는지 걱정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그녀의 눈에 안도감이 스치는 찰나 왠지 물기도 함께 어린 것만 같았다.
“…들어오도록.”
사나의 의아한 어조에 고개를 창문 쪽으로 돌린 르베나의 입에서 작은 숨소리가 비집고 나왔다. 그건 자신의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시키는 소리이기도 했지만, 현실을 자각하는 무거움을 담은 소리이기도 했다.
곧 모두가 르베나가 앉아있던 테이블로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사나는 제가 들고 온 간식과 차를 내려놓으면서도 혹시나 싶어 계속 르베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혹시나 오늘 온 일행이 르베나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않았나 하는 염려가 보였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언제나처럼 무감각한 붉은 눈이 보이자 사나는 비로소 제 걱정을 내려놓으며 일행과 함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주님. 저는 가스트 백작입니다. 그리고 초면에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마땅히 맡겨둘 곳이 없어 제 손자 아한도 함께 왔습니다.”
가스트의 소개에 회색 머리의 귀여운 외모의 소년이 까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가스트에게 기대어 숨었다.
‘아한…….’
르베나의 붉은 눈이 작은 소년에게로 향했다. 가스트를 닮은 은은한 회색의 머리에 맑은 녹안이 사랑스러운 소년. 시간을 거스르기 전에도 아한은 르베나를 곧잘 따랐다.
사나의 죽음 이후 급변한 르베나를 모두가 어려워해도 아한만은 달랐다.
아한은 르베나만 보면 예법 따위는 잊고 달려들어 안기기 일쑤였고, 가끔 부르지도 않았는데 궁에 찾아와 정사를 보는 르베나의 옆에 몇 시간이고 머물며 책을 읽다 갔다.
그리고 르베나도 어린 아한에게 만큼은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았고 그의 행동은 모두 받아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보았던 열네 살의 아한은 여전히 르베나에겐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아한마저도…….’
그리고 그 귀여운 소년은 가스트의 발령과 함께 남부지방으로 향했다. 그 말은… 그때 아한도 후벤과 가스트와 함께 죽었을 것이란 뜻이었다.
그때 르베나의 깊은 상념을 뚫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드록 왕자님과 내기를 하셨다 들었습니다. 온 궁이 그 이야기뿐이더군요.”
가스트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가만히 그를 향했다. 분명 르베나가 아는 그라면 지금 르베나의 마력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디오니스 마법 학교의 교장을 연임했을 정도로 가스트는 실력 있는 베이라이자 학문에 조예가 깊은 마법사였다. 하지만 굳이 지금 그가 다른 소재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배려다.
나름의 아픈 상처를 갖고 있을 이 시대 모든 베이라들에 대한.
“그렇다. 이 보석을… 찾아와야 한다더군.”
르베나는 이들이 오기 전 드록이 시녀를 통해 보낸 보석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깨졌음에도 영롱하게 빛을 내는 보석은 꽤 강도가 높은 종류일 듯했다.
가스트가 호기심을 빛내며 그 보석의 조각 하나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몸이 움찔 굳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가스트 님.”
가스트의 변화를 기민하게 알아챈 후벤이 그를 불렀지만, 놀라움이 가득 담긴 가스트의 시선은 오직 르베나에게 향했을 뿐이었다.
그와 반대로 가스트와 눈이 마주친 르베나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다시 가스트의 시선이 사나에게로 향했다.
“…가스트… 님?”
가스트의 시선이 빤히 자신을 향하자 사나가 조금은 당황해 그를 불렀다.
그러자 가스트가 크고 주름진 손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사나 양, 실례가 안 된다면 잠시 손목을 좀 빌릴 수 있겠소?”
가스트의 갑작스러운 청에 당황하던 사나였지만 곧 후벤과 르베나를 한 번씩 보았다가는 그에게 조심스럽게 손목을 내밀었다.
가스트는 디오니스의 별로써 유명한 베이라였지만 후벤의 가문과 오래도록 친분이 두터운 백작이기도 했다. 신분이 후작인 후벤이 백작인 그에게 존대를 하는 것만 봐도 둘 사이 친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후벤 후작은 사나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사나의 눈에서 망설임이 사라진 건 금방이었다.
“여기요.”
사나의 손목이 가스트의 손에 가볍게 쥐어졌다. 곧 따뜻하고 인자한 느낌의 무엇인가가 사나의 손 안을 흐르는 느낌이 흘렀다. 동시에 가스트의 회색 눈은 신중함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사나가 깨뜨린 이 보석은 분명 마석이었다.
게다가 저주의 흔적이 남겨진 마석. 하지만 흔적만이 남겨졌다는 것은 이미 여기에 숨겨진 마법이 발동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후벤에게 듣기로 사나가 이 보석을 깨기 전 드록 왕자가 들고 있었다고 하니 접촉만으로 마법이 발동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다.
그렇다면 마력이 발동된 상대로 예측되는 건 둘뿐이었다.
이것을 깨뜨린 사나, 그리고 지금까지 깨진 조각을 지니고 있던 르베나.
곧 꼼꼼히 사나의 몸 구석구석에 마력을 흘리던 가스트가 낮은 침음을 흘리더니 부드럽게 손을 뗐다. 그러고는 르베나를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공주님, 실례가 안 된다면 손목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 가스트 님, 공주님께서는…….”
가스트의 청에 르베나가 답을 하기도 전 후벤이 먼저 이를 만류하였다. 후벤은 가스트가 사나의 손목을 먼저 잡고, 그걸 핑계로 르베나의 마력을 측정하려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스트는 인자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지만 마법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열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하지만 한번 아니면 죽어도 아닌 르베나의 성격상 절대 마력 측정을 응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 후벤은 가스트가 르베나의 거절에 무안하지 않았으면 했다.
“……!”
하지만 후벤의 우려는 기우일 뿐이었다. 놀랍게도 르베나가 선뜻 가스트에게 손목을 내놓은 것이다.
르베나에게 손목을 달라고 한 가스트도 내심 놀랐는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제 손을 갖다 대었다.
“이럴… 수가…….”
르베나의 손목을 가볍게 잡은 그의 회색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린 것은 금방이었다. 그의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약간의 경외가 담긴 목소리에 후벤과 사나, 아한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로 향했다.
“마석이라고요?”
가스트의 설명에 모두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깨뜨린 보석이 마석이라니…….”
사나는 얼굴은 거의 백지장처럼 겁에 질려 있었다.
“네. 게다가 저주 주문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여 사나 양과 르베나 공주님의 몸을 살펴본 것인데… 다행히도… 두 분 다 저주 발동에 걸린 흔적이 없었습니다.”
가스트가 말을 하는 도중 르베나를 잠시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후벤과 사나는 그 시선은 눈치채지 못한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근데 어째서 드록 왕자가 저주마법이 새겨진 마석을 유파시드에게 진상할 생각을 한 것일까요? 유파시드는 세츠들의 왕입니다. 그가 이를 알게 된다면 이는 자칫 전쟁으로까지 번질 수 있는 예민한 사안입니다.”
이어진 후벤의 말에 답을 한 건 르베나였다.
“그도 몰랐을 거다.”
르베나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집중됐다.
“멍청한 놈이 그냥 어디서 주운 걸로 건수 하나 잡아 사나를 협박하려고 한 거지. 하지만 지금쯤은 알았을 수도 있겠군.”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모두들 각자의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보석을 구하는 것에 대해 하나둘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사나는 이 일의 중심이었기 때문이고 후벤과 가스트 역시 르베나의 일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아는 모든 지식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의견을 내기 시작한 그들의 회의는 아한이 잠들 때까지 계속되었다.
“휴우… 벌써 자정이 지났군요.”
후벤의 말에 사나와 가스트 역시 목을 이리저리 돌리며 피곤을 표했다. 아한이 잠들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르베나는 세 사람을 방에서 물렸다.
어째서인지 르베나는 잠든 아한을 옮기지 말고 그냥 제 침대에서 재우라 했다. 그것도 무척 신기한 일이었지만, 지금 그들의 관심은 조금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에요.”
사나의 말에 후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공주님께서 저희에게 상의를 하시다니…….”
이때까지 르베나는 본인과 관련된 크고 작은 어느 일 하나 사나와 후벤에게 상의한 적이 없었다. 모두 본인이 결정했고, 사나와 후벤은 그녀가 벌인 일조차 남의 입을 통해 듣기가 일쑤였다.
둘은 그게 서운하기도 하였지만 타고난 르베나의 성정이라 생각해 딱히 그 서운함을 표현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공주님은 자연스럽게 보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사나와 후벤에게도 의견을 묻고 그들 모두에게 부탁이라는 것을 했다
“처음으로… 함께하자고 손을 뻗어 주셨군요.”
후벤의 말을 들은 사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굳은 결의가 가득 차올랐다.
“전 내일부터 맡은 바 임무를 꼭 해내겠어요!! 공주님과 처음으로 함께하는 일이니만큼 절대 우리 공주님께 피해를 드리지 않을 거예요!”
다부진 눈빛으로 다짐하는 사나를 보며 가스트와 후벤 역시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럼 후벤 경, 우리도 어서 잠자리에 들게나. 내일부터 할 일이 태산이니 말일세.”
가스트의 말에 후벤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르베나의 방문 앞을 떠났다.
그리고 조금 늦게 남은 가스트만이 닫힌 르베나의 방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조금 전, 르베나의 방에서 있었던 일을 되새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