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제1장 디오니스 (17)
“이게 무슨…….”
놀란 르베나의 반응에 켄느의 왕이 코웃음을 치며 말하였다.
“이제 알겠소? 그대를 제외한 디오니스의 대부분 귀족들이 유파시드에게 청원을 보내었소. 디오니스의 왕이 미쳐가 제2의 신마전쟁을 일으키려 하니 제발 디오니스를 구원해 달라고 말이오!!”
켄느 왕의 말이 르베나의 귓전을 때렸지만, 그녀는 쉽게 알아들을 수 없었다.
디오니스의 귀족들은 그녀를 무서워하면서도 동경했다. 그녀가 가진 힘을 두려워하였고 또한 경배하였다. 르베나가 마력으로 어떠한 귀족들을 처단하거나 배척할 때마다 그들은 찬양의 말을 퍼부어 댔다.
르베나도 처음부터 그들의 말을 모두 믿지는 않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은 그들의 충정을 믿기에 결코 부족한 시간이 아니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심으로 그녀에게 충성을 다했으며 디오니스에 해가 되는 이들을 처단하는 그녀를 숭배하였다.
그리고 고작 국경을 어지럽힌 세츠 몇을 처단한 일로 연합군이 온다는 말에 의아해하는 그녀에게 오늘의 일을 제안한 것도 모두 그들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모두의 앞에서 베이라의 힘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르베나가 선봉에 서준다면, 분명 최소한의 피로 다시 베이라들은 설 자리를 얻을 것이라고.
이것은 제2의 신마전쟁이 아니라 이유도 없이 디오니스를 침략한 그들에 대한 정당한 방어이며 베이라들이 설 곳을 만드는 첫 발걸음일 거라고.
유파시드는 약속을 지키는 이. 분명 베이라들의 의지와 힘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라 생각된다면 우리가 원하는 약속의 말을 모두의 앞에서 하게 될 것이라고.
숨죽여 살던 베이라들을 위해 이런 기회는 다시 없을 천운이라고.
오늘 연합군을 맞이할 때에도 잠시 흔들리는 그녀에게 최악의 경우 죽음으로 함께하겠다며 충의를 보인 것도 저들이었다.
“어… 째서…….”
르베나의 흔들리는 붉은 눈이 그들을 향하였다. 그때 르베나의 바로 뒤에 서 있던 후츠 백작이 말하였다. 그의 목소리는 르베나에게는 들리지만 저 건너편 유파시드의 일행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았다.
“건방진 계집. 네깟 게 마력 좀 있다고 이제껏 떠받들어 주니 정말로 네가 왕이 된 줄 알았던 모양이지? 우린 네가 아니라 너의 그 힘이 단지 무서웠을 뿐이다. 그것도 처음에만 무서웠지 나중에는 방해만 된다는 걸 깨달았지. 너의 그 힘이 있는 한 디오니스를 우리들 마음대로 할 수가 없으니!!”
후츠 백작의 말은 르베나에게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제 그 힘을 제압할 유파시드와 수만의 군대가 있으니 너는 그저 한낱 계집일 뿐이다. 억울해하지 말고 죽어라. 이미 저들에게 네가 평화협정을 어겼다는 모든 증거가 있으니 발버둥 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말고! 크하하!!”
르베나의 손과 어깨가 부들부들 떨렸다.
후츠 백작.
그는 르베나가 왕이 되는데 후벤과 가스트와 함께 발 벗고 나설 만큼 그녀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 왔던 인물이다. 후벤, 가스트와 베이라의 힘을 쓰느니 마느니로 언쟁을 벌일 때마다 르베나의 편에서 서 주고 그녀를 가장 잘 이해해 준 것도 후츠 백작이었다.
그녀의 힘을 가장 존중해 준 것도, 그녀가 처단해야 할 인물들의 비리를 알게 모르게 알려 준 것도, 후벤과 가스트를 남부지방으로 발령내라 조언을 해준 것도 모두…….
“모두… 오늘을 위해서였나?”
깊게 가라앉은 르베나의 말에 후츠 백작이 웃음을 터뜨렸다.
“푸학!! 어리석은 계집!! 조금만 잘해줬더니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따라오는 꼴이라니. 이래서 어려서 학대받던 것들은 다루기가 쉽다는 말이야. 크하하!”
그의 웃음이 조금씩 커지기 시작했다.
“후벤 공작과 가스트 백작이 곁에 있어 일이 더 늦어지나 했는데 알아서 척척 치우고 말이야. 베이라로써 마력을 잘 다루면 뭐해? 사람 보는 눈이 발바닥에 달렸는데 말이야. 푸하하하!”
후츠 백작의 말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같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에게선 더 이상 르베나를 두려워하거나 존경하는 마음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르베나의 붉은 눈에 검은빛이 일렁거렸다.
“그들을… 어떻게 했지?”
“어떻게? 크크크, 어떻게 했겠나. 당연히 죽였지! 꼴에 왕의 명령이라고 혈혈단신 남부로 향하는 그 꼴이란……!!”
후츠 백작의 말에 르베나의 몸에서 검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르베나의 눈이 사정없이 떨렸다. 후벤, 가스트와 함께했던 수많은 기억들이 그녀의 머리를 수없이 강타해 왔다.
그들과의 모든 시간들, 그 모든 이야기들, 그 아프고 슬픈… 그렇기에 더없이 사랑스러운 이야기들.
르베나의 눈에 검붉은 기운이 도사렸다. 곧 그녀가 찢어 죽일 듯 후츠 백작을 노려보았다.
“으윽… 소용… 크으… 없, 어…….”
후츠 백작의 목을 죄이는 마력을 르베나는 조금 더 끌어 올렸다. 만약 정말 후츠 백작이 그들을 죽였다면.
휘우웅-!
무형의 진동이 공간을 채웠다. 스멀스멀 르베나에게서 새어 나오던 검붉은 바람이 서서히 둥글게 모습을 말며 회오리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회오리의 모습을 갖춘 검붉은 바람이 조금씩 조금씩 휘몰아치며 후츠 백작에게로 향했다.
점차 숨통이 조여 이제는 끅끅거리며 침을 흘리는 후츠 백작이 제게로 다가오는 그 회오리바람을 떨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그토록 당당하던 그의 눈이 경악과 두려움으로 일그러지고 있었다. 검붉은 바람은 어느새 그의 잿빛 눈동자에 선명하게 잡힐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
하지만 그녀의 강대한 힘은 순식간에 사그라들고 말았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마력을 시전한 르베나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만큼 빨랐다.
순간 르베나가 고개를 앞으로 휙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표정도 없이 르베나를 바라보는 그. 루드바하가 그녀의 눈에 박혀 왔을 뿐이다.
“힘을… 쓰지 마십시오. 이곳에서의 어떤 살육도. 허락지 않겠습니다.”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의 온몸이 잘게 떨렸다.
그들이 죽었다고. 내 모든 것을 대신하던 그들이, 죽었다고.
내 오만함 때문에. 나의 멍청함 때문에. 나의 경솔함 때문에.
또다시 그들이… 죽었다고.
르베나의 붉은 눈이 저의 힘을 구속하고 있는 루드바하에게 향했다. 그리고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마주 본 순간, 그의 눈 또한 사정없이 떨렸다. 붉은 눈 가득 고인 눈물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루드바하가 르베나를 향해 무언가 입을 여는 찰나, 갑작스럽게 발생한 엄청난 소음이 공간을 강타했다!
콰르릉. 쿠구궁, 콰직콰직!
“으악!!”
“크헉!”
“으으악!”
갑자기 공간을 울리는 소리와 함께 연합군 쪽에서 일순간 엄청난 비명과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루드바하와 르베나마저 느끼지 못했을 만큼 빠르게 발동된 힘. 놀란 루드바하와 르베나가 고개를 돌려 빠르게 타들어 가며 소리를 지르는 연합군을 바라보았다.
마치 집채만 한 불구덩이가 쏟아진 것처럼, 연합군의 군데군데, 동그란 번개가 쏟아진 것처럼. 사람들이 타들어 가고 있었다.
“아악… 살려……!!”
“아아아악!!!”
“제발… 살려줘!!”
갑작스럽게 쏟아진 힘에 연합군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을 지르는 사람과 사람의 살이 타들어 가는 불쾌한 냄새, 짙은 피비린내가 공간을 잠식해 나갔다. 그리고 르베나의 뒤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베이라의 힘이다! 디오니스의 왕이 마력으로 연합군을 죽였다!!”
크지도 않은 그 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진 것과 동시에,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죽은 동료를 바라보며 당황과 두려움에 잠식당해있던 연합군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한 사람에게로 향하였다.
흠칫.
수만의 살의를 느낀 르베나는 왕이 된 이후 처음, 두려움으로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짐을 느꼈다. 그녀는 지금 처음으로 깨달아 버렸다.
광활한 디오니스.
수만의 군대.
수백 수천의 세츠와 베이라들.
이곳에 그녀의 편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하악… 하, 하악…….”
땀방울이 뚝뚝 그녀의 작은 얼굴에서 떨어져 내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쉰 르베나가 제 가슴께에 손을 가져다댔다. 아무리 생각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던 전쟁의 시작.
언제나 르베나의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루드바하를 비롯한 연합군을 처음 맞닥뜨린 순간에서.
지금, 처음으로 그다음 장면들을 떠올린 르베나의 충격은 결코 적지 않았다.
“하아… 하… 배신… 후츠 백작이 나를… 배신했어……. 그리고… 하아, 으흑… 가스트와 후작이…….”
르베나의 얼굴이 끔찍한 고통으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짜릿하고 묵직한 고통이 그녀의 가슴께를 강타했다. 그렇게 한참을 버티다 침대에 엎드려 숨을 몰아쉬는 르베나의 붉은 눈에서 이윽고 또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처음으로 두려워졌다.
그곳으로… 그녀가 이룩한 모든 것들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이.
처음으로 두려움에 잠식당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눈물을 흘려 대는 붉은 눈은 그렇게 몇 시간을 힘겹게 발버둥 쳤다.
그러다 이내 서서히 감겨 갔다. 마치 지금의 고통을 잊으려는 것처럼.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것처럼.
* * *
“공주님께서 말입니까?”
마치를 타고 후벤과 함께 이동 중인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가 놀라며 물었다.
그는 수도로 올라온 지 채 얼마 되지 않아 후벤의 다급한 청으로 왕궁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놀란 그의 물음에 후벤이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공주님께서 베이라시라니… 게다가 독학으로 치유를 시전하셨단 말입니까?”
못 믿겠다는 듯 물어오는 가스트에게 후벤이 괴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열 살 때 마력의 존재를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7년 동안 저나 사나 양에게 말하지 않고 독학을 하신 모양입니다.”
그의 입에서 커다란 한숨이 쏟아졌다.
“하… 가끔 이상하다고 느끼기는 했습니다. 공주님께서 남자들조차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힘든 수련 뒤에도 평소와 같은 얼굴로 다음날 수련장으로 나오실 때 말입니다. 기사들조차 인상을 찡그리는데 공주님은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였습니다. 마치…….”
“마법으로 치유한 것처럼?”
가스트의 말에 후벤이 괴로운 듯 제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하… 가스트 님. 전 자격이 없습니다. 전… 저는, 그냥 공주님께서 버티시는 거라 믿었습니다.
그게 그저 대견하고 안쓰럽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베이라라는 것을 알고 모두에게 숨긴 채 받아들이기까지 그 어린 분은 또 얼마나…….”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후벤을 가스트의 인자한 눈이 지그시 향했다.
“자책하지 말게, 후벤 경. 만약 후벤 경의 말대로라면 흠… 공주님은 그냥 평범한 베이라는 아니시네. 그분은 타고난 베이라. 나도 아직 이해되지 않는 것이 많지만 그분이 베이라인 것도, 그것을 숨기게 된 연유도… 전부 누구의 잘못도 아니네.”
나직이 한숨을 내쉰 가스트의 눈이 제 옆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손자, 아한에게로 향하였다. 제게로 향하는 눈빛을 느꼈는지 아한이 고개를 돌려 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스트의 인자한 눈빛을 확인하더니 방긋 미소 지었다.
웃으며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는 가스트의 말이 공기 중에 가볍지 않은 무게로 퍼져나갔다.
“왜 이런 시련을… 이렇게 어린 영혼들에게 주시나이까…….”
마차는 안의 상황도 모른 채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드디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외궁을 향해 힘차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