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7화 (17/276)

17화

제1장 디오니스 (16)

“르베나 공주 말입니까?”

“그래.”

짧게 답하는 루드바하를 지그시 바라보던 유안이 말했다.

“진짜 공주는 아닙니다.”

“진짜 공주가 아니면 가짜란 말이야?”

루드바하의 말에 유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핏줄은 왕실의 핏줄이 맞지요. 제노스 왕이 딸인 루아나 공주의 핏줄이니.”

“공주의 딸이 왜 공주의 호칭을 달고 왕궁에 사는 거지? 디오니스에 그런 법이 있었나?”

선뜻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묻는 루드바하에게 유안은 본인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말해 주었다. 르베나와 관련된 출생부터 학대 사건,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 이르기까지.

정보력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앞서 있는 유안이었기에 루드바하는 그의 말을 끝까지 경청했다.

유안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난 후, 루드바하는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유안은 그답지 않은 조심스런 목소리를 내었다.

“그분께 흥미가… 생기신 겁니까? 전하께서 누구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게 처음이라.”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의 짙은 푸른 눈에 순간 미소가 지어졌다.

“왜, 내가 작은 왕국, 그것도 베이라들의 성지인 디오니스의 공주에게 빠질까봐?”

루드바하의 질문에 유안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그만큼 루드바하가 누군가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첫 번째, 아니 엄밀히 말해 두 번째였기 때문이다. 루드바하는 유안이 무슨 생각을 하듯 알바 아니라는 듯 혼자만의 생각에 잠기었지만.

‘공주가 아니지만 공주라 불린다…….’

무감각한 표정으로 숨겨 놨지만, 모두의 위에 선 오만하고 강인한 왕의 성질이 보였던 열일곱 살의 공주, 르베나 드 디오니스.

그녀를 떠올린 루드바하의 얼굴에 점차 호기심 어린 미소가 서서히 번져 나갔다.

* * *

“베, 베이라요?”

사나의 목소리에는 놀람과 함께 약간의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후벤은 재빨리 방문을 열고 주변의 기척을 살핀 후, 르베나에게 다가와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공주님, 공주님께서 마력을 가지고 있단 걸 언제 아셨습니까? 아니 스승이 계십니까? 어떻게 이런 치료술을… 아니, 아니 그것보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까?”

그답지 않게 당황하며 채근하는 후벤을 바라보던 르베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이 있다는 건 열 살 즈음에 알았고 스승은 없다. 독학했을 뿐. 그리고 이에 대해 알린 것은 너희가 처음이다. 됐나?”

르베나의 말에 후벤과 사나는 순식간에 여러 감정의 조각들에 휩싸였다.

그렇게 제 몸을 지키겠다고 열심히 기사들과 수련을 하던 그들의 공주님이 베이라라니.

심지어 이제껏 그 사실을 혼자만 알고 독학까지 하셨다 한다.

더 이상 베이라가 나지 않는 디오니스에 왕위계승권을 가진 베이라의 존재는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르베나가 걱정되는 만큼 한편으로는 르베나가 본인들에게 처음으로 말했다는 것에 대한 기쁨과 함께 독학으로 이만큼이나 마력을 다스리게 되었다는 르베나에 대한 대견함이 이상하게 뒤섞였다.

“고, 공주님 일단 허락하신다면 가스트 남작을 궁으로 불러오겠습니다. 공주님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에게 확인을……!”

“필요 없다.”

꽤 신중하게 고른 인물을 단칼에 자른 르베나의 말에 후벤이 곤란한 표정으로 사나를 바라보았다. 르베나는 후벤의 곤란한 얼굴을 한 번 보고는 평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스승이 필요하지 않고… 내 힘을 굳이 숨길 생각도 없으니.”

하지만 이번 르베나의 말에는 사나와 후벤이 화들짝 놀랐다.

“공주님, 만약 세나르 왕비가 알게 된다면… 아니 지금 여기에 와있는 유파시드가 알게 된다면……!”

“죽이려 하겠지.”

남의 일인 듯 툭 던지는 르베나의 말에 후벤과 사나 모두 이젠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게 벌써 두 번째인 르베나는 어쩐지 변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에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르베나도 알고 있다.

이곳에는 예전과 다르게 세츠들의 수장 유파시드가 와 있다. 과거와 무엇이 다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현재 디오니스에 있고 베이라의 힘을 타고난 디오니스의 왕위 계승자를 그냥 두고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또 다른 신마전쟁의 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이기에.

그렇지만 르베나는 자신의 힘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베이라의 힘은 누구도 갖지 못한 권력이었으며 누구도 무릎 꿇릴 수 있는 수단이었다. 무엇보다 그것은 르베나가 갖고 있는 그녀만의 무기였다.

게다가 르베나가 이곳에서 계속 살 생각이면 모를까 예전으로 돌아가기로 정한 무도회 전까지 이 마력을 쓸 일이 뭐 그리 있을까 싶기도 했다. 비밀은 지키려 하지 않아도 지켜질 것이다.

르베나는 아직도 붕어처럼 뻐끔거리는 후벤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가스트 남작을 외궁으로 초대하는 건 허락하지.”

뜻하지 않은 르베나의 말에 잠시간 버벅대던 후벤의 얼굴에 약간의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이는 오래 가지 않았다.

“다만, 그가 궁에 머무는 것까지는 허락하되 그 이상의 간섭은 허락하지 않겠다. 특히, 내 마력에 관해서는.”

순간 후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또다시 제 옆의 사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이는 두 사람을 르베나는 피곤하다며 얼른 내쫓아 버렸다.

이전의 삶에서 둘은 밤새 르베나에게 마력을 숨길 것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그걸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혼자 있게 된 그녀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밝은 금빛이 언뜻언뜻 섞인 은빛 머리, 심연의 바다같이 짙은 푸른색 눈동자, 옅은 미소가 끊이지 않는 얼굴.

세츠들의 중심이자 젠의 황제가 될 루드바하 라 유파시드.

그를 떠올리자 갑자기 르베나의 머리에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 정도의 통증이 이어지자 곧 르베나의 머리에 두서없는 이미지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

르베나가 기억하는 전쟁의 시작. 드디어 그 이후의 일이 지금 르베나의 머릿속을 강타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 * *

르베나는 처음 마력이 폭주한 이후 계속 스스로의 마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르베나는 쓰면 쓸수록 점차 마력을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 타고난 베이라인 그녀에게 스승인 가스트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후벤과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 그리고 그의 어린 손자 아한은 그녀가 가장 아끼는 사람들이었다.

르베나는 비록 사나의 죽음 이후 점차 냉정한 사람으로 바뀌어 갔지만 그들에 대한 마음까지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연합군의 진격을 앞둔 상황에서만큼은 그들과의 대립이 반갑지 않았다.

‘연합군이라…….’

소문에 의하면 연합군을 만든 젠의 유파시드가 강경한 의미를 담아 디오니스로 진격해 올 것이라 했다. 평화협정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르베나의 서신조차 무시하는 걸 보면 소문은 사실인 듯했다.

‘후벤, 가스트… 두고 봐라. 나는 디오니스를 지켜 낼 것이다. 디오니스를 세츠들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로 만들 것이다. 이 힘은… 마력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임을… 모두가 알게 할 것이다.’

결심을 굳힌 르베나는 점점 늘어나는 군부의 귀족들과 전국에서 모여드는 베이라들의 청에 따라 디오니스 국경을 어지럽히는 세츠들을 적극적으로 처단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정확히 한 달 뒤, 3개 왕국의 병사들을 이끌고 나타난 젠의 유파시드를 맞닥뜨렸다.

단 반나절.

그와 3개 왕국의 연합군은 디오니스의 절반을 반나절만에 먹어 치우고 수도로 들어왔다.

이미 그들을 맞을 준비를 하던 르베나와 디오니스 모든 귀족들의 병사들이 그들과 대치를 이루었다. 그리고 유독 한 사람이 르베나의 눈에 띄었다.

순백의 은빛 같은 머리칼에는 햇빛의 반사에 따라 언뜻언뜻 금빛이 보이는 듯했다.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수려한 외모에 큰 키. 멀리서 보아도 그는 신성한 세츠들의 왕, 유파시드 같았다. 르베나와 시선을 마주친 그가 문득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는 생각에 잠긴 듯 멈추었다. 이때를 틈타 르베나가 소리쳤다.

“너희들은 정당한 이유도 없이 이 땅, 디오니스를 침공하였다. 이것은 엄연히 유파시드의 이름을 걸고 한 평화협정을 어기는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할 말이다!! 사특한 베이라가 왕이 된 걸로도 모자라 그 힘을 국경 밖으로까지 쓰다니!! 이는 다른 왕국과 제국을 위협하려는 수작임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르베나의 말에 자칸의 한 남자가 소리쳤다.

‘자칸의 왕자인가…….’

카잔의 왕은 오십이 넘은 나이었다. 지금 소리친 이는 구리빛 피부에 20대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자칸 왕실의 문양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젊은 왕가의 남자, 자칸의 왕자일 것이 분명했다. 그가 소리치자 뒤에 있는 수많은 연합군이 칼과 무기를 바닥에 찍으며 소리를 냈다.

“우우-.”

“우! 우!”

“우!!”

수만의 군대가 내는 소리는 실로 위협적이었다. 그리고 디오니스의 내륙통로인 북부를 뚫고 내려온 그들의 무기에는 채 굳지 않은 선혈이 묻어 있었다.

르베나는 연합군이 디오니스를 향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북부의 모든 주민들을 남부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최소한의 병력만을 북부에 주둔시켰다.

애초에 그들이 연합군을 막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북부의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피신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왕의 피신 명령에 당황하였으나 오랜 시간 각인된 전쟁의 두려움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일사불란하게 꼭 필요한 짐을 챙겨 군대의 통솔하에 남부 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연합군의 칼에 묻은 피를 보며 르베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주민들을 대피시키길 잘했군.’

르베나는 스스로가 성군이라 생각되지는 않았지만, 필요치 않은 살생을 저지르는 왕도 아니었다. 백성을 사랑하는 왕도 아니었지만, 죄 없는 백성이 죽는 것을 방관하는 왕도 아니었다.

그녀의 분노가 향하는 곳은 오로지 한 곳.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그녀의 힘을 부정하는 이들에게뿐.

르베나의 붉은 눈이 수만의 군대를 훑다가 그 앞에 시립한 유파시드라는 이에게 닿았다.

아까부터 말도 없이 르베나만 빤히 보는 그는 듣던 대로 대단한 세츠였다.

유파시드임에도 단 하나의 신력 자락도 보이지 않음은 그가 얼마나 신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세츠인지를 보여 주었다.

‘이길 수 있을까…….

르베나는 저의 뒤에 시립한 군대를 둘러보았다.

몇 개월에 걸쳐 전역에서 모여든 몇백 명이 조금 넘는 베이라와 만 명이 조금 안 되는 군사들. 연합군 무리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다.

하지만 그들은 신마전쟁의 패배 이후 일반인보다 못한 삶을 살았고 그걸 다시 뒤엎을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자 했다. 또한 귀족들과 그들의 병사들, 디오니스의 기사단 역시 디오니스를 침범한 연합군에 대한 기세가 자칫 사나웠다.

르베나는 제 몸 안의 마력을 점검했다. 서서히 르베나의 몸을 돌고 있던 마력이 흥분한 르베나의 감정에 살며시 동요되기도 했지만 르베나는 그것을 지그시 눌렀다.

‘인정받을 것이다!! 베이라의 힘 또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공평한 힘이라는 것을. 마력이 결코 저주받은 힘이 아니라는 것을……!’

르베나는 이를 위해 그녀를 마주하는 수만의 군대 앞에 목숨을 걸었다. 또한 그녀 뒤에 시립한 디오니스 모든 귀족들과 병사, 베이라들이 그녀와 같은 목소리를 내 줄 것이다.

그래서 르베나는 두렵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의 협상을 최소한의 희생으로 잘 마무리하면…….

‘가스트 후작과 후벤 공작도 인정해 주겠지.’

르베나가 큰 소리로 모두에게 외쳤다.

“디오니스는 우리의 국경에서 국경 안 백성들을 괴롭히던 세츠의 무리들을 처단한 것뿐이다. 이것은 디오니스를 보호하려는 목적일 뿐.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평화협정을 유지하는 조건 하에 베이라의 힘을 인정해달라는 것이다!”

르베나의 말에 연합군의 웅성거림이 퍼져나갔다.

“신력과 마찬가지로 마력은 내가 없애고 싶다고 없앨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생명의 산물. 나는 디오니스나 타국의 베이라들이 단지 마력을 타고났다는 이유로 죄인처럼 사는 이 모순을 유파시드, 당신에게 말하고 싶었다. 신마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없이 베이라들도 더 이상 그 힘을 숨기지 않고 나라의 건설적인 일에 힘쓸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순간 르베나의 말에 들려오는 주변의 웅성거림을 무시한 자칸의 왕자가 소리쳤다.

“거짓말!! 삿된 말로 현혹하려 들지 마라!! 우리는 이미 디오니스의 왕이 그 힘을 이용하여 젠 제국을 치고 유파시드를 살해하여 제2의 신마전쟁을 일으킬 계획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다!!”

그의 말에 르베나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무슨 소리지? 난 그대들이 내가 국경의 세츠들을 처단한 일로 왔다고 알고 있다.

그리고 내 서신을 다 무시한 것은 그대들이 아닌가.”

르베나의 말에 자칸의 왕자가 물었다.

“헛소리하지 마!! 여기에 당신의 말을 믿어 줄 사람은 없어! 또한 당신이 죽인 것은 세츠만이 아니라 교역을 위해 오간 타국의 백성들이기도 했다고!”

르베나는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디오니스의 왕. 디오니스의 수호자. 나는 무고한 타국의 백성을 해치지 않는다! 도대체 당신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 나는 하나도 모르겠다.”

르베나의 말에 이번엔 켄느의 왕이 외쳤다.

“헛소리! 유파시드! 듣지 마십시오. 소문대로 아주 간악하고 사악한 혀를 휘두르는 계집입니다. 저희가 유파시드에게 드린 모든 증거가 저년의 거짓을 고하고 있습니다!”

“증거……?”

르베나의 말에 이제껏 닫혀있던 유파시드, 루드바하의 입이 열렸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신력을 실었는지 일대의 모두가 들을 만큼 멀리 퍼져나갔다.

“디오니스의 왕이여, 우리에겐 그대가 제2의 신마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있소.”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저도 모르는 일을 제가 하였다면 보여 주시지요, 그 증거.”

르베나가 루드바하를 노려보며 말하자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이 르베나를 향했다가는 일순,

그녀의 뒤에 시립해 있는 디오니스의 귀족과 병사 그리고 베이라들을 향하였다.

척. 처처척. 척척!

그리고 루드바하의 눈을 따라 제 뒤를 바라본 르베나의 눈이 서서히 경악으로 떨렸다.

그녀의 뒤에 든든히 서 있던 디오니스 모든 귀족들과 병사들 그리고 기사들이 지니고 있던 그들의 무기가 그녀, 르베나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증거… 입니다.”

루드바하의 크지 않은 목소리가 마치 천둥처럼 르베나의 귓전에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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