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6화 (16/276)

16화

제1장 디오니스 (15)

사나를 부축해 방을 나서는 르베나의 뒷모습에 루드바하의 시선이 끈질지게 따라붙었다.

달칵.

이내 그녀가 방을 벗어나고 문이 닫히자 드록이 루드바하에게 말하였다.

“아, 어서 앉으시지요. 정말 영광입니다. 제 방까지 직접…….”

“오늘은 이만 가 보죠.”

닫힌 방문에서 채 시선을 돌리지도 않은 루드바하가 건성으로 말하였다.

이에 당황한 드록의 수려한 얼굴이 난감함으로 살짝 일그러졌다.

“하, 하지만 여기까지 오신 목적이…….”

당황하며 이어가던 드록의 말 중간에 루드바하의 눈이 방향을 틀어 그를 향하였다.

움찔.

분명 루드바하의 입은 여전히 그림 같은 미소를 그려내고 있고 눈가에도 옅은 미소가 보이는데… 어째서 눈빛만은 다른 말을 하고 있을까.

드록을 향하는 그의 짙은 푸른색 눈이 시리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오늘은 때가 아닌 듯하니. 다 음 기 회 에.”

음절을 하나하나 끊어 다시 말하는 루드바하의 말에 드록은 좀 전까지의 당황스러움도 잊고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루드바하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인형 같은 움직임이었다.

그러자 온화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 루드바하가 대동한 남자를 데리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혼자 방안에 덩그러니 남은 드록은 이래저래 기가 빨리고 힘든 마음에 털썩 의자에 주저앉아 버렸다. 뭔가 일이 아주 이상하게 꼬여 가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달칵.

“표정 관리 좀 하시죠.”

드록의 방문이 닫히자마자 유안이 질책하듯 그의 주군에게 말했다.

문을 지키던 시종은 어느새 자리를 비운 뒤였다.

“표정? 내가 뭘?”

다시 그림 같은 미소를 그리며 유안을 향한 루드바하의 얼굴은 전에 없이 황홀했다.

아마 누군가 지금 루드바하를 본다면 심장을 붙잡고 쓰러질 만큼, 그가 그려내는 미소는 루드바하의 외모를 더 빛나게 만들었다.

곧 작게 한숨을 내쉰 유안이 말하였다.

“저 멍청이가 놀라는 걸 못 봤습니까.”

유안의 말에 피식 웃으며 닫힌 방문을 한번 힐끔 본 루드바하가 말했다.

“그래봐야 멍청인데 뭐.”

다시 웃는 그의 미소 속 경멸의 빛이 어렸다.

“누굴 진짜 겁내야 하는지도 모르는 멍청이.”

곧 루드바하의 진한 벽안이 누군가가 떠난 복도의 긴 끝을 향해 반짝이기 시작했다.

* * *

“공주님, 사나!”

사나를 부축한 르베나가 자신의 방에 돌아오자 언제 소식을 들은 것인지 후벤이 와 있었다.

순간 사나의 치맛자락에 닿은 후벤의 녹안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아니… 이게!”

르베나는 후벤의 반응을 무시하고는 서둘러 사나를 제 침대에 눕혔다.

아니, 눕히려 했다.

“침대 더러워져요, 공주님. 전 그냥 다른 시녀들한테 약 구해 치료받으면 돼요. 그러니까…….

사나의 말을 듣고는 깊은 한숨을 내쉰 르베나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돌연 꽃이 꽂혀 있는 화병을 집어 들어 침대의 한 모퉁이에 화병을 뒤집어 쏟아 버렸다.

후드득.

꽃과 물이 침대 모퉁이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곧 르베나의 서늘한 눈이 어리둥절해 있는 사나에게로 향했다.

“봤지. 어차피 빨아야 해. 그러니까 누워.”

순간 조금은 어이없는 르베나식 친절에 지속되는 통증에도 불구하고 사나가 크게 웃어 버렸다.

르베나는 분명 어떤 말을 하던 그녀의 침대를 더럽히지 않겠단 사나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거다.

‘그래서 굳이 이런 방식을 쓴 것이겠지. 세상 제일 다정한 우리 공주님 같으니라고.’

사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르베나의 침대에 조심스레 몸을 누였다.

포근한 햇볕 냄새 위에 르베나의 시원하고 깊은 우드향이 벤 침구는 #생각보다 훨씬 편안했다.

“저희 집 주치의를 부르겠습니다.”

궁 안에도 의사가 있기는 했지만 궁 내에 거주하는 의사는 왕가와 그에 준하는 귀족이 아니고서는 진찰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벤이 후작가의 주치의를 부르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빠르게 이를 만류했다.

“아니야. 부르지 마.”

뜻밖에 저의 뜻을 반대하는 르베나의 말에 후벤이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냉정한 듯하셔도 사나에게 돈을 아낄 공주님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그러자 르베나가 놀란 듯한 후벤에 이번에는 다른 명을 내렸다.

“후벤, 방에 아무도 못 들어오게 막아.”

후벤은 갑작스레 떨어진 이상한 명에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들의 공주는 어리지만 절대 허튼소리는 하지 않았고 르베나에겐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후벤은 망설임 없이 방 끝에 놓인 긴 테이블을 끌고 와 방문 앞에 놓았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르베나가 조심스럽게 사나의 치맛자락을 들어올렸다.

화들짝 놀란 후벤이 방 밖으로 나가려다 막힌 문을 보고 울상을 지은 것도 그때였다.

레이디의 몸을 훔쳐보는 것은 기사로써 옳지 않은 일이란 생각에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자신이 막은 장애물 때문에 밖으로 나갈 수도 없음에 눈앞이 캄캄해진 것이다.

“창가 쪽 의자에 앉아.”

그때 구세주처럼 들린 르베나의 말에 창가로 눈을 향한 후벤이 잽싸게 가서 제 몸을 던졌다.

창가라면 사나의 얼굴은 보이겠지만, 침대 옆에 가림막이 있으니 그녀의 가슴께 밑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기사로서의 덕목을 지키게 해 준 공주님께 너무 감사한 순간이었다.

“공주님…….”

같은 시간, 사나는 이 공주님이 왜 이러나 싶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사를 부르지 않는 거야 그렇다 쳐도 후벤 경한테 문을 막고 지키라니.

분명 평범한 방식과는 많이 다른 듯하였다. 무엇보다 이게 괜히 르베나한테 폐를 끼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사나는 염려했다. 하지만 사나의 부름에도 르베나의 눈은 사나의 상처에 굳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전에도 사나는 매질에 의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이번에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어. 단순한 치료로는 후유증까지 예방하지 못하니 상처 자체를 없애야 해.’

사나의 반응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생각을 마친 르베나는 사나의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에 마력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헉!”

“……!”

곧 르베나의 손에서 검붉은 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이 닿은 사나의 상처는 급속도로 아물고 있었다. 아니 이건 아무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매질을 당하기 전, 원래의 피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후벤과 사나의 소리없는 경악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르베나는 상처치료에 더욱 집중했다.

원래 방어와 치유에 능한 세츠와는 다르게 베이라들은 공격에 강하지만, 그녀는 르베나였다.

최강의 베이라로 디오니스의 왕좌에 스스로 앉은. 그녀에게 이 정도 상처를 낫게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됐다. 이제 괜찮을 거야.”

이어지는 르베나의 말이 들려왔지만 사나는 감사 인사는커녕 멍하니 제 다리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어느새 느껴졌던 통증도 상처도 모두 사라진 후였다.

오직 치맛자락에 남아있는 혈흔만이 조금 전 상황이 거짓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었다. 후벤 역시 순간 그렇게 중요시하던 기사도도 잊어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사나의 맨다리를 빤히 바라보았다.

“공주님… 혹시……!”

후벤의 조심스러운 말이 그의 입을 벗어나자 르베나가 짧게 답했다.

“그래, 난 베이라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르베나의 말에 후벤과 사나의 눈동자는 경악으로 치켜 떠졌다.

베이라.

신마전쟁의 패배로 더 이상 빛을 받지 못하는 존재. 패배의 낙인이 찍혀 모든 이에게 경계를 당하는 존재. 그래서 모습을 감추었고 더 이상 디오니스의 땅에 태어나지도 않는 존재.

그 존재가 지금 그들의 앞에 있었다.

아직은 앳된 나이. 하얗고 작은 얼굴 가득 자리 잡은 매혹적인 이목구비.

시리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 언제나 무감각한 얼굴.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그들의 공주 르베나의 모습으로.

* * *

“뭐라고? 내 보석을?!”

눈치 보며 말을 꺼낸 드록을 노려보는 세나르의 눈빛이 자못 매서웠다.

“대체 어떤 보석을……! 아니다. 거기 너! 내 보석함을 가져오렴. 거울 밑에 있는 거로. 거울 밑에 있는 보석함이라고?”

“네… 어머니…….”

세나르가 기어들어갈 듯 대답하는 드록을 노려보고는 곧 시녀가 가져온 보석함을 열어 그 안을 살폈다. 그러고는 놀란 듯 크게 치켜뜬 눈으로 드록에게 물었다.

“드록, 혹시… 여기에 있던 세공되지 않은 보랏빛 보석을… 그것을 가져간 것은 아니지?”

세나르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드록이 제 눈을 끔뻑끔뻑 느리게 감았다 떴다가는 슬그머니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곧 그것이 긍정의 사인임을 알게 된 세나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이 멍청한……!”

보석함을 쾅 닫고는 손가락으로 드록을 가리키며 욕을 하려던 세나르는 문득 눈에 밟히는 방 안 시녀들 때문에 더 이상의 말을 생략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세나르는 빠르게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시녀들을 모두 물렸다.

그러고는 저를 닮지도, 제노스 왕을 닮지도 않은 드록의 멍청함이 도대체 누구한테서 기인했는지를 생각하며 그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드록,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제발 좀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하, 하지만 어머니께서도 르베나가 안 되면 그 사나인지 뭔지부터 잘라 놓으라고…….”

눈치를 보며 말하는 드록을 보며 가슴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는 세나르였다.

그래, 분명 그렇게 말했다. 르베나가 안 되면 그 시녀라도 잡아야 한다고.

사나가 외궁을 맡고 나서 외궁에 사람의 출입이 빈번해지며 르베나가 다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사나라도 잡아다 그 기세를 꺾어 놓으면 좋겠다 하였다.

하지만.

“드록, 잘 들어라 그 보석은… 그… 보석은 하아… 마석이란 말이다.”

세나르의 말에 드록의 탁한 금빛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마, 마석이요? 하지만 베이라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고 마석은 거의 없다고…….

드록의 말에 세나르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한때 디오니스에 넘쳐나던 마석들은 신마전쟁 이후 자취를 감춘 베이라들에 의해 더없이 귀해졌다. 마석이라는 것 자체가 강도 높은 보석에 마력이나 신력을 집어넣음으로써 만들어지기에 더 그랬다.

넣는 마법의 종류에 따라 몇 회 한정이기는 해도 공격, 방어, 가벼운 치료 등이 가능하기까지 한 특별한 보석.

세나르에겐 그 귀한 마석이 존재했다.

바로 7년 전 르베나에게 마법을 걸어준 베이라에게서 받은 마석. 그건 단 한 번, 상대에게 저주를 거는 마석이었다.

심지어 보통 저주에 걸린 사람은 동일 혹은 그 이상의 마력으로 치료하지 않는 이상 저주에 의해 서서히 앓다가 7일 내로 죽게 된다고 했다.

“흠…….

곰곰히 생각을 하던 세나르가 갑자기 아차 싶은 표정으로 드록에게 물었다.

“마석이 깨진 것은 언제냐? 혹 너의 손에 들고 있을 때 깨진 것이냐?”

어쩐지 초조한 듯 물어오는 세나르에게 드록 역시 깊이 생각하다 말하였다.

“그것이… 음… 제가 그 시녀 계집을 보고는 그것을 들고 있던 시종에게서 빼앗아 손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집과 부딪히고 나서 바닥에 떨어져 깨졌습니다.”

“하면 깨지고 나서 그 파편은??”

“당연히 그 계집이 사과하며 다 주웠습니다.”

드록의 말에 세나르가 그제야 안심한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드록과 똑닮은 화려한 얼굴에 짙은 미소를 박아넣었다.

“와중에 잘하였구나. 르베나 그 아이를 어쩌지는 못해도… 그 시녀장만큼은 이번 기회에 없어질 테니……. 하하… 잘했다… 잘했다, 우리 왕자.”

만족스럽게 번지는 세나르의 미소를 본 드록의 얼굴이 영문 모를 표정을 지었다가는 곧 제 어미를 따라 웃기 시작했다.

마석. 깨진 파편. 어머니의 보석함. 어머니의 만족스러운 미소.

이 모든 것으로 대강의 상황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미소 띤 얼굴로 다시 찻잔을 쥐는 세나르를 보며 드록은 그제야 왕비에게 혼날까 두근대던 마음을 겨우 가라앉혔다.

비록 시작은 생각 없이 벌인 일이었지만, 생각 외로 일이 꽤 재미있게 흘러간다는 생각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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