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5화 (15/276)

15화

제1장 디오니스 (14)

“고, 공주님! 큰일 났어요, 사나 시녀장께서 큰 실수를 저질러 세, 세나르 왕비님께 매질을 당하고 있어요!”

급박하게 전하던 초조함 음성.

“공주님께서 어서 가서 말려 보세요!! 세나르 왕비님은 공주님을 예뻐하시니 말씀을 들어주실지 몰라요!!”

예쁜 눈웃음으로 속살대던 목소리가 순간 르베나의 머릿속을 울려왔다.

멍청한 르베나를 본궁으로 보낸 것도 모자라 사나의 시신 앞에서 그녀가 멍청하다며 소리 높여 웃던 시녀.

그녀가 지금도 드록의 옆에 있다. 다친 사나를 비웃으며. 흔들리는 사나의 몸을 바라보며.

순간 르베나의 마력이 보이지 않은 힘이 되어 그 시녀에게로 빠르게 쏘아졌다.

하지만 시녀를 향하던 르베나의 분노 앞에 드록이 보인 순간. 르베나는 빠르고 노련하게 자신의 감정을 눌러 담았다.

동시에 아무도 모르게 쏘아지던 르베나의 마력도 공기 중에 스르르 녹아 버렸다.

‘난… 난 그때와는 달라.’

르베나는 보이지 않게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자신을 눌렀다.

비록 사나는 그때처럼 이들의 덫에 빠져 매질을 당하고 있지만, 적어도 르베나는 그때처럼 뭣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마력 운용 따위도 못해 지나간 모든 것을 피로 물들이는 철없는 베이라가 아니었고 앞뒤 상황보다 감정을 먼저 내세우는 애송이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사나, 그녀가 아직 살아 있었다.

르베나는 작은 숨을 내쉬고는 눈앞의 드록을 바라보았다. 드록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눈이 차가운 선연함과 그보다 짙은 분노를 조용히 담아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락. 착.

드록의 옆에 서 있던 기사 두 명이 칼을 꺼내 드록을 호위하듯 앞을 막아섰다.

그 모습을 본 르베나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맨날 마녀 계집이라고 부르더니 정말 내가 마녀라고 되는 줄 아시는군요.”

르베나가 붉은 눈을 일렁거리며 드록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며 말했다.

“제가 정말 마녀라면… 저런 기사 둘 따위로 저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르베나는 한 걸음 다가온 것뿐이었지만 드록은 깊은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난번 기이한 르베나의 힘을 경험한 드록은 그 뒤로 항상 기사들을 대동하고 다녔다.

베이라가 거의 없는 요즘, 최고의 기사 둘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에게 나름의 심적인 안정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그들을 동행했고 드록은 완벽한 안전을 보장받고 있었다.

르베나를 마주하기 전까지는.

수많은 훈련을 받으며 전장에서도 수없이 활약했던 기사들 역시 르베나에게서 흘러나오는 미약한 살기에 민감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던 드록이 문득 제 발을 내려다보고는 자존심이 상한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저년을 잡아!!”

드록의 말과 동시에 사나의 곁에 서 있던 시종들이 사나를 붙잡더니 사나의 목에 칼을 드리웠다. 이를 본 르베나의 눈에 조용히 검은 빛이 일렁였다.

“하… 감히 너 따위 것이 날 위협해? 다가와 봐. 다가와 보라고! 아니면 지난번처럼 사특한 주술이라도 써 봐!! 바로 저 시녀 계집을 죽여 버릴 테니까!!”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 어디선가 있었던 듯한 일.

하지만 가장 큰 차이. 아직 사나는 살아 있다.

그것만으로 르베나는 모든 아량을 베풀 수 있었다. 그래서 조금 더 여유로울 수 있었다.

“당신이 아무리 왕자라도 아무 죄 없는 시녀를 벌하고 죽일 권한은 없습니다. 심지어 그녀는 벨루디 자작가의 영애이기도 합니다.”

르베나의 말에 드록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아무 죄도 없어? 저년이 지나가는 나를 쳤어! 그리고 젠의 유피시드께 진상할 물건을 깨 버렸다고!! 그건 드워프의 창고에서 거금을 주고서야 겨우 사 온 거야. 저런 자작가의 시녀가 갚을 수도 없다고!!”

“…얼마죠?”

“2000만 다나.”

기다렸다는 듯 들려온 드록의 대답에 르베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2000만 다나?

보통 평민 가족 4인이 한 달 사는데 필요한 액수가 100다나 정도다. 심지어 이 왕궁의 1년 예산 또한 200만 다나를 넘지 않는다.

디오니스의 왕이었던 르베나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뭐? 2000만 다나? 왕궁의 10년 예산이 들 정도의 보석을 샀다고?

현재 디오니스 왕궁에 그런 현금은 없다. 신마전쟁에 패해 쇠퇴의 길을 걷고 있는데 그 정도의 돈이 있을 리가 없다.

예전 르베나가 왕일 때는 여러 마도구의 생산으로 현금이 많아졌지만, 지금은 그런 마도구도 없지 않은가. 결국 지금 드록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 어쩌면 사나가 부딪힌 일 역시 꼭 사나의 실수만은 아닐 것이란 것도.

과거에도 그렇듯, 드록과 세나르는 여기저기에 방대한 그물을 쳐 놓고 그들이 걸리기만을 기다린 것이다.

르베나는 순간 고민에 빠졌다.

맘 같아선 여기서 모두 도륙을 내고 사나를 데리고 나가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뒷일이 복잡해진다. 더군다나 여기에 계속 남을 생각이 아니기에 사나를 위해 최대한 좋게 해결하고 싶었다.

평화롭지만 간단한 방법.

르베나가 승자의 표정을 짓고 있는 드록을 보았다.

“이렇게 하시죠. 제게 보석을 보여 주면 똑같은 것으로 구해다 드리죠. 그럼 유파시드께 진상하는데도 차질이 없을 테니.”

르베나의 말을 들은 드록이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정말 미친 듯이 웃다가 종국에 깔깔대고 웃는 꼴이 딱 미친놈 같았다.

“하하하. 진짜 미친년이네. 야 머리에 뭐 맞았냐? 이건 드워프의 창고에서 구해 온 보물이라고! 너 따위가 어디서 손쉽게 구해올 게 아니라니까! 얼굴 좀 반반하다고 몸이라도 이용할 생각인가 본데? 드워프한텐 어림도 없어!!”

드록의 말에 르베나는 감정에 반응하여 또다시 꿈틀대는 마력을 느꼈지만, 지그시 눌러 버렸다.

상대할 가치가 없는 버러지의 말일 뿐이었고 이곳을 뜨기 전에 알아듣기 좋게 잘근잘근 밟아 줄 생각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때, 모두의 귀를 단숨에 사로잡을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내기를 하면 되겠네요. 괜찮다면 제가 증인을 서도 되겠는지요?”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본 르베나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섰다. 아무리 신경을 쓰지 않았대도 누가 들어온다는 인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었기에 르베나의 경계심은 한층 짙어졌다.

곧 문가에서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한 남성이 보였다.

언뜻 밝은 금빛이 비치는 결 좋은 은발에 짙은 푸른색 눈을 지닌 남자, 루드바하가.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젠의 중심이며 세츠의 중심이신 유파시드에게 디오니스의 왕자, 드록 드 디오니스가 인사드립니다.”

언제 험악했느냐는 듯 완벽한 왕실 예법으로 인사를 하는 드록의 표정에는 인자하고 멋들어진 미소만이 가득하였다. 그 미소가 드록의 외모를 더 빛나게 만들었다.

그리고 르베나 역시 고개를 들어 루드바하를 바라보았다.

깊은 심연의 푸른 눈동자가 붉은 르베나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곧 그림 같은 미소가 그의 얼굴에 퍼져나갔다.

“이분은… 누구시죠?”

루드바하의 말에 드록이 남모르게 잠시 인상을 찡그렸다 얼른 펴고는 말하였다.

“아, 우리 디오니스의 공주입니다. 이제 열일곱 살인데도 왕실 예법에 많이 서투릅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젠의 유파시드여.”

드록의 말에 르베나의 붉은 눈에 불쾌한 감정이 미미하게 스쳐 갔다. 다른 사람도 아닌 드록의 지적이라니. 하지만 루드바하는 그저 웃는 얼굴을 하며 편안하고 듣기 좋은 음성을 내었다.

“저도 격식 차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으니 되었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제가 본의 아니게 두 분의 대화를 듣게 된 것에 대해 사과부터 해야겠군요. 시종이 고한 후 문을 열어 들어왔는데 두 분께서 대화에 집중하느라 모르는 듯하더군요. 인사할 기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루드바하가 살짝 고개를 숙이려 하자 드록이 깜짝 놀라며 루드바하보다 더 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제 방에 그의 출입을 멋대로 허한 문지기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의 음성만은 루드바하의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있었다.

“무, 무슨 말씀을! 유파시드께서 오실 줄 모르고 이런 소란을 피운 제 잘못입니다. 공주의 잘못을 훈계하는 역할은 언제나 힘이 들지요.”

이제는 자칫 엄하고 다정한 왕자를 흉내 내려는 드록에게 르베나가 경멸의 눈빛을 노골적으로 쏟아내었다. 곧 르베나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입 모양을 내며 혼잣말을 뱉었다.

“쭉정이 같은 게 멀쩡한 척은…….”

풉.

순간 어디선가 들린 웃음소리에 르베나가 놀라 고개를 돌렸지만, 거기엔 예의 있고 근사한 미소를 짓고 있는 루드바하와 온통 파란색의 눈과 머리칼을 한 냉정한 인상의 남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하긴. 워낙 작게 입 모양을 낸 거라 누가 들었을 리도 없다. 살짝 루드바하의 눈이 르베나를 스친 것 같았으나 그는 계속해서 드록에게 정중히 제안을 할 뿐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까 말씀드린 대로 제가 두 분 내기의 증인이 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공주님께서 그 보석을 구해 오는지에 대해 말이죠.”

“아, 아니 유파시드께서 신경 쓰실 만한 일이 아닙니다. 제가 알아서 잘 처리하겠습니다.”

당황한 드록이 루드바하의 제안을 에둘러 거절했다. 이 기회는 르베나를 잡아 족칠 절호의 기회인데 이렇게 루드바하에게 넘겨 어영부영 끝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드록의 마음 따위 아무것도 모르는 루드바하는 더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부드럽게 말했다.

“제 마음이 불편해서 그럽니다, 드록 왕자님. 저에게 주시려던 선물이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안 받아도 충분하다 하면 왕자님의 마음이 불편하실 테고, 이왕 주시려던 선물을 공주님에게 돈으로 지불하라 사정없이 말할 수 없는 노릇이니. 제가 증인을 서지요.”

루드바하의 부드럽지만 고집이 느껴지는 말에 드록의 인상이 구겨졌다.

이걸로 건수 잡아 저 계집애나 그 수족을 좀 족쳐 볼까 했더니.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이건 기회이기도 했다. 곧 제국의 황제가 될 유파시드의 환심을 살 기회……!

르베나가 이번에 보석을 못 구해오면 선심 쓰는 척 용서하며 인자한 인상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르베나나 그 시녀야 유파시드가 간 다음에 얼마든지 꼬투리를 잡아 족치면 될 일이었다.

애초에 깨진 보석은 중요한 것도 아닌 것 같았으니.

우연히 어머니의 방에서 발견한 보석은 오래되어 보였다. 보석에 관심이 많은 드록 조차 처음 본 것이었다. 그래도 빛깔이 맘에 들어 어느 칼에나 박아 놓을까 하여 가져가던 중이었다.

처음부터 귀한 것은 아니라 깨져도 아쉽지는 않지만, 보석이라고는 다이아도 모르는 르베나가 절대 구해 올 리가 없었다.

곧 드록의 얼굴에 인자함이 서렸다.

“그럼 그렇게 하지요. 유파시드께서 증인이 되어 주신다니 더없는 영광입니다. 사실 저는 그냥 혼내는 척만 하고 넘어갈까 하였는데 말입니다.”

하지만 드록의 인자함을 단 한 사람만은 그냥 넘기지 못했다.

“척만 하고 넘어갈까 하셔서 사나를 저렇게 때리셨군요.”

둘의 대화 속, 갑작스레 이어진 르베나의 말에 드록의 시선이 루드바하의 시선과 함께 사나에게로 가 박혔다. 그리고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아.”

루드바하의 잘생긴 얼굴에 안타까움이 번져 갔다. 하지만 이를 본 드록이 얼른 루드바하의 시선을 가로채며 말을 걸었다.

“큼……! 제 시녀들의 충정이 너무 과했습니다. 제가 잘 처리하지요. 아, 그러면 르베나가 언제까지 저 보석을 구해 오면 되겠습니까?”

드록의 말에 루드바하의 눈이 순간의 선연함을 담았지만 드록은 알지 못했다.

이어진 루드바하의 얼굴엔 여전히 미풍 같은 미소가 서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음… 무도회까지. 이번 무도회의 마지막 날이 어떨까 합니다.”

하지만 이번 루드바하의 말에는 르베나의 미간이 언뜻 찡그려졌다.

무도회의 마지막 날이면 보름달이 뜰 시점이다. ‘다니아’를 쓰기 가장 적기인 날이란 뜻이었다.

‘하지만 뭐 보석을 건네주고 나서 주문을 외워도 되니까.’

곧 빠르게 생각을 마친 르베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기로 하지요. 저는 그럼 제 시녀장을 데리고 나가 보겠습니다. 아, 그리고 왕자님. 오늘 저희 시녀장이 진 빚은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루드바하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드록에 대한 엄포까지 잊지 않은 르베나가 사나에게 다가갔다. 그때까지도 사나를 붙들고 있던 시종, 시녀들에게 그녀가 싸늘한 눈빛을 쏘아 주자 그들이 얼른 사나를 놓고는 떨어졌다.

“공… 주님… 여긴 왜 오시고 그래요.”

연신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웃는 사나의 얼굴을 본 르베나가 제 입술을 세게 깨물고는 사나를 부축했다. 하지만 사나는 여전히 듣기 싫은 말만을 보태었다.

“놓으세요… 땀하고 피 묻어요… 누군가 보내 주시면…….”

“그만. 더 하면 진짜 화가 날 것 같아.”

흠칫. 놀란 사나의 눈이 르베나를 향했다. 르베나는 언뜻 무표정해 보였지만 사나는 분명히 보았다.

평소보다 더 치켜 올라간 눈매, 붉은 걸 넘어 하얘지도록 깨문 입술.

어떤 식으로든 르베나가 이렇게 화난 모습은 처음 본 사나였다. 그것도 본인이 다친 모습에.

항상 표현은 하지 않지만 르베나의 뜨거운 마음이 이 순간 어떤 것보다 선명하게 전해지는 것 같아 사나는 제 몸을 조금 더 르베나에게 기대었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르베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좋네요… 우리 공주님 품…….”

사나의 힘없는 미소를 본 르베나의 손이 더한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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