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4화 (14/276)

14화

제1장 디오니스 (13)

짝.

“윽……!”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사나의 몸이 소스라치게 떨려왔다.

종아리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매질에 그녀의 작은 몸이 고통을 호소한 지 벌써 얼마나 지났을까.

사나는 점점 강해지는 통증을 느끼며 조금 전의 일을 떠올렸다.

사나는 르베나의 생각에 빠져 그만 드록과 부딪히고 말았다.

그리고 하필 드록이 들고 있던 보석이 젠의 유파시드에게 진상될 진귀한 보석이라고 했다.

드워프의 창고에서 아주 어렵게 구한 귀하고 값비싼 보석.

그리고 사나가 이를 깨뜨렸다는 말을 전하는 드록의 얼굴에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드디어 건수를 잡았다는 듯한 그의 표정에 사나는 얼른 무릎을 꿇었다.

“왕자님, 제발 자비를…….”

제 앞에 무릎 꿇은 사나를 내려다보던 드록이 굉장히 고민된다는 투로 말하였다.

“외궁의 시녀가 본궁에 드나들다 곧 제국의 황제가 되실 분께 진상할 보석을 깨뜨리다니…….”

드록의 말에 사나가 놀라 얼른 답하였다.

“필요한 식료품을 주문하러 잠시 들렸습니다!! 정말입니다. 실수였습니다. 왕자님.”

그녀의 간절한 말에 드록이 씨익 웃는 얼굴로 사나의 얼굴을 가만히 마주 보며 말하였다.

“종의 실수는… 곧 주인의 실수, 맞지?”

순간 들려온 드록의 말에 사나의 온몸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이 일에 절대 공주님을 끌어들일 순 없어!’

사나는 드록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를 바닥에 깊이 숙이며 빌고 또 빌었다.

“왕자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감히 용서를 바라지 않으니 어떤 벌이든 제게만 내려주세요. 온전히 저의 부주의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제발…….”

사나의 간절함이 통한 것일까.

드록은 곧바로 사나를 자신의 궁에 끌고 와 그의 시종, 시녀들에게 그녀를 붙잡으라 명했다.

그의 명에 두려움이 가득 찬 사나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짓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잔인한 악마와 같이 느껴진 순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윽……!”

다시 가해진 매질에 사나의 몸이 그만 휘청거렸다. 자작가의 딸로 태어나 루아나 공주의 말동무 시녀로 입궁한 사나는 여태껏 누군가에게 매질을 당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런 그녀의 몸은 사정없이 가해지는 매질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음… 이렇게 몸이 약해서야 벌을 모두 받을 수 있겠나? 역시 그 주인을 데려와야…….”

하지만 드록의 말이 들리자마자 사나는 제 다리에 없는 힘을 모두 쥐어짜 다시 일어섰다.

공주님. 환한 햇빛 아래가 너무도 잘 어울리는 우리 공주님.

사나는 그런 르베나를 어떤 식으로도 세나르와 드록의 일에 휘말리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제 다리가 없어진다 해도. 그래서 제가 불구가 되어 버린다 해도.

어린 시절 이미 충분히 힘들었던 그분에게 가해지는 좌절은 더 이상 없어야 했다.

사나는 그렇게 이를 꽉 물며 오랜 시간 매질을 버텨냈다. 하지만 드록은 그런 사나의 반응이 이미 지겹고 무료해진 지 오래.

만약 이때 무엇인가를 고하는 시종의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는 사나를 그냥 죽이고 끝냈을지도 몰랐다.

“드록 왕자님, 르베나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문을 열어드릴까요?”

시종의 말이 넓은 방 안을 울리자 방 안 사람들의 표정이 전혀 다른 색으로 물들어 갔다.

드록의 얼굴에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미소가, 그리고 사나의 얼굴에는… 불길함을 가득 담은 놀라움과 절망이.

* * *

시간의 역행 이전, 열일곱 살이 된 르베나는 심적으로 강하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겁이 많았고 사나와 후벤의 보호 아래 안주하는 어린 계집아이일 뿐이었다.

그날도 르베나는 여느 날처럼 후원에 앉아 꽃을 바라보며 한가로운 감상 따위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르베나에게 처음 보는 시녀가 다급히 달려왔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호기심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고, 공주님! 큰일 났어요, 사나 시녀장께서 큰 실수를 저질러 세, 세나르 왕비님께 매질을 당하고 있어요!”

시녀의 말에 놀란 르베나가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사, 사나가 왕비님께? 왜? 어째서?”

르베나의 말에 시녀가 다급히 말했다.

“저도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미 매질을 많이 당했어요!! 공주님 어서요!!”

시녀의 말에 이리저리 허둥대던 르베나가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후벤하고 사나가 무슨 일이 생겨도 둘의 동행 없이는 움직이지 말랬는데…….’

자리에서 일어서 초조해하며 어쩔 줄 모르는 르베나를 보던 시녀는 그녀를 재촉하며 말했다.

“공주님께서 어서 가서 말려보세요!! 세나르 왕비님은 공주님을 예뻐하시니 말씀을 들어주실지 몰라요!!”

시녀의 말에 흠칫한 르베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왕비님이 날 예뻐한다고?”

선하게 생긴 시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러니까 사나 시녀장님도 보내 주셨죠! 모르셨어요? 사나 시녀장님을 외궁으로 보내고 여기 있던 시녀들을 모두 벌한 게 바로 세나르 왕비님이세요!”

시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르베나가 이내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사나한테 물은 적이 있었다. 세나르 왕비는 어떤 사람이냐고. 그때 사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분은 조금 외롭고 그래서 사랑에 많이 서툰 분이에요… 그러니 미워하지 말아요, 아무도. 우리 공주님은 그냥 이렇게… 사랑받으시면서 웃으면서 자라시면 되는 거예요.”

그날의 대화를 떠올린 르베나에겐 더 이상의 망설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알겠어! 그럼 내가 가서 말려 볼게. 저기 그럼 후벤 경한테 가서 좀 말해 줄래? 후벤 경이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말하라고 했거든.”

르베나의 말에 작은 미소를 지어 보인 시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요! 후벤 경께는 제가 말씀드릴 테니 어서 가 보세요!!”

시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르베나가 허둥지둥 본궁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씩 멀어져가는 르베나의 뒷모습은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르베나의 모습이 멀어질수록 시녀의 선한 미소 역시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시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르베나의 몫으로 차려진 테이블 위의 쿠키를 보더니 냉큼 집어 제 입속으로 넣으며 말했다.

“멍청한 계집이라고 하더니 정말이네.”

좀 전과는 다른 미소로 씩 웃은 시녀는 기사단이 아닌 르베나가 향한 본궁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왕비님 제발이요!”

세나르의 궁에 도착한 이후 르베나는 계속 세나르에게 빌고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사나가 세나르 왕비의 방에 부름을 받고 온 며칠 전을 기점으로 왕비의 보석이 없어졌다 한다. 그리고 그게 오늘 사나의 방에서 나왔다고.

보통 왕가의 물건을 훔친 이는 손을 자르는 게 디오니스의 법도다.

그걸 떠올린 르베나는 왕비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제발… 제발 사나를 구해주세요. 사나는 절대 도둑질할 사람이 아니에요!!”

“그럼 지금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건가요, 공주?”

왕비의 말에 흠칫 놀란 르베나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까 시녀말로는 분명 왕비가 르베나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지금 눈빛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왕비의 말투는 상냥했다. 말투만 들으면 정말 르베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 눈빛은… 마치 저 눈빛은…….

‘맞아… 예전에 날 벌주던 외궁 시녀들 같아.’

르베나는 문득 떠오른 기억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나려는 팔을 문질렀다.

그런 르베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왕비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작고 다정한 음성으로 다시 말하였다.

“이미 저지른 죄에 대하여 무작정 용서를 해 줄 만큼 디오니스 왕궁의 법도는 허술하지 않답니다, 공주. 하지만… 예전부터 종의 벌을 약하게 해주는 방법이 있기는 하지요.”

왕비의 말에 르베나의 붉은 눈이 놀람과 호기심을 가지고 크게 떠졌다.

순간 세나르가 세상 누구보다 자애롭게 웃으며 말하였다.

“주인이 종과 그 벌을 나누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랍니다.”

왕바의 말에 르베나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건 디오니스에서 유일하게 종의 벌을 가볍게 해 주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 세상에 대체 가능한 종을 두고 함께 벌을 받는 주인은 없었다. 특히 왕궁에서는.

하지만… 르베나는 사나에 대해 생각했다.

밀빛 머리, 따뜻한 갈색 눈빛, 언제나 따뜻한 미소. 햇볕 냄새가 나는 품을 가진 사나.

르베나는 왕비를 보며 용기 내어 말했다.

“함께 벌을 받을게요! 벌은… 뭔가요?”

떨리는 붉은 눈을 바라보는 왕비 세나르의 눈에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가 퍼져 나갔다.

사나가 죽고, 르베나의 마력 폭주가 일어나기 사흘 전의 일이었다.

* * *

“들어가시지요.”

금으로 화려하게 음각된 드록의 방문. 그 앞에 서 있던 르베나는 딱딱한 시종의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오래전 회상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시종의 손에 의해 열리는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

방에 들어서 안의 광경을 눈에 담으며 조용히 입술을 깨무는 르베나의 얼굴이 드록의 호박색 눈에 만족스럽게 박혀왔다. 곧 드록은 시종에게 눈길을 주어 방문을 닫게 하고는 짐짓 엄숙한 말투로 물었다.

“르베나, 네가 내 궁에는 무슨 일이지? 얼마 전 일을 사과라도 하려고 온 거냐?”

하지만 르베나는 드록의 말에 답을 하지 않고 사나의 주변만을 살피고 있었다.

단단함이 디오니스 최고라고 알려진 스파나무 가지가 벌써 몇 개째 부러져 널브러져 있는 바닥.

가지에 잔뜩 눌러 묻은 혈흔들.

서 있는 것조차 힘에 겨워 숨을 몰아쉬는 사나.

그런 사나의 얇은 종아리는 사정없이 터져 치맛자락이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외궁의 귀하신 공주님께서 어쩐 일이람?”

순간 드록의 곁에 선 말단 시녀의 목소리가 아주 작게 들려왔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듣지 못했을 정도의 크기.

무심코 그리로 고개를 돌린 르베나의 눈에 한 시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귀여운 얼굴과 새초롬하게 도톰한 입술. 드록의 가까이서 아양을 떨 듯 르베나를 비아냥거리는 순진한 말투.

순간 르베나의 기세가 사나워졌다. 몸속에서 들끓는 마력이 순식간에 르베나의 마음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르베나와 드록의 주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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