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3화 (13/276)

13화

제1장 디오니스 (12)

“하나! 둘!”

차차착.

“열 맞춰- 차렷!”

구령이 힘차게 울려 퍼지는 곳은 기사단장 후벤의 정예기사인 제1기사단의 훈련장.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오후 훈련 시간이 되자 훈련을 하던 기사들은 하나둘 힐끔힐끔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이를 본 후벤이 소리쳤다.

“정신 차리지 못하나!! 곧 있을 건국 기념일에 기사단 전원의 시합이 있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너희 열 명 중 한 명이라도 예선을 탈락하면 열흘간 지옥 훈련이다!”

후벤 경의 말에 모두가 정신을 바짝 차린 듯 얼굴에 굳은 긴장감을 담았다.

지옥 훈련이라니. 지금도 지옥인데. 여기서 어떻게 더 지옥이란 말인가.

그들이 후벤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식은땀을 흘릴 찰나, 어디선가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검은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리고 바지 차림으로 들어선 늘씬한 르베나의 모습과 함께.

훈련장으로 들어선 붉은 눈이 주변을 한번 훑더니 훈련받는 기사들의 옆으로 가 섰다.

“공주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도 멋지십니다. 우리 공주님.”

“공주님처럼 밝은 해가 뜬 아침입니다.”

저마다의 인사를 듣고는 르베나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가지고.

하지만 그녀를 보는 기사단원들의 눈에는 차마 지울 수 없는 감정들이 한 무더기였다.

벌써 7년.

그날의 참혹한 광경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기사단은 이 마르고 연약한 소녀가 그들 앞에 이리 건강하게 서 있는 게 꿈만 같았다.

어느 날부터 후벤 단장과 온 소녀는 매일매일 어마어마한 양의 수련을 해나갔다.

모두가 만류하며 그만하라 하여도 마치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는 것처럼 작은 아이는 모든 순간을 악착같이 버텼다.

그래서 기사들은 모두 생각했다.

그녀에게 드리워졌던 시련을 다시는 겪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그녀를 지키지 못한 우리들의 몫이어야 할 시련을 혼자 감당하시는 거라고.

단순히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때 써먹어야겠단 생각만으로 열심히 하는 르베나와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지만.

어쨌든 그렇게 채색된 르베나의 모습은 그들의 눈에 작은 공주님을 정말 대단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분을 레이디로 둔 본인들은 세상에 둘도 없이 축복받은 기사들이란 생각도 함께.

그런 생각이 모두에게 퍼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그들은 르베나의 수련을 자처해서 돕기 시작했다. 더 이상 훈련을 만류하지 않고, 도울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그리고 모두의 도움을 받은 르베나는 훌륭한 기사로 자라고 있었다.

외모면 외모, 실력이면 실력.

그들의 공주님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멋진 레이디가 되어가고 있다.

다만 르베나 공주님은 무지 차갑고 무관심해 보이긴 했지만.

그들은 그게 모두 르베나가 부끄러움을 숨기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르베나가 더욱 사랑스럽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헤…….”

르베나의 모습을 보는 기사들의 눈에 숨길 수 없는 애정과 자랑스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들의 생각을 전혀 모르는 르베나는 오늘의 훈련을 이어나갈 뿐이었지만.

르베나는 이 얼마 남지 않은 훈련으로 몸에 익은 몇 년간의 감각이 이전으로 돌아갔을 때에도 기억나기만을 바랐다. 그래야 제 눈앞의 모두를 쓸어 버리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테니.

“…유파시드?”

훈련 도중 땀에 젖은 검은 머리칼을 닦아내며 묻는 르베나의 모습에 채 숨기지 못한 대견스러운 표정을 짓던 기사 다한이 말하였다.

“네. 신마전쟁을 승리로 이끈 세츠의 중심, 유파시드 말입니다.”

말을 하는 다한 경이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새 물통을 르베나에게 건네었다.

역시나 자연스럽게 그 물통을 받아든 르베나가 다시 물었다.

“그가 왜 디오니스에 온 거지?”

르베나의 입가에 묻은 물을 보며 자연스레 깨끗한 수건을 건네며 다한이 답했다.

“이제 곧 젠이 제국으로 승격한다는 말이 많습니다. 아마 그 전에 왕국을 돌아보며 점검할 생각이 아닐까 합니다.”

“흠…….”

르베나가 다한에게 건네받은 수건으로 입가를 닦고는 다시 물통을 들어 올렸다.

물이 넘어가는 목울대가 작게 움직인다. 희고 가는 목선이 고와 지나가는 시종들이 꿀꺽 침을 삼키며 바라보았다가는 여기저기서 느껴지는 살기 어린 시선에 금방 정신을 차리고는 재빨리 연무장을 벗어났다.

절대 기사단의 근처에서 르베나 공주를 훔쳐보지 말라는 무언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종들을 죽일 듯 노려보던 이들 중 하나인 다한 경이 언제 그랬냐는 듯 웃으며 르베나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곧 왕국에서 큰 무도회가 있을 예정이라 합니다. 공주님께서도 올해 열일곱 살이 되셨으니 이 기회에 데뷔탕트를 하시는 것이…….”

조심스러운 다한 경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난 르베나가 단호하게 말하였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러고는 뒤도 안 돌아본 채 나무 그늘에서 벗어나 다시 연무장으로 향하는 르베나의 모습을 바라보는 다한 경의 주위로 기사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 다한 경의 표정을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공주님께서 뭐라십니까? 나가시겠답니까? 데뷔탕트를 하시겠대요?”

물어오는 한 기사의 말에 다한 경이 작게 고개를 젓자 모두 일제히 탄식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우리 공주님 모습 자랑하고 싶은데.”

“우리 공주님 데뷔탕트 꼭 죽기 전에 보고 싶었는데…….”

“하… 불쌍한 총단장님. 그거 보시겠다고 온 수도의 의상실을 다 터셨다는데…….”

그렇게 제각기 흩어지는 아쉬움의 소리는 곧 기분 좋게 불어오는 봄바람이 모두 가지고 사라져 버렸다. 훈훈한 바람이 어울리는 봄의 중심이 성큼 다가온 어느 날이었다.

* * *

요즘 디오니스 왕궁의 모든 이들은 매우 분주하다.

바로 곧 제국으로 승격될 젠의 왕이자 세츠들의 중심인 유파시드가 디오니스 왕궁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분주함과 거리가 먼 곳 또한 있었다. 본궁과는 떨어져 있는 르베나의 외궁이 그랬다. 그곳의 젊은 시녀장 사나는 오늘도 여느 날처럼 연무장으로 향하는 르베나에게 무도회 참가에 대해 권했다가 칼 같은 거절의 대답을 듣고 의기소침해졌다.

저렇게 예쁘게 자라신 공주님을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우리 모두의 무관심에도 그분은 이렇게 훌륭하게 자랐다고. 루아나 공주님의 딸은 결코 꺾이지 않았다고. 그분의 맑은 눈을 꼭 닮은 공주님을 보라고.

하지만 본인이 죽어라 거절을 하니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외궁의 시녀장이었다.

“내가 포기하면 안 돼!! 무엇보다 데뷔탕트를 해야 입지도 굳건해지실 테니……!”

굳게 다짐을 외친 사나는 본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무도회에 유파시드가 참여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이에 대한 정보나 얻고자 하였던 것이다.

기사와 마법에 관심이 많으신 공주님이니 제국의 왕이자 유파시드인 그가 참석한다면 마음이 좀 달라지시지 않을까?

그렇게 르베나에 대한 생각을 하며 바삐 걷던 사나의 몸이 누군가에게 부딪힌 것은 그때였다.

“앗……!”

쨍그랑.

사나가 누군가와 부딪힌 순간 그녀의 몸이 뒤로 밀려 넘어졌다. 동시에 상대방의 손에 들린 물건이 떨어져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사나는 제 몸의 아픔도 잊은 채 벌떡 일어나 급히 고개를 숙였다. 넘어진 그녀의 눈에 보인 상대방의 신발은 누가 보아도 귀족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큰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자비로운 용서를…….”

당황하는 그녀의 손이 작게 떨려왔다. 귀족의 보석을 깨트리다니.

크게 질책을 당할 일이었다. 비록 이 길은 시종 시녀들이 자주 사용하는 길이라 왜 귀하신 분이 여기 있는지는 몰랐지만. 순간 젠에서 온 귀하신 분들의 존재가 생각난 사나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하지만 그녀의 염려가 기우라는 듯 머리 위로는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르베나의 시녀장이 아니더냐? 어서 고개를 들거라.”

움찔.

목소리를 들은 사나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생각보다 부드럽고 다정한 상대방의 목소리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던 탓이다.

곧 그녀의 갈색 눈에 상대방의 모습이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아…….

상대방을 보고는 말을 잇지 못하는 사나의 얼굴이 창백했다.

연무장에서 땀을 쏟으며 혼자 훈련을 하는 내내 르베나는 오전의 사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너무 무정하게 내친 것이 맘에 계속 걸렸다.

하지만 데뷔탕트라니.

르베나는 이 삶에 깊이 개입할 생각이 없다. 어차피 그녀는 돌아갈 것이므로.

그러니 데뷔탕트같은 것도 필요 없다. 아니, 이전에서조차 그녀가 스스로 걸은 로드의 길이 그녀의 왕위 즉위식이자 데뷔탕트였다.

어린 소녀들이 예쁜 드레스를 입고 부모님과 가문의 축하를 받으며 하는 데뷔탕트는 예나 지금이나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딱 한 가지.

르베나는 걸리는 것이 있어 계속 오전에 기가 죽어있던 사나의 모습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읏……!”

순간 딴생각을 하며 검을 내리치는 바람에 르베나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르베나의 검이 눈앞에 있는 모형을 지나 허공을 가르며 땅에 처박혔다. 그리고 그 순간 급한 발걸음이 연무장을 가로질러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빗나간 검으로 인한 어깨 통증을 느낄 새도 없이 르베나의 얼굴이 다가오는 누군가를 향하였다.

찌릿하게 기분 나쁜 어깨의 통증이 저 발걸음 소리에 귀 기울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 일상적이지 않은 소리에.

보통 기사들의 연습 시간에는 그 누구도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간혹 격한 훈련 중에 뭣 모르고 출입하던 이가 다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근데 다른 이도 아니고 르베나 궁의 시녀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이를 본 제1기사단 단장인 다한 경이 모두의 훈련을 즉각 중지시켰다.

그리고 지난번 드록에게 잡혀 곤란을 겪었던 시녀, 루는 급히 르베나에게 작은 발걸음을 달렸다.

“고, 공주님 허헉…….”

급히 숨을 몰아쉬는 루를 보며 르베나는 루를 다그치지 않고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평소 친분이 있지는 않아도 르베나는 자신의 외궁에서 일하는 모든 시종 시녀의 이름은 물론 성격도 잘 알고 있었다. 루라고 불리는 이 시녀는 결코 이유 없이 금지된 연무장에 들어설 이가 아니었다.

잠시 숨을 고른 루가 급박한 얼굴로 르베나에게 말했다.

“공주님 어서 본궁으로 가 주세요!! 지금 사나, 사나 시녀장님이……!”

이어진 루의 말에 르베나의 얼굴은 삽시간에 굳어지고 말았다.

오후 내내 마음에 걸리던 것. 그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열일곱 살. 첫봄이 오고 아직 보름이 뜨기 전.

그래, 시간의 역행 이전, 딱 이때쯤.

사나는 죽었다.

* * *

덜덜 떨리는 두 손을 꼬옥 마주 잡은 사나가 눈앞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창백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겁에 질려있었다.

동시에 바닥에 무참히 나뒹구는 보석 조각을 확인한 사나가 곧바로 무릎을 꿇고 빌었다.

“제, 제발 아량을 베풀어 주세요. 제발.”

그런 사나의 모습을 본 지나가던 시종 시녀들이 차마 보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사나의 앞에 선 이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달래었다.

“뭘 그렇게까지 빌고 그래. 내가 그렇게 자비 없는 사람으로 보였나?”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울수록, 그의 화려한 입매가 더 큰 곡선을 그릴수록.

사나의 온몸에서는 피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얼굴을 들어 보라니까. 응?”

이내 그의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지자 사나가 떨리는 갈색 눈을 들어 겨우 그를 바라보았다.

오후의 석양이 비친 그의 얼굴은 여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그리고 행복해 보였다.

디오니스의 제1 왕위 계승자. 드록 드 디오니스.

그가 여느 때보다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 사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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