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2화 (12/276)

12화

제1장 디오니스 (11)

지난 7년.

시간의 역행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연구에 몰두하던 르베나는 이렇다 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하지만 그동안 르베나는 결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딱 두 가지, 그녀는 스스로에게 변화를 일으키기로 했다.

첫 번째는 바로 검술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학대사건 이후 르베나는 그날의 치욕을 곱씹으며 제 몸을 지킬 수단을 강구했다. 하지만 끝없던 마력으로 무서운 것이 없던 르베나는 시간을 돌아오며 그 모든 마력을 잃었다. 그 덕에 시녀 따위에게 맞아 졸도하는 치욕까지 당했으며 못 먹어 바짝 마른 몸은 걸핏하면 휘청대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르베나는 지겹게도 저를 찾아오는 후벤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언제나 저를 모른척하거나 짜증만 내는 르베나가 저를 지그시 보자 후벤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미소가 번져갔다.

그때 르베나가 후벤에게 말했다.

“검을 배우고 싶다.”

지어지던 후벤의 미소가 일순 멈춰지며 순식간에 사그라든 것은 순간이었다.

“검이라뇨? 그 연약한 몸으로 어찌… 절대 안 됩니다!”

다소 강한 후벤의 반응에 사실 르베나는 조금 당황했다. 르베나의 말이라면 뭐든 다 할 정도의 바보 같은 후벤이 이렇게 단칼에 거절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르베나의 표정은 후벤이 보기에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래서 후벤은 저를 줄곧 무시만 하던 르베나가 처음으로 한 말을 거절당한 것에 충격을 먹었다 생각했다. 그제야 후벤이 다소 누그러진 기세로 말하였다.

“레이디를 지킬 기사단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가 공주님께 가해지는 어떠한 위해도 용납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여린 손에 차가운 쇳덩이를 쥐지 마십시오.”

후벤의 말에 르베나는 그 모르게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바보 같은 작자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걸 가지고 길게 말싸움을 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먹은 르베나가 후벤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래서 날 오 년이나 그렇게 방치한 건가? 말해 봐. 내가 또 그렇게 방치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지?”

그 말에 후벤의 입이 딱 다물렸다.

“난 이 궁안의 누구도 믿지 않는다. 오로지 나만을 믿을 뿐이다. 그러니 난 나를 지킬 수단이 필요하다. 만약 네가 지도를 거절한다면 난 이 궁을 나가서라도, 그 누구에게라도 배움을 청하겠다.”

어린 르베나를 모른척했던 지난 시간.

그건 후벤과 사나에게는 어떠한 변명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쓰디쓴 기억이었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소녀를 어떻게 그렇게 모른 척 할 수 있었는지. 마법에 당했다는 걸 알 리 없는 후벤은 매일 르베나를 볼 때마다 자책하며 괴로워했다.

물론 감시를 위해 세나르 궁에서 일했던 사나는 르베나를 잊지는 않았지만 학대라는 일을 알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그래서 서운하지 않았다. 르베나가 아무리 저희를 밀어내도, 싸늘한 얼굴과 말로 상처를 건드려도.

르베나의 아픈 시간에 가지는 책임을 느꼈기에.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단지 싸늘하기만 하다고 생각한 소녀는 그냥 내버려 두기엔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그녀는 사나와 저를 강박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쳐내면서도 그나 사나가 다치거나 세나르 왕비 궁 사람들에게 무시라도 당할라치면 그 붉은 눈을 무서운 기세로 일렁거리며 화를 내는 듯 보였다.

하얀 볼이 붉게 달아오르고 붉은 눈동자에 검은빛이 일렁거릴 정도의 분노를 느끼면서도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려는 르베나를 보면, 그녀가 그들을 얼마나 아끼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뿐.

르베나는 꽤 깊은 감정을 그들에게 갖고 있는 듯하면서도 절대로 그들에게 다가오지도 않았고 그들의 접근은 허락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후벤은 이번에도 알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상처를 건드린 저 소녀가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을지.

곤란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제 입술을 깨무는 저 습관을 사나와 저는 어느새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곧 나지막이 한숨을 내쉰 후벤이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자꾸 깨물어 아프게 붉어진 르베나의 입술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 한다면 하실 분이니 어쩔 수 없군요. 다른 사람 손에 맡기느니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하지만 한번 시작한다고 하신 이상… 배려는 없습니다, 공주님.”

순순한 후벤의 허락에 르베나가 표정을 감추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그딴 것을 바라지 않는다.”

제법 싸늘하게 답한 르베나는 곧바로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말한 것과 달리 제 얼굴에 저도 모르는 만족스러움이 퍼지고 있었다는 걸 르베나는 몰랐다.

그리고 르베나에게 들킬까 싶어 그 얼굴을 마냥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후벤의 얼굴에도 조심스러운 미소가 점점이 번지고 있었다.

그렇게 르베나는 열한 살부터 지금까지 기사단에서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았다. 심지어 그녀 본인도 몰랐지만 르베나는 검술에도 꽤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이는 기사단장으로서의 후벤을 자극하며 르베나가 더 성장해 나가는 밑거름이 되었다.

두 번째 변화는 남몰래 마력을 수련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르베나는 학대에 대한 모든 일이 일단락되고 제 방에 틀어박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분명 저를 붙잡던 시녀 두사를 향해 살기를 흘릴 때 몸 안에서 미약하게나마 반응하는 마력을 느꼈던 것이다. 그건 마치 무한한 어둠 속에 빛나는 실낱같은 힘이었지만 저의 몸 가득 차 있던 마력을 언제나 충만하게 느끼던 르베나가 그걸 놓칠 리 없었다.

그리고 미약한 마력을 느낌과 동시에 살기에 마력을 얹자 두사는 숨이 막힌 듯 헐떡거렸었다.

하지만 그뿐, 이후 마력은 마치 꺼진 후의 불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때를 떠올려 보자.”

르베나는 그날 이후 매일 제 몸속에 숨어 있는 마력을 찾아내고 끄집어내고 다스리는 훈련을 했다. 없는 마력을 찾아내고 다듬는 일은 어려웠다.

심지어 시간의 역행 이전 분노로 인해 폭주한 마력으로 베이라가 된 그녀에게 처음부터 차분히 시작하는 마법은 미지의 세계일 뿐이었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 일을 단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5년이 지난 어느 날 밤, 여느 때와 같이 모두가 잠든 시간, 방에 앉아 있던 르베나는 평소처럼 몸 안을 돌아다니는 마력들을 그러모았다.

그동안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마력은 이제 안정적으로 어느 수준 이상 르베나의 몸속에서 쉽게 느껴졌다.

하지만 억지로 끄집어내어진 마력은 르베나의 몸을 마음대로 활기치고 다니며 몸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녔다. 억제되지 않는 힘이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 르베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르베나는 더 마음을 집중하며 다스렸다. 마력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마력을 통해 힘을 구현할 때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얼마나 훌륭한 베이라인지를 보려면 그가 얼마나 자유자제로 제 몸의 마력을 다스리나 보면 되었다.

그리고 르베나는… 타고난 베이라였다!

우우웅--.

주변의 공간이 어떠한 힘에 공명하듯 작은 진동을 만들어 냈다.

툭.

티 하나 없이 새하얀 르베나의 얼굴에서 한 방울의 땀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신호인 듯 공간에 퍼져 있는 진동이 그 힘을 더해 갔다.

어지럽게 널려 들썩들썩하던 종잇조각들이 더 이상 못 견디겠다는 듯 날려 어지럽게 흩어졌다.

방 안에 놓여 있는 화이트 컬러의 심플한 침대, 고급스럽지만 어떠한 무늬도 일체 없는 옷장이 진동하며 덜그락, 덜그락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창문 옆의 커튼은 매서운 바람이 들이닥친 듯 제 모습을 풀어헤쳐 팔락팔락 날리기 시작했고 닫혀 있는 창문의 유리는 마치 누군가 거세게 흔드는 것처럼 쩌걱쩌걱 소리를 내었다.

“으읏…….”

순간 르베나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르베나가 다시 찌푸린 미간을 풀어내고 깊은숨을 들이쉬는 순간……!

방 안의 모든 진동이, 모든 바람이 마치 이전까지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한순간에 없어졌다.

덜커덩거리던 가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조용히 제 자리를 지켰고 팔락팔락 풀어헤쳐져 흩날리던 커튼은 다시 일자로 가지런히 내려졌으며 창문의 유리 역시 조용했다.

단지 르베나의 뒤에 두서없이 흩어져있는 꽤 많은 양의 종이들과 쩍쩍 금이 가 있는 창문의 유리들만이 방금 일어난 일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뿐이었다.

그리고.

살며시 떠진 르베나의 붉은 눈동자에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르베나는 그 수많은 감정들을 재빠르게 갈무리했다.

여리여리 청순할 것만 같은 가녀린 선에, 매혹적이고 압도적인 외모의 얼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그녀가 눈을 뜬 것만으로 마치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더없이 차가운, 그러나 더없이 뜨거운 붉은 눈.

그리고 마침내 그 눈이 호선을 그리며 만약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당장에 심장마비로 죽어 버릴 법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됐다.”

방 안으로 퍼져나가는 르베나의 목소리가 마치 한여름밤의 꿈처럼 흩어져 갔다.

아찔한 그녀의 미소와 함께.

그렇게 2년 전 어느 날, 르베나는 스무 살 정도에야 갖게 되었던 마력 컨트롤 능력을 열다섯 살의 나이에 되찾을 수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밤이었다.

* * *

햇볕이 좋은 봄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르베나는 요즘 부쩍 즐겨 찾게 된 외궁 화원에 앉아 있었다.

짙고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흩날리고 하얀 피부에 자리 잡은 매혹적인 이목구비가 지나가던 시녀 시종들의 눈길을 속절없이 붙잡았다.

그리고 어떤 보석보다도 빛나는 눈. 저 눈을 왜 그렇게 불길하게 생각했나 의아할 정도로 르베나의 눈은 매혹적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저 눈이 나를 보고 웃는다면 얼마나 아찔할까.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생각도 모른 채 제 손을 만족스레 바라보던 르베나가 몸 안에 휘몰아치는 마력을 느껴 보았다.

언제 느껴도 변함없이 만족스러운 이 기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지켜주는 힘, 마력. 그녀는 마력이 있음으로 존재하였고, 마력이 없는 르베나는 르베나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르베나는 다시 돌아갈 날만을 기다렸다.

벌써 열일곱.

이 시간으로 온 이후 7년을 더 살았지만 르베나는 여기서 보낸 시간보다 다시 돌아갈 이전의 삶이 그리웠다. 모든 걸 이룩했던 시절 자신의 모습이 매일매일 사무치게 그리웠다.

모두의 위에 군림했던 그녀만의 왕좌가.

다만 한 가지.

“공주님,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화원에 앉아있는 르베나를 보며 따뜻하게 미소 짓는 사나가 보였다.

르베나가 돌아가고 싶은 이전의 시간에, 그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르베나는 지난 몇 년간 끊임없이 유혹에 시달렸다.

사나가 없는 그때로 정말 돌아가고 싶은 걸까. 지금을 그냥 살아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르베나는 그 모든 유혹을 이겨냈다. 이전의 삶이야말로 르베나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낸 것이었다.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 그녀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자리였고 왕좌였다.

심지어 그녀는 유파시드를 비롯한 다른 왕국들과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다. 돌아가야 했다.

돌아가서 전쟁의 결말을 지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곳에 돌아가 저를 이곳으로 돌려보낸 이에게 그 대가를 처절하게 갚아 주어야 했다. 르베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 사람. 받은 것은 꼭 되돌려 주는 사람.

이곳에서의 몇 년이 오로지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이었다면 이전의 삶이야말로 그녀에 의한, 그녀만을 위한 삶이었다.

그러니 이곳에서의 삶은 그녀의 삶이 아니었다. 이내 눈앞에서 웃는 사나에게서 눈을 뗀 르베나는 언제나처럼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마치 사나를 작정이라도 한 듯 무시하는 태도였다. 하지만 그런 르베나를 본 사나는 여전히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작게 말하였다.

“…그렇게 차갑게 구셔도 공주님 마음 다 알아요.”

예민한 르베나의 청각에 들려오는 사나의 말에도 르베나는 눈을 돌리지 않았다.

단지 계속 제 옆을 지키는 사나의 존재가 거슬려 읽던 책을 덮고 조용히 일어날 뿐이었다.

“공주님…….”

조그맣게 저를 부르는 사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르베나는 무거운 다리를 계속 움직였다.

얼마 전 르베나는 방법을 찾았다. 이전으로 돌아갈 방법을.

‘다니아…….’

디오니스의 왕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 무기.

그리고 시간의 역행 이전 유일하게 그 비밀을 푼 디오니스의 왕이 르베나였다.

처음 디오니스를 건국한 왕이 드래곤의 축복으로 얻은 무기.

디오니스의 영원한 강림을 기원한 드래곤의 축복.

그 축복인 ‘다니아’는 시전자의 소원을 무엇이든 단 하나 들어준다고 한다.

그 소원에는 제한이 없되, 한 번 사용한 ‘다니아’는 그 힘을 잃는다.

그랬다. 방법은 찾았다. 어찌어찌 기억을 더듬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주문도 기억해 냈다.

그리고 르베나는 얼추 이전과 비슷한 정도의 마력도 회복해 놓았다.

이제 남은 것은 언제고 마음의 준비가 되었을 때 주문을 외우면 되는 것이다.

사나의 목소리는, 사나의 다정한 눈은, 사나의 포근한 냄새는.

이곳에 잘 남겨두면……. 그러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 * *

르베나가 있는 외궁과는 떨어진 디오니스의 본궁 앞, 불어오는 바람에 금빛이 언뜻언뜻 섞인 은발의 머리가 결 좋게 흩날린다.

짙은 푸른색 눈빛을 마주하는 이들의 소리 없는 감탄이 들려오고, 그 주인공, 루드바하가 듣기 좋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젠의 중심이며 세츠의 중심인 유파시드, 루드바하가 디오니스의 여러분을 뵙습니다.”

그러자 루드바하의 앞에 선 디오니스의 수많은 귀족이 이내 고개를 숙이며 답하였다.

“제국의 중심이 되실 유파시드에게, 디오니스의 영광이 함께하길.”

이내 그림 같은 루드바하의 얼굴에 보기 좋은 미소가 진하게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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