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제1장 디오니스 (10)
“뭐야, 시녀 주제에 감히 나를 거부하겠다는 것이냐?”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기를 미루어놓고 외궁 앞 화원에 걸터앉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던 르베나의 귀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닙니다. 왕자님, 저, 저는 단지…….”
실랑이가 벌어지는 곳으로 르베나의 붉은 눈이 스르륵 향하였다.
외궁의 입구, 그곳에 이제 곧 성인식을 앞둔 디오니스의 머저리 왕자 드록이 있었다.
드록은 제 어미를 닮은 덕에 빼어난 외모를 지녔으나 평소 행동거지와 자주 짓는 짜증스러운 표정 때문인지 그를 미남으로 생각하는 건 그가 예의 있게 대해 주는 타 왕국 공주들이나 고위 귀족가의 딸들 뿐이었다.
그의 화려한 금발과 꿀같이 아름다운 눈에도 불구하고 왕궁 사람들의 눈에는 한심하게 사고나 치고 다니는 불안한 왕위 계승자일 뿐인 것이다.
보통 디오니스에서는 왕의 나이가 젊다 하더라도, 후계자가 성인식을 치르면 왕위 계승을 준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후계자의 성인식을 통해 은퇴를 앞둔 왕은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의 왕위를 이은 자식이 정사에 익숙해지도록 뒤에서 지지하며 도와주는 역할을 하였다.
후계자의 자질에 따라 짧으면 몇 개월, 길게는 십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왕위 계승이 이어진 역사가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왕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급히 왕위를 계승받아 근본 없는 폭군이 여러 번 나왔던 디오니스 왕가 나름의 지혜라면 지혜였다.
그리고 곧 성인식을 앞둔 드록의 손에는 외궁 시녀로 보이는 한 사람의 손목이 붙잡혀 있었다.
“내가 너를 잡아먹는다 하였느냐? 그저 날이 좋아 본궁 구경이나 좀 시켜 준다 하는데!”
드록의 억지스러운 주장에 시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벌써 몇 명인지 몰랐다.
이런저런 드록의 핑계로 본궁에 간다고 갔던 시녀들이 온통 눈물 바람으로 돌아온 것이.
그녀들은 모두 무슨 일을 당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깔끔한 시녀복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고 누가 물어도 서러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때로는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물 바람으로 몇 날 며칠을 지새다 갑자기 종적을 감추기도 하였고, 죽은 채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렇게 손버릇이 안 좋은 드록에게 나쁜 일을 당하고 있다는 시녀들의 소문이 벌써 온 궁을 쓸었다. 그리고 드록은 유독 어리고 순종적인 시녀들만을 골라 이 같은 일을 벌이고 있었으며, 성인식이 다가올수록 그 정도가 빈번해졌다.
하지만 상대는 이 디오니스의 왕자이자 차기 왕으로 지목되는 드록 왕자였다. 감히 그의 손길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르베나의 외궁에서 일하는 시녀 루는 이번에 자기 차례가 왔음을 직감했다.
손을 옥죄는 드록의 손아귀 힘이 강해지고 버티던 발이 힘없이 땅에서 떨어졌다.
처음 궁에 들어온 시녀들이 꿈꾸듯 바라보는 화려한 외모의 왕자가 바로 드록이었지만, 그의 성정이 얼마나 잔인하고 못됐는지 아는 루는 그저 이 순간이 무섭고 두려울 뿐이었다.
결국 루는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끌려가며 곧 제 앞에 펼쳐질 상상하기도 싫은 일들을 떠올렸다.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 손 놓으시죠.”
차갑고 선연한 음성이 시녀 루의 귓가에 들려오기 전까지는.
덜덜 떨며 이미 아는 목소리의 주인을 담는 루의 눈에 검은 머리와 붉은 눈의 제 주인, 르베나가 보였다.
“뭐가 어째?”
르베나의 목소리를 들은 드록이 여전히 시녀의 손을 강한 힘으로 붙잡고는 말하였다.
드록의 표정은 더없이 사납게 구겨져 있었다.
“재수 없는 마녀 주제에. 어디 감히 내 일에 끼어드는 거지?”
악의가 잔뜩 담긴 드록의 말에도 르베나의 붉은 시선은 잡혀있는 루의 손목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내, 그들의 곁으로 다가온 르베나의 손이 시녀 루의 손을 붙들고 있는 드록에게로 향하였다.
르베나는 제 손보다 반절은 더 큰 드록의 손을 붙잡았다.
이를 본 드록은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아하하 이제 보니 네년이 내 손을 잡고 싶었구나? 한데 이를 어쩌지? 난 더럽고 재수없는 마녀의 손 따위는 잡고 싶지이… 악!!”
르베나를 모욕하는 말을 하던 드록이 갑자기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고는 곧장 시녀의 손에서 제 손을 떼고는 공기 중에 마구 흔들기 시작했다.
마치 아주 뜨거운 것에 데인 사람처럼.
“악! 아악! 저년이, 저년이 내 손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아아악!!”
짜증스럽게 제 손을 연신 흔들며 소리치는 드록의 모습에 모두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너무도 가늘어 곧 부러질 것 같은 저 공주님의 손이 저 재수없는 손 좀 만졌기로 저렇게 아프다고 하는 건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드록이 태연한 얼굴로 서 있는 르베나를 보고는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재수 없는 계집!! 닿는 것만으로 손이 이렇게 아릴 지경이라니! 네년의 독기가 물이 올랐구나!!”
하지만 르베나는 드록의 말에 반응하지 않은 채 제가 할 말만을 조용히 내뱉었다.
“제 궁의 시녀들을 건드리지 마십시오.”
르베나의 말에 순간 기가 막힌다는 듯 미간을 구긴 드록의 눈이 르베나를 향했다. 정확히 말하면 르베나의 뒤에 숨어 몸을 가리고 있는 시녀를.
“나는 곧 성년식을 치른다. 그렇게 되면 이 궁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란 말이다! 그런 내가 내 것을 미리 좀 취하겠다는데 왜 네년이 나서는 것이냐! 감히!!”
본심을 드러내는 드록의 말에 르베나의 얼굴에는 싸늘한 조소가 어렸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시는군요. 이는 디오니스 왕국이 아주 미개했을 때의 왕들에게나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로하데스 왕께서 군림하실 때, 시녀장은 귀족 가문과 혼인이 가능하다는 법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랬다. 몇 대 전 디오니스의 성군으로 칭송받던 왕. 뛰어난 베이라이자 성군이었던 로하데스 왕은 시녀장과 사랑에 빠진 제 친우를 위해 이 같은 법을 제정하였다.
그 법을 통해 시녀와 결혼한 친우는 왕국 최고의 공작 가문이 되었으며 그 가문은 로하데스 왕의 살아생전 모든 충의를 다해 왕을 모셨고, 로하데스 가문의 안주인이 된 그녀는 성심을 다해 왕비에게 조력하였다.
이는 디오니스 왕가의 모두가 전해 듣는 옛날이야기였고 이 이야기의 요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르베나는 이 순간 이 같은 기본조차 모르는 멍청이가 이 나라의 왕세자라는 것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그걸 모르는 바보는 이 디오니스에 없다! 너만 아는 것처럼 잘난 체하지 마! 게다가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 저 아이가 시녀장이냐?”
콧방귀를 뀌며 드록은 뻔뻔하게 입을 벌렸다.
“저건 그저 네년 궁의 말단 시녀일 뿐이지. 게다가 나는 디오니스의 왕법을 준수하는 차기 왕이다. 시녀장은 건드리지 않아!!”
드록이 말을 하며 제법 당당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하지만 눈을 마주친 다들 눈을 돌리기 일쑤였다. 괜한 불통이 제게 튈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그의 당당함을 본 르베나만이 기가 막혀 그에게 조금 더 친절히 가르침을 주고자 하였다.
물론 진실을 강조하면서.
“하… 정말 머리가 안 좋으시군요. 모든 시녀는 잠재적으로 시녀장이 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왕법에 준수한다면 그녀들을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이 드록의 얼굴로 향했다.
“또한 왕이라 하여 그녀들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왕뿐만 아니라 평민들도 아는 상식적인 일입니다. 동의할 의사가 없는 여성을 강제로 취하는 행동은 개새끼도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말을 하는 르베나의 표정은 마치 제 앞의 드록을 개만도 못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듯하였다.
아니, 차라리 개가 낫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드록이 분노로 벌개진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달려온 외궁의 시녀시 종들이 방금 제가 잡아챘던 계집을 둥그렇게 보호하듯 싸고 있었다. 동시에 마치 저를 세기의 범죄자를 보듯 노려보고 있었다.
“이, 이… 새끼들이…….”
이에 분노에 가득 찬 드록이 그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비단 제 궁의 시녀뿐만이 아닙니다. 만약 어디에서든 한 번 더 상대의 동의 없이 시녀들을 끌고 갔단 얘기가 들리면… 귀족회의에 정식으로 해당 건을 상정하겠습니다.”
순간 분노로 말아 쥔 드록의 주먹이 떨렸다.
보통 왕족이 품위 없는 행동을 할 경우 유일하게 이를 징계할 수 있는 권리는 귀족들에게 있었다. 귀족이나 같은 왕족이 안건을 상정하면 이에 대해 귀족회의를 하게 되고 처벌 유무가 결정된다.
그리고 모든 회의 과정을 듣고 처벌을 받아들일지 말지 최종적인 결정을 하는 건 왕의 권리이자 의무였다.
비록 제노스 왕은 문제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내막을 캐묻고 다니며 뜻을 펼치는 왕은 아니었지만, 르베나의 학대 일과 마찬가지로 의롭지 못한 일에 직면할 때는 필요한 결단을 내릴 줄 아는 이었다.
이 같은 생각들이 떠오르자 드록은 새삼 저 태생도 천한 계집애가 귀족회의에 의견을 상정할 수 있는 공주라는 것에, 또 그 뒤에 후벤 후작가가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동시에 이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는 르베나의 존재가 새삼 미치도록 싫어졌다.
턱이 으스러질 듯 악 물은 드록이 제 옆에 시립해 있던 기사의 검을 뽑아낸 것은 그때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르베나를 베어 버릴 듯 사정없이 검을 내려그었다.
챙.
하지만 호기롭게 빼어 든 드록의 칼은 목표에 채 닿기도 전, 힘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딱히 그의 검을 막은 것도 없건만 갑자기 뭔가에 부딪힌 듯 검을 떨구는 드록의 시선이 하염없이 떨려왔다. 눈앞의 그녀, 르베나를 보면서.
칠흑 같은 검은 머리에 선명한 붉은 눈.
인형같이 예쁘기만 한 얼굴의 계집.
그곳에 담긴 지독한 무표정.
그리고 그녀에게 닿지 못한 제 검. 순간 드록이 겁먹은 표정으로 르베나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뭐, 뭐야 이 마녀……! 무슨 수를 쓴 거냐!!”
하지만 그런 드록을 보는 수많은 시종시녀들의 눈에는 의문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아니, 아까는 공주님이 저 갸날픈 손으로 지 손을 좀 잡았다고 세상 아프다는 듯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이번에는 공주님을 베어낼 듯 칼을 내지르다 혼자 칼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공주님한테 마녀라며 소리를 지른다.
이쯤 되면 드록 왕자가 실성한 게 아닌가 싶었다.
반면 주변 사람들의 생각을 알 리 없는 드록의 온몸엔 지금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아까 제 손을 잡아챈 저 계집애의 힘은 드록이 경험한 어떤 기사보다도 셌다.
아니, 힘이 셌다기보다 르베나의 손이 닿는 순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는 표현이 더 정확했다.
그리고 지금, 솟구치는 분노에 저년의 머리카락이라도 잘라 겁을 주려 하였더니 채 머리카락에 닿기도 전, 매서운 힘이 제 칼을 튕겨냈다.
이건 마치… 책으로만 보던 베이라나 세츠들의 방어술 같았다.
‘베이라나… 세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방금 본인이 겪은 일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상기하며 치를 떠는 드록의 눈이 순간 르베나의 눈과 마주쳤다. 정확히 말하면 저를 빤히 관찰하듯 보던 그 눈과.
순간 르베나가 그에게 차분한 어조로 달래듯 말했다.
“오늘 왕자님의 상태가 안 좋으신 듯하니 이쯤에서 그만하시지요.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순간 르베나의 붉은 눈이 드록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는 듯한 소름이 돋아왔다.
동시에 알 수 없는 기운이 드록의 목을 죄어오며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당황하며 제 목을 감싸 쥐는 드록에게 르베나가 천천히 다가섰다. 그러고는 조금 전과는 다른 아주 싸늘하고 건조한 목소리로 그에게만 들릴듯 속삭였다.
“마녀의 것에는 절대 손대지 마십시오… 오래 살고 싶다면.”
말을 마친 르베나가 곧바로 몸을 돌리기 무섭게 드록이 바닥에 무릎을 꿇더니 켁켁거리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드록의 시종들과 기사들이 얼른 드록에게 다가가며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아무래도 오늘 제 왕자님의 상태가 심히 좋지 않은 듯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드록의 모습을 하찮다는 듯 바라본 르베나가 뒤로 돌아서는 여전히 사람들의 사이에서 벌벌 떠는 시녀에게 다가갔다. 르베나의 붉은 눈이 드록에게 잡힌 시녀의 가는 손목을 향했다가는 다시 시녀, 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리고 네가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상대가 누구든 일단 죽을힘을 다해 때리고 도망가라. 그게 안 되면 도와달라고 죽을힘을 다해 소리를 쳐. 그러고 나서 뒷일이 걱정된다면… 나를 찾아.”
시녀 루가 제 말을 알아들었는지 살핀 르베나가 루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다시 외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거우면서도 시원한 우드 향이 르베나가 스치는 공기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녀의 늘씬한 실루엣이 점점 작아질수록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시녀 루의 얼굴은 더없이 붉게 물들어갔다.
“…하… 멋있어…….”
드록에게서 멀어져 외궁의 화원으로 돌아온 르베나가 풀썩 테이블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가만히 제 손을 들여다보았다.
마력.
방금 드록의 손을 때리고 칼날을 후려친 힘은 모두 그녀의 마력이었다.
“마력… 내… 마력…….”
제 손을 가만히 바라보며 중얼거린 르베라의 입가에 누구도 알아보기 힘든 미소가 작게 그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