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10화 (10/276)

10화

제1장 디오니스 (9)

순간 르베나를 제약하는 모든 고리들은 속절없이 풀어져 버렸다.

언제나 고여 있던 몸 안의 힘이 폭발하듯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졌다. 검붉은 힘은 주변의 모든 것을 빨아들여 이윽고 큰 회오리 모양을 그려냈다.

더욱 크게 폭사하며 뻗어나가는 그 힘에 드록과 베이라의 얼굴이, 손과 발이 그리고 몸이 처절한 비명과 함께 곧 점이 되어 사라져 갔다.

그날, 드록의 곁에 있던 세나르의 사람 모두가 더 이상 사람의 형체가 아니게 될 때까지 르베나의 힘은 쉴 새 없이 휘몰아쳤다. 그리고 눈물과 함께 번져가는 그녀의 미소도 멈출 줄 몰랐다.

‘그만해… 제발… 멈춰! 분노에 먹히지 마!!’

차마 꿈속의 장면을 더는 볼 수 없는 르베나가 외쳤지만 꿈속 르베나에겐 닿지 않았다.

다만 눈앞의 이들이 모두 사라지자 본궁으로 시선을 돌린 꿈속 르베나의 앞에서는 검붉은 핏빛 회오리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마치 전설 속의 드래곤이 승천하는 것처럼 검붉은 회오리는 점점 하늘로 높이 뻗어 올라갔다. 그리고 르베나의 붉은 눈에서는 핏빛과는 어울리지 않는 맑고 투명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그건 더없는 공허함이기도 했고, 사나와 함께 무언가를 하나 더 잃어버린 것 같은 지독한 상실감이기도 했다.

툭. 투둑.

그날, 열일곱 살의 르베나는 본궁으로 걸음을 옮겨 그곳에 존재하는 모든 세나르의 궁인들을 말살했고, 세나르 역시 마력의 폭풍에 가두어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그 시간 내내 르베나의 얼굴에는 지독하리만큼 강한 공허와 슬픔이 담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동시에 과거의 그날,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베이라들은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 누구보다 강한 베이라가 디오니스에 탄생했다는 사실을.

시간의 역행 전, 르베나의 마력이 처음으로 폭주한 날이었다.

* * *

조용히 눈을 뜬 르베나의 눈에서 연신 뜨거운 눈물들이 하염없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는 환한 방 안은 사나 또한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조용했다.

흐르는 눈물을 채 닦지도 않은 어린 르베나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소리만이 방 안 유일한 기척이었다.

“그래… 잘… 기억할게. 잊지도 않을게.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흑… 어떤 왕이었는지… 으흑… 그러니 사나… 후벤… 너희를 지키지 못했고, 또 너희를 버리기까지 했던… 어리석은 나에게서… 도망가, 제발…….”

누군가에게 닿지 못한 무거운 진심만이 환한 한낮의 방안을 외로이 떠도는 어느 봄날이었다.

* * *

왕국력 919년.

화려함과 순백의 색으로 점철된 궁.

그 어떤 화려함이 와도 감히 저를 빛낼 수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순백의 색이 와도 감히 저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보는 순간 모든 이를 압도할 만큼 거대하고 깨끗한, 하지만 고급스런 화려함이 공존하는 성.

신마전쟁을 신력의 승리로 끝내고 이제는 제국으로의 격상을 눈앞에 두고 있는 젠 왕국.

그중 가장 단조로우며 깔끔한 방에 자리 잡은 한 인영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큰 키에 빼곡하게 잡혀있는 근육들은 그가 오랜 시간 훈련으로 다져진 근사한 몸의 주인임을 암시했다.

화려한 느낌을 주는 결 좋은 은발에는 빛의 반사에 따라 백색과 같은 밝은 금빛이 언뜻언뜻 보이는 듯했다. 시리도록 잘생긴 이목구비는 더없이 차가운 표정과 함께 그에게 시선을 뗄 수 없게 하였다. 심연의 바다처럼 짙은 푸른색으로 빛나는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어렸다.

“…동쪽… 인가.”

그의 듣기 좋은 목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벌컥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녹색 머리에 녹색 눈빛을 가진, 다소 짓궂게 생긴 기사 차림의 청년이 들어왔다.

“어이, 폐하 안 나갈 거야?”

폐하라 부르면서도 반말이나 찍찍 날리는 이, 라옹을 아래위로 훑은 그가 라옹을 질책하듯 바라보았다. 그 눈에 슬쩍 민망한 표정을 짓던 라옹이 말했다.

“아니… 노크를 하려고 했어… 분명 그랬어… 문을 열기 2초 전까지는… 크흠…….”

아무리 왕국의 예법에 대해 말하고 말해도 머리 다친 붕어처럼 금방 까먹고 말아 버리는 라웅을 바라보던 그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라옹을 따라 들어온 푸른 머리의 이지적인 외모를 가진 이, 유안이 말하였다.

“차라리 트롤을 데려다 놓고 교육을 시키는 게 빠를 겁니다.”

들려온 차가운 말에 피식 웃은 그의 눈이 부드럽게 유안을 향하였다.

그러자 그의 짙은 푸른빛의 눈을 본 유안이 왕궁의 예법에 걸맞은 완벽한 모습으로 인사를 했다.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자, 젠의 중심이며 세츠의 중심이신 유파시드에게 언제나 신의 안배가 함께하시길.”

완벽한 유안의 인사를 보던 라웅이 입술을 삐죽였다.

자신의 모습을 잠시 곁눈질한 유안이 피식 작게 웃는 것 또한 놓치지 않으며.

“그만 됐다, 우리 사이에.”

그들의 은근한 신경전을 차단한 루드바하, 아니 이 세상 오직 단 하나의 존재, 젠의 유파시드는 더없이 차갑기만 한 입술 끝에 자잘한 미소를 그려 넣었다.

그의 더없이 유치하기만 한 친구들을 바라보며.

그동안 신마전쟁으로 다섯 왕국은 치열한 싸움을 이어 갔다.

신마전쟁에서 이기는 왕국은 제국으로 격상하여 다른 네 개의 왕국을 영원히 다스리게 될 지어라.

이는 이들의 피에 새겨진 유산과도 같았다.

베이라들의 성지인 디오니스와 세츠들의 성지인 젠 왕국은 가장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으며

때마다 여러 베이라와 세츠를 배출해 냈던 나머지 세 왕국인 마르한, 자칸, 켄느 왕국은 디오니스나 젠과 연합을 이루기도, 독립을 주장하며 싸우기도 하였다.

그리고 왕국력 900년.

젠 왕국에서 가장 신력을 많이 타고난 한 명의 세츠에게 주어지는 유파시드의 칭호가 역사상 가장 어린 세 살 아이에게 부여되었다.

아이는 유례없을 정도의 무한한 양의 신력을 타고났다. 아직 어려 신력을 쓸 수는 없었지만 아이는 본인의 신력을 쉽게 다른 세츠들에게 양도해 주었다.

그리고 유파시드의 나이 다섯 살.

전에 없이 강하게 폭발되어 퍼진 신력의 힘으로 디오니스의 수많은 베이라는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젠 왕국은 900여 년간 이어진 신마전쟁의 승자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 뒤로 십여 년,

이제 성인이 된 스물두 살의 유파시드, 루드바하는 10년 전부터 선왕의 뒤를 이어 준비하던 젠의 제국으로의 격상 준비를 이제 막 끝마쳤다.

오직 신력의 힘으로 지배자가 결정되는 젠에서 대대로 가장 많은 유파시드를 배출한 루드바하의 가문, 그 정점에 선 루드바하는 역사상 다시 없을 신력을 가지고 젠 왕국을 다스리는 유파시드가 되었다.

“드디어 지겨운 준비가 끝났군.”

기지개를 켜며 말하는 라웅의 말에 유안이 타박하듯 말했다.

“지난 십 년이 지겨웠다니……. 덜 구른 모양이군.”

유안의 말에 라웅의 얼굴이 전에 없이 구겨졌다.

지난 십 년, 반란의 무리들을 척결하고 젠 왕국 몰래 다시 꿈틀대는 세력이 있다는 첩보가 들어오면 온 세계를 질주하며 처단하고 다녔다.

말은 신마전쟁이 끝났다고 하면서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력들은 젠 왕국에조차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모두 샅샅이 뒤져내고 처단하여 다른 생각 따위는 하지도 못하게 압박하며 평화협정을 이루어낸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끔찍한 지난 시간을 생각하며 라웅은 곧 울 것만 같은 얼굴이 되었다.

“내가 왜 모르겠어! 그 때문에 난 아직도 총각이라고!!”

라웅의 말에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은 유안이 루드바하에게 말하였다.

“유파시드, 준비는 끝났습니다. 이제 모든 왕국에 서신을 전달하고 준비된 계획을 시작하시지요.”

유안의 말에 루드바하가 깊은 울림이 전해지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미성인 듯 들리면서도 듣는 사람의 배꼽 깊숙한 곳을 울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쉽사리 귀를 떼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래. 이제 드디어 시작이네. 정말… 기대되는군.”

루드바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져나갔다.

같은 남자가 보더라도 홀릴 것만 같은, 아름다운 미소였다.

* * *

굵은 웨이브가 흐르는 칠흑 같은 검은 머리가 바람결에 흐드러지게 날린다.

제법 굴곡이 드러나는 늘씬한 몸에는 어떠한 귀족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기품이 흘렀다.

돌아보는 하얗고 작은 얼굴은 갸름한 선을 이루어 안 그래도 늘씬한 몸매의 선을 더욱 부각시켰다.

그 안을 채우는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오뚝한 콧날과 붉고 탐스러운 입술, 그리고 선명하리만치 붉은 눈동자는 보는 모두의 숨이 멎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창문을 등진 그녀, 르베나의 붉은 눈동자에는 짜증이 가득 들어섰다.

“진짜 내 말을 뭐로 듣는 거지?”

르베나의 짜증이 향하는 곳에 우물쭈물 서 있는 두 인영은 바로 사나와 후벤이었다.

그들은 르베나의 눈이 짜증에 일그러져 있음에도 또 그것이 저희를 향한 것임에도 크게 주눅 들어 보이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계속 들어온 공주님의 딱딱한 말투조차 이젠 사랑스러우니 말 다한 게 아닌가 싶었다.

화를 냈음에도 여전히 멀쩡해 보이는 사나와 후벤을 본 르베나의 눈이 찌푸려졌다.

“하… 너희는 얼마나 날 우습게 만들 작정인 건가.”

르베나의 말에 사나가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공주님. 곧 생일이신데… 게다가 이렇게나 아름다우신데 대체 왜 생일 연회를 안 여시겠다는 거예요!!”

사나의 말에 옆에서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후벤을 노려본 르베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제 방을 둘러보았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따뜻한 볕이 드는 큰 방엔 그 크기가 무색할 만큼 단출하고 깔끔한 백색의 가구들이 자리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널린 선물 상자들 또한.

저것들을 눈에 담는 르베나의 눈에 다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모두 갖다버려. 내가 쓸 일은 없을 테니.”

그러고는 침실의 방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버린 르베나를 눈으로 쫓던 사나가 원망의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거 보세요 후벤 경, 르베나 님이 분명 싫어할 거라고 했잖아요!!”

사나의 말에 잔뜩 풀이 죽은 후벤이 말하였다.

“하지만 모두 우리 공주님께 하나같이 어울리는 것들 뿐인데 어쩌나.”

후벤 후작가의 모든 재산을 르베나에게 탕진할 것만 같은 위험한 가주, 후벤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이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사나의 시선이 무심코 르베나가 방금 있던 자리를 향하다가는 곧 환한 웃음을 만들어 냈다.

아주 작은 들꽃 한 송이.

후벤이 둔 많은 선물들 사이 투박하게 놓인 들꽃 한 송이만이 르베나의 허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작은 온기가 사나의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자아냈다.

사나와 후벤이 투닥 거리는 틈에 외궁 밖으로 나오던 르베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새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조금은 소란스러워졌고 어느덧 아름답게 자란 외궁 앞 화원이 조금은 생소하게 르베나의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몇 년이 흘러도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

7년 전.

르베나의 학대 사건이 밝혀진 이후, 제노스 왕은 르베나의 전속 시녀를 사나로 바꾸고 후벤 경에게 주기적인 방문 및 보호를 명하였지만 달라진 것은 그것뿐이었다.

사형 예정이었던 시녀들은 바로 독살을 당해 배후에 누가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분명 세나르의 짓이란 걸 알지만 증인도 없는 상황에서 왕비를 대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단지 후벤과 사나의 반대에도 다시 외궁에서 살 것을 고집한 르베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저… 공주님 외궁보다는 다른 궁으로 거처를 옮기시는 게 어떨까요?”

혹시나 좋지 않은 기억이 가득한 외궁에서의 삶이 어린 르베나에게 더 큰 상처가 될까 싶은 사나의 걱정이었다.

“외궁이 좋아. 그게 싫다면 네가 다른 곳으로 가면 되겠지.”

하지만 르베나의 쌀쌀맞은 그 한마디에 사나는 설득 대신 외궁을 전부 갈아엎다시피 고쳤다. 이후로도 르베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하였다. 그저 도서관을 오가며 여전히 시간 역행의 현상에 대해 공부하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럼에도 사나와 후벤은 포기하지 않았다. 둘이서 작당이라도 한 듯 아무리 르베나가 무관심으로 일관해도 르베나를 보살피고 애정을 기울이는데 어떠한 시간이나 물질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참다못한 르베나가 붉은 눈에 살기를 담아 쏘아보며 꺼지라 하여도 사나는 온몸을 벌벌 떨면서도 죽어도 못 간다 버텼고, 기사인 후벤은 오히려 대견하다는 듯 르베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흘러간 시간.

사나는 르베나가 눈만 깜빡여도 원하는 바를 맞출 만큼 정성으로 그녀와 외궁을 살폈다.

그리고 후벤은 르베나를 방문할 때마다 후작가의 가주답게 매번 이렇게 돈 지랄을 하고 있었다. 가끔 르베나는 그가 후벤 후작가를 말아먹을 탕아였던가…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과거와 같은 양상으로 흘러가는 것 같은 불안함에 르베나는 그들에게 더 큰 무관심과 짜증으로 응대하였다. 자신과 깊게 엮이지만 않으면 그들을 또 잃지는 않을 수 있다는 생각만을 되뇌며.

하지만 무엇보다 마음에 안 드는 한 가지.

끊임없이 노력함에도 자꾸만 그들의 행동이 밉지 않아지는 자신, 르베나가 있었다.

순간 기분 좋은 봄바람이 르베나의 전신을 포근히 감싸 안았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뱉어내는 말만큼 짜증이 나지는 않는. 그래서 문제인 요즘이었다.

왕국력 919년.

열일곱 살의 르베나가 두 번째로 맞이하는 어느 봄의 초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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