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제1장 디오니스 (8)
르베나는 냉담한 시선으로 어린 날의 또 다른 저를 지켜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의 역행 전, 힘겹게 살아 냈던 그녀의 어린 날을.
그리고 그곳엔 지금과는 다른 르베나가 존재했다.
사나와 함께 잠들고, 간간이 놀러오는 후벤의 목마를 타고 까르르 웃는 아이. 사나가 직접 구운 쿠키를 잔뜩 입에 넣은 채 코코아 한 모금에 행복해하는 아이.
사나가 사랑한다 말해 주면 두 볼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나도…….’라고 말하는 수줍은 아이. 낮잠에서 깼을 때 사나가 없으면 서러워 눈물 흘리는 아이.
그 모든 아이가 지나온 시간의 르베나였다.
이윽고 모든 행복하고 부드러운 순간들을 담아내던 장면들은 이내 천천히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어두운 방 안, 빛 한 줌 들어오지 않는 차가운 냉방.
세나르의 계략에 빠져 잘못을 저질러 버린 사나와 같은 벌을 서면 그녀를 살려주겠단 왕비의 말에 멍청하게도 고개를 끄덕인 열일곱, 어느 날의 르베나가 보였다.
장면이 그곳을 비추자 순간 르베나의 생각이 꿈이란 공간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보고 싶지 않아, 이건……!’
하지만 그녀의 꿈은 개의치 않고 다시 장면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곳에 비치는 르베나는 아무도 없는 골방에 갇혀 있었다. 무섭지는 않았다. 사나를 만나기 전에는 흔한 일이었고 곧 사나도 온다고 하였으니.
당시의 르베나는 사나와 함께라면 무서운 것이 없었다. 게다가 어느새 몸이 커져 버린 르베나였기에 냉방은 더 이상 예전만큼 두렵지도 않았다.
그렇게 얼마인지 모를 시간 동안 사나를 기다리던 어느 순간 인기척이 들리더니 문이 열리며 환한 빛이 쏟아졌다. 어두운 방에 있던 르베나가 채 그 빛에 적응할 새도 없이 다시 닫혀 버린 문을 보며 조심스레 소리를 내었다.
“…사나?”
열일곱 살임에도 아이 같은 말투가 가득 묻어나오는 르베나의 목소리에 방의 다른 쪽,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사나, 사나가 왔어!’
이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들뜬 마음에 르베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방금 인기척이 난 곳으로 걸음을 옮기려 한 순간이었다.
“…오지 마세요!”
“사나……?”
처음 듣는 사나의 화난 목소리에 순간 르베나는 당황스러웠다.
사나는 르베나가 허락 없이 마력을 쓸 때 말고는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얼마 전 우연한 기회로 마력의 존재를 알게 되고, 몰래 가스트에게 가르침을 받는 시간 동안 사나는 오로지 르베나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그마저 가끔 허락 없이 마력을 써 혼나도 르베나에 대한 걱정을 한가득 담은 애정 어린 음성이 전부였다.
하지만 지금 목소리는.
“사나 왜 그래? 나 무서워… 사나 옆에 있으면 안 돼?”
울먹이는 르베나의 목소리에 상대편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에 안심하고 다시 움직일 찰나, 사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공주님 때문에 누명을 쓰고 매까지 맞았어요. 지금은 공주님을 뵙고 싶지 않다고요.”
사나의 말에 르베나가 놀라 물었다.
“나… 때문에? 왜? 사나, 내가 뭘 잘못했어? 그래서 사나가 벌 받은 거야?”
르베나의 목소리에 사나가 답했다.
“나중에 화가 풀리면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 떨어져 계셔 주세요. 지금은 무척 피곤하거든요.”
“…응.”
‘안 돼, 알겠다고 하지 마!’
꿈을 보는 르베나와는 다르게 그때의 르베나는 풀이 죽어 얌전히 알겠다고 답했다. 세나르의 보석을 훔쳤다는 사나의 도둑 누명이 왜 르베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나가 한 말은 언제나 다 맞았으니까.
그렇게 시간은 지났다. 얼핏 느끼면 몇 시간, 얼핏 느끼면 며칠이 지난 것도 같았다.
어두운 내부에서 시간을 가늠하기란 어려웠다. 그동안 르베나는 부지런히 사나의 기분을 살피고 대화를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사나는 피곤하다며 대화를 거절했다. 가끔 작은 밑창을 통해 들어오는 물조차 사나는 제대로 마시지 않았다.
찰칵찰칵.
그렇게 적막에 익숙해진 공간에 어느 순간 자물쇠 소리와 함께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흘간 물과 미음 정도만 먹으며 빛을 못 본 르베나가 눈부심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사이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와 말소리가 들린 듯도 했다.
이에 르베나가 다시 눈을 뜨려는 찰나, 시녀 둘이 다가와 르베나를 부축하며 서둘러 방 밖으로 데리고 나오며 말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주님. 얼른 방에 돌아가 쉬시지요.”
시녀의 말에 걸음을 옮기던 르베나가 문득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아, 근데 사나는?”
문득 르베나를 잡은 시녀의 몸이 움찔 떨리는 것 같았지만 시녀는 곧 태연하게 말했다.
“시녀장님은 다른 곳에서 휴식을 취하게 될 겁니다.”
‘믿지 마, 거짓말이야!’
시녀의 말에 르베나는 사나랑 얘기를 해 볼까 하다 계속 피곤하다고 말했던 사나를 생각해 쉴 시간을 주고자 하였다. 해서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몰랐다. 그 순간 이미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따위는.
제 꿈속의 장면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심장이 아프게 조여오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보고 싶어……!’
르베나의 간절한 외침이 아프게 들려왔지만 꿈은 모든 걸 기억해 내라는 듯 다시 이어졌다.
르베나가 혼자 돌아오자 이상함을 알아챈 후벤은 곧 상황을 알아보겠다며 방을 떠났다. 그리고 돌아온 그의 몸은 큰 충격으로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공주님, 사나가… 사나 양이……!!!”
순간 르베나는 후벤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은 채 무작정 아래층을 향해 내달렸다.
왜 아래층인지, 무엇을 예감한 것인지도 모른 채.
빠르고 다급한 걸음에 순간 계단에 발을 헛디딘 르베나가 잠시 휘청이다 난간을 꼭 붙잡고 섰다. 거칠어진 호흡으로 인해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자꾸만 뜨거운 덩어리가 목 밖으로 나오려 해 침을 꿀꺽 삼켜댔다.
왜인지 불길한 생각이 제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게 정확히 무슨 생각인지도 모른 채 다시 다리에 힘을 준 르베나가 일 층으로 내려옴과 동시에 외궁의 큰 문을 두 손으로 힘껏 열어젖혔다.
“공주… 님!”
누군가의 부름을 시작으로 모두의 시선이 르베나에게 향한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자꾸만 가빠지는 숨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무언가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것이 너무 빨리 계단을 내려온 탓이라 생각한 르베나의 붉은 눈이 사람들이 둥글게 감싼 원의 중심을 향하였다.
하얀 천. 딱 사람 키만 한 하얀 천.
그걸 본 르베나의 손이 사정없이 떨려 왔다.
“아니야…….”
갈라진 목에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럴 리 없어.”
한 걸음 내딛는 걸음마다 시종들과 시녀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뒤로 물러섰다.
“말도 안 돼.”
어느새 바로 앞에 놓여있는 하얀 천에 덜덜 떨리는 희고 작은 손이 향했다.
그리고 르베나는 보았다.
더없이 거칠게 흐트러져 있는 다정한 밀빛 머리와 더 이상 온기를 보여 주지 않는 감긴 눈을.
…사나였다.
“아아…….”
종아리부터 시작해 여기저기 난 시신의 상처들이 르베나의 눈에 가득 들어찼다.
언젠가 그런 르베나를 사나가 안아 준 것처럼 르베나가 조심스럽게 사나의 몸을 제 품 가득 끌어안았다.
“아아… 왜… 어째서…….”
현재 궁에는 가스트를 제외하고 베이라의 힘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얼마 전 세나르 왕비가 베이라 하나를 궁에 들였다 했다. 그때부터 사나와 후벤은 르베나에게 마력의 사용을 일절 금했다.
그래서 차가운 사나의 몸이 다시 한번 르베나에게 잔인한 진실을 알려 주는 순간 르베나는 모두 알아 버렸다. 사나가 왜 이렇게 혼자 죽어가야 했는지.
“바보… 아냐… 흑……. 아… 흑…….”
사나가 사흘의 시간동안 르베나를 멀리한 이유도. 평소와는 다른 차가웠던 말투까지도.
“그게… 윽… 사나와… 맞바꿀 만한… 일이야……? 으흑… 내 마력을 들키는 일 따위가?”
사나, 사나만큼은 안 된다.
그 누구도 사나를 이런 식으로 앗아가면 안 되는 거였다.
르베나를 어둠에서 구해 준 사나는, 르베나에겐 빛인 그녀만은, 데려가면 안 되는 거다.
뜨거운 눈물이 자꾸만 떨어졌다. 그리고 동시에 르베나는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더 이상 소리를 낼 수조차 없었다.
“으… 윽… 으…….”
뜨거운 불구덩이가 목구멍을 내리 막았다. 숨 쉬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고 눈에서는 막을 수 없는 눈물들이 뜨겁게 그리고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힘들었다. 아팠다. 숨이 막혀 호흡이 거칠어졌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도 온기 가득한 사나의 미소를, 그 다정한 갈색 눈을 다신 볼 수 없다고 생각하자 르베나의 가슴이 수백 수천 가락으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만약 그 순간, 들려오는 그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르베나는 그렇게 며칠이고 사나의 몸을 붙들고 울고만 있었을 것이다.
“초상이 났나? 이것들이 어디 궁 안에서 울음소리를 내고 있어, 재수 없게!!”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리에 모두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드록, 적어도 양심이 있다면 이곳에 나타나지 말아야 할 사람.
외궁 시종시녀들의 눈길에 모두 독기가 들어찼다. 드록은 태연한 얼굴로 그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오직 한 사람, 죽은 사나를 안고 있는 르베나만을 바라보았다.
“내가 왔는데 인사도 하지 않는 거냐? 건방진 마녀 새끼.
하지만 르베나는 드록의 도발에도 반응하지 않은 채 여전히 죽은 사나에게 시선을 둘 뿐 이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드록이 르베나의 품에 안긴 죽은 사나에게로 다가갔다.
“……!”
“……!!”
순간 모두가 경악에 찬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리고 물기 가득한 르베나의 붉은 눈 또한 경악으로 가득 차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의 발을.
“고작 이딴 계집 하나 죽었다고 나를 무시하는 거냐, 마녀 새끼야?”
르베나의 시선을 받은 드록이 이죽거리며 한번 더 같은 행동을 하려 했다.
죽은 사나의 시신에 발길질을 하는 말도 안 되는 행동을.
순간 드록의 다음 행동을 예상한 르베나의 손이 드록의 발을 애원하듯 붙잡았다.
하지만 피식 웃으며 가볍게 힘을 준 드록의 발길질에 힘을 이기지 못한 르베나의 몸은 쉽게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공주님!”
“꺄악!!”
“르베나 공주님!!”
나가떨어진 르베나의 모습에 시종 시녀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르베나는 나가떨어진 그 모습 그대로 제 얼굴을 사정없이 구기며 그를 노려볼 뿐이었다. 르베나의 표정에 잔인한 미소를 지어 보인 드록이 문득 제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하나 꺼내 허공에 몇 번 돌리며 이죽이듯 말했다.
“그거 알아? 죽은 자의 머리칼을 가지고 있으면 전장에서 살아 온다는 얘기. 원한이 짙은 자의 것일수록 그 효과가 뛰어나다고 하더군. 원한이 많으면 많을수록 달려오는 적들에게 저주를 한다나 뭐라나.”
“키킥. 저 멍청한 계집애를 감싸다 이게 뭐람. 저게 더 멍청한 거였네.”
얼핏 드록의 말에 뒤이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인 듯했지만 그건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말을 마친 드록의 거침없는 손이 르베나의 품에서 떨어져 나온 사나의 머리카락으로 향했다. 경악 어린 모두의 눈길만이 그 손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록의 차마 숨기지 못한 잔인한 희열의 눈빛은 붉은 눈동자를 떨고 있는 그녀, 르베나만을 향하고 있었다.
이내 드록의 칼이 사나의 머리카락에 닿은 순간, 르베나는 제 몸에서 제어할 수 없는 분노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사나가 죽은 날. 사나의 다정한 눈을 더 상 볼 수 없게 된 날.
그리고 드록이 감히 사나의 밀빛 머리카락을 건드린 그날.
르베나를 위해 외롭게 죽어간 사나가 멍청이 취급을 받은 날.
제대로 된 마법을 배우기도 전, 르베나의 마법은 감정에 동요해 폭주해 버렸다.
르베나의 온몸에서 피어오른 검붉은 마력은 그대로 드록과 그의 시종, 시녀들을 광폭하게 삼키기 시작했다. 르베나조차 제 분노에 먹힌 자신의 마력을 통제할 수가 없었다.
디오니스의 별, 가스트가 뒤늦게 뛰어나왔지만 그마저도 막을 방법이 없어 겨우 제 사람들을 보호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강한 르베나의 마력에 본궁에 있던 왕비의 손님, 베이라가 반응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오… 이런 마력이라니!!! 르베나 공주님께 이런 마력이 있다는 걸 알았다면 절대 어린 시절 마법을 걸지 않았을 텐데요… 키키… 이렇게 매혹적으로 자라실 줄 알았다면 절대 망각의 약을 타지도… 않았을 거고… 키키… 그리고… 왕비님의 명이 없더라도 저 시녀를……. 치료해… 줬… 을 텐데요. 키키키키키 그러게 왜 괜히 왕비님 눈에 거슬려서 아끼는 이를 내주셨어요.”
르베나의 검붉은 눈이 황홀하다는 듯 웃고 있는 베이라와 두려움에 질식된 드록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눈은 곧이라도 피를 흘릴 듯 충혈되어 있었고 무수한 눈물들이 뽀얀 얼굴을 사정없이 적시고 있었다. 그
“결국… 나 때문이었구나. 사나가 세나르 왕비님, 아니 그 사람의 속임수에 빠진 것도… 죽은 것… 도… 결국은 다… 나 때문이었구나.”
뒤늦게 사나를 향한 세나르의 계략과 어린 시절 저주의 비밀을 알아 버린 르베나의 검붉은 마력이 더욱 공격적으로 거칠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감정을 대변하듯.
“그런데… 그래서 더 용서가 안 돼. 그럼 날 죽였어야지! 날 때렸어야지! 겨우 만난 사나를 다시 내게서 뺏아가? 겨우내 날 품어주던 이 온기를 이렇게 앗아가!!”
‘제발 멈춰!!’
폭주해 버린 제 마력의 힘을 보고 탐욕으로 물든 베이라의 얼굴과 공포로 물든 드록의 모습을 똑똑히 새긴 르베나가 처음으로 그들에게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내가 거슬린다고? 내 힘이 탐난다고? 그래, 그럼 마음껏 느끼게 해줄게. 그 힘… 이라는 것 말이야.”
사나의 죽음 앞에서 그녀를 모욕하던 드록과 사나를 의도적으로 위험에 빠뜨린 세나르 왕비.
그리고 그 순간조차 자신의 힘을 탐하는 베이라 앞에서 그날.
르베나는 폭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