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8화 (8/276)

8화

제1장 디오니스 (7)

힘겨운 눈꺼풀이 들어 올려지고 붉은 눈동자가 흐려진 초점을 맞추어 간다.

서서히 의식이 돌아온 르베나의 눈에 흰색의 높은 천장이 들어왔다.

순간 가만히 위를 응시하던 르베나가 놀란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

하지만 순간 엄습한 고통에 르베나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그것도 잠시 르베나는 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다가는 천천히 제 몸을 보았다.

그리고 어린 르베나의 얼굴이 점차 실망감에 물들어갔다.

눈을 뜨자마자 보인 높은 천장과 벽지는 매우 눈에 익은 것이었다. 왕이었던 르베나가 생활했던 본궁의 방과 매우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베나는 드디어 제가 꿈에서 깬 줄 알았다. 지긋지긋하고 나약했던 제가 있던 악몽에서.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까짓 매질에 기절해 버린 작고 쓸모없는 몸뚱이뿐이었다. 엄습하는 고통 같은 건 얼마든지 참아낼 수 있었다.

다만 시간의 역행,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못한 지독한 상실감과 함께 그깟 매질에 정신을 놓았다는 수치스러움만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르베나에게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공주님, 깨어나셨어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르베나의 붉은 눈에 따뜻한 갈색 눈동자가 가득 들어왔다.

그녀, 사나는 르베나의 옆에 조심스레 다가와 앉았다. 그러고는 다정함이 가득 담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후벤 경과 기사분들의 증언으로 공주님 궁 시녀들의 그간 악행이 모두 밝혀졌어요. 폐하께서 귀족회의를 소집하셨고 만장일치로 그들 모두 극형에 처해지고 배후도 밝혀질 거예요.”

다정한 눈동자에 검은 머리카락의 공주가 한가득 비치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많이 힘드셨죠? 늦어서 죄송해요… 이제부터 제가 공주님의 전속 시녀가 될 거예요. 다신 아무도 공주님을 때릴 수 없어요! 감히 그 누구도 공주님을 괴롭힐 수 없어요!! 제가, 제가 그렇게 만들게요.”

다짐하듯 내뱉는 사나의 말에 르베나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새 사나의 옆에 따라 들어와 서 있는 남자에게도 붉은 시선이 박혀 들었다.

짙은 고동색의 단정한 머리칼, 냉정한 듯하지만 따뜻한 녹색 눈.

르베나가 두 사람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그리고 순간 붉은 눈동자 속에는 그들의 속마음을 꿰뚫을 것처럼 검은빛이 일렁였다.

곧 르베나가 말했다. 모든 진심을 담아. 다시 없을 선연함을 담아 냉정하게.

“그대들에게 고마워할 거라 생각할 만큼 내가 우습나. 그대들의 무관심 속에 난 방치되었다. 나는 수년간 그 외궁에서 고통받고 억압되었다! 하지만 그대들은 오지 않았지.”

마치 진심으로 용서할 수 없다는 듯.

“그러니 이제 와 그 알량한 죄책감을 들이밀지 말라. 내게 너희들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책임을 떠밀지 말라. 그대들이 정말 내게 미안하다면! 알량한 죄책감이라도 있거든……!”

르베나의 붉은 눈이 그들을 싸늘하게 훑었다. 순간 짜릿한 무엇인가가 그들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르베나는 말을 마치고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치 너희 같은 것들을 꼴도 보기도 싫다는 듯. 당황하며 눈물이 잔뜩 고인 사나와 죄책감을 채 지우지 못한 후벤의 얼굴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는 듯.

하지만 르베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해야만 그들의 다정하고 깊은 마음 속, 죄책감이란 아주 작은 씨앗을 심을 최소한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는 걸.

그래야 그들에게서 비로소 멀어질 수 있다는 걸.

* * *

“폐하, 젠 제국에서 연합군을 일으켜 움직인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지나친 베이라의 힘은 젠이 내세운 평화를 위협하는 힘으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디오니스 내부의 일이라 유파시드도 묵인하였지만 폐하께서 왕국 외부에까지 힘을 쓰시면 유파시드가 곧바로 움직일 것이옵니다. 그러면 바로 전쟁입니다!”

르베나의 어린 시절 기억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조금 더 수척해진 모습으로 무릎을 꿇은 채 애원하듯 고하는 후벤의 옆에는 성성한 백발을 늘어트린 늙은 가스트가 자리했다.

두 사람의 눈빛이 애원하듯 또는 염려하는 듯 그들의 앞에 자리한 주군을 향했다.

굴곡진 몸매를 과하지 않게 드러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무심히 왕좌에 앉은 이는 스무 살의 그녀, 바로 르베나였다.

르베나가 제 앞에 무릎을 꿇은 후벤과 가스트를 한번 보고는 여상히 대답을 건넸다.

말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영락없이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왕의 모습이었다.

“나는 디오니스의 평화를 위해 국경을 어지럽히는 세츠들을 처단한 것일 뿐. 이를 곡해하는 것은 그들의 자격지심이다. 내가 거기까지 배려할 필요는 없는 듯하군. 하지만 후벤 공작과 가스트 후작은 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듯해.”

르베나의 무감각한 붉은 눈이 후벤과 가스트를 향했다.

순간 후벤과 가스트의 얼굴에는 더없는 슬픔이 묻어났다.

“어찌 저희의 마음을 몰라주십니까, 폐하. 유파시드가 군사를 이끌고 디오니스로 오고 있다 합니다!! 모르시겠습니까? 폐하께서 베이라의 힘을 무분별하게 계속 쓰신다면 제2의 신마전쟁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디오니스의 멸망뿐입니다!”

“가스트 후작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눈을 넓히십시오. 폐하의 힘을 찬양하며 원하는 것만을 빼가는 이들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이는 폐하뿐만이 아니라 디오니스 모든 백성들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토해 내듯 뱉는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지만, 그 진심은 붉은 머리카락의 군주에게까지 닿지 않았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막는 것! 그것이 베이라들이 사라져 버린 디오니스의 왕, 폐하께서 진정 하셔야 할 일입니다!”

목이 터져라 청을 올리는 후벤과 가스트의 눈에는 가릴 수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본 르베나는 그들의 모습이 마음에 차지 않을 뿐이었다.

그들의 말은 마치 여전히 르베나의 힘을 믿지 못한다는 듯 들려왔기 때문에.

국경에서 얼쩡거리는 세츠들을 처리해 디오니스의 위상을 높여달라는 가신들의 청을 들어준 것 뿐인데, 연합군을 동반한 전쟁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게다가 그녀는 분명 국경 안으로 들어온 세츠들에게 경고를 한 후 그 경고를 무시하는 자들만을 처리했다. 평화협정을 어긴 적이 없단 말이었다.

하지만 르베나를 보는 후벤과 가스트는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전하를 이용해 제 가문의 배만 채우려는 이들의 말 따위는 듣지 마시라고,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엔 디오니스의 병력이 아직 너무 약하다고, 우린 그렇게 디오니스, 그리고 그보다 소중한 폐하를 잃을 수는 없다고.

제발 훗날을 도모하시어 더이상 무분별한 귀족들의 말에 놀아나시지 말아달라고.

다만 그들의 깊은 마음을, 그리고 그보다 더 소중한 뜻을 그때의 르베나는 알지 못했다.

그래서였다. 그들에게 이별을 고한 것은.

후벤과 가스트를 잠시 바라보던 르베나가 고개를 돌리며 명했다.

“그렇게 그대들이 나와 뜻을 달리 하고 싶다면… 그대들은 그저 지켜보라. 나와 이들이 디오니스를 어떻게 지켜내는지 말이다.”

‘안 돼!’

“그대들에게… 남부 지방으로의 전출을 명한다.”

‘안 돼, 제발!!’

르베나의 명에 모든 걸 잃은 듯한 후벤과 가스트의 텅 빈 눈이 눈앞의 거대한 왕좌를 향했다.

“전하를 믿고 까불더니 속이 다 시원하군.”

“디오니스의 발전을 저해하고 전하를 믿지 못하는 신하의 최후인 게지.”

망연자실한 후벤과 가스트를 사이에 두고 여러 귀족들의 비아냥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강한 목소리가 모든 공간을 부술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지 마, 그들을 보내지 마! 그들을 내치지 마, 제발!!’

하지만 강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질책하고 힐난하는 귀족들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 갔고 순간 궁 내부의 벽으로부터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온 사방으로 점점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왕좌에 앉아있던 르베나를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 피는 이윽고 르베나를 지나 후벤의 팔과 가스트에게로 가 그들의 전신을 뒤덮었다. 그 순간 숨이 콱 막히는 느낌과 함께 목소리가 더욱 힘을 키워 외치기 시작했다.

‘도망쳐, 도망쳐, 제발! 후벤! 가스트! 제발… 도망쳐!!!’

처절한 비명이 공간을 깨트릴 듯 울린 순간 왕좌에 앉아있던 르베나가 어느새 온통 피에 젖은 몸으로 정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죽인거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누구보다 너를 사랑한 그들을… 네가, 죽였다.”

곧 왕좌에 앉아 있던 르베나의 눈에서도 뚝뚝 피가 흘러내렸다. 곧 그 피가 온 바닥을 적시고 주위의 모든 것을 삼키기 시작했다. 끈적하고 비릿한 피 냄새가 가득 찼다. 숨이 막혀왔다. 하지만 한 모금의 산소조차 질척하고 비린 피비린내가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그 희박한 공기의 숨막힘과 짙은 피비린내의 구역감이 서서히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댕, 댕, 댕-!

* * *

“…헉!”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어린 르베나의 입에서 가쁜 숨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헉……!! 하아… 하악… 하…….”

막힌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는 소녀의 붉은 눈이 고통과 두려움 후회로 점칠 되어 갔다. 하지만 들이쉬는 공기 속에 배어 있는 진한 약 냄새와 함께 사나가 놓고 간 은은한 꽃향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르베나는 자신이 꿈을 꾼 것임을 알아챘다.

툭.

순백의 침대 시트 위 떨어진 눈물을 발견한 르베나가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궁의가 정성껏 감아놓은 붕대에서는 방금 갑자기 일어난 탓인지 다시 터진 상처의 피가 묻어나 옅은 피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아직 아침이 오지 않은 어두운 새벽녘이었다.

“공주님, 간밤에 잘 주무셨어요?”

부득이 같이 자겠다는 것을 매일 밤 매서운 눈으로 쫓아냈지만, 사나는 동이 트기가 무섭게 르베나의 방으로 달려왔다. 정확히 말하면 치료를 목적으로 잠시 묵는 본궁의 방으로.

언제나와 같이 포근한 향기를 담은 사나의 품 안에서는 이름 봄에 피어나는 루아나 꽃이 새벽공기를 머금은 채 가득 들려 있었다. 달콤하고 조금은 싱그러운 꽃의 향이 온 방에 퍼져 나갔다.

이틀 전 가져온 온실의 이름 모를 꽃을 빼내며 그 자리에 루아나 꽃을 꽂은 사나가 웃으며 말했다.

“아직 이른데도 루아나… 꽃이 피었더라고요.

우리 르베나 공주님 생각이 나 정원사에게 조금 부탁했어요.”

사나의 말에 르베나의 눈이 잠시 사나의 품에 들린 꽃을 향했다가는 돌아왔다. 선명하고 싱그러운 녹색의 꽃잎과 붉은 수술로 안을 가득 채운 별 모양의 루아나 꽃을.

“그만 오라고 한 내 말은 무시하기로 한 건가?”

르베나의 말에 부지런히 화병에 꽃을 넣던 사나의 손이 잠시 움찔했다가 언제나처럼 고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공주님. 폐하의 명이라 저도 부절할 수가 없어서요. 공주님의 상태가 좋아지셔서 다시 외궁으로 갈 때까지 꼭 붙어 시중을 들라 하셨거든요. 아, 물론 외궁에도 함께 갈 거예요!”

이십 대 초반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상냥하고 포근한 미소를 지어 보인 사나는 누가 봐도 신이 나 보였다. 궁의가 와 르베나의 상처를 살필 때는 언제나 뒤돌아 조용히 눈물을 훔쳤지만, 그녀에게는 르베나와 함께하는 모든 시간이 행복해 보였다.

이내 작게 콧노래까지 부르며 꽃을 돌보는 사나를 보며 르베나는 휙 등을 돌린 채 누워 버렸다.

이에 아직도 비쩍 마른 르베나의 작은 등을 잠시 바라본 사나는 얼른 슬픈 기색을 지워 내고는 잔잔하고 듣기 좋은 허밍을 소리 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아침햇살이 기분 좋게 쏟아지는 작은 창틈으로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과 사나의 듣기 좋은 음색이 한데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이내 르베나의 눈은 사나의 허밍을 따라 점점 감겨들기 시작했다.

* * *

“르베나 공주님!”

“너무 예쁜 우리 공주님!!”

“사랑해요… 우리 아기 공주님.”

포근한 사나의 품에 꼬옥 안긴 어린 제가 보였다. 사나의 품에 안긴 어린 르베나는 행복해 보였다. 수줍은 얼굴로 사나의 애정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제 머리에 얹어진 화관을 어루만지는 손은 작았다. 그리고 사나의 품에 제 몸을 기대는 표정은 순진했다.

그 순간 르베나는 알아차렸다. 또 다른 꿈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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