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제1장 디오니스 (6)
스물다섯의 세나르.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른 그때 제노스 왕의 두 번째 왕비로 간택되었다.
불만이 있었냐고? 전혀 없었다.
“너의 외모는 오직 더 높은 자리를 쥐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세나르.”
세나르는 루치아 공작에게 어릴 때부터 외모는 단지 이용 가치가 있는 무기일 뿐이라고 수없이 교육받으며 자랐다. 또한 이 디오니스에 본인에게 어울릴 자리는 왕의 옆이 아니면 없다고 생각했다.
제노스 왕과는 비록 스무 살 가까이 차이가 나기는 했지만, 그는 나이에 비해 깔끔하고 준수한 외모와 기품을 지녔고 왕국의 예법이 누구보다 근사하게 몸에 밴 왕이었다.
또한 그는 측실이나 애인이 하나도 없어 세나르가 신경 쓸 여자 또한 왕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점이 퍽 마음에 들었다.
또한 사십 대의 그가 앞으로 살아봐야 얼마나 살겠나. 그녀는 이 기회를 통해 비교적 괜찮은 나이에 어린 왕자를 통한 대리통치로 이 디오니스를 가질 수 있었다.
이보다 더한 신랑감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세나르의 생각과 달랐다.
비록 제노스 왕에게 사랑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온통 죽은 왕비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밝게 웃는 재수 없는 계집, 루아나 공주가 온 궁 안을 활개 치고 다녔다.
“세나르 왕비님, 오늘도 햇빛이 참 좋지요?”
“세나르 왕비님, 저와 함께 티 타임을 가지지 않으시겠어요?”
그녀는 저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도 않는 새엄마인 세나르를 언제나 웃음으로 대했다.
팔푼이 같은 계집이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매일같이 여기저기 웃음을 흘리고 다녔다.
채신머리 없는 행동거지에 경거망동한 태도, 세나르의 눈에 보이는 루아나는 딱 그랬다.
주는 게 없이도 싫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세나르는 결국 하룻밤 만에 드록 왕자를 임신하였고 태어나 제 품에 안긴 드록을 보며 제 아들이 왕세자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여자에게도 왕위계승권이 있는 디오니스에서 루아나 공주의 존재가 그저 미운 존재를 넘어 제 아들의 왕위를 위협할 커다란 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게다가 루아나는 궁 안팎의 사람들에게 신임이 두터웠다. 더없이 완벽한 왕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늘이 도우신 덕일까!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고, 모두의 사랑을 받던 철딱서니 없는 공주 루아나는 그녀의 나이 스물한 살에 사랑에 빠졌다.
문제는 그녀가 혼인도 전에 아이를 임신했다는 점과 만삭이 되어 나타나서도 상대 남성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던 공주였던 만큼 사람들의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미혼모라는 치부를 안게 된 루아나라니……!
소식을 들은 세나르 왕비에게 당시의 매일이 얼마나 즐거운 날들이었는지.
그 멍청한 계집애가 제 위치와 명예를 스스로 쥐고 흔드니 이 어찌 즐겁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드디어 다가온 출산일.
루아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이와의 짧은 눈 맞춤 끝에 생을 달리했다.
궁 안의 모든 이가 슬픔과 비탄에 빠졌으며 하나뿐인 딸을 잃은 제노스 왕은 깊은 슬픔에 빠르게 잠식되어 갔다. 미혼모라고 놀란 것도 잠시, 여전히 모두에게 사랑이었던 루아나의 죽음은 궁 안팎에 큰 슬픔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세나르만은 그날 남몰래 성대한 축배를 들었다. 드록을 낳았을 때보다도 더 다채롭고 격한 감정이 밀려든 날이었다. 눈엣가시 같던 루아나가 사라지다니. 비로소 제가 몸담은 이 궁이 온전히 제 차지가 된 기분이었다.
비록 루아나의 말간 미소를 쏙 빼닮은 르베나, 그 어린 계집이 존재했지만 괜찮았다.
제노스 왕은 르베나에게 루아나 공주에게 보였던 만큼의 사랑과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아주 가끔 마지못해 아기인 르베나를 찾긴 했지만, 그는 아기를 안아보지도 웃어 주지도 않았다.
그의 모든 행동에서 마음이 우러나왔다.
너는 루아나 공주를 대신할 수 없다고. 그 무엇도 그의 비워진 마음을 채울 수는 없다고.
그렇게 루아나가 떠난 이후 세나르는 세상 모든 것이 저를 위한 아름다운 합주곡 같다 느껴졌다. 언제 어디서나 그녀가 서 있는 곳이 세상의 중심이었다. 아니, 그랬어야만 했다.
그 장면을 보기 전까진.
“르베나! 여기를 보렴, 르베나!”
르베나를 보는 제노스 왕의 시선에서 감출 수 없는 애정의 빛이 감도는 순간을. 르베나가 방싯방싯 웃을 때면 미세하게 따라 올라가려는 그의 입매를.
그리고 그 모습을 세나르가 채 받아들이지도 못하던 어느 날, 그는 르베나를 디오니스 왕국의 공주 신분으로 명시하겠다 모든 귀족들에게 공표하였다. 그녀는 그날 느낀 배신감과 모욕을 잊을 수 없었다. 당연히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의 뒤를 잇는 건 오직 나의 아들 드록이었다!!
재수 없게 알짱거리던 루아나가 겨우 죽었는데! 이제는 그 딸이, 심지어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것이 모든 이들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한다고?
그 딸년이 공주의 신분을 꿰차고 왕위 계승권을 얻는다고?
저런 계집애가 그의 아들이 가져가야 할 몫을 차지하는 건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세나르는 그때부터 루치아 공작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다.
그리고 좋은 기회를 얻어 어린 르베나를 외궁으로 보내는 것까지 성공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다 여겼다. 눈에서 멀어진 르베나는 모두에게서 잊혀질 줄 알았다.
제노스 왕의 눈에서만 멀어지면 될 거라 여겼다. 그럼 드록의 자리는 안전할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모두에게 쉽게 잊히기에 어린 르베나의 존재는 너무나 컸다.
이제 막 말을 하고 방긋 웃으며 걸어다니는 르베나는 궁 안 모두의 사랑과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것이다.
그녀의 붉은 눈이 애정을 가지고 누군가를 바라볼 때면
그 눈빛을 받은 이는 포옹과 사랑으로 보답했다.
그리고 외궁으로 홀로 간 어린 르베나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관심은 르베나에 대한 동정과 함께 세나르 왕비에 대한 의심으로 번져갔다.
“르베나를 제 딸처럼 생각한다는 왕비님은 왜 공주님을 다시 데려오지 않으시지?”
“어린 공주님이 혼자 외궁 살이라니 너무해.”
“르베나 공주님이 보고 싶어. 우리 귀엽고 사랑스러운 공주님.”
궁 안에서 르베나의 존재는 사그라지긴커녕 그 존재감을 더욱 불려가기만 했다.
그리고 그즈음 매일 매일을 히스테릭한 불안감에 떨던 세나르에게 루치아 공작은 드디어 해결책을 쥐어 주었다.
“베이라요?”
놀라 묻는 세나르에게 공작이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왕비님. 이 아비가 유능한 베이라를 하나 알게 되었습니다. 아시다시피 마력은 공격과 저주에 강합니다. 그리고 그의 말에 의하면…….”
이어진 공작의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베이라의 저주와 암시가 걸린 매개체를 가지고 만든 약물을 왕궁의 수원지에 풀면 모든 것이 끝이라 했다. 그 약물에는 르베나를 서서히 잊게 하는 암시와 붉은 눈에 대한 공포를 아로새길 저주가 새겨질 것이라 했다.
“심지어 약물이 섞인 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궁 안 사람들이 이 저주와 암시에 더 강하게 길들여질 거라더군요.”
“어떻게 그런 마법이 있을 수 있죠?”
믿을 수 없어 하는 세나르에게 루치아 공작이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 하인 부부를 상대로 시험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년을 참으로 예뻐한다고 소문이 자자한 집이었지요. 그 딸년을 팔아치우고 그 딸년을 잊게 하는 암시를 걸어 물에 타 먹였습니다.”
공작의 말에 세나르가 긴장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 모습에 진한 미소를 그려 넣은 공작이 이어 말하였다.
“처음에는 미친놈들처럼 발광을 하던 그들이 발악하는 정도가 서서히 줄어들었습니다. 약물을 먹이고 일주일이 지나자 딸년의 이름을 말할 때 눈물만을 좀 흘리더군요.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딸년을 기억은 하되 어디서 뭘 먹고 사는지 관심도 없더군요.”
공작의 말에 세나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노예 부부의 딸이 어디로 팔려 무슨 운명에 처해졌을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 약물이 정말 효과가 있다는 것. 그것만이 중요했다.
“이 저주는 여러 가지 제한이 있는 만큼 효과는 확실하다 합니다. 그러니… 지금이 기회입니다!”
공작의 말에 세나르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하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안다.
왕궁에 의문의 약물을 몰래 그것도 지속적으로 푸는 건 반역이다.
그 약물이 자칫 왕을 비롯한 왕족에 대한 암살에 사용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제 궁에는 풀지 않을 것이고 오로지 본궁으로 들어가는 우물과 기사단을 위시한 별궁 몇 개에만 풀 것인데.
걸릴 가능성은 거의 전무했다.
또 현재 디오니스 왕궁에 실력 있는 베이라는 거의 다 신마전쟁에서 죽었거나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를 알아챌 이도 없었고, 이 마법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르베나의 피와 머리카락은 외궁의 로난에게 말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니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완벽했다. 세나르 왕비의 얼굴에 여느 보석보다 아름다운 미소가 박히듯 번져갔다.
그것은 어린 르베나가 외궁으로 보내지고 1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 * *
그때를 떠올리던 세나르 왕비의 눈에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모두가 그년을 잊게 하는데 자그마치 4년이 걸렸습니다. 4년이요! 그리고 지금 이 왕궁 어느 누구도 그년을 궁금해하지 않는데 어째서……!”
늦은 저녁 다시 궁으로 돌아와 세나르 왕비와 차를 나누는 루치아 공작의 얼굴도 덩달아 어둡게 일그러졌다.
그렇다.
분명 그 베이라의 말처럼 마법은 완벽했다. 궁 안의 사람들은 거짓말처럼 서서히 르베나를 잊어갔다. 간혹 그 존재에 대해 떠올리더라도 왠지 모를 붉은 눈을 떠올리며 소스라치게 싫어하곤 하였다. 그들이 르베나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은 듯 보였다.
모든 것은 정말이지 완벽했다.
오늘까지는.
“…어쩔 수 없지요. 세상에 완벽한 마법은 없다고 하니.”
공작의 말에 세나르 왕비가 제 입술을 세게 깨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동의를 표했다.
얼핏 너무나 쉽고 간단하며 완벽해 보이는 이 마법에는 두 가지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첫 번째, 대상을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것.
두 번째, 대상이 마력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
그렇기 때문에 이 마법은 르베나에게 쓰기 완벽했다.
그 덜떨어진 계집애에게 마력이 존재할 리 없거니와 외궁으로 옮겨가 로난의 통제하에 그 재수 없는 검은 머리칼 하나 보이지 않을 테니.
하지만 완벽했던 통제가 이번 일로 풀리고 말 것이다. 그년의 검은 머리가 다시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나타날 것이고 사람들은 점점 각성에서 깨어날 것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미래를 떠올린 세나르 왕비가 초조하게 말했다.
“다시 마법을 쓰면 안 될까요? 더 강하게!!”
그러자 공작이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르베나 공주를 외궁에 묶어 수단이 사라졌지 않습니까. 게다가 후벤 후작과 엮이게 된다면 이쪽에서 함부로 움직이기도 쉽지 않습니다.”
공작은 어두운 얼굴로 조용히 말했다.
“만에 하나라도 후벤 후작이 마법의 존재를 눈치챈다면 그것은 이번 사태와는 그 규모 자체가 다를 것입니다.”
“후벤 후작은 베이라가 아닙니다. 그가 어찌 안단 말입니까?”
세나르의 말에 루치아가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스트, 그자가 곧 수도로 올라온다고 하는군요. 아시다시피 그는 디오니스의 별이란 칭호를 달았을 정도의 마력을 가진 베이라입니다. 게다가 가스트와 후벤 경은 예로부터 친분이 두터웠죠. 큼……!”
루치아 공작의 말에 세나르가 아름다운 인상을 찌푸렸다.
“가스트… 그 영감탱이는 시골에나 처박혀 있을 것이지, 왜 하필 지금……!”
세나르 왕비가 가스트의 이야기를 듣고는 초조함으로 얼굴을 물들이자 곰곰이 생각에 잠겨있던 루치아 공작이 곧 생각을 정리한 듯 옅은 미소를 띠며 답하였다.
“왕비님, 이미 5년이란 시간을 기다리지 않았습니까? 앞으로 5년만 더 지나면 드록 왕자님께서 정식으로 성년식을 치루게 될 것입니다.”
공작의 얼굴에는 평온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5년은 꽤 긴 시간이지요… 어리고 힘없는 계집애가 사고로 죽기에 더없이 충분한… 그리고 늙은 왕이 세상을 떠나기에도 충분한… 그런 시간 말입니다.”
루치아 공작의 말이 끝나자 초조해하던 세나르 왕비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만족스러움이 가득 밴 아름다운 미소가 번져 갔다.
그래, 그건 더없이 완벽한 시나리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