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제1장 디오니스 (5)
“폐하, 이는 어떤 말로도 포장되지 않는 엄연한 학대입니다. 르베나 공주님은 전장에 참여한 기사들조차 얼굴을 바로 할 수 없을 정도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다시 고개를 숙인 후벤의 목소리는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이는 디오니스 왕궁, 아니 디오니스 모든 이들의 무관심이 빚어낸 참으로 참혹하고 부끄러운, 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부디 이 일에 관련된 모든 이를 엄중한 디오니스의 법으로 처단하시고 공주님이 신분에 맞는 합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후벤의 말에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던 루치아 공작이 입을 열었다.
루치아가는 메이슨가와 함께 디오니스 왕국에 단 둘뿐인 공작 가문이기 때문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는 현 왕비, 세나르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사실 르베나 공주님의 신분은 매우 애매하지요. 본래 공주가 혼인을 하면 남편의 가문으로 이적되어 그곳에서 딸을 키우는 것이 맞습니다. 그리고 왕위 계승권도 잃게 됩니다.”
그의 지적은 오래전, 이 공간에서 한번 다루어진 적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따지면 르베나 공주님은 당연히 저희 디오니스의 공주가 아니게 됩니다. 하지만… 흠… 우리는 모두 그런 르베나 공주님을 원래 신분에 맞지도 않는 공주로 올려 대접하였지요. 그 아비를… 모르니 말입니다… 크흠.”
잠시 말을 멈춘 루치아 공작이 가볍게 고개를 돌려 후벤을 보았다.
“한데 신분에 맞는 대접이라니… 어려운 문제로군요.”
곤란한 듯 말을 흘리는 루치아 공작의 태도에 후벤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루치아 공작의 말은 어찌 들으면 이치에 맞는 말이나, 결국은 미혼모인 루아나 공주를 한 번 더 공개적으로 욕보이고 그 태생인 르베나를 저격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루아나 공주는 어느 날 갑자기 임신한 채로 나타났고 르베나를 낳다 눈을 감았다. 갑작스러운 죽음의 순간에까지 남자의 이름을 담지 않은 채 말이다.
그녀의 입이 무거웠던 탓에 누구도 르베나의 아버지를 감히 추측하지 못했다. 그러니 르베나를 공주라 부르며 왕궁에 머무르게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배려이자 아량인 셈이었다.
결국 루치아 공작은 이번 발언으로 루아나 공주의 바르지 못한 행실과 함께 르베나의 출생을 귀족들에게 또 한 번 각인시켰다.
그렇게 태어난 그녀는 엄연히 따지자면 왕가의 사람이 아니라고.
미천한 핏줄의 아이에게 이런 관심은 너무나 과분하다고.
가히 세나르 왕비의 아버지다웠다.
그리고 그의 말에 다른 공작가의 가주인 메이슨 공작이 의견을 냈다.
희끗한 흰머리가 그의 나이를 짐작케 했지만 노련하고 날카로운 눈빛은 그를 결코 가벼이 볼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공작이라는 위치에도 중립을 선호했기에 모두의 관심이 그에게 절로 쏠렸다.
“하나 르베나 공주님의 신분은 제노스 폐하께서 이미 오래전 결정한 일입니다. 또한 세나르 왕비께서 르베나 공주님을 본인의 딸처럼 키우시겠다 엄포를 놓으셨기에 르베나 공주님의 신분은 10년 전 그때, 공주로서 디오니스 왕가 명부에 명시되었습니다.”
중립파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메이슨 공작의 말에는 무게감이 가득 실려 있었다.
“늙은 신은 그저 이 디오니스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어린 공주를 향한 핍박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잔인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또한 여기 모인 모두가 공주님을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마땅한 바,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에 부끄러움과 수치심이 들 뿐입니다.”
메이슨 공장의 말에 모두 당황한 듯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또한 메이슨 공작이 말한 10년 전을 떠올린 세나르 왕비 역시 미세하게 표정을 구겼다가 금방 가다듬으며 말했다. 그 순간에도 그녀의 눈이 제노스 왕을 빠르게 훔쳐보는 듯했다.
“맞습니다. 르베나는 루아나 공주의 하나뿐인 딸. 나 세나르는 어미를 잃은 르베나를 제 딸처럼 키우겠다 약속하였습니다. 그러니 르베나는 공주의 신분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세나르의 말에 루치아 공작이 얼른 말을 보태었다.
“보통의 왕비들은 보호자 없는 공주의 소생을 퇴궁 시키거나 성인이 될 때까지 아가씨로 부르며 양육의 책임만을 겨우 다할 뿐입니다. 하지만 왕비님은 한사코 르베나 공주를 받아들이겠다 하셨죠. 이같이 넓은 왕비님의 아량과 마음은 이 디오니스의 축복이 아닐는지요.”
루치아 공작은 언제 르베나의 신분을 운운했냐는 듯 세나르 왕비의 후한 인성과 인품을 귀족들에게 강조하였다. 이런 상황에서조차 르베나를 인정하는 왕비의 발언은 그녀가 이번 일과 무관할 것이라는 이미지를 심기에도 딱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 속내를 뻔히 아는 후벤은 세나르 왕비와 루치아 공작의 가증스러운 얼굴을 향해 조용한 분노를 담아낼 뿐이었다.
가만히 그들의 공방을 계속 지켜보던 제노스 왕이 이내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렇게 계속 공방만 해서는 해결이 나지 않겠군. 메이슨 공작의 말대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공주가 훈육을 받은 것이냐 학대를 받은 것이냐 하는 주제이니 이것은 전문가의 의견을 듣도록 하지. 여봐라, 궁의는 어디 있나, 의사를 들라 하라.”
제노스 왕의 말에 시종이 문밖에서 기다리던 궁의를 불러들였다. 왕의 부름에 서둘러 입실한 후 무릎을 꿇은 궁의가 인사를 올렸다.
“강대한 힘의 근원, 그 중심에 앉아계신 폐하에게 디오니스의 영광이 함께하시길.”
그의 인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제노스 왕이 말하였다.
“고개를 들라. 그리고 말해보라. 르베나 공주는 훈육을 받은 것인가, 학대를 받은 것인가.”
제노스왕의 물음에 궁의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생각과는 달리 질문이 너무 간소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했고 안절부절 못하며 어찌 대답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의 갈등이 뭔지 곧바로 알아챈 후벤이 강한 어조로 그에게 엄포를 놓았다.
“폐하의 명이다. 그대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이 공주님의 신상에 대해 고해야 할 것이다.”
후벤의 말에 꿀꺽 침을 삼킨 그가 더듬더듬 떨리는 입을 열었다.
애초에 거짓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많은 귀족들과 제노스왕 앞에서 큰일을 고하려니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솟았기 때문이다.
“오늘 본 공주님의 환후는 심각… 합니다. 아마 한 달간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으시고도 한동안 요양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워낙 같은 부위를 여러 번 맞으시어 흉이 지시거나 다른 문제가 부가적으로 발생될 수 있습니다.”
궁의에 말에 무거운 침묵이 회의장 안을 휘감았다.
그들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핀 궁의가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하, 하지만 공주님의 상태는 단지 그것만이… 아닙니다!!”
한번 말이 트이니 용기를 얻은 듯 궁의가 막힘없이 말을 잇기 시작했다.
“왕궁 시녀를 통해 르베나 공주님의 몸을 모두 살펴본 결과, 공주님은 극심한 영양결핍에 시달리셨습니다. 열 살 지금의 나이를 생각했을 때 영양 상태는 고작 일고여덟 살 수준에 그칩니다. 또한 몸 곳곳에 자리한 상처 족히 몇 년은 되어 보이는 것부터 얼마 되지 않은 것까지 다양합니다.”
궁의의 말에 후벤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대의 말대로라면… 르베나 공주님께 가해진 폭력이… 몇 년 동안… 지속된 것이란 말인가?”
후벤의 물음에 궁의가 무거운 얼굴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르베나 공주님께서는 몇 년에 걸쳐 심각한 학대를 받은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것을 단지 훈육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학대입니다, 폐하. 열 살 여자아이가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지나, 치게… 가혹한 학대 말입니다.”
궁의의 말을 들은 여기저기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싶지 않던 그림자가 선연하게 그들의 앞으로 다가와 그들의 무관심함과 무자비함을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그들을 바라보던 궁의는 방에 두고 나온 작은 인영을 생각했다.
어린 르베나 공주의 몸은 끔찍했다. 바싹 마른 몸은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만 같았다.
여기저기 남은 상처와 흉터는 얼마나 오랜 시간 고통 속에 시간을 보내왔는지 알 수 있는 흔적이었다. 생기 없이 푸석거리는 머릿결은 여느 평민 아이보다도 못했고, 영양실조로 표면이 갈라진 손발톱은 여기저기 부러지고 찢어져 있었다.
모두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열 살 소녀가 혼자 감내하였을 상처들을 본 순간 그는 제 안에 뜨거운 것이 끊임없이 울컥울컥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가엾다는 말로는 표현이 되지 않았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그녀의 현재는 디오니스 모든 귀족과 왕족의 어두움을 그대로 반영하는 그림자와 같았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회의실 안에 깊은 어둠을 드리우기 충분하였다.
* * *
쨍그랑.
날카롭게 던져진 유리잔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와 함께 방문 앞을 지키는 시녀들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리고도 한동안 화려한 방 안에서는 온갖 물건 던지는 소리와 함께 깨지는 소리들이 난무하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방의 주인, 세나르 왕비의 흐트러진 머리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루치아 공작이 말하였다.
“다 하셨으면 이제 그만 진정하고 좀 앉으시지요. 눈이 많습니다.”
공작의 말에 세나르 왕비가 눈을 부릅 치켜뜨며 소리쳤다.
“진정, 진정이라뇨!! 아버님께선 모르시겠습니까? 이제 르베나는 외궁에 고립된 잊혀진 존재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예전처럼, 예전처럼… 모두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디오니스의 유일한 공주가 될 거라고요!!”
소름 끼치도록 선연한 분노를 담은 세나르 왕비의 말에 루치아 공작이 한숨을 내어 쉬며 말하였다.
“이미 벌어진 일입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왕비님이 그 시녀들의 일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모든 귀족들에게 인지시키고 다음 방법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공작의 말에 세나르 왕비는 모든 것이 못 견디게 짜증 난다는 듯이 소리쳤다.
“그딴 것이야 아버님께서 해결해 주시면 되지요! 그 멍청한 년들이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리면 그만이고요.”
왕비의 말에 루치아 공작이 빤히 세나르를 바라보다가는 이내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씀입니다. 왕비님, 언제나처럼 이 아비를 믿으시면 되는 일이지요. 모두 이 아비가 잘 해결 할 테니. 그저 왕비께서는 이제부터 연기만 잘하시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인내심을 꾹꾹 눌러 말하는 공작의 말에 왕비가 슬쩍 눈치를 보고는 풀썩, 제 의자에 앉았다.
루치아 공작은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법이 없지만 한번 화가 나면 제아무리 왕비라 하여도 그냥 넘어가지 않을 사람임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이 제 아비였고.
조금 진정한 듯한 세나르 왕비가 과장되게 처연한 눈빛을 만들어 내었다.
“그야 너무나 쉬운 일이지요. 이 방에 틀어박혀 우는 흉내를 내는 것쯤이야! 저는 다만 너무 아까워서 그럽니다, 아까워서! 저희가 몇 년에 걸쳐 공들인 저주……!”
“나가 보거라!”
세나르 왕비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루치아 공작이 옆에서 묵묵히 깨진 유리를 치우던 시녀들에게 일갈하였다. 이에 시녀들은 익숙한 듯하던 일을 놓고는 일사분란 하게 방을 나갔다.
시녀들이 모두 나간 것을 지켜본 루치아 공작이 화가 난 듯 다소 낮은 어조로 말하였다.
“누누이 말씀드렸지요! 그 입을!! 그 입을 좀 조심하라고!!”
공작의 말에 순간 제가 저지른 잘못을 깨달은 왕비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경솔한 세나르를 본 루치아 공작이 잠시 머리를 식히라며 자리를 비웠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는 하지만 분명 오늘 흔들린 귀족들의 여론을 다시 휘어잡기 위한 일정이 있음을 세나르는 의심하지 않았다.
어느새 혼자가 된 방 안, 조금씩 흥분이 가라앉은 세나르는 머릿속 깊이 잠들어 있던 어느 기억의 틈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환한 밀빛 머리에 따뜻한 녹색 눈빛.
언제나 미소 짓던 그 재수 없는 계집, 루아나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