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5화 (5/276)

5화

제1장 디오니스 (4)

같은 시각.

고급스럽지만 주인의 성품을 나타내듯, 사치스럽지는 않은 방에서 연신 불안한 듯 왔다 갔다 하던 늙은 시종이 제 주인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폐하… 이 늙은것이라도 보내주십시오. 제발…….”

애달픈 그의 청에도 그의 주인, 제노스 왕은 그저 무감각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이 향한 곳은 책상 위 작게 놓여있는 어느 초상화였다.

굽이치는 물결모양의 밝은 밀빛 머리에 따뜻한 녹색 눈.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하나뿐인 딸.

루아나 공주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그를 평생 모셔온 늙은 시종조차 아무것도 읽을 수 없는 무기질적인 느낌만이 가득하였다.

그리고 그런 제노스를 바라보는 늙은 시종의 눈은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멀리 떨어진 창밖으로 향하였다.

외궁, 루아나 공주의 어린 딸, 르베나가 머물고 있는 그곳으로.

“어, 어떻게…….”

제 손에서 피가 터져나오는 고통도 잊고 로난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잘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런 로난에게 후벤의 분노에 찬 녹색 눈동자가 향했다.

흠칫.

순간 로난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저 녹색 눈이 당장에라도 저를 갈기갈기 찢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후벤의 뒤에서 말릴 틈도 없이 한 인영이 뛰어나왔다.

“공주님! 르베나 공주님!!”

그녀, 사나가 달려들어 르베나의 곁에 있는 두사와 하나를 있는 힘껏 밀쳐 버렸다.

힘없이 툭 밀쳐진 그녀들도 로난과 같이 당황하여 어안이 벙벙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 시녀들을 죽일 듯 노려보는 것도 잠시, 서둘러 눈길을 돌린 사나의 갈색 눈동자가 방황하다가는 이내 벌겋게 물들었다.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었다. 너무나 작고 마른 여자아이의 몸에는 땀과 피가 흥건하였다. 검은 머리카락은 땀에 잔뜩 젖어 있었고 몸은 마치 시체처럼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아아… 르… 베나… 공주님… 아…….”

사나의 떨리는 손이 조심스럽게 르베나에게 향했다.

하지만 사나의 손이 르베나의 젖은 머리칼에 닿기도 전, 그녀의 손을 사납게 붙잡아 채는 어린 손길이 있었다.

건조한 나뭇가지처럼 바싹 마르고 작은 손, 아픔으로 덜덜 떨리는 손가락.

그럼에도 스스로를 지켜내려 하는 미약한 힘.

그 더없이 초라하고 마른 손이 사나가 느끼는 고통을 더해 주었다.

힘겹게 거친 숨을 몰아쉬는 르베나가 무겁게 제 눈을 들어 갈색 눈 가득 눈물이 고인 사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붉은 눈에 사납게 몰아치던 검은 빛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씁쓸함, 아련함, 그리움 등의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몰아쳤다.

르베나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를 힘겹게 쥐어 짜내며 말했다.

“말… 했지 않나… 내, 일에… 관여치 말라고…! 하아……. 돌아가…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다신!”

마치 온몸의 남은 힘을 짜내는 것처럼 말하는 르베나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쉬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때문일까. 사나의 눈에서 힘겹게 참던 눈물이 순간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싫어요, 공주님… 흑… 이제 됐어요……. 이제… 흐읍… 기다리는 건 그만할래요.”

사나의 말에 르베나가 더 말을 이으려는 찰나, 사나는 듣지 않겠다는 듯 르베나의 몸을 조심히 그리고 느리지 않게 그러 안았다.

상처 부위와 피가 번진 다른 부위가 최대한 닿지 않게 조심하며 르베나의 몸을 꼬옥 안았다. 동시에 르베나는 살갗을 통해 전해지는 사나의 떨림을 고스란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나던 따뜻한 햇볕 냄새가 피비린내와 함께 르베나를 훅 덮쳐 왔기 때문에.

단지 그것 때문에 르베나의 붉은 눈은 스르르 감기고 있었다.

‘이렇게 눈을 감으면 안 되는데. 고작 이런 일에… 이렇게…….’

르베나는 멀어지는 의식을 잡으려 노력했지만 마르고 힘없는 어린 육체는 더 이상의 아픔을 거부하며 까무룩 잠들어버렸다.

그렇게 르베나가 기절한 모습에 사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더욱 꼬옥 르베나를 그러안자 후벤이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얼굴로 말하였다.

“다한 경, 사나 양과 함께 공주님을 본궁 의사에게 모시고 가라, 당장!!”

명을 받은 기사 하나가 착잡한 표정으로 조심스레 르베나를 안아 들고는 발길을 서둘렀다.

아니, 서두르려 했다. 순간 그의 몸이 흠칫 떨리지만 않았다면.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벼운 소녀.

그녀가 제가 지키고 보호해야 할 디오니스의 유일한 레이디, 르베나 공주라는 사실이 처음으로 그가 왕국의 기사인 것을 부끄럽고 후회스럽게 만들었다.

제 손에 전해진 가벼운 무게가 이 순간의 그를 미치도록 수치스럽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다른 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이 외진 궁에서 공주님은 어떠한 시간을 보낸 것인가.

왕국의 모든 로얄 패밀리, 특히 유일한 레이디인 그녀를 보호해야할 기사단은 어째서 그녀의 안위를 이 순간까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나.

모두가 이 순간 느끼는 짙은 무력감과 수치스러움은 그들의 살과 뼈를 에일 만큼 거대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후벤의 날카로운 빛을 담은 녹색 눈이 로난과 멍하니 앉아있는 두 시녀를 향했다.

순간 후벤은 치솟는 살기를 억지로 다잡았다. 당장이라도 저것들을 도륙해내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를 모든 이성의 찌꺼기까지 그려 모아 눌렀다.

저것들은 여기서 편히 죽으면 안 된다. 적어도 저들은 저들에게 맞는 최후를 맞이해야 한다.

후벤의 살기 어린 진득한 시선이 그들에게서 떨어져 뒤에 시립한 기사들에게 향했다.

“나머지 기사들은 저것들을 기사단 감옥에 구금해라. 나와 폐하의 허락 없이는 어느 누구의 면회도 허용치 않겠다!!”

후벤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기사단의 발걸음이 세 명의 시녀들을 향했다.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기사단의 그림자가 짙어질수록 그녀들의 얼굴도 사색이 되어 갔다.

소리소문없이 자행되던 무자비한 감금과 학대가 드디어 끝을 맺는 순간이었다.

* * *

“뭐라?”

날카로운 고음이 방안을 찢어 놓을 듯 울렸다.

제 손에 쥐어진 찻잔을 세게 내려놓은 여자, 세나르 왕비가 제 앞에 고개를 숙이고 덜덜 떠는 시녀를 노려보았다.

“다시 말해 보아라. 뭐가 어째?”

세나르 왕비의 말에 시녀가 온몸을 벌벌 떨며 다시 고하였다.

“후, 후벤 경과 제1기사단 정예 기사분들이 외, 외궁에 조사를 가셨다가 시녀… 들이 르베나 공주님을 때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합니다.”

시녀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본궁 시녀인 사나 양과… 기사 하나가 공주님을 왕궁 의사에게 모시고 갔고… 부, 분노한 후벤 경이 시녀 셋을 기사단의 감옥에 구금… 하고 누구의 면회도 허락지 않는다 하셨답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게, 게다가… 지금 그 일로 후벤 경이 폐하께 보고를 올리러 가셨고 급히 귀족회의… 가 소집되어 본궁이 발칵 뒤집혔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좋지 못한 소식만 전하는 시녀의 보고에 세나르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화려한 이목구비는 구겨져도 여전히 예뻤다.

하지만 구겨진 그녀의 표정에는 아름다움 없는 독기만이 가득했다.

“멍청한 것들! 그리 조심하라 일렀는데……!”

찻잔을 쥔 세나르 왕비의 손이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하필 걸려도 후벤 후작이라니……!”

후벤 후작의 자로 잰 듯 반듯한 성정과 칼 같은 행동력은 디오니스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그는 누구보다 정의로운 기사였으며 정의에 따라 즉각적인 행동을 실천할 만큼의 실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디오니스 모두의 존경과 사랑을 받는 왕국의 기사 단장임과 동시에 귀족들의 신임을 한 몸에 받는 후작가의 가주였다.

게다가 루아나 공주와도 어릴 때부터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 이번 일을 그 자에게 걸린 것이 보통의 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빠르게 생각을 끝낸 세나르 왕비가 앞에 선 시녀에게 고했다.

“어두운 색으로 된 수수한 드레스를 꺼내거라. 내 바로 본궁으로 향할 것이다.”

방 안의 온갖 사치를 두른 장식품들보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세나르의 명이었다. 순간 세나르 왕비에게 그런 드레스가 있었나 생각하던 시녀는 매서운 세나르의 눈을 보고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의 회의실 앞.

보기만 해도 화려한 음각이 두드러진 방문은 한때 전성기의 디오니스를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그 방문이 열리자 여기저기 당황한 얼굴로 웅성거리는 귀족들과 디오니스의 왕, 제노스

그리고 이번 일의 보고자인 후벤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들 긴급 귀족회의 소집에 따라 입궁하며 대략의 일을 전해 들은 터였다.

그 일을 듣고 곤란해하고, 분노하며, 당황하는 모든 감정들이 소란스럽게 제자리를 지켰다.

세나르 역시 어두운 남색의 드레스를 입고 늦지 않게 자리했다.

“모두 앉지.”

모두의 착석을 권하는 제노스 왕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방 안의 누군가는 그 무감정한 목소리에 안심하였고, 또 누군가는 분노를 느꼈다.

분명 제노스 왕께서는 누구보다 루아나 공주님을 아끼고 사랑하셨다. 루아나 공주의 죽음 이후 마음의 병이 깊어졌다고는 하나 분명 아기인 르베나를 보는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깃들어 있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도 저리 평온한 그의 반응은 많은 이들의 생각을 하나로 압축시켰다.

‘르베나 공주가 버려진 것만은 확실하군.’

이런 귀족들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노스 왕이 후벤을 향해 말하였다.

“후벤 경은 모두의 앞에서 오늘의 일을 고하라.”

제노스 왕의 감정 한 톨 없는 명에 후벤이 제 분노를 억지로 집어넣으며 입을 열었다.

“강대한 힘의 근원, 그 중심에 앉아계신 폐하에게 디오니스의 영광이 함께하시길. 신은 디오니스 기사단의 기사단장이자 후벤 후작가의 가주, 후벤 드 제르입니다.”

고개를 숙인 후벤은 주먹을 꾹 쥐고 말을 이었다.

“저는 현재 왕국 내에서 벌어진 기사 실종 사건을 수사하다 실종 당한 이가 외궁의 시녀와 관련되어 있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해서 폐하의 승인하에 외궁을 불시에 조사하러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연찮게… 르베나 공주님의 학대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음…….”

“흐음…….”

오면서 들었던 이야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을 갖던 귀족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디오니스가 아무리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해도 일국의 공주가 방치되어 학대당했다는 사실은 디오니스의 치부이자 절대 알고 싶지도 않은 비밀과도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일이 지금 후벤 경의 입을 통해 덮을 수 없는 형체가 되어 나타났다.

그때 떨리는 목소리 하나가 방 안을 울렸다.

“아아… 어쩜… 말도 안 돼요, 후벤 경… 학대라니요……. 혹시… 혹시나 시녀들이 훈육하는 모습을 오해하신 게 아니신지요? 그들은 제가 믿는 자들이에요. 결코 우리 르베나 공주를 해 할 자들이 아니랍니다.”

정말로 이 일로 충격을 받은 듯한 세나르 왕비가 힘겹게 입술을 뗐다.

그녀는 이 일에 정말로 충격을 받은 것처럼 손을 부들부들 떨며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이제 갓 삼십 대 중반에 접어드는 매혹적인 왕비의 처연한 모습에 방에 있던 귀족들은 본능적인 보호본능 느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이때다 싶은 동의의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린 공주의 훈육은 항상 있어 왔던 일입니다. 내 후벤 경의 넘치는 충정은 익히 아는 바이지만 작은 일을 가지고 굳이 문제를 키우지는 말자, 이 말입니다.”

“맞습니다. 어린 공주의 훈육이 어디 하루 이틀 일입니까.”

“이는 어찌 보면 내명부의 일인데 어찌 귀족회의까지 소집한답니까, 허허.”

한 후작 가문 가주의 말을 신호로 여기저기 웅성거림이 퍼졌다.

그리고 그때 처음 말을 시작한 후나 후작을 싸늘한 눈빛으로 일갈한 후벤이 소리쳤다.

“기다란 가죽 채찍으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어린 공주님을 때리는 건 도대체 어느 나라의 훈육방법입니까? 장성한 기사들이 상주하는 기사단에서도 그런 체벌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 뒤에 이어진 말은 거칠고 조야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면 후나 가문에서는 어린 자녀들의 훈육을 이런 식으로 하십니까?”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후벤의 말에 처음 의견을 냈던 후나 후작이 멋쩍은 듯 입을 다물었다.

어느 누구도 그런 식으로 자식을 훈육하지는 않는다. 노예라면 모를까.

순간 후나 후작의 머릿속 생각을 공감한 듯 모두의 입이 다시 다물어졌다.

세나르 왕비를 편들기 위해 더한 말들이 제 발등을 찍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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