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제1장 디오니스 (3)
디오니스의 기사단장 후벤과 사나는 십여 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빨랐으나 동시에 조심스러워 보였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벤은 주위를 한번 둘러본 후 짐짓 목소리를 낮춰 사나에게 말했다.
“폐하께는 조사 중인 사건의 범인과 연관된다 의심되는 시녀가 외궁에 든 것 같다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그녀가 증거를 감출 곳이 오직 외궁인 듯하여 조사가 필요하다고도 고하였습니다.”
후벤의 말에 사나가 걱정스레 말하였다.
“왜 사실대로 말씀하시지 않으시고요? 폐하라면… 비록 르베나 공주님께 무관심하셔도 학대를 방치할 성정은 아니신데요.”
사나의 말에 후벤이 작게 한숨 짓고는 말했다.
“폐하는 그러하시겠지요. 하지만 궁에는 보는 눈과 귀가 많습니다. 사나 양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사나는 단번에 그의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폐하는 분명 학대를 방치할 분이 아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단의 원흉인 세나르 왕비가 이를 알게 되면 분명 어떤 수를 써서든 방해를 할 것이다. 차라리 방해만 하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외궁을 조사한다고 세나르 왕비가 가만 있지 않을 텐데요?”
제가 이제껏 외궁에 오지 못한 것 역시 세나르 왕비의 짓임을 떠올리며 걱정이 가득 담긴 사나의 말에 후벤이 웃으며 말하였다.
“오늘 세나르 왕비님은 드록 왕자님과 외국 사신단과의 오찬자리에 가셨습니다. 아마 저녁때나 되야 돌아오실 테지요. 중간에 누군가가 전달을 하더라도 빠져나오는 데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후벤은 안심하라는 듯 단단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저희 기사단 단원 하나가 호위로 따라갔으니 만약 일정이 변경되거나 다른 눈치를 보이면 빠르게 기별해 올 것입니다.”
후벤의 말에 사나의 얼굴에 다행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외궁을 향하는 그녀의 눈에는 슬픔과 어두움이 번져갔다.
“정말… 생기라고는 하나 없는 곳이네요…….”
이어지는 사나의 말이 무엇인지 후벤은 듣지 않아도 알았다.
그리고 후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곳은 어린 공주의 외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삭막했다.
아니 누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아니까 삭막하다 표현했지 그냥 버려진 궁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불안한 무엇인가가 후벤의 가슴을 두드려 대고 있었다.
“르베나 왕녀님이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하신 거 같아요. 제발 도와주세요, 후벤 경!”
간절히 부탁해온 그녀의 부탁을 여러 번 거절하였음에도 결국은 이곳에 온 것을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지금이 끔찍하게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후벤이 데려온 십 여명의 기사들 역시 원인 모를 두근거림에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후벤이 조사 중인 사건과 관련하여 저희들을 차출했다 알고 기사단을 출발했다.
하지만 그들의 걸음이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외궁으로 향하는 순간,
오늘 본인들이 맞닥드리게 될 일이 단순 조사는 아닐 것이라 직감했다.
그리고 후벤은 조용히 기사들에게 손짓하며 외궁입구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입구로 들어서는 조심스런 발걸음과 함께 후벤의 머릿속에는 조금 전의 일이 잠시 떠올렸다.
* * *
외궁의 조사 허락을 구하는 후벤에게 디오니스의 왕, 제노스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말하였다.
“경에게 외궁의 조사를 명한다. 경은 한 치의 의문도 남김없이 조사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명을 받잡습니다. 디오니스의 영광이 폐하와 함께.”
허락을 구한 후벤이 제노스 왕의 방을 나서는 순간 제노스의 음성이 나지막히 후벤의 예민한 청각을 파고들었다.
“고마워하겠군… 우리 루아나가…….”
흠칫.
제노스 왕의 말을 들은 후벤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렸으나 그곳엔 좀 전과 다름없는 무표정한 얼굴의 왕이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 * *
‘분명 들었던 거 같은데.’
확실치 않은 음성의 진위를 떠올린 후벤이 고개를 작게 저어 생각을 떨쳐내고는 침착하지만 빠른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뒤로 후벤을 따르는 기사들의 발걸음이 작은 진동과 소리를 만들어냈다.
사실 이 작은 궁을 뒤지는데 십 여명의 정예기사들은 많다면 많은 인원이었다.
하지만 만약 사나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일에는 반드시 증인이 필요했다.
모두가 믿을 수 있을 만큼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으며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지 않는 충직한 사람들.
디오니스 왕국의 제1기사단은 모두 실력으로만 뽑힌 최고의 정예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명예와 긍지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겼고 어느 누구도 그들이 명예와 긍지를 더럽히는 일을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후벤은 이들만큼 사람들의 믿음을 얻으며 좋은 증인이 되어줄 존재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스윽-.
기사들의 옷깃 스치는 소리가 선명하게 전해질 정도로 궁은 조용했다.
왕위 계승자 중 하나인 어린 공주가 살고 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단촐했으며 겨우내 청소는 하였지만 궁 안 어디에도 그 이상의 손길과 정성이 보이지는 않았다.
심지어 외궁의 삼 층에 자리한 르베나의 방문을 향하는 동안 그들은 쥐새끼 한 마리 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암시하는 바에 모두의 표정이 점차 어둡게 가라앉았다.
짝. 짜악.
그리고 2층을 벗어나 르베나가 기거하는 3층에 가까워지는 순간, 그들에게 처음으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주 날카롭고, 불길한 진동을 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다소 높은 음성의 주인은 무엇인가에 분노한 듯 계속해 소리쳤다.
점차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기사들에게 그 소리가 형태를 갖추어 박혀온 것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러운 새끼 마녀! 더러운 벌레 새끼! 감히 그 벌건 눈으로 날 쳐다보다니! 너 같은 건 죽어야 해! 죽어!! 이 새끼 마녀야!!”
그리고 제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사나의 온몸은 사시나무처럼 떨려오기 시작했다.
짝. 짜악. 짝.
“눈 깔아! 당장 눈 깔라고!!”
소름끼치는 분노를 담고 내쳐지는 소리에 사나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떨리는 손을 들어 방문에 가져다 대려는 찰나, 다가온 큰 손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막았다. 눈물 가득한 갈색 눈이 제게 다가온 손의 주인, 후벤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벤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 기사들에게 작게 말했다.
“사나 양을 뒤로 모셔라. 문은 내가 열고… 너희가 뒤를 따른다. 사나 양은 맨 뒤로… 모시도록.”
후벤의 말뜻을 알아들은 기사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사나를 뒤로 보내는 기사들의 표정에는 차마 표현할 수 없는 어둡고 무거운 감정들이 가득하였다.
무수한 적들을 베고 신마전쟁에 참여하여 왕국을 지켰던 디오니스의 정예기사인 그들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 문을 열고 보게 되는 것은 그 어떠한 전쟁의 장면보다 그들의 마음에 처참하고 선연한 흉터를 남기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을 사나 양이 먼저 보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 역시도.
이윽고 문 앞에 선 후벤이 문고리를 잡아 돌린 순간, 이윽고 모두가 알게 되었다.
그들의 직감은 불행하게도 결코 틀리지 않았다는 걸.
촤악! 착!!
아까부터 계속되는 매질에 르베나는 제 입안 가득 피가 고여가는 것을 느꼈다. 비릿한 향이 코를 타고 진동했다. 언제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입술을 짓씹는 습관 때문이었다.
‘죽여 버리고 싶다… 죽이고… 싶어.’
지독히도 춥고 끔찍하게도 더러운 방. 구역질만 나왔던 음식. 언제나 성한 곳이 없던 제 몸.
매질을 당할 때마다 떠오르는 감정은 단 하나뿐. 지웠던 과거가 이제는 더이상 과거가 아니라는 사실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여전히 허약하고, 여전히 바싹 마른 이 몸으로 돌아온 것 또한.
순간 입술을 꽉 깨물은 르베나의 눈이 검게 일렁였다.
흠칫.
동시에 르베나의 몸에서 알 수 없는 기운이 실낱같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 기운이 몸에 닿은 순간, 시녀 두사는 제 목이 강하게 조여 오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기분이 아니었다.
그것은 실체가 뚜렷한 고통이었다.
“크… 흑!!”
목이 졸리는 느낌에 고통스러워하던 두사가 문득 마주친 르베나의 붉은 눈동자는 그 순간 검게 일렁이고 있었다. 동시에 르베나의 피 묻은 입가에는 이 상황과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진한 미소가 번져갔다.
갑자기 눈이 뒤집힐 것처럼 올라간 두사가 흰자위만 보인 채로 끅끅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두사의 갑작스러운 모습에 놀란 시녀 하나도 르베나를 잡던 손을 엉겁결에 놓아 버렸다.
르베나는 반쯤은 놀라고 반쯤은 희열에 찬 눈으로 두사를 더욱 집요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눈이 뒤집히면서도 르베나의 붉은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두사를 보고서는 로난이 급히 제 손에 잡힌 채찍을 더욱 세게 내리친 것은 그때였다.
“윽……!”
다시 내리쳐진 고통에 르베나의 몸이 방어적으로 둥글게 휘어졌다.
동시에 르베나의 눈동자에서 가까스로 시선을 떼어낸 두사가 갑자기 막힌 숨이 풀린 사람처럼 급하게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헉… 허억… 켁……!! 헉헉…….”
그 모습을 모두 본 로난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얼른 저 계집애를 잡아! 저 불길한 붉은 눈이 재수 없어 그런 거야!! 그러니까 저 재수 없는 눈을 보지 말고 그냥 잡으라고!!”
로난은 문득 며칠 전 르베나의 눈을 보고 겁먹었던 자신과 방금의 두사를 겹쳐 보았다.
그리고 본능적인 거부감과 함께 그보다 짙은 공포가 그녀의 몸을 스멀스멀 타고 오르는 것을 느꼈다.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멈춰야 한다고. 그렇지 않다면 저 눈에 먹혀 버릴 거라고.
하지만 로난은 그런 생각이 들수록 채찍을 더욱 높게 들어 올리고 더욱 세게 후려쳤다.
‘아니, 날 멈추게 할 수 있는 건 없어. 이런 비쩍 마른 계집애 따위에 겁먹는다는 건 말이 안 돼! 어떻게 왔는데! 이 자리까지 내가 어떻게!!’
로난은 마치 르베나를 때리는 행위로 제 안의 두려움을 없앨 수 있다고 믿는 사람처럼 더욱 세게 채찍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고래고래 소리를 내지르며 제 팔이 덜덜 떨려도 멈추지 않았다.
“죽어!! 차라리 죽어 버려!! 이 마녀 같은 년!!”
깊은 두려움과 분노가 제 음성을 타고 공기 중에 내질러졌다.
사실 로난은 전에 한 번도 르베나를 이렇게까지 때린 적이 없었다.
르베나는 언제나 제게 머리를 조아리고 살려달라고 빌었으니까.
그리고 그녀는 언제나 그런 르베나의 모습을 감상하며 티가 나지 않을 부위에만 매질을 했으니까.
하지만 두려움에 잠식당한 로난은 이성을 잃었고, 지금 제 팔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채찍을 휘둘러댔다.
이 궁 안에서 단 한 사람, 자신보다 지위가 높지만 유일하게 막 대할 수 있는 르베나는 영원히 그렇게 남아야 했기 때문에. 비루하고 버려진 계집으로. 제가 언제든 화를 풀 수 있는 왕족으로 말이다.
르베나가 더 이상 순종하지 않는다면 다시 그렇게 만들면 될 일이었다.
로난이 다시금 채찍을 휘두르려 제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홱……!
로난의 무자비한 손길에 날카롭고 차가운 힘이 와 닿은 것은 찰나의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열고 들어선 후벤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과 경악 그리고 곧이어 분노가 차례로 물들어 갔다.
확 밀려드는 피비린내.
그리고 그 앞에는 흥분하여 머리를 잔뜩 헝클어뜨린 채 긴 가죽 채찍을 흔드는 시녀 로난과 죽을힘을 다해 르베나를 붙잡는 두 명의 시녀가 보였다. 그중 한 시녀는 창백하게 질린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벤의 떨리는 눈이 시녀들을 향했다가는 곧 그녀들이 붙잡고 있는 작은 그림자로 향했다.
순간 후벤의 눈가가 작은 경련을 일으켰다.
작디 작은 그림자.
그녀의 머리카락을 따라 흐르던 굵은 물결모양을 그대로 복사해놓은 것 같은 새까만 머리가 바닥에 흐드러져 있었다.
작고 마른 아이의 몸은 어디가 어디인지도 모를 정도로 피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아이의 몸은 잡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힘없는 시체처럼 퍼져 있었다.
“내 아이를 잘 부탁해, 후벤. 우리 아이한테 좋은 삼촌이 되어 줄거지?”
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후벤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그리고 그녀의 굽이친 머리모양을 닮은 너무나 작은 소녀가, 그녀의 마지막 모습처럼 힘없이 퍼져 있는 모습에 후벤은 저도 모르게 검을 빼어 들었다.
놀란 기사들이 말릴 새도 없이 후벤은 제가 느끼는 끔찍한 감정을 떨쳐내듯 눈앞의 것을 베어냈다.
홱……!
날카로운 은빛이 쇄도하더니 뱀의 몸통처럼 꿈틀대던 채찍이 잘려 나갔다.
한없이 작고 마른 어린아이를 족쇄처럼 얽어매고 고통을 아로새기던 줄이 잘려 나간 순간이었다.
동시에 채찍을 들고 있던 로난의 손에서도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아악……!!”
갑작스럽고 강렬한 통증에 제 손을 보며 울부짖는 로난과 놀란 두 시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한 곳을 향했다.
르베나의 방문. 누구도 오지 않았고, 누구도 오지 않았어야 하는 그 공간.
그곳에 십여 명의 기사와 분노한 후벤 그리고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는 본궁의 시녀, 사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