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3화 (3/276)

3화

제1장 디오니스 (2)

따뜻하게 말린 햇볕 냄새, 부드럽고 다정한 갈색 눈,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미소.

르베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문득 눈이 마주친 사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 돌아오기 이전의 삶, 그곳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동안 그녀의 모습은 한결같았다.

지금의 르베나와는 달리.

르베나는 그때처럼 못 먹어 바싹 마른 상태였지만 적어도 더러운 몰골은 아니었다.

과거로 돌아온 시기가 따듯한 이른 봄인 탓에 차가운 물로나마 매일 목욕을 했기 때문이고, 어릴 때의 기억 때문에 강박처럼 커서도 제 몸을 깨끗이하는 일에는 철두철미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나는 먼 옛날의 기억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을 한 채 제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르베나… 공주님?”

하필 지금 만나다니.

아직도 목 근처에 남아있는 붉은 자국을 안 보이게 슬쩍 돌린 르베나가 제게 다가온 사나에게 싸늘한 얼굴로 일갈했다.

“난 너에게 인사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 역시 왕족인 내게 먼저 말을 거는 무례를 범하지 말라.”

흠칫.

르베나의 말을 들은 사나의 얼굴에 놀람과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사랑스러워 안아주고만 싶게 생긴 작은 아이가 어울리지도 않는 눈빛으로 싸늘하게 말하자 사나는 상대가 예의를 갖춰야 할 공주임에도 삐져나오는 웃음을 꾸욱 참으며 말하였다.

“네, 르베나 공주님. 제가 모자라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하지만 너무… 너무 반갑고 기뻐 그러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저랑… 대화를 나눠 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처럼 친절하고 상냥하기만 한, 하지만 조금은 다정한 눈가에 물기가 고인 사나를 가만히 제 눈에 담던 르베나가 곧 여지없이 몸을 돌리며 말하였다.

“내게 신경 끄도록. 그리고 다시는… 내게 말을 걸지 마라. 이를 어기면 왕족의 말을 무시한 너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돌아선 르베나의 눈이 순간 더욱 차갑게 내려앉았다. 동시에 가던 방향을 뒤로하고는 서늘하고 외진 자신의 궁을 향해 걸음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르베나가 그리 일갈하며 돌아서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나의 얼굴에는 겁을 먹은 표정도 어떠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사나의 눈은 점점 어둡게 가라앉아 르베나의 모습을 쫓을 뿐이었다.

푸석한 검은 머리카락, 창백하리만치 허옇고 거친 피부, 궁 안 시녀들도 입지 않을 법한 허름한 드레스, 길거리 아이들보다도 작고 마른 체구.

그리고… 저를 바라보던 텅 빈 눈빛까지도.

그렇게 사나의 눈은 오래도록 르베나가 떠난 공허한 자리만을 지키고 있었다.

* * *

로난이 뒤꽁무니를 빼고 나서 며칠이 지난 오후, 제 키보다 높게 쌓인 책들을 한참 동안 뒤지며 몰두하던 르베나가 모든 긴장을 풀어내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깊은숨을 토해냈다.

“하… 정보가 부족해…….”

벌써 며칠째 책이란 책은 다 뒤지며 시간 역행과 마력을 되찾는 방법 등에 관한 정보를 찾던 르베나가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제 입술을 깨문 순간이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나오는 그녀만의 습관이었다.

때는 왕국력 912년.

오랜 신마전쟁이 종결되고 신성시대로 접어드는 때였다.

세상은 신력을 가진 이들을 ‘세츠’, 마력을 가진 이들을 ‘베이라’라 부르기 시작했고, 서로 상반된 힘을 가진 ‘세츠’와 ‘베이라’들은 서로를 향한 끝없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신마전쟁’이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세츠와 베이라와의 다툼은 역사상 가장 강한 세츠의 등장으로 인하여 세츠의 승리로 끝이 났다.

승리로 인해 점점 강해지는 세츠와는 달리 점점 작아져 이제는 그 세력을 찾아보기도 힘든 베이라. 사람들은 이제 신마전쟁의 시대가 종전을 넘어 신성시대로 기울어질 것이라 생각했으며 세상의 흐름 또한 그렇게 흘러갔다. 동시에 베이라들의 성지였던 디오니스 왕국은 자연스레 쇠퇴의 길을 걸어갔다.

당신이 기억하는 베이라가 있다면, 그들 모두가 디오니스 왕국의 백성이다.

약소국의 길을 걷는 디오니스에겐 더 이상 어울리지 않는 말이 되어버린 유명한 어느 책의 구절을 떠올리며 르베나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쇠퇴하는 디오니스… 종적을 감춘 베이라들…….”

이내 깊은 한숨을 다시 내쉰 르베나가 현재 고전을 느끼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마전쟁이 끝난 후 디오니스 왕국에서는 신마전쟁에 미련을 갖는다는 인상마저 없애기 위해 마력과 신력에 관련된 심도 있는 책들을 모두 불태웠기 때문에.

“겁쟁이들…….”

작게 짓씹는 듯한 르베나의 선연한 말이 텅 빈 방 안을 울렸다.

지금의 디오니스는 그녀가 이끌었던 디오니스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시간의 역행이란 괴현상을 경험하기 이전의 삶에서 본인의 강력한 마력을 느낀 르베나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제 힘을 갈고 닦아 키워 갔다.

그를 통해 결국 그녀는 강대한 마력으로 디오니스의 왕이 되었고 이후에는 기다렸다는 듯 이제껏 저를 욕하고 깔보았던 모두의 피로 디오니스를 적셨다. 그렇게 디오니스 전역에는 짙은 피비린내와 함께 역대 최고의 마력을 가진 왕이 탄생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가 저지른 크나큰 실수의 시작임을 그때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그녀라면 가능할 것이라고. 그녀의 마력이라면, 그 강대한 힘이라면, 역대 최고의 베이라라면 다시 디오니스를 일으킬 수 있다는 신하들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온몸을 가득 채운 마력을 믿었다.

그 결과 세츠들의 성지, 젠 제국은 주변 세 개 왕국과의 연합군을 이끌고 디오니스를 침범했다.

신마전쟁을 끝으로 맺은 다섯 왕국의 평화협정. 그 약속을 깨뜨린 디오니스의 왕, 르베나를 처단하기 위해서.

“…하지만 거기까지란 말이지.”

르베나의 기억은 시간을 역행한 부작용 때문인지 그 이후를 통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과 함께 돌아오지 못한 마력의 자취조차도. 그래서 여전히 그 전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 역시 떨쳐내지 못했다.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

그렇게 한참 상념에 잠겨있던 르베나의 귀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높은 목청에 날카로운 데시벨의 소리. 로난을 위시한 세 명의 시녀들이었다.

얼마 전 제가 겁을 준 이후로 코빼기도 비추지 않길래 정신을 좀 차렸나 했더니 제 버릇 트롤 못 준다고 다시 오는 모양이었다.

동시에 르베나의 붉은 눈도 검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복도에 울리는 로난의 목소리가 들려온 탓이다.

“저 계집애가 뭘 잘못 처먹었는지 맛이 좀 갔다. 그러니 오늘도 그런 모양새면 너희가 그 계집애를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 알겠니? 저 더러운 마녀한테 왕국의 법도를 제대로 알려줘야지!!!”

복도를 쩌렁쩌렁 울리며 들려온 로난의 말에 두사와 하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갸우뚱거렸다.

그 르베나가 로난에게 반기를 들었단다.

불쌍할 정도로 순하고 멍청한 르베나가 그랬다는 게 그녀들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았지만, 로난의 말이라면 트롤이 백마 탄 왕자가 됐다 하여도 믿을 그들이므로 두 시녀는 단단히 마음을 다잡으며 로난을 따랐다.

그리고 며칠 전의 일을 생각하며 작게 몸서리친 로난 역시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며칠 전 르베나의 방을 나선 그녀는 내리 며칠을 앓아누웠다. 열이 펄펄 끓고 지금은 생각조차 안 나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더랬다.

그래, 그날의 기묘한 느낌은 몸살의 전조였던 것이다.

잠시라도 그 새끼 마녀한테 기가 눌렸다 생각한 제 스스로가 지금 생각해도 우스웠다.

‘그런 상태였으니 저 계집애의 기세에 밀렸다 오해를 했지! 하지만 그날 막말을 한 대가만은 치르게 해 줘야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로난이 르베나의 방문을 거침없이 열어젖혔다.

그래서 그녀는 몰랐다.

지금 이 문을 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이후 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리고 제가 그토록 앓았던 이유가 몸살이 아닌 르베나의 살기 때문이었다는 것조차.

“으윽…….”

르베나의 입에서 짓누른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래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시는군요. 더 세게 잡아!”

로난의 목소리에 힘입어 두사와 하나의 손에 힘이 더해졌다. 그리고 투박한 두 시녀의 손에는 어느새 작고 마른 르베나의 몸이 붙잡혀 있었다.

조금 전, 자신의 방에 들어선 로난과 두 시녀를 본 르베나는 이들을 눈으로 한번 흘기고는 아예 없는 사람처럼 무시해 버렸다. 저런 것들에게 제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가 방에 들어서도 무시하는 르베나를 본 로난의 눈은 더 큰 분노로 차올랐다.

그래서 로난은 오늘 제대로 날을 잡기로 했다. 청소 시녀들도 모두 일찍 돌아가게 한 보람이 있었다. 이 궁에 남은 거라고는 저 말라비틀어진 새끼 마녀와 저와 저의 충직한 부하 둘뿐이었다.

곧 다가올 승리감에 도취한 로난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공주님, 오늘은 우리 버르장머리 없는 공주님께 이 디오니스의 예법을 아주 뼈에 제대로 새겨드릴 작정이랍니다.”

로난의 말에 한쪽 눈을 치켜뜬 르베나가 무슨 개소리냐는 듯 쳐다보았다.

순간 르베나의 눈빛을 받은 로난이 두사와 하나에게 이를 갈며 말했다.

“잡아.”

로난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두사와 하나는 의자에 앉아 있는 르베나에게 다가가 가는 팔과 다리를 하나씩 잡고 바닥에 눌러 버렸다.

“이 무슨……!”

당황스러운 기분도 잠시 분노한 르베나가 눈을 치켜떴다.

촥!

그리고 순간 르베나의 온몸에 찌릿할 정도의 고통이 엄습해 왔다.

“오늘의 훈육은 예절에 관한 것입니다. 공주님은 이제부터 훈육을 받으시며 본인의 잘못을 뉘우치시지요. 공주님께서 잘못을 모두 뉘우치고 반성하시면 훈육은 끝납니다.”

손에 들려 있는 채찍을 휘두르다 제 앞에서 고통에 일그러진 르베나의 얼굴을 본 로난의 얼굴에 희열의 빛이 스쳤다. 그리고 같은 시각, 고통이 아닌 당황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던 르베나의 얼굴이 순간 무엇인가를 깨달은 듯 사정없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그래, 두사와 하나가 저를 잡을 때까지 르베나는 여유가 있었다. 그녀에게 시녀 둘 해치우는 것쯤이야 아무 일도 아니었으니. 지나가는 개미를 손가락으로 누르는 일보다 쉬웠다.

그래, 분명 그래야만 했다.

…시간의 역행, 그 이전이라면.

하지만 그녀는 지금 디오니스의 왕이 아니었다. 온몸에 가득 찬 마력으로 손가락만 휘두르면 만물을 제 앞에 무릎 꿇게 만들던 그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것 때문에 조금 전까지 고민을 하지 않았나!

순식간에 형언할 수 없는 무력감과 상실감이 르베나의 전신을 덮쳐 왔다.

“……!”

그리고 그 순간조차 로난의 매질은 사정없이 이어졌다.

촤악!!

계속되는 채찍질에도 르베나는 아프다 생각하지 않았다. 이까짓 시녀들의 놀이 같은 매질은 디오니스의 왕으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녀에게 장난과도 같았다.

하지만 정신과 달리 연약한 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고통을 호소해 대기 시작했다.

매섭게 내려치는 로난의 매질에 한 달 전 호되게 맞아 겨우내 나아가는 상처가 금세 터져 버렸고 열 살 아이의 여린 살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찢어져 갔다.

“…읏!”

또다시 내리쳐진 채찍질에 온몸의 전기가 흐르는 듯한 통증이 번져 왔다.

제아무리 별거 아니라 되뇌도, 스스로를 나약하지 않다 다독여도, 이 여린 몸뚱이에 가해지는 아픔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익숙해진 고통도 고통이라고 아프다 소리치는 제 작고 말라비틀어진 몸뚱이가 이 순간, 끔찍이도 싫었다.

하지만 여전히 르베나는 울지도 않았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이를 깨달은 로난이 제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이 정도로는 약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꽉 잡아! 꼼짝도 못 하게 꽉 잡으라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사와 하나의 손이 여린 르베나의 숨통을 조이듯 온몸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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