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을 든 왕녀, 르베나-2화 (2/276)

2화

제1장 디오니스 (1)

“드록 왕자님, 저런 요망한 것에는 눈길을 주지 마시고 어서 발길을 옮기시지요. 폐하와 왕비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옆에서 말을 건네는 시녀의 말을 언제나처럼 무시한 드록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르베나를 보고는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역시 마녀는 맞아도 아프지 않은가 보지? 보통의 계집이라면 소리를 지르며 넘어질 법한 세기인데… 역시 제 어미를 잡아먹고 나온 것이라 독하군! 아, 어쩌지? 내 손이 썩어 버리는 것 같아!!”

씹어뱉듯 말을 던진 드록은 이후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기대에 찬 눈빛을 잘게 떨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대하던 일이 일어나지 않자 곧 험악하게 인상을 구겨 버렸다.

언제나 독기 어린 말을 던지면 곧잘 울먹이며 저를 올려다보던 르베나였다. 지금도 그렇게 올려다보면 순간 다시 한번 세게 후려칠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저 계집애가 얼굴을 들어 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 그렇지!’

곧 잘게 떨려오는 르베나의 어깨에 눈길이 닿은 드록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베어 물었다.

“너같이 독하고 더러운 마녀가 아프다고 우는 꼴이라니… 차라리 몬스터가 왈츠를 춘다는 말이 더 믿기겠어… 푸핫, 푸하핫!”

드록은 가소롭다는 듯 르베나의 어깨를 강하게 밀치며 그 자리를 떠났다. 비록 두 번 후려치진 못했으나 감히 고개도 못 들 정도로 아프게 흐느끼는 꼴을 보니 제 기분이 심히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드록 왕자님, 폐하와 왕비님과의 만찬에 가십니까.”

순간 제 앞길을 막고 굽실거리는 어조로 감히 제게 인사를 건네는 누군가의 존재만 아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감히 누가 내 길을 막고 먼저 인사를……! 아, 로난이로군.”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곧바로 화를 참는 드록의 모습에 미소 짓는 시녀, 로난이 더욱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왕자님의 빛나는 자태를 확인하고 저절로 향하는 제 발길을 멈출 길이 없었습니다.

부디 용서하시길.”

한껏 자세를 낮춘 중년의 시녀, 로난의 태도에 드록이 짐짓 만족스럽다는 생각을 하다가 무엇인가가 생각난 듯 버럭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그래… 아니, 용서고 뭐고 조금 전 붉은 눈의 계집을 보았다! 어머니와 내가 그리 신신당부했는데도 그 계집이 궁 밖을 나오게 하다니! 네가 지금 제정신인가?”

드록의 말에 움찔, 제 몸을 떨어 보인 로난이 고개가 땅에 닿을 듯 조아리며 말했다.

“요, 용서하십시오, 드록 왕자님! 그리 신신당부하였는데도 워낙 멍청해 곧잘 제 주제를 잊고는 합니다! 제가 다시는!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단단히 혼을 내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왕비 마마께는…….”

울먹거리며 두려움에 몸을 떠는 시녀를 보는 드록이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어려서부터 제 어머니인 세나르 왕비로 인해 모두를 내려다보며 자라다 보니 모두가 제게 눈치를 보는 꼴이 심히 만족스러운 그였다. 곧 드록이 이전과는 다른 자상한 어조로 말을 건네었다.

“내 어머님께는 말씀드리지 않을 테니 바로 처리하는 게 좋을 거야.”

은근한 드록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빠르게 이해한 로난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네네……!! 제가 바로 가서 처리를……!”

하지만 이어진 로난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채 드록은 할 일이 끝났다는 듯 바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난은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동안 고개를 한껏 숙여 드록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지체 없이 화난 걸음을 별궁으로 옮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확!!

어딘가를 향하려 걸음을 옮기던 르베나의 머리채가 누군가에 의해 휘어 잡혔다. 악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시녀, 로난에게 휘어 잡힌 르베나는 그녀의 거칠고 우악스러운 손길과 함께 순식간에 별궁으로 끌려 들어갔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별궁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우는 순간이었다.

* * *

“드록 왕자님 드십니다.”

드록의 도착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와 함께 커다란 다이닝 룸의 문이 양옆으로 열렸다.

세상 선한 미소로 문 안으로 들어간 드록은 성인 15인은 족히 앉을 만큼 기다란 식탁을 짧게 눈으로 훑었다. 그러고는 상석에 앉아 있는 이를 보며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였다.

“강대한 힘의 근원, 그 중심에 앉아계신 폐하에게 디오니스의 영광이 함께하시길.”

고개를 들어 올린 드록의 예법과 선한 미소는 보는 이로 하여금 따뜻한 미소가 번지게 하였다.

“…앉거라.”

왕, 제노스의 명이 떨어지자 흠 잡을 데 없는 자세로 드록이 제 자리에 가 앉았다.

그리고 그런 드록을 세상 뿌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왕비, 세나르가 제노스에게 말하였다.

“폐하, 우리 왕세자께서 이리 왕법에 밝으시고 한 해 한 해 갈수록 늠름해지시니, 이는 분명 우리 디오니스의 복이 아닐는지요.”

세나르의 말에 잠시간 드록에게 시선을 두었던 디오니스의 왕, 제노스가 제 시선을 떼며 말하였다.

“모두 왕비의 가르침과 사랑 덕분이겠지요. 짐도 드록 왕자의 성장에 언제나 기대가 큰 바요. 이제 시장할 터이니 모두 식사 합시다.”

미소 짓는 제노스의 왕의 대답에 세나르와 드록 모두 흡족함이 가득한 얼굴로 앞에 놓인 접시에 시선을 두며 식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자리에 어느 누구도 깊게 가라앉은 제노스 왕의 웃음기 없는 눈빛만은 알아보지 못하였다.

벌컥.

거세게 열린 방 안, 초라하고 볼품없는 냉기가 풀풀 날리는 바닥으로 로난은 제 손에 잡혀 있는 머리카락을 내동댕이치듯 던져 버렸다.

쿵.

작은 아이의 몸은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큰 소리를 내며 떨어졌지만 로난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언제나처럼 울며 잘못했다 용서를 빌 아이를 기다리는 로난의 눈에는 일순 엄청난 희열을 기다리는 이의 그릇된 욕망마저 서려 있었다.

“오늘 본궁에 갔다 오는 걸 봤다는 자가 있더군요, 공주님. 제가 일전에 분명 말씀드렸지요? 본궁에 갈 일은 저희에게 얘기하라고, 공주님은 절대 멀리 걸음 하지 않는 법이라고!!”

큰 소리가 좁은 방에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그 멍청한 머리가 기억을 하는 겁니까!! 예? 또다시 제 말을 무시하였으니 이번에는 골방이 아니라 지하 감옥에라도 가두어야겠군요!”

말을 내뱉은 로난은 오늘 역시 언제나처럼 눈물을 흘릴 아이, 르베나의 모습을 기대했다.

하지만 신음소리조차 내지 않고 넘어진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르베나의 모습에 로난은 순간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그러나 몸을 숙여 르베나가 제대로 숨을 쉬는 걸 확인한 순간, 로난은 망설임 없이 르베나에게 다가가 두툼하고 큰 제 손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퍽.

듣기만 해도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느껴질 만한 소리가 휑한 방 안을 가득 울렸다.

화끈거림과 함께 전해지는 둔탁한 통증.

언제나처럼 표가 나지 않게 교묘하게 후려쳐진 얼굴과 목 사이에서는 익숙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한참 궁의 시녀들에게 학대를 당할 때라 그런지 아이의 작은 몸은 익숙해진 고통에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오히려,

‘죽여 버릴까?’

쾌감 어린 얼굴로 저를 향하는 로난을 바라보는 르베나의 작은 몸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전 드록의 손길에 수치스러움을 견뎌내던 어깨의 떨림이 여전히 선명하건만.

저 여자는 어린 시절의 저를 끔찍이도 괴롭히고 때렸다.

과거로 돌아와서 직접 마주치는 건 처음이지만 미래 디오니스의 왕이 된 자신은 분명 저 여자를 잔인하게 도륙해 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지나가 버린 미래일 뿐. 로난의 괴롭힘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그럼에도 맞는 것에 익숙해져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작은 몸과 왕으로 군림하며 많은 걸 겪은 성인으로써의 정신은 이 순간의 고통보다는 로난의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이 약한 몸뚱이를 끝없이 매질한 발칙하고 겁대가리 없는 시녀, 로난.

그녀를 훑는 붉은 눈동자에 깃든 살의에 로난의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이, 이 멍청한 공주님이 감히 로난에게 이리 예의 없는 눈빛을 보내다니 조, 좀 더 맞아야겠군요!!!”

로난이 억지로 제 몸에 쏟아지는 기운을 견뎌 내며 말을 뱉어 냈다. 저를 노려보는 저 눈도, 제 몸을 압박하는 이 두려움도 결코 르베나의 짓일 순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난은 제 귀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응? 지금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르베나와 저밖에 없는 빈방을 놀란 얼굴로 두리번거리는 로난의 귀에 순간 의심했던 소리가 실체가 되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닥쳐라.”

들려온 소리에 놀라 입을 뻥긋대는 로난을 보며 어느새 해진 드레스 자락의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난 르베나가 붉은 눈을 매섭게 빛냈다.

“하, 지하 감옥? 그런 게 내 궁에 있었나? 그게 어디에 있지? 당장 안내해라. 네 뚱뚱하고 거대한 몸뚱이를 거기 처박아 줄 테니.”

“뭐, 뭐라…….”

흘러나온 르베나의 말에 놀란 로난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어버버댔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망한 집안의 빚 대신 시녀로 처분된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삶은 고난과 역경 그 자체였다. 그런 자신이 버려지고 비루한 공주 계집의 눈빛 하나에 움찔하다니.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로난이 빠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본 르베나는 또다시 비웃는 듯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뭘 그리 두리번거리지? 날 때릴 몽둥이를 찾나? 공주가 할 눈빛이 아니라? 내가 공주답지 못해 맞아야 한다면, 고작 시녀장 주제에 내게 매질을 하는 시건방진 너는… 어떻게 죽여야 하는 거지?”

“…흐윽…….”

르베나의 말에 놀란 로난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르베나가 살의를 가득 담아 짓씹듯 말했다.

“너에게 주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다. 내 앞에서 꺼져라. 그리고 다신 나타나지 마라. 만약 한 번만 더 내 눈에 띈다면 그때는… 네가 보는 이 불길한 붉은 눈이 이 세상에서 보게 되는 마지막 색이 될 테니.”

오늘 저 붉은 눈의 미천한 계집이 미친것인지, 아니면 제가 환청을 듣는 것인지.

당황한 로난의 눈에 흔들림 없이 저를 향하는 차가운 붉은 눈이 보였다.

그 순간, 로난이 침을 꿀꺽 삼키며 혼자 중얼거렸다.

“오, 오늘은 제가 몸이 안 좋은가 보군요.”

나름 차분한 태도로 말을 한 로난의 머릿속은 반대로 지극히 혼란스러워졌다.

‘저, 저 계집이 미친 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혹시 내가 몸이 안 좋아서……? 그래, 그래서야. 자꾸 환청이 들리네!’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던 로난의 머릿속에서 순간 좋은 핑계가 떠올랐다.

‘어차피 여기서 더 때리면 흔적도 남을 거야. 만약을 위해 그건 피해야지! 그래, 그걸 위해서야.’

빠르게 생각을 마친 로난이 제 앞에 서 있는 르베나를 당황스러움과 두려움이 섞인 눈으로 한번 노려보고는 들어설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방을 벗어났다.

쾅!

거세게 닫히는 문의 소리가 또다시 르베나의 귀를 시끄럽게 울렸다. 그와 동시에 르베나의 붉은 눈도 한동안 문 뒤로 사라진 로난의 흔적을 날카롭게 쫓아갔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내 로난의 기척이 외궁 내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불쾌한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난 르베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방을 벗어났다.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 외궁의 녹슬고 커다란 문을 열어젖히자 이른 봄의 차가운 바람이 뜨거운 목 주변의 상처를 어루만지듯 살랑거리며 불어왔다.

그제야 숨통이 좀 트이는 듯, 르베나가 작은 숨을 천천히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많지 않은 걸음을 옮긴 어느 순간 르베나의 시야에는 어딘가 그리운 누군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어린 소녀의 눈에서는 수많은 감정들이 혼란스럽게 뒤섞여 갔다.

어린 시절의 르베나에게 유일하게 다정했던 그녀, 사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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