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을 든 왕녀, 르베나 ]
1화
제1장 디오니스
Prolog
깊은 밤의 물결처럼 굽이치는 검은 머리카락은 반묶음을 했음에도 그 풍성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 사이사이에서 빛나는 수많은 다이아몬드는 짙은 밤하늘을 유영하는 은하수와도 같았다.
깨끗하고 하얀 얼굴 위.
풍성한 속눈썹의 그늘 아래 살짝 치켜 올라간 붉은 눈은 이 밤 더없이 선명했고 그 아래 자리 잡은 적당히 도톰한 입술은 잘 익은 과실과 같아 탐스러웠다.
중간중간 흩뿌려진 진주 가루는 굴곡진 몸에 딱 맞아떨어지는 붉은색의 머메이드라인 실크 드레스와 함께 그녀의 도도하고 고귀한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부각시켜 주었다.
또각.
그녀가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살랑--.
길고 가는 백금의 귀걸이 끝에 달린 투명한 다이아몬드가 그녀의 걸음에 따라 춤추듯 움직였다.
깜빡.
방문 앞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던 그를 바라보며 그녀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풍성한 속눈썹이 나부끼듯 움직였다가는 고이 감춰 놓았던 붉은 보석을 살며시 보여 주었다.
두근두근.
이윽고 그녀, 르베나를 기다리던 그의 심장이 거세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르베나 드 디오니스 공주님과 아를 드 메이슨 경의 입장입니다.”
연회장의 큰 문을 지키던 시종의 고하는 소리에 번잡했던 무도회장엔 적막이 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그 적막을 환영이라도 하듯 문이 열리고 르베나와 그녀의 손을 잡은 아를이 모습을 나타냈다.
순도 높은 검은색 머리에 붉은 눈의 도도한 매력을 지닌 르베나와 환한 금안을 빛내는 아를의 모습은 모두의 시선과 심장을 멎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무르익기 무섭게 또 다른 사람의 등장이 연회장의 분위기를 휩쓸었다. 그의 등장에 귀족들은 마치 말을 맞춘 것처럼 양옆으로 갈라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이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시선에는 더없는 놀라움과 경악 그리고 경외심이 번져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유파시드께서……!!”
“황제께서 디오니스에 오시다니…….”
“소문이 사실이었나봐요, 황제께서 르베나 왕녀님을…….”
“저게 사람의 외모라니… 엘프의 피가 섞인 거 아닌가?”
엘프뿐 아니라, 신이 그의 외모를 만들 때 남들 열 배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고 해도 믿을 만한 외모와 분위기에 감탄과 찬미를 외치는 모두의 말이 공기를 맴돌았다. 하지만 본인과는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미소를 지은 그의 시선은 오직 그녀, 르베나를 향해 있었다.
순간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르베나의 입술마저 다가오는 그를 향해 붉은 과실이 터뜨려지듯 열렸다.
“…제국의 황제, 유파시드를 뵙습니다.”
르베나의 인사에 옅은 미소를 지은 그의 짙고 어두운 푸른 눈이 아주 잠시 르베나의 손에 닿았다가는 떨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녀를 정성껏 에스코트하는 아를의 손에. 그러고는 평소와 같이 옅은 미소가 번진 얼굴을 하며 르베나에게 말했다.
“아쉽군요. 일이 이렇게 빨리 해결될 줄 알았다면 절대로 서신을 물리지 않는 건데 말입니다.”
아쉬움보다는 질투와 함께 묘한 집요함이 느껴지는 그, 루드바하의 말에 르베나는 무심히 그가 보내왔던 파트너 요청 서신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그에게 답변을 위해 입을 떼기도 전, 대답은 르베나의 옆에서 조금은 차가운 목소리를 타고 들려왔다.
“서신을 철회하지 않으셨어도 폐하께서는 그곳에서 인사를 나누셨을 테니 아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르베나의 옆에 선 아를의 날 선 말에도 제국의 황제, 루드바하의 얼굴에는 여전히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그렇지 못했다.
아를의 손을 다시금 향하는 그의 벽안이 여느 때보다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드바하는 티내지 않고 더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어쩐지 제가 서신을 철회하지 않았다면 지금 이곳에 서 있을 사람은 제가 아닌… 아를 경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루드바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회장에는 찬물을 끼얹은 것 같은 적막이 맴돌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르베나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무감각하게 바라볼 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연회장의 귀족들만이 서로를 향하는 두 남자의 차가운 눈빛에 짙은 호기심을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디, 디오니스의 태양, 제노스 드 디오니스 폐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아를과 루드바하, 그 두 사람의 분위기에 압도되어 있던 시종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그곳에 감돌던 긴장감이 깨진 것은 순간이었다.
루드바하와 아를 역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려 연회장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제노스 왕을 바라보았다. 언제 서로를 견제했냐는 듯 제노스 왕에게 예의를 갖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흠 잡을 데가 하나 없었다.
그리고 한 사람, 오늘 연회의 주인공 르베나는 제노스 왕의 입장에 붉은 눈을 더욱 깊이 있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오늘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르베나 드 디오니스는 로드의 길에 자리하라.”
연회장의 분위기를 휘어잡을 만큼 위압감 있는 모습으로 등장해 왕좌 앞에 자리한 그의 명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그와 동시에 연회장 가운데에는 이제까지 없던 붉은 길이 서서히 빛을 내며 제 모습을 드러나기 시작했다.
“오오… 살아생전 로드의 길을 보게 되다니.”
“로드의 길은 정말 피처럼 붉군요… 그럼에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가……!”
“디오니스의 명맥이 끊어졌다 한 자 누구요!”
연회장의 모두가 이젠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디오니스 로드의 길을 보자 흥분과 환희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다신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만큼 몇몇은 붉게 물든 눈가를 손수건으로 찍어 낼 만큼의 감격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리고 그 길의 주인공, 르베나 또한 로드의 길에서 제 눈을 떼지 못했다.
언제나 평이하게 박동하던 제 심장도 이 순간만큼은 거세게 저의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두근두근. 두근두근.
곧 풍성한 금색의 털을 가장자리에 두른 흰색의 망토를 시종이 조심스레 르베나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또각. 또각.
기분좋은 망토의 무게를 느낀 르베나는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린 사람처럼 흔들림 없이 로드의 길, 그 끝이자 시작점을 향해 걸어갔다.
바르고 곧게 편 어깨와 도도하게 치켜든 고개, 오로지 눈앞의 제노스 왕만을 똑바로 직시하는 붉은 눈과 검은 밤하늘처럼 하늘거리는 풍성한 머릿결.
로드의 길을 걷는 르베나는 마치 정의를 심판하러 온 도도하고도 고독한 여신과 같아 보였다.
두근! 두근!
제법 침착한 르베나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그녀의 심장만은 세차게 박동하며 이 순간의 벅차오르는 감동을 사정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이윽고 르베나가 로드의 길, 그 끝에 다다랐을 때 제노스 왕이 한껏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 그녀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시종에게서 건네받은 화려한 빛을 흩뿌리는 관을 르베나의 머리에 조심스레 얹으며 큰 소리로 선포했다.
“나 제노스 드 디오니스는 르베나 드 디오니스를 나의 후계로 정식 임명하는 바이다! 이제 르베나 드 디오니스는 디오니스 왕국의 정식 후계자로서 언제나 백성을 지키고 왕국을 번영시키는데 자신의 모든 살과 피를 묻을 지어라!!”
정해진 선언문을 힘 있게 외치는 제노스 왕의 말에 르베나의 몸이 그녀 자신만 알 수 있을 만큼 작게 떨렸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녀가 머리에 왕관을 받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난 그 순간 이어진 제노스 왕의 돌발행동에 모든 귀족들이 헛숨을 들이켜며 놀랐지만 르베나만은 그러지 않았던 것은.
이 신성하고 거룩하며 절제된 의식에서 제노스 왕이 그의 손녀, 르베나를 꼬옥 껴안은 이 순간에 말이다.
이윽고 제 손녀를 품에 소중히 안은 그가 말했다.
“고맙다, 나의 손녀야. 그 모진 시간을, 그 모진 세월을 이렇게나 멋진 모습으로 살아 주어서. 이렇게나 맑은 눈을 가지고, 이렇게나 정의로운 마음을 가지고 내 앞에 서 주어서. 이제 나는… 여한이 없구나.”
제노스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결코 작지도 않았다.
해묵은 감정이 오랫동안 켜켜이 쌓인 그의 말과 목소리에는 깊은 진심과 뜨거운 애정이 담겨있었다. 예법을 중시하는 귀족들마저 눈시울을 붉힐 만큼.
그리고 그 순간,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누군가의 선창을 시작으로 연회장에 자리한 모든 이가 붉어진 눈시울을 뒤로하며 소리쳤다.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연회장이 떠나갈 듯 외쳐지는 소리에 르베나가 제노스 왕의 품에서 벗어나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넓은 연회장 안 가득찬 사람들이 그녀와 제노스 왕을 보며 한껏 미소 짓고 있었다.
어떤 이는 조금 전 일로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어떤 이는 손안에 든 샴페인을 기세 있게 치켜들며,
또 어떤 이는 옆의 사람과 이 순간의 기쁨을 만끽하며.
…혼자 걸었던 길.
지금 그녀를 보며 환호하는 그들은 예전 타인의 피로 뒤덮인 채 홀로 로드의 길을 걷는 어린 소녀를 혐오했다. 겉으로는 축하하며 속으로 증오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리하여 선왕의 인정도 없이 디오니스의 왕이 되었음을 스스로 선포하는 그녀의 발아래서 축하와 충의를 말하던 그들은 오랜 시간 끝에 그녀와 디오니스를 멸망과 처절함의 끝으로 몰고 갔다.
누구나 그녀를 칭송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누구나 그녀를 두려워했지만, 누구도 그녀를 위해 목숨 걸지 않았다.
외롭지만 견뎌야 했고, 아팠어도 가야만 했던 길의 끝.
시간의 역행이란 신비함 그 이전, 르베나에게 있어 귀족들은 그런 이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소리친다.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디오니스 만세!”
“르베나 왕녀 전하, 만세!!”
그들이 외치는 그녀의 이름이 낯설어서,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그들의 목소리가 뜨거워서,
르베나의 심장도 이 순간 더없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 순간 시종에게 건네받은 르베나의 날카로운 검을 타고 오르는 검붉은 마력 또한 그녀의 오늘을 축하하듯 환희하며 폭사하기 시작했다.
* * *
탁.
소녀의 작은 손이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고는 제목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신력과 마력 : 세계의 시작과 비밀>.
글귀를 노려보듯 깊게 생각에 잠긴 듯한 소녀는 곧 인상을 찌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풍성하지만 푸석한 머리카락이 일어난 소녀의 등 뒤로 가볍게 흘러내렸다.
이제 막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소녀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분위기와 외모를 지녔다.
칠흑 같이 새까만 머리카락은 약간의 웨이브가 더해져 흘러내렸고, 희고 작은 얼굴에는 그림으로 그려놓은 듯한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았다.
오뚝한 콧날과 입술은 누가 보아도 안아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아니, 그럴 것이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미의 화신이 땅을 치며 울고 갈 정도의 소녀는 또래보다 훨씬 삐쩍 마른 몸과 여기저기 상처가 난 거친 피부, 그리고 보살핌이라고는 한 번도 받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모습으로 존재했기 때문이다.
마치 완벽하게 사랑스러운 소녀의 그림을 그린 다음 회색의 물감으로 거칠게 여기저기 그림을 망쳐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런 소녀에게선 어떠한 것도 함부로 그 빛을 바랠 수 없는 매혹적인 부분이 있었다.
얼핏 보면 까맣게 보일 정도로 농도 짙게 붉은 눈동자.
그 눈동자는 어떤 보석을 가져다 놔도 빛이 바랠 정도로 선명하였다.
그 눈동자가 제게로 향한다면 어떤 이라 하여도 제 몸을 스치는 감각에 오묘한 저릿함을 느낄 것이다.
게다가 열 살 소녀가 가지기 힘든 어떤 감정마저 가두어 놓은 붉은 눈은 매혹을 넘어 경외심, 혹은 두려움까지도 느끼게 할 만큼 선연하였다.
그때 누구든 한번 보면 절대 잊지 못할 그 붉은 눈동자가 도로록 문을 향해 굴러갔다.
시선에 따라 걸음을 옮긴 소녀가 문을 열고 나오자 지나가는 시녀가 소녀, 르베나를 보고 슬쩍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곧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지나쳐 빠르게 제 발걸음을 옮겼다.
이에 르베나 역시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렇게 열 살 르베나의 언제나와 같지만 새로운 하루가 또 시작되고 있었다.
밖으로 나온 르베나는 쏟아져 내리는 햇빛에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가 곧 서둘러 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르베나의 앞에 문득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진 것은 그때였다.
짝.
갑작스레 르베나의 얼굴이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그 힘을 이기 못한 채 순식간에 옆으로 꺾인 것이다.
“더러운 마녀의 눈을 가지고 감히 날 쳐다봐?”
이유 없는 미움과 원한이 공기를 타고 그녀에게 선명하게 전해졌다. 보지 않아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또 하나의 왕위 계승권을 가진 디오니스의 왕자, 드록의 출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