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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131화 (131/131)

131. 여울목의 봄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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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02

“할아버지!”열 살, 어린 윤성의 손에서 검은 구슬이 떨어졌다.

왕세자 영과 병연과 우정을 약조하며 나눠 가졌던 구슬이었다.

윤성이 영의 배동(陪童)이 되어 궁궐을 드나들게 된 것도 벌써 한 계절이 훌쩍 지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이라 그런지 세 사람은 한 몸에서 태어난 형제처럼 마음을 나눴다.

오늘은 그 마음의 징표로 이 검은 구슬을 나눠 가졌던 것이다.

손자의 손에서 떨어진 검은 구슬을 바라보는 김조순의 눈에는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벗. 벗이라 하였느냐?”“할아버지…….”“그자들이 너의 벗이라고?”“할,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잖아요. 세자저하와 가깝게 지내라고요.”“가깝게 지내라고 하였지, 마음까지 나누라고 한 적은 없다.”“네?”“성아, 잘 들어라. 왕세자는 네 벗이 아니다. 너희 둘을 결코 그리될 수 없는 사이다.”“그럼 우린 무엇입니까?”“그는 네가 밟고 올라서야 할 상대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너뜨려야 할 성가신 존재지.”“할…… 아버지.”전혀 예상하지 못한 할아버지의 말에 충격을 받은 듯 윤성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할아버지, 약조했어요. 벗이 되겠다고…… 그분의 충직한 신하가 되겠다고…… 약조하였습니다.”“지키지 못할 약조다.”“아니요, 아닙니다. 할아버지, 지킬 거예요. 전 저하와의 약조, 지킬 겁니다.”어린아이답지 않은 강단에 김조순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사람이란 참으로 미련한 동물이지. 제 몸으로 겪어보지 않으면 좀처럼 두려운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리지 못하니. 네가 진정으로 두려워할 존재가 뉘인지 기억해라.”말과 함께 김조순은 제 등 뒤를 지키고 서 있는 호위무사를 돌아보았다.

“저 아이를 광에 가둬라.”할아버지의 차가운 명에 윤성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광? 광이라고?

철이 들 때부터 숱하게 갇혀왔던 곳이다.

왕세자보다 글공부에 진척을 보이지 못할 때면 광에 갇혔고, 왕세자보다 시문을 짓지 못하면 갇혔고, 왕세자를 이겨도 갇혔고, 왕세자에게 져도 갇혀야 했다.

하여, 어둡고 축축한 광은 윤성에게 두려움의 상징이었다.

윤성이 사납게 도리질을 했다.

“싫어요, 싫어요. 할아버지.”애원하는 어린 손자를 감정 없이 내려다보던 김조순이 다시 말했다.

“가둬라.”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윤성은 그대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이윽고 덜컥, 문이 닫혔다.

작은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검은 공간.

오직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만이 곁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추워요, 추워. 어머니, 어머니!”열 살, 어린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시리고, 너무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 하나 윤성에게 손 내밀어 주는 이는 없었다. 누구도 감히 나서서 소년을 걱정해 주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둘러싸인 것처럼 가까이 다가오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외롭고 힘든 시간은 닷새나 이어졌다.

외로움이 사무쳐 이제는 공허함만이 남았다.

굳게 닫혔던 광이 열렸다.

윤성의 앞으로 김조순이 다가왔다.

텅 빈 윤성의 눈을 본 후에야 그는 비로소 만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된 것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비었으니, 비로소 제대로 된 가르침을 부어줄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의 감정을 버려라. 그따위 것에 연연해서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기억해라. 그것이 네가 살아야 할 이유고 유일한 목적이다.”김조순은 그릇을 빚듯 손자를 빚고 있었다.

모두 버려야 한다.

비정한 현실을 담기에도 사람의 가슴은 협소하지 않은가?

“…….”“웃어라. 하여, 네 속내를 누구도 알지 못하게 해라.”말을 마친 김조순은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윤성을 돌아보았다.

“청국으로 떠나거라. 채비하라 일렀으니 너는 이 길로 떠나면 될 것이다.”그것이 끝이었다.

어떤 작별의 말도, 따뜻한 인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서러운 축객령에 윤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그의 곁으로 어미가 다가왔다.

지난 닷새 동안 단 한 번도 그를 찾지 않았던 어미였다.

그녀가 윤성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잘 다녀오너라.”어떤 감정도 담겨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한마디.

그것은 닷새 동안 느꼈던 그 어떤 것보다 차고 시리게 느껴졌다. 어미를 바라보는 윤성의 두 눈에 옅은 눈물막이 덧씌워졌다.

어머니. 제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제가 듣고 싶었던 말은…….

진실로 제가 듣고 싶었던 한마디는…….

*  *  *

“괜찮아?”푸른 새벽빛과 함께 이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내를 들여다보는 이랑의 눈에 걱정이 가득했다.

“악몽이라도 꾼 거야?”땀이 송골송골 맺힌 사내의 이마와 제 이마를 번갈아 짚던 이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다려. 약 가져올 테니까.”“저는 괜찮습니다.”“내가 안 괜찮아.”이랑이 주먹을 불끈 쥐며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기억이 돌아오게 하겠어. 그간 들어간 약재 값이 얼만데.”“…….”이랑의 뒷모습을 보며 사내는 소리 없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어쩐지……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  *  *

“이게 사실인가?”병연은 수하가 가져온 서찰을 덮으며 물었다.

“예조참의 김윤성을 어린 시절부터 보필하던 자의 진술입니다. 얼마 전까지 곁을 지키다 노쇠하여 낙향했다고 합니다.”“그렇군.”수하의 말에 병연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수하가 가져온 서찰에는 윤성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의 일까지 세세하게 모두 기록되어 있었다.

그가 왜 청국으로 떠났는지, 어찌하여 왕세자와 자신에게 등을 돌렸는지, 그리고…… 어쩌다 라온을 마음에 품게 되었는지.

라온과 윤성의 만남은 애초에 계획된 것이었다.

청국에 있던 윤성이 조선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

모두 홍경래의 자손을 부추겨 임신년의 민란과 같은 일을 다시 한 번 일으키기 위함이었다.

하여, 윤성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라온이 여인이라는 것을, 그녀가 역적의 자손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윤성은 라온을 이용할 목적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이 바뀌었다. 라온의 밝음이, 그 순수함이 윤성의 마음을 휘저었다.

결국, 윤성은 라온을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내놓았다.

그때 그리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었는데.

그 밤에 라온을 찾아왔던 윤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따뜻한 웃음이…….

지난겨울, 운악산 자락에서 윤성을 본 것을 마지막으로 그의 행적이 묘연했다.

병연은 윤성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백방으로 사람을 풀었다.

윤성을 찾는 사람은 비단 병연만이 아니었다.

안동 김씨 일문 역시 사라진 윤성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금 그들에겐 새로운 수장이 필요했다.

김조순의 낙향으로 구심점을 잃어버린 그 일문이 미래를 기대할 수 있었던 이, 왕세자 영과 우위를 가릴 수 없을 만큼 명석한 윤성이 유일했던 것이다.

한때는 벗이었던 사내.

그러다 어느 순간, 정적이 되었고 다시는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믿었던 만큼, 벗의 배신을 알게 된 이후엔 증오도 컸다.

하지만…….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윤성의 모습에 병연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언제나 가면 같은 웃음을 짓고 있던 윤성의 속내는 진득하게 곪아있었다. 끔찍한 외로움이 사갈의 독처럼 그를 좀먹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몰랐다.

그걸 모른 채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병연의 눈매가 가늘게 떨렸다.

“하여, 참의의 행방은 아직 찾지 못했느냐?”“간밤에 은밀한 전언이 들려왔습니다. 그분과 닮은 자를 보았다는 이가 있습니다.”수하의 말에 병연이 눈을 떴다.

“그곳이 어디더냐?”

*  *  *

“봤어? 봤어?”소곤대는 목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안달한 여인들을 보며 이랑은 미간을 찡그렸다.

스승님의 심부름으로 약초를 팔러 약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이랑과 그녀의 일행들이 가는 길목마다 여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왜들 저래?”이랑의 물음에 단우가 신이 나서 대답했다.

“동네 처자들이 모두 밤잠을 못 잔대요.”“갑자기 단체로 불면증에라도 걸린 거야?”“누나도 참. 그게 어디 불면증 때문이겠어요? 다 저 형 때문이죠.”단우가 제 뒤를 따라오는 사내를 가리켰다.

“저 바보가 뭐가 좋다고.”이랑과 눈이 마주친 사내가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때였다.

수줍은 표정의 한 소녀가 이랑에게 다가왔다.

“저기, 보시어요.”“응?”“이거…….”“이게 뭐야?”“소군자께 전해 줄래요?”“소군자?”이랑이 고개를 갸우뚱하자 곁에 서 있던 단우가 작게 속삭였다.

“저 형님을 소군자라고 부른대요.”“저 바보가 왜 소군자야?”“잘 웃는 사내라는 의미로…….”“그건 그렇다고 쳐도, 소(笑)자 뒤에 붙은 군자(君子)는 다 뭐야?”“군자의 얼굴처럼 맑고 아름답다는 의미라던데요.”“별 당나귀가 하품하는 소릴 다 들어보겠네.”단우의 말에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이 된 이랑은 다시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친 사내는 예의 밝은 웃음을 보였다.

해를 등지고 있어서 그런가? 눈이 시릴 만큼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흥!”인정하긴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미소.

괜스레 불퉁한 표정이 되어버린 이랑은 고개를 휙 돌렸다.

“늑장 부릴 시간 없어. 정오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돌아와야 한다고 스승님께서 으름장 놓았단 말이야. 그러니 다들 서둘러.”이랑은 발끝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그녀의 곁을 단우가 열심히 따라 걸었다.

그러나 이내 걸음을 멈춘 단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형님! 안 오세요?”“…….”목청을 돋우는 단우의 부름에도 사내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저러지?”단우의 고개가 외로 기울어졌다.

궁금하긴 이랑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체 뭐 하고 있는 거야? 얼른 가야 한단 말이야.”기다리다 못해 사내의 곁으로 다가온 이랑이 채근했다. 그러나 그녀의 채근에도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방(榜)이 붙어있는 벽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뭘 보는 거야?”사내를 좇아 이랑이 시선을 돌렸다.

시선 끝에 죄인을 찾는다는 방이 들어왔다.

역적 홍경래의 자손이며 감히 여인의 몸으로 궁궐의 환관이 된 간 큰 자를 찾는다는 내용의 방이었다.

사내는 방에 그려진 여인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는…… 여인이야?”묻는 이랑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왜 떨리는 것인지 스스로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떨렸다. 그리고 불안했다.

“……모르겠습니다.”사내가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선이 갑니다. 이상하게도……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이상하게도…….”……심장이 뛰었다.

심장에 얼음 가시라도 박힌 듯 시리고 아렸다.

*  *  *

“아…….”마른 한숨이 이랑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밤새워 뒤척이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이게 다 소군자인지, 뭔지 하는 녀석 때문이야.”방에 그려진 여인의 얼굴을 보는 사내의 표정이 이랑의 뇌리를 떠나질 않았다.

억울한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랑은 방문을 열고 나섰다.

내 이 녀석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불면증? 병증은 들어봤어도 그런 병이 세상에 존재하는 줄 몰랐던 이랑이었다. 그런데 잠을 못 잤다. 단 한숨도.

불퉁해진 이랑이 사내가 잠들어 있는 방문을 활짝 열었다.

“소군자! 이리 나와!”“…….”“소군자!”버럭 소리를 질렀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어라? 이 이른 시간에 어디로 갔나?

방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어 주위를 살피자니 익숙한 얼굴이 턱밑으로 불쑥 다가왔다.

“넌 잠도 없냐?”유 노인이었다.

눈가에 잠이 덕지덕지 묻은 스승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이랑을 노려보았다.

“스승님. 해가 중천이야.”“아직 해 안 떴다.”“빨리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많이 잡아먹는 법이라더니.”“늙은 새는 좀 천천히 일어나도 되는 법이지. 그나저나…….”유 노인이 콩, 이랑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한 며칠 얌전한 척하더니. 그새 또 말이 반 토막이냐? 내가 말 잘라먹지 말라고 했지? 계집의 언행이 어찌 그리 조신하지 못해?”“병자를 살피는 의원은 여인과 사내, 그 성별을 뛰어넘어야 한다며? 스승님은 꼭 필요할 때만 계집의 언행 운운하시더라?”억울하다는 듯 이랑이 소리쳤지만 유 노인은 이미 이불 속으로 머리를 묻은 후였다.

어느새 엉덩이로 숨을 쉬는 스승을 보며 이랑이 물었다.

“스승님, 그런데 소군자 못 봤어?”“…….”“스승님.”“반 토막말에는 대답 안 한다.”“소군자 못 봤어요?”“네 녀석 들어오기 전에 마을 쪽으로 가는 것 같던데.”“마을 쪽으로?”거긴 왜?

이랑은 아직 푸른 새벽이 짙게 깔린 길을 응시했다.

어느새 그녀의 발걸음이 마을을 향했다.

사내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생각할 사이도 없이 몸이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이랑이 정신을 차렸을 땐, 방이 붙은 벽 앞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방을 바라보는 사내의 등을 지켜보는 자신이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그리 서 있는 사내를 보자 문득 가슴 깊은 곳에 바람이 불었다.

지난겨울, 다 죽어가는 사내를 집에 데려온 이후 단 하루도 사내를 보지 않은 날이 없었다.

스승님은 사내가 살 수 없을 거라 장담했다.

처음에는 스승님에 대한 오기로 사내에게 매달렸다. 어떻게든 살려내 스승님의 코를 납작하게 눌러줘야지. 그러기 위해서는 사내를 살려야 했다. 어떻게든 살려내야 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사흘이 흘렀다.

눈이 내리고 녹길 반복했다.

날이 풀리고 얼어있던 산과 계곡에 파릇한 새순이 돋아났다.

하루가 다르게 바람이 따뜻해졌다.

노란 개나리가 꽃잎을 한껏 벌렸다. 시샘하듯 진달래가 수줍은 분홍빛을 자아내는 봄이 왔다.

그사이, 사내는 어느덧 이랑이 살아가는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있었다.

잠든 사내에게 탕약을 먹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의 곁에서 밥을 먹고, 약초를 다듬고, 늦은 밤 그에게 시침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루를 마감하곤 했던 것이다.

그런 사내가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그 어떤 곳.

눈앞에 있는 사내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바람처럼, 구름처럼, 그렇게 어딘가로 흘러가 버릴 것만 같았다.

순간, 진실로 하고 싶은 한마디가 이랑의 턱밑에 매달렸다.

그러나 결코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한마디.

가지마.

그 애처로운 말을 입안으로 꿀꺽 삼킨 이랑은 사내를 불렀다.

“소군자.”“…….”“소군…….”“윤성입니다.”“응?”“제 이름…… 윤성입니다.”사내, 윤성은 여전히 방에 그려진 여인에게서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이랑의 눈동자가 커졌다.

“생각…… 났어?”묻는 이랑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제처럼…… 여인을 아느냐고 물었을 때처럼 다시 떨렸다.

그때처럼 떨리고, 그때처럼 불안하다.

“생각났어?”가지마.

목청을 가다듬은 이랑이 물었다.

“다 생각난 거야?”가지마.

“…….”침묵이 흘렀다.

아주 짧은 침묵이었다.

그러나 이랑에게는 영원처럼 긴 시간이었다.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윤성이 고개를 돌렸다.

“……아니요. 이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습니다.”“정말?”이랑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피어올랐다.

“정말입니다.”마주 보며 웃는 윤성의 웃음이 그 어느 때보다 환했다.

그 화사한 웃음은 아릿한 화살이 되어 이랑의 심장에 꽂혔다.

*  *  *

“저분…… 맞습니까?”희붐한 새벽이 밝아오는 골목 한구석.

삿갓을 깊이 눌러 쓴 병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등 뒤에 있던 수하가 윤성을 가리키며 물었다.

수하의 손짓을 따라 병연은 시선을 옮겼다.

맑은 느낌의 여인과 미소를 마주한 윤성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전보다 많이 수척해졌지만, 그 웃음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해 보였다.

그러다 한순간.

우연인 듯 골목으로 눈길을 돌리던 윤성과 시선이 마주쳤다.

윤성과 병연, 두 사람의 눈길이 허공중에서 만났다.

그렇게 한참을 응시하던 병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다.”“하지만 분명히…….”“잘못 찾았다.”짧은 한 마디로 수하의 말을 일축해버린 병연은 몸을 돌렸다.

앞서 걷는 병연의 모습에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머뭇거리던 수하 역시 그 뒤를 따랐다.

“왜? 누가 있어?”골목 끝자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윤성을 보며 이랑이 물었다.

“아닙니다. 그저…… 그리운 사람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 말입니다.”“그리운 사람?”“아닙니다. 그보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설마…… 절 찾아오신 겁니까?”“그, 그럴 리가 없잖아.”속내를 들켜버린 이랑은 버럭 고함을 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감출 수 없었던 터라. 그녀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지금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하지만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눈치를 채고 부러 그러는 것인지.

윤성이 집요하게 그녀의 뒤를 따랐다.

“어디 가십니까?”“어디……?”그러게. 나 어디 가는 거지?

잠시 생각하던 이랑은 서둘러 둘러댔다.

“약방에. 스승님이 연고를 갖다 주고 오라고 해서.”“약방은 이쪽 길입니다.”“…….”이랑의 얼굴에 ‘아차’하는 빛이 떠올랐다.

그렇다고 해서 내친걸음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 고집스레 걸음을 옮기며 이랑이 말했다.

“뭐, 약방 가기 전에 들릴 곳이 있어서 말이야.”“그게 어딥니까?”이랑의 뒤를 따르며 윤성이 물었다.

“비밀이야.”대답이 궁핍해진 이랑이 먼 허공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어디 가는 길인데 비밀이라고 하는 겁니까?”“비밀, 비밀이야. 그런데 왜 자꾸만 따라와?”“이른 새벽입니다. 여인 홀로 가기엔 위험합니다.”“괜찮아.”“제가 괜찮지 않습니다.”“정말 괜찮다니까.”“제가 괜찮지 않다니까요.”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등 뒤로 붉은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나는 꿈을 꾸었네

꽃이 되는 꿈을

나비가 되어 빛 속을 날갯짓하는 꿈을

나는 꿈을 꾸었네

구름이 되는 꿈을

바람이 되어 세상을 맴도는 꿈을

나는 꿈을 꾸었네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꿈을

그대의 눈 속에 내가 온전히 담기는 꿈을

영원히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꿈을

나는 오늘도 꿈을 꾸네

영영 깨지 않을…… 그런 꿈을 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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