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여울목의 봄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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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30
귓전으로 바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들이마시는 숨 자락으로 비릿한 혈향이 스며들었다.
“!”어디선가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너무도 아득하게 들리는 그것은 몽혼한 꿈의 한 자락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갔다. 바람 속을 부유하는 먼지처럼 몸은 한없이 가벼웠다.
아아, 이대로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으면.
손끝으로 발끝으로 몸속의 모든 생기가 빠져나가는 듯했다.
죽음의 냄새가 짙어졌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또다시 누군가가 그를 불렀다. 하지만 못 들은 척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돌리면 다시 현실을…… 마주하기 싫은 끔찍한 사실들을 직시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하루, 이틀? 아니면 그보다 더 많은 날이 흐른 듯도 싶었다.
감은 눈자위로 늦봄의 나른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누군가 그를 흔들어 깨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대로 깨고 싶지 않아. 영영 잠들고 싶어.
마치 단잠에 빠진 어린아이처럼 그는 고집스레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또다시 부르는 소리와 함께 와락 거친 손길이 양팔에 느껴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아파, 제발 놓아줘.
할 수 있는 힘껏 몸을 뒤틀었다. 하지만 그를 잡고 있는 손의 악력은 점점 더 강해질 뿐이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이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이것이 숙명이라는 듯 느껴지는 빈틈없는 결박. 그리고 그것을 각인시키려는 듯 뺨 위로 너무도 선명한 숨결이 느껴졌다.
* * *
“이랑이 네 이놈! 예서 뭐하는 게냐? 하라는 건 다 하고…….”벌컥 방문을 열고 고함을 질러대던 노인은 어린 여인의 손짓에 문득 말을 멈췄다.
백분을 바른 듯 유난히 하얗고 갸름한 얼굴.
그리고 그 얼굴색에 대비되는 새카만 눈동자.
얼굴의 절반을 차지하는 듯한 커다란 눈 가득히 호기심이 서려 있는 이랑은 석류처럼 붉은 입술 위에 검지를 세웠다.
“쉿! 조용히 해요, 스승님.”“뭐냐? 드디어 죽은 게냐?”“스승님!”“그럼?”묻는 유 노인에게 이랑은 대답 대신 누워있는 사내를 눈짓했다.
우쭐대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이었다.
“뭐야? 설마…… 기어이 살려낸 게야?”“제가 뭐라 그랬어요? 살려낼 거라고 했지요?”“흥.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은 격이로군.”인정할 수 없다는 듯 노인은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꼈다.
지지 않고 이랑이 소리쳤다.
“실력이에요.”“굼벵이도 구르는 재주도 있다더니. 어쩌다 구르게 되었구나.”“실력이라니까!”“이 녀석이, 어따 대고 소리를 질러? 그리고 말 잘라먹지 말라고 했지.”“스승님이 자꾸만 억지를 쓰니까 그렇죠. 그보다 스승님, 약조한 대로 주세요.”“뭘?”“지난번에 약조했잖아요. 스승님이 만드시는 고약의 비법, 이 사내 살려내면 저한테도 알려주시기로 했잖아요.”“내가 그랬던가?”궁지에 몰린 노인은 킁킁 괜한 헛기침을 하며 귀를 후볐다.
운악산 깊은 골짜기.
유 노인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산 지도 어느덧 16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입소문을 통해 제법 솜씨 좋은 의원으로 알려진 유 노인은 종기에 특효인 고약을 제조하는 데 하루의 대부분을 소비했다.
그런 유 노인의 곁에는 올해로 열일곱이 된 이랑과 열두 살이 된 단우, 두 명의 제자가 있었다.
고분고분한 단우와는 달리 호기심 많은 이랑은 유 노인에겐 골칫덩이였다. 특히나 이렇게 고약의 비법을 알려달라고 조를 때면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다 죽어가는 사내를 살려내면 주겠다고 겨우 입을 막아놨는데.
몇 달 잠잠하다 싶었는데 다시 시작이었다.
“스승님. 또 딴말하시지 말고, 주세요. 어서요.”채근하는 이랑을 향해 유 노인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이랑이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너부터 내놔.”“뭘요?”“아무리 우리가 스승과 제자라고 하지만 셈은 확실하게 치러야지. 너, 저 사내를 살리겠다고 내 귀한 약재를 죄다 가져다 쓰질 않았느냐. 고약비법을 알려주기 전에 그 약재 값부터 받아야겠다.”“제가 돈이 어딨어요?”“약재 값 받기 전엔 나도 고약비법 알려줄 수 없지.”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깃장을 놓은 노인은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잠시 후.
열린 문안으로 작은 소년이 날다람쥐처럼 쪼르르 들어왔다.
“이랑 누나. 괜찮아요?”소년은 이랑의 눈치를 살폈다.
보통 이렇게 스승님과 한바탕 설전을 치를 때면 이랑은 분하거나, 억울해서 울상을 짓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턱을 치켜들었다.
“들었지?”“누나?”“단우야. 너도 분명 들었지?”“뭘요?”“스승님 말이야. 분명히 이 사내가 쓴 약재 값만 주면 고약비법 알려주신다고.”“네. 듣긴 들었지만…….”누난 돈이 없잖아요.
“무슨 방도라도 있어요?”단우가 물었다.
“당연하지.”기다렸다는 듯 이랑이 벽에 걸려있는 도포 자락을 활짝 펼쳐 들었다.
누워있는 사내를 처음 발견했을 때 입고 있던 것이었다.
“지난번에 약초 팔러 마을에 내려갔다가 물어봤는데. 이 비단 말이야, 보통 귀한 게 아니라더라.”이랑의 얼굴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 사내 깨어나면 약재 값이 문제가 아니야. 아무렴, 다 죽어가는 것을 도로 살려놨는데, 그깟 돈이 문제겠어? 내 정성에 감복하여 전 재산이라도 내놓을지도 몰라. 하하하.”“정말요?”단우는 곤하게 잠들어 있는 사내를 돌아보았다.
처음 사내를 발견한 것이 눈 내리는 겨울이었다. 그 사이 계절은 봄으로 바뀌어 지천이 꽃으로 뒤덮여 있었다.
“기다려 봐.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반짝하고 눈을 뜰걸.”자신만만한 이랑의 모습에 어린 단우가 덩달아 신이 나 있을 때였다.
“네 이놈들! 아직도 여기서 뭉기적거리고 있는 게냐?”문밖에서 유 노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너희들, 약초 잘라놓으라고 한 건 다 한 게냐?”“아차!”이랑이 제 이마를 쳤다.
“이 녀석! 그럴 줄 알았지. 오늘 해 안에 다 해놓지 않으면 둘 다 저녁밥 없을 줄 알아라.”이랑을 향해 노인이 눈빛을 세웠다.
유 노인의 눈빛을 피해 밖으로 달아나던 이랑이 문득 제 스승을 돌아보았다.
“스승님! 자꾸 그러시면 저 사내한테 받은 치료비 한 푼도 안 줄 거예요.”제법 호기롭게 소리치며 혀를 살짝 빼물었다.
그러나 이내 미간을 한데 모으는 스승의 서슬에 얼른 뒤돌아서서 쪼르르 달아났다. 꽁지가 빠지라 밖으로 사라지는 그 모습에 노인은 허허 너털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녀석. 그런데…… 정말 저 자를 정말 살려냈다는 게야?”무서운 녀석.
노인은 초막의 한구석에 잠들어 있는 젊은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보았을 땐 간신히 숨 자락만 붙어있던 자였다.
맥을 짚어보니 이미 북망산 중턱을 오르고 있었다. 화타가 온다 해도 살릴 수 없으리라 장담했다.
그런데 살려냈다고?
노인은 이랑이 사라진 곳과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이래서 피는 못 속이는 건가?노인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 * *
“역시!”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랑은 연신 방실거리며 웃었다.
예상한 대로 사내는 날이 밝기도 전에 눈을 떴다.
“스승님! 스승님! 일어나 봐요. 단우야, 일어나!”이 역사적인 순간을 혼자 즐길 수는 없었다.
이랑은 잠든 스승과 어린 사제를 깨웠다.
“고얀 놈! 이 늙은 스승 잠자는 꼴을 못 보지?”“지금 잠이 와요?”“꼭두새벽부터 열 오른 암탉처럼 설치는 네놈이 이상한 거다. 제발 잠 좀 자자, 잠 좀. 넌 잠도 없냐?”“지금 잠이 문제가 아니라고요.”“그럼 뭐가 문제야?”“저기요, 저기 좀 보세요.”잔뜩 들뜬 이랑이 어딘가를 손가락질했다.
노인과 단우가 그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저…… 저…….”“누나!”다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사내가 멀쩡한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스승과 사제 보란 듯 이랑은 사내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처음으로 치료한 그녀의 첫 환자는 참으로 미색이 아름다운 장부였다. 잠들어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 예상하고 있었지만, 눈을 뜬 얼굴은 생각 이상으로 헌헌했다.
무심한 눈빛으로 이랑을 바라보던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기는…… 어딥니까?”“여울목.”“여울목?”“응. 겨울 산에서 다 죽어가는 걸 내가 살려준 거야.”이랑은 유난히 ‘내가 살려준 거야’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렇군요.”마치 방관자 같은 시선으로 자신의 상태를 살피던 사내가 다시 물었다.
“그런데…… 낭자는 누구십니까?”“이랑이, 여이랑.”그럼, 생명의 은인인데. 이름 정도는 알아둬야지.
“그렇군요.”이번에도 같은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 그런 대답 말고 다른 거 없어?
이랑은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그런 그녀를 사내 역시 빤히 쳐다보았다.
“그런데…….”“응.”꼴깍, 기대감에 마른 침이 다 고였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대체 내가 어느 귀한 댁 도령을 살려준 것일까?
잠깐의 침묵 사이로 이랑의 기대가 잔뜩 부풀어 올랐다.
분명 고맙다고 하리라.
어떤 사례든 하겠다고 하겠지?
그럼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고민하는 찰나.
드디어 사내의 입술이 열렸다.
“……나는 누굽니까?”“응?”
* * *
내가 무얼 잘못 들었나?
“방금 뭐라고 했어?”전혀 예상치 못한 물음에 이랑의 고개가 외로 기울어졌다.
“혹시…… 내가 누군지 아십니까?”“나야 당연히…… 모르지.”당연한 대답이었다.
네가 너를 모르는데 내가 너를 어찌 알아?
그런 이랑을 향해 사내가 진지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제가 어쩌다 이리되었는지는 아십니까?”“…….”“제 집이 어딘지는 아십니까?”“뭐야? 집이 어딘지 몰라? 정말로 본인이 누군지 모르겠어?”“……네.”사내의 대답에 이랑은 마치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망했다.
고개를 푹 숙이던 이랑이 돌연 등 뒤에서 찢어지게 하품을 하는 유 노인을 돌아보았다.
“이게 다 스승님 때문이야.”“이 녀석이!”유 노인의 주먹이 이랑의 머리를 쿡 쥐어박았다.
“달라는 대로 약초 주었더니. 이건 또 무슨 헛소리야?”“분명 머리를 다친 거야. 그때 스승님이 저 사내를 끌고 왔을 때 어딘가에 머리를 부딪힌 게 분명해. 이럴까 봐 내가 들것에 싣자고 했잖아!”어차피 죽을 목숨, 그리 수선 피울 것 없다며 다리만 붙잡은 채 질질 끌고 온 것이 화근이 된 것이 틀림없었다.
“또또, 말 잘라먹지!”유 노인이 눈에 힘을 세웠다.
“지금 이 판국에 말 잘라먹는 게 대수야? 이제 어쩔 거야?”“어쩌긴 뭘 어째? 기억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지.”“그러다 영영 기억 안 나면?”“안 나면…… 그냥 목숨 부지한 걸로 감사해야지.”“그럼 내 치료비는? 내 고약비법은? 내 명성은?”“뭐? 내 치료비? 내 고약비법? 거기다 명성까지. 이런 고얀 놈을 보았나. 아직 이마에 핏기도 안 가신 녀석이 벌써부터 명성 운운하는 게야?”“몰라 몰라. 스승님이 책임져. 어쩔 거야?”“어쩌긴 뭘 어째? 저리 안 떨어져? 어허! 네 이놈!”“스승님, 누나! 그만들 두세요.”졸린 듯 연신 눈을 비비던 단우가 이랑과 유 노인을 말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사내는 문득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꼭 기억할 것이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잊어버린 듯하다.
그게 무얼까? 대체 그게…… 무엇일까?
그는 서걱대는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