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특별한 비밀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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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6
“아직 소식이 없느냐?”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영이 물었다.
차가운 새벽바람을 묻히고 돌아온 시비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옵니다.”“어찌 이리 더딘 것이냐? 원래 이리 더딘 것이냐?”영은 초조한 기색으로 저 멀리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산실(産室)을 바라보았다.
진통을 느낀 라온이 산실에 들어간 지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 지났다.
처음에는 간간이 흘러나오던 신음마저도 이제는 들리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곁에서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었건만.
아이를 낳는 일은 영의 영역 밖의 일인지라, 어쩔 도리 없이 그저 동동 발만 굴러야 했다.
“아직이옵니다.”백번도 넘게 들려온 대답에 영의 인내심이 한계를 드러냈다.
“안 되겠다. 내가 가야겠다.”기어이 영은 라온이 있는 산실로 향했다.
“주군, 아니 되옵니다. 기다리십시오. 예서 기다리셔야 합니다.”느닷없는 그의 행보에 놀란 박두용과 한상익이 버선발로 뛰어나와 말렸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내 아내의 일이고, 내 아이의 일이다. 내가 지켜야겠다.”평소의 냉철한 모습일랑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영은 재게 몸을 움직였다.
잘못하였다.
어리석었다.
누가 뭐라 하여도 라온의 곁을 지키는 것이었는데.
그 사람의 손을 잡고 놓지 말 것을.
산실로 들어가던 라온의 모습이 영의 뇌리를 채웠다.
아득한 고통으로 창백해진 얼굴 가득 식은땀이 맺혀 있던 그 작은 얼굴이 명치에 맺혀 숨조차 바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것이 사내라더니. 그저 괜찮다는 한마디만 철썩 믿고 말았다.
“이런 바보를 보았나. 이런 어리석은 사내를 보았나.”스스로를 질책하며 산실 앞에 멈춰 섰다.
그의 모습에 산실 앞을 지키던 의원들과 시비들이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어찌 되었느냐?”턱밑에 들러붙은 숨을 채 떼어내지도 못한 채 영이 물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사옵니다.”“어제부터 그 말만 수십 번을 들었다.”“정말 이제 곧…….”의원의 말이 이어질 때였다.
“응애, 응애!”우렁찬 울음소리가 고요하던 산실을 뒤흔들었다.
영의 심장이 우뚝 멈췄다.
마치 한순간에 얼어버리기라도 한 듯 그대로 굳어버린 그는 눈동자만 산실로 돌렸다.
잠시 후.
안으로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고 시비 몇 명이 급한 걸음으로 부엌으로 향했다. 그 뒤로 백지장처럼 하얀 낯빛의 방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심아.”저에게로 집중된 시선에 방심이 종종걸음으로 영에게 다가왔다.
“어찌…… 되었느냐?”꽉 막힌 목이 간신히 트였다.
“경하드리옵니다. 예쁜 따님이십니다.”방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은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심려 마십시오. 아기씨도, 마님도 건강하십니다.”“그래? 그래. 다행이구나. 다행이다.”그제야 숨통이 트였다.
영은 내내 참았던 숨을 한껏 몰아쉬었다.
그때였다.
“말도 안 된다.”영의 곁을 지키고 서 있던 의원이 눈매를 한데로 모은 채 방심을 응시했다.
“너 방금 뭐라 하였니? 마님께서 낳으신 것이 따님이라 하셨느냐?”“네. 왜 그러십……?”“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네?”“내 분명 마님을 진맥하였을 때 사내아이의 맥을 짚었느니. 그런데 따님이라니? 따님이라니?”여자아이가 태어난 것이 마치 방심의 탓이라도 되는 듯 의원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따님을 따님이라 한 것밖에 없건만. 마치 죄인 보듯 노려보는 의원이 무서워 방심은 울먹거리고 말았다.
“정말 따님이더냐? 네 눈으로 확인했어?”못 믿겠다는 듯 의원이 다시 물었다.
지난 30년간, 그의 진맥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지금껏 뱃속 아이의 성별을 잘못 짚었던 적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분명 사내아이의 맥이었는데. 분명…….”바로 그때.
산실 문이 벌컥 열렸다.
“경하드리옵니다. 아드님이옵니다.”한달음에 영의 앞으로 달려온 산파가 주위가 떠나가라 소리쳤다.
“좀 전엔 분명 딸이라 하질 않았는가?”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산파가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쌍생아입니다.”
* * *
“라온아.”영은 라온의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기진맥진한 채 잠들어 있던 라온이 입가를 길게 늘였다.
“저하.”꽤나 길고 힘들었던 시간 덕에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우리 아기 보셨어요?”“그래. 보았다. 지금도 보고 있다.”“둘이었습니다. 둘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잠결인 듯 웅얼거리는 음성에 기쁨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 의원도 놀라더구나. 감쪽같이 하나인 줄 알았다고 하더구나. 어찌 그리할 수 있는지. 30년 의원 생활에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하더구나. 녀석들이 뱃속에서부터 장난질이 보통이 아니다.”“네. 장난꾸러기들입니다. 그래도 예쁘지요?”“아니. 밉다.”“저하…….”“아주 못된 녀석들이다. 꼬박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나 어미를 고생시키다니.”말은 그리하지만, 영은 라온의 곁에 누워 입술을 오물거리는 두 아이를 사랑스러운 눈길로 응시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듣고 서운하다 할 겁니다. 칭찬하여 주십시오. 탈 없이 세상 밖으로 나온 장한 아이들입니다.”“그래. 장하다. 어여쁘구나. 그리고…….”영은 라온의 손을 가만 그러잡았다.
“장하다, 장하다. 라온아.”“네. 제가 생각해도 제가 참으로 장한 일을 한 것 같습니다.”“뭐라?”이 와중에도 농을 하는 라온의 모습에 영은 풀썩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덩달아 웃던 라온의 웃음이 어느 순간 사라졌다.
영은 까무룩 잠이 든 라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제는 두 아이의 어미가 되었건만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발그레 홍조 띤 얼굴은 여전히 소녀 같았다.
아니, 이제는 여린 소녀의 모습에 성숙한 여인의 향내가 덧칠해져 풍요로운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영은 잠이 든 라온의 눈두덩에 가만히 입을 맞췄다.
하늘 봉숭아 빛 두 뺨과 붉은 입술에 경건한 입맞춤을 바쳤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나란히 누워있는 두 아이를 보았다.
두 볼에 라온의 영기를 담은, 그리고 자신을 영락없이 빼닮은 아이들.
어미와 마찬가지로 곤히 잠든 아이들의 뺨에 얼굴을 묻었다.
햇솜처럼 하얗고 말간 아이들에게서는 갓난쟁이 특유의 배릿한 향내와 함께 행복이 물씬 풍겼다.
이 행복을 놓치지 않으리라.
쉽게 달아나지 못하도록 손아귀에서 놓아주지 않으리라.
단단히 결의하는 영에게 수마가 밀려들었다.
라온이 산실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아본 적 없었던지라. 피로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영은 라온의 곁에 비로소 지친 몸을 뉘었다.
금세 잠이 든 그의 얼굴에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것은 온전히 행복한 사내만이 지을 수 있는…… 그런 저릿한 미소였다.
* * *
1년 후.
“암행어사를 파견하고 시시때때로 민정을 시찰하는 관리를 파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탐관오리의 수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영의 목소리가 실내를 무겁게 채웠다.
“듣자하니 이번에 새로 평양감사 된 자의 방탕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고 한다.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이 있음에도 연일 연회를 열고 기녀들을 불러 모으니.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 선생, 백운회의 사람을 평양으로 보내 사실을 확인해야겠소.”“명 받자옵니다.”“허고…….”그 이후에도 영의 엄중한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회합의 분위기는 예전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특히…… 고개를 숙인 사람들의 모습이 뭔가 이상했다. 바닥을 짚고 있는 팔이 부르르 떨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깨를 연신 들썩이는 것이 어찌 보면 우는 듯도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소리 없이 웃는 중이었다.
영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애써 웃음을 참고 있었던 것이다.
엄한 얼굴로 정사를 논하는 영의 오른팔에는 강보에 싸인 아이가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의 반대편 팔은 어느새 걸음을 떼기 시작한 아이의 지팡이로 쓰이던 참이었다.
“아부, 아부, 아부…….”의미가 불분명한 말을 연신 중얼거리던 아이는 푸푸 투레질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 녀석, 어딜!”위태위태 단상 아래로 걷는 아이를 영은 번쩍 들어 올렸다.
“아부, 아부.”아비의 손에서 벗어나려 앙증맞은 발을 바동거리는 모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기씨가 부쩍 호기심이 느신 것 같습니다. 어려도 사내라 그런가 봅니다. 하하하.”기분 좋게 웃음을 흘리는 정약용의 말에 영은 어색한 헛기침을 흘렸다. 그래도 제 아이에 대한 말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고 말았다.
“이 호기심 많은 녀석은 월이지요.”“월이 아기씨라면…….”쌍둥이 중 여아였다.
“어이쿠, 제가 실수를 하였습니다. 그럼 이쪽에 순하게 잠든 아기씨가…….”“그 아이가 환이라오.”“거참. 딴에는 총명하다 생각했는데. 두 분 아기씨는 좀처럼 구별할 수가 없으니. 번번이 실례하게 됩니다.”정약용은 겸연쩍은 얼굴로 마른 입맛을 다셨다.
영이 그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생, 사실은 나도 자주 헷갈리오.”그 솔직한 고백에 정약용은 허허 웃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월은 빛이 산란하는 마당으로 되똥되똥 걸어 나갔다.
그리고 이 소란 속에서도 환은 여전히 곤하게 잠들어 있었다.
* * *
다시 7년 후.
“하압!”“으앗!”두 개의 작은 인영이 땅을 박차고 올랐다. 허공중에서 하나로 뒤엉킨 그림자는 금세 두 개로 갈라져 바닥에 착지했다.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아이는 목검을 든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직은 어린 태가 역력한 환과 월이었다.
“하아, 하아.”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던 환은 들고 있던 목검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아, 졌다, 졌어. 그새 또 늘었네?”지친 듯 풀밭에 풀썩 주저앉는 환의 곁으로 마치 분신인 듯 똑같이 생긴 아이가 다가왔다.
찍어낸 듯 똑같이 생긴 얼굴에 똑같은 모양의 두건을 쓰고 심지어 입고 있는 옷까지 똑같았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손목에 차고 있는 팔찌.
팔베개하고 벌렁 풀밭에 눕는 환의 손목에는 푸른색의 실을 꼬아 만든 팔찌가, 그리고 그의 곁에서 멀쩡한 얼굴로 앉아있는 월은 붉은 팔찌를 차고 있었다.
“지난번에 알려준 검식, 연습 안 한 거야?”“할 짬이 없었어.”“환이 너, 궁에 들어간 이후로 너무 게을러졌어.”“궁에선 검술 말고도 할 일이 많아서 그래.”변명하듯 환이 말했다.
“할 일?”“해야 할 공부도 많고, 익혀야 할 법도에. 게다가 지난번에 네가 나 대신 궁에 있다 나간 뒤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배로 늘었어.”“왜?”“월이, 너한테 골탕 먹은 우부빈객께서 단단히 벼르고 있었단 말이야.”“우부빈객? 아, 킁킁빈객 말이구나.”“킁킁빈객?”“응. 공자께서 킁킁, 맹자께서 킁킁. 말끝마다 킁킁대니 킁킁빈객이지.”“아하, 이제야 알겠구나. 궁녀들 사이에서 킁킁빈객이라는 말이 돈다던데. 네가 한 말이구나.”“헤헤.”월이 혀를 살짝 빼내 물며 웃었다.
“그래서? 그 킁킁빈객께서 널 많이 괴롭혔어?”“그런 셈이지. 그런데 왜?”“어머니께서 항상 말씀하셨지. 사람은 무릇 받은 만큼 돌려줘야 한다고. 말해 봐. 얼마나 괴롭힘을 받았어? 내가 이번에 궁에 들어가면 죄다 돌려줄 테니.”월의 말에 환이 두 눈을 부릅떴다.
“말썽은 안 돼.”환의 단호한 모습에 월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너는 아버지랑 똑같아.”“좋은 말이지?”“재미없다는 뜻이야.”“뭐? 그보다 지난번에 내가 놓고 간 책은 다 외웠어?”“대충.”건성으로 대답하는 월을 환이 다시 한 번 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번엔 지난번처럼 엉터리로 시험 치를 생각하지 마.”“안 해.”“얌전히 구는 것도 잊지 말고.”“걱정 마. 내가 누구야? 월이야, 월이. 우리 아버지 딸.”자신만만하게 웃는 월의 모습에 도통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환의 고운 이마 위로 흐릿하게 주름이 그려졌다.
그때였다.
“세손저하, 세손저하.”멀리서 장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갈 시간인가 보다.”월이 반짝하고 몸을 일으켰다.
“여기!”손을 흔드는 그녀의 팔을 환이 잡아당겼다.
“월아! 팔찌.”“아참!”눈빛을 교환한 두 아이는 능숙한 동작으로 차고 있던 팔찌를 바꿔 찼다.
그 사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장 내관이 다가왔다.
“두 분 여기 계셨습니까?”“응.”“그만 궁으로 돌아가실 시간이옵니다.”“벌써?”“네.”“아쉽네.”시치미 뚝 뗀 월이 미간을 한데 모았다.
영락없이 어린 시절 영의 모습인지라, 장 내관의 입이 헤 벌어졌다.
고작 여덟 살이라 하여도 세손저하의 미모 출중하시니.
어린 소년의 외모에 한순간에 넋을 잃은 궁녀가 한둘이 아니었다.
천진한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는 깊은 눈망울, 오뚝한 콧날, 그리고 석류처럼 붉은 입술. 표정이 없을 때는 그 차가운 아름다움에 가슴이 설레었고, 행여 웃기라도 할 때는 주위의 공기마저 환해졌다.
우리 세자저하께서도 아름다운 분이셨지만 세손 저하와 월이 아기씨는 그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우셨다.
저 두 분이 자라시면 어떤 모습이려나.
상상하는 장 내관의 얼굴에 문득 홍조가 그려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그렇게 웃어?”앞서 걷던 월이 장 내관을 돌아보며 물었다.
화들짝 놀라 허리를 숙이던 장 내관이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세손저하, 어찌 그러십니까?”“내가 무얼?”“어찌 말투가 바뀌신 듯하옵니다.”“아, 그러하냐?”아차차, 실수.
서둘러 말투를 바꾼 월이 장 내관과 나란히 서 있는 환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는?”환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때 환의 물음에 대답이라도 하는 듯 저 멀리서 작은 인영이 팔을 흔들었다.
“환아, 월아!”어린 소녀처럼 달음박질친 라온이 두 아이 앞으로 달려왔다.
“어머니, 그러다 숨넘어가겠습니다.”환이 라온의 손을 잡으며 걱정스레 말했다.
“걱정 마라. 어미가 누구냐?”제 가슴을 두드리며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라온의 모습은 월이와 똑같았다. 낮게 한숨을 쉬던 환은 은근슬쩍 월을 앞으로 밀었다.
“어머니. 저는 그만 돌아가겠습니다.”“그래.”돌아가겠다는 아이의 말에 라온의 표정이 금세 시무룩해졌다.
하늘의 뜻을 저버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두 아이 중 사내아이를 궁으로 보내야 했다. 벌써 오래전의 일임에도 이렇듯 짧게 만났다 헤어질 때면 가슴이 미어졌다.
“두 달 후면 다시 올 텐데요, 뭘.”“그래.”“그때까지 강녕하셔야 합니다.”“알았다.”말을 하던 라온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월의 목에 매주었다.
담비 털로 만든 목도리였다.
“어미가 만든 것이야.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차니. 귀찮더라도 꼭 목에 두르고 있어라.”“저는 괜찮습니다. 월이 주세요.”“월이 것은 따로 준비해 뒀으니 걱정 마라.”“어머니.”“갈 길이 멀다. 어서 서둘러라.”이대로 두었다간 한없이 걸음이 지체될 듯싶었다.
라온은 서둘러 장 내관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윽고 세손을 데려갈 가마가 당도했다.
가마에 오른 월이 환을 돌아보았다.
“잘 지내.”환아…….
“잘 가.”월아…….
두 달 후에 다시 만나자.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 섰다.
월은 환 대신 가마에 오르고 환은 월이 대신 라온의 손을 잡았다.
두 달마다 서로 위치를 바꿔 살아가는 것.
그것은 두 아이 만의 은밀한 장난이었다.
그리고 오직 두 사람만이 아는 특별한 비밀.
성별이 다름에도 어미마저 구별하지 못할 만큼 똑같은 외모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부모님과 떨어져야 했던 환을 위한 월의 배려이기도 했다.
“어머니.”“응?”아이의 부름에 라온이 고개를 돌렸다.
앞으로 두 달.
월이 되어 살아갈 된 환이 라온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왜 그러니?”“아닙니다.”“어찌 그래? 할 말이라도 있는 거니?”“정말 아닙니다. 그냥요. 그냥 좋아서요.”환은 입가를 길게 늘이며 느른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두 달 만에 보는 어머니의 모습이 마냥 좋아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행복했다.
행복한 날들이 물처럼, 구름처럼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