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특별한 비밀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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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3
숲에 바람이 일었다.
햇살에 반짝이는 잎사귀들이 바람에 팔랑거렸다. 수만 마리의 나비가 날갯짓하는 듯 아득한 모습.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러나 정작 푸른 생명으로 가득 찬 후원을 바라보는 하연의 눈가엔 허망함만이 가득했다.
아름다운 숲도 지켜보는 이가 없으면 그저 쓸쓸히 퇴색할 뿐이었다.
문득, 자신의 운명도 이 숲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날이 시들어가는 계절처럼 그녀도 하루하루 생을 좀먹어 가고 있었다.
명분 없는 삶이란……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텅 빈 시선으로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넓디넓은 궁궐의 후원은 고요 속에 갇혀 버린 듯했다. 아니, 고요 속에 잠긴 것은 이 후원만이 아니었다.
세자께서 떠나신 이후로 궁은 생기를 잃어버렸다.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건만, 동시에 모든 것이 변했다.
일상이 무료했다.
그리고 무료한 일상은 너무도 더디게 흘러갔다.
그러나…….
하연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석상처럼 굳어있던 그녀가 고개를 문득 고개를 돌렸다. 시선 끝에 붉은 장포를 입은 사내가 들어왔다.
세자익위사 한율이었다.
세자께서 떠나시며 그녀에게 남긴 마지막 배려였다.
소리 없이 다가온 율이 하연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연이 그에게 물었다.
“알아보았나요?”간결하고 담담해 보이는 목소리 속에는 다급한 심정이 녹아있었다.
“마마의 짐작이 옳았습니다.”되었다.
하연의 입가에 오랜만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놓았던 서찰을 율에게 건넸다.
“이걸 그분께 전하세요. 누구도 알지 못하게, 은밀하게 말입니다.”명을 받은 율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사라졌다.
또다시 혼자가 된 하연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그 표정은 좀 전과는 달랐다. 꺼져가듯 시들어 있던 얼굴에 전에 없던 무언가가 깃들었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었다.
* * *
“갑자기 웬 불공을 드리겠다고 고집이신지.”투덜대는 박두용의 숨 끝으로 연신 거친 바람이 새어나왔다.
그는 연신 못마땅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금 박두용이 있는 곳은 따뜻하고 안락한 홍운이 아니라 깊은 산중의 작은 암자였다.
이틀 전.
라온은 갑자기 불공을 드리러 이 암자에 오겠다며 영에게 청했다.
몸이 무거워지면 더는 걸음하기 힘들 것이니, 이른 시일 내에 다녀오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라온의 간청에 영은 하는 수 없이 허락했다.
그러나 중한 일을 하는 중이라. 영은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를 대신하여 박두용과 한상익이 라온을 수행했다.
암자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험했다. 사방이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암자로 오기 위해서 더러 길이 아닌 곳을 걸어야 할 때도 있었다.
박두용의 입에서 불만이 연신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다.
보다 못한 한상익이 박두용의 입을 막았다.
“박가야, 그만해라. 오죽이나 불안하시면 이러시겠느냐.”“불안하실 것이 무어냐. 곁에 든든한 지아비 계시겠다, 이곳저곳 눈길 닿는 곳마다 보살피는 이도 수두룩한데. 대체 불안하실 것이 무어냐?”“네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원래 자식 품은 어미의 마음이란 그리 불안하고 조심스러운 게지.”한상익의 알은 체에 박두용은 콧방귀를 뀌었다.
“한가야, 네놈이 어미의 마음에 대해 무얼 안다고 그리 말하는 거냐? 누가 보면 자식 몇은 두고 있는 줄 알겠구나. 그래 봐야 너나 나나 반쪽짜리 사내인 것을.”“이 망할 박가야. 꼭 자식이 있어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더냐?”“그럼 없는데 어찌 안다고 그러느냐?”“된장인지 뭔지 꼭 찍어봐야 아는 게 아니질 않아? 척하면 척이라고. 원래 그런 건 자연스레 아는 법이다.”“지렁이 승천하다 몸통 뒤틀리는 소리 하는구나.”“뭐야, 이 늙은 놈이.”“늙은 것으로 치자면 나보다 여섯 달이나 먼저 태어난 네놈이 더 늙었다.”“어려서 좋겠구나.”“그러는 네놈은 저승길 가까워져서 퍽이나 좋겠다.”“뭐야? 이놈이 오늘 여기서 누구 저승길이 더 가까운지 한번 볼까?”한상익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지지 않고 박두용 역시 손바닥에 퉷 마른 침을 뱉으며 싸울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그만하십시오.”말만 섞었다 하면 티격태격하는 두 노인 사이로 라온이 끼어들었다.
“날이 이리 좋은데, 경치 구경하시며 담소라도 나누시면 좋을 것을. 어찌 그리 싸우기만 하십니까.”해사하게 웃는 라온의 모습에도 두 노인은 서로 노려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싸움은 그쯤 하시고 이것 좀 드십시오.”라온은 아이들처럼 투닥거리는 두 사람 앞에 작은 소반을 내려놓았다.
소반에는 말갛게 우러난 연잎 차와 말랑한 떡이 소박하게 놓여 있었다.
“이거 드시면서 예서 조금만 쉬고 계십시오.”라온의 말에 한상익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님은 어딜 가려고 그러하십니까?”“암자 주지 스님께서 귀띔해 주셨는데요. 저 위에 있는 불당에서 불공드리면 그 어떤 소원이든 이뤄진다고 합니다. 잠시 다녀올 테니 쉬고 계십시오.”“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행여 무리하셨다가 몸이라도 상하시면 주군께 우리가 경을 칠 겁니다.”“네. 걱정 마세요.”걱정하는 두 노인을 안심시킨 라온은 사뿐사뿐 고운 걸음으로 암자 뒤편으로 향했다.
“우리 마님이 저리 고우셨던가?”처음 보았을 때는 영락없이 사내아이였는데.
한입 크기의 인절미를 입안에 밀어 넣은 박두용이 웅얼거렸다.
“그러게나 말이다.”한상익 역시 라온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대답했다.
새삼 주군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저리 고우니 눈밖에 떼어놓지 않으시려는 게지.
저리 맑으니 안 보이면 전전긍긍 애달파하시지.
싱긋, 미소를 짓던 한상익은 하늘을 올려보았다. 하늘 위로 어느새 저녁놀이 짙게 깔리고 있었다. 아련한 붉은색이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이런 하늘을 얼마나 더 볼 수 있으려나.
하루하루가 화살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눈 깜빡할 사이 세월이 저만치 앞으로 치달리는 기분이다. 그러기에 매 순간이 안타깝고 소중했다.
그나저나 이 떡은 어찌 이리 맛날까?
이 연잎 차는 또 어찌 이리 달콤한 것일까?
나른한 생각을 끝으로 한상익은 그대로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그의 곁에는 먼저 잠이 든 박두용이 낮게 코를 골고 있었다.
* * *
내 아이의 안녕을 기원하나이다.
내 님의 평안을 바라옵니다.
네 평 남짓한 작은 불당에 간절한 소망이 가득 들어찼다. 한 번, 두 번, 세 번……, 절을 올리는 라온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무슨 염원을 그리 비는 것입니까?”고요하던 불탕의 문이 열리고 낯선 인영이 모습을 보였다.
라온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사박사박 비단 자락 끌리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입니다.”정갈한 미소와 함께 인사를 건넨 하연이 라온의 앞에 앉았다.
“강녕하셨습니까?”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라온이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약조한 만남이었다.
며칠 전, 하연의 은밀한 서찰을 받았을 때는 조금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나 언제고 한 번쯤은 만나야 할 사람이었다.
하여, 영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불공드린다는 핑계로 이 암자를 찾았다.
두 여인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뗀 사람은 하연이었다.
“몸은 어떻습니까?”시선이 자연스레 라온의 배로 향했다.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라온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어찌 아셨습니까?”“언제 알게 되었느냐 묻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네?”“그 밤이었지요. 그대가 내게 약과를 가져왔던 그 밤에 알게 되었습니다.”“어떻게 말입니까?”나조차도 몰랐던 사실을 어떻게 아셨다는 겁니까?
“글쎄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꼬집어 말하라 한다면…… 나도 딱히 대답할 수 없겠군요. 그냥…… 네, 그냥 알아지더군요. 그대를 본 순간, 몸속에 귀한 생명을 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아마도 절실히 바라던 것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본능이…… 여인의 마음이 속삭였던 것이리라.
“…….”라온의 시선이 바닥으로 향했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마음 알아차린 하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그대를 원망하려 이리 만나자고 한 것이 아닙니다. 내겐 그럴 마음도, 그리고 자격도 없으니까요.”잠시 말을 멈춘 하연은 라온에게 좀 더 바싹 다가가 앉았다.
“내가 그대에게 은밀한 만남을 청한 것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입니다.”“부탁이요?”묻는 라온을 향해 하연이 돌연 머리를 깊숙이 숙였다.
“왜 이러십니까? 일어나십시오.”당황한 라온의 목소리에도 하연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부탁입니다. 제발 내 청을 들어주세요.”“말씀해 보십시오. 대체 무슨 부탁이신데 이러시는 겁니까?”라온의 물음에 하연은 머뭇거렸다.
그러나 이내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고약한 이기심이라 하여도 상관없었다. 못된 욕심이라 손가락질하여도 그 모진 눈길 다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하연은 소맷자락 속에 숨어있는 주먹을 왈칵 말아 쥐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잠시 후, 내뿜는 날숨과 함께 진실로 하고픈 한마디가 하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대의 아이를 내게 주세요.”
* * *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머릿속이 먹먹해졌다.
어미의 본능이려나?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하연을 바라보는 눈빛에 날이 섰다.
아직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은 아이였다. 아직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아이를 달라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그 성난 속내를 알아차린 하연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아이를 빼앗으려는 게 아니에요.”“그럼 무슨 마음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겁니까?”“그분의 핏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밖으로 내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입니다.”“…….”“그 아이는 왕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아이는 하늘이 이 나라를 위해 내려준 씨앗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열게 될 또 하나의 희망. 이리 허망하게 그분의 흔적을 세상에서 지울 수는 없습니다. 그분께서 달이 되었다고 하지만 하늘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것은 해입니다. 그 아이가 왕이 된다면 그분의 뜻을 가장 올곧게 세상에 비출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부디…… 그리하게 해 주세요. 부디 내 청을 거절하지 마세요.”간절한 눈빛이 라온을 향했다.
마주 보던 라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찌해야 좋은 것인지 선뜻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운명이 이끄는 대로 걸음 하였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사내를 연모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소중한 생명을 잉태하였다. 그러나 하나를 갖게 되면 하나를 내어놓는 것이 세상의 순리라고 하였던가. 가혹한 운명은 그녀에게 또 다른 시련을 내어 놓았다.
차라리 눈감고, 귀 막아 버리고 싶었다.
세상이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라고 뒤돌아 앉아버리고 싶었다. 이 나라가 어찌 되든, 이 나라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가던 눈 질끈 감아버리면 그만 이리라.
하지만…….
라온은 굳은살이 박여있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영을 만나 그의 여인이 되고 안락한 나날을 보내고 있음에도 비루하고 고되었던 과거는 이렇듯 또렷하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들었던 삶이었다.
그것이 이 나라 백성으로 태어난 자에게 지워진 멍에였다.
백성이기에 고되었고, 백성이기에 그 고된 삶이 당연하다 하였다.
그런 세상이 싫어 스스로 자청하여 달이 된 영이었다.
사내가 사내답고, 여인이 여인다우며, 또한 아이와 노인이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그녀의 정인은 지금도 밤잠을 설치고 있다.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리고 궁을 떠난 영이었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가 사라짐으로써 대(大)가 끊어지고 말았다.
하연의 청이 아니라 할지라도, 후계를 위해 아이는 궁으로 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뒤엉킨 번민이 라온을 괴롭혔다.
가슴께에 아득한 격통이 느껴졌다.
아무리 하늘의 뜻을 따른다 하여도 어찌 어미의 마음을 끊을 수 있을까. 하여, 라온은 하연의 청을 단칼에 끊어낼 수도, 그렇다고 기쁘게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마침내 여린 입술이 열리고 나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온의 번민이 하연에게로 전해졌다.
어미의 슬픈 본능은 어미가 되지 못한 여인에게도 고스란히 느껴졌다. 차마 마주 앉아 있기 어려웠다. 하연은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하연이 물러간 후에도 라온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 아이의 안녕을 기원하나이다.
내 님의 평안을 바라옵니다.
작은 불당을 가득 채운 간절한 기원은 밤이 새도록 이어졌다.
* * *
황금빛 햇살이 눈두덩을 간질였다. 달콤한 꿈에 사로잡혀 있던 박두용은 부스스 눈을 떴다.
아이고 잘 잤다.
눈을 비비던 동창 밖으로 시선을 보내자니 마당을 쓸던 어린 동자승과 눈이 마주쳤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해맑게 인사말을 건네는 동자승에게 박두용은 웃음으로 답례했다.
“네, 잘 잤습니다.”“곧 아침을 준비하겠습니다.”“그럼 감사하지요.”동자승은 곧 마당을 가로질러 자취를 감추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두용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이 밝았다? 날이 밝아? 아침? 아침이란 말이야?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아이고, 한가야!”벼락같은 목소리에 선방(禪房) 한쪽에 얌전히 잠들어 있던 한상익이 용수철처럼 몸을 일으켰다.
“왜? 무슨 일이냐?”“날이 밝았다. 날이 샜단 말이다.”“그게 무슨 소리냐?”“우리가 하룻밤을 꼬박 잠들었었단 말이다.”“말도 안 되는 소리 마라.”한상익은 박두용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놈이 이제는 망령이 들었나? 웬 헛소리야?
라온과 암자에 당도한 것이 불과 반 시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하룻밤이라니.
그런 한상익을 갑갑하게 바라보던 박두용이 벌컥 방문을 열었다.
“봐라. 날이 밝았단 말이다.”“이, 이게 어찌 된 거냐?”당황한 눈으로 푸르게 밝아오는 새벽 풍경을 보던 한상익은 급히 주위를 살폈다.
“박가야. 마님은? 마님은 어디 계시느냐?”“그걸 내가 어찌 아냐?”그때였다.
“이제 일어나셨습니까?”허둥대는 두 노인의 귓가에 라온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문밖에 선 라온에게로 향했다.
하얗게 마른 입술, 붉게 충혈된 눈동자.
한눈에 봐도 밤을 꼬박 새운 것이 틀림없었다.
“마님, 설마 밤새 불공을 드린 겁니까?”한상익의 물음에 라온은 흐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박두용이 펄쩍 뛰었다.
“무리하지 말라 그리 당부드렸건만. 안 되겠다. 한가야, 가마꾼 불러라.”“알았다. 내 서둘러 준비할 것이니. 너는 마님께서 더는 무리하지 못하도록 곁을 지키고 있어라.”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노인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얼마 후.
라온을 태운 가마가 암자를 떠났다.
멀리, 비탈길로 사라지는 가마를 향해 하연은 깊게 고개를 숙였다.
끝내 라온의 대답을 들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연은 그녀가 순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임을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큰 둥지를 만들어 두겠습니다. 언제고 그대의 아이가 그곳에서 힘찬 날갯짓을 할 수 있도록. 그분의 아이가 큰 뜻을 잃지 않도록. 든든한 둥지를 만들 것입니다.”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하연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하연은 푸른 창공을 응시했다.
억지로 만든 사람의 연이라 하여도 상관없었다.
가문을 위해 알맹이는 모두 버리고 빈 껍데기인 채로 살아갈 생이었다.
그런 하연에게도 긴 세월을 견뎌내야 할 분명한 이유가 생겼다. 이 궁에서 살아야 할 명분이…… 삶의 뚜렷한 목적이…… 생긴 것이다.
하연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인형처럼 굳어있던 얼굴이 생기로 반짝거렸다.
* * *
“이제 온 것이냐?”라온과 그 일행들이 홍운으로 들어가기 위해 호숫가에 다다랐을 무렵.
라온의 앞으로 영의 긴 그림자가 다가왔다.
“저하.”라온의 얼굴에 금세 환한 미소가 꽃처럼 피어났다.
“기다리고 계셨습니까?”묻는 말에 대답하는 대신 영은 라온의 얼굴부터 살폈다.
“안색이 왜 이러느냐?”하룻밤 사이 지친 기색이 역력한 라온을 보며 영이 물었다.
“안색이 왜요?”시치미 뚝 떼는 라온을 향해 영이 눈매를 치떴다.
“밤새 절이라도 드린 것이냐?”“생각할 것이 좀 있어서요.”“무에 그리 생각할 것이 있다고 이리되도록 절을 올려?”영의 성난 눈빛이 라온의 곁을 지키고 있는 박두용과 한상익에게로 향했다.
“그대들은 무얼 하고 있었는가?”“그러니까…… 그것이…….”차마 할 말을 못 찾은 두 노인은 연신 눈동자를 굴렸다.
암만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암자에 도착하여 떡과 연잎 차를 먹은 것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그 뒤는 도통 캄캄했다.
혼자라면 모를까, 어찌 두 사람이 함께 그리되었을꼬.
“제가 고집을 부린 겁니다. 할아버지들은 죄 없어요.”라온은 서둘러 영의 눈길을 막았다.
사실은 하연과의 만남을 방해받고 싶지 않아 엄공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 잠 오는 약을 얻었더랬다.
그 약을 연잎 차에 조금 풀었는데 생각보다 효능이 대단하였다. 한상익과 박두용이 정신없이 잠이 든 것도 모두 그 때문이었다.
두 사람에게 괜한 불똥이 튈까 싶어 라온은 영의 팔을 잡아끌었다.
“몸이 무거워서 그런지, 쉬이 지치는 것 같습니다. 어서 쉬고 싶어요.”해사한 웃음이 영의 눈을 가득 채웠다.
“저하, 저하…….”말끝을 길게 늘이며 눈웃음 짓는 제 여인의 모습에 영의 마음이 녹아내렸다.
“홍라온.”이 고얀 녀석.
감히 저항할 수 없는 미소에 강건한 사내는 스스로 무장을 해제했다.
어느덧 세상에서 가장 유순한 사내가 되어버린 영은 라온의 손에 이끌려 구름다리를 건넜다.
이러다 내가 바보가 되고 말겠구나.
문득 이런 걱정도 들었지만…….
아무려면 어떠할까.
라온의 앞에서만큼은 바보가 되어도 좋았다.
천하에 다시없을 팔푼이가 된다 하여도 상관없었다.
좋았다.
그저 좋았다.
이리 보고만 있어도 심장이 터질 만큼 좋고, 좋고, 또 좋았다.
“이제는 어디든 홀로 보내지 않을 것이다.”으름장 놓는 영을 라온이 돌아보았다.
“그런데 저하, 어찌 눈이 토끼처럼 빨갛습니까?”“한숨도 못 잤느니.”“왜요? 또 일이 많으셨던 것입니까?”“일이야 초저녁에 다 끝냈다.”“그럼요?”“네가 없으니 도통 잠을 잘 수가 없겠더구나.”“이런…….”“왜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이냐?”“다정도 깊으면 병이라고 하였습니다.”“병이라도 상관없다.”“상관있습니다.”“어째서?”“그 병을 앓으면 참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힘들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그 사람 생각뿐인지라. 온종일 혼곤한 꿈길을 걷는 듯 그리 살게 됩니다. 생활이 힘들 지경이지요.”“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그거야…….”라온의 얼굴에 문득 수줍은 표정이 피어났다.
“제가 이미 앓고 있기 때문입니다.”듣기만 해도 가슴 벅찬 말이라.
영은 라온을 제 품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속삭였다.
“참으로 고민이구나.”“무엇이 말입니까?”“날이 갈수록 네가 더 좋아지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으냐.”영의 말에 라온은 입가를 길게 늘였다.
그런 그녀의 콧방울을 장난치듯 쥐었다가 놓으며 영은 말을 이었다.
“말해 봐라. 병연에게 미소를 되찾아준 네가 아니더냐. 그리 차갑던 윤성이 녀석에게는 가면 같은 미소를 거두고 진짜 표정을 지을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렇게 다른 이의 고민을 척척 해결해 준 너였다. 그러니 내 고민도 해결해다오.”“말씀해 보십시오. 고민이 무엇입니까?”“날이 갈수록 홍라온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느냐?”영이 내심 진지한 표정으로 묻자 라온 역시 진지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시선을 들어 영을 바라보며 라온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하의 고민은 도저히 해결할 방도가 없는 듯합니다.”“그럼 나는 어찌하면 좋으냐?”영의 물음에 라온이 길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요. 제가 평생 저하의 곁을 지키는 수밖에요.”“뭐라……? 하하하하.”영의 웃음소리가 허공에 기분 좋은 파장을 만들어냈다.
삶은 가끔 사소한 곳에서 찬란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다.
지금이 그랬다.
아프도록 행복한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한때가…….
시리도록 찬란한 순간들이 영과 라온의 앞에 펼쳐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