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달의 나라 (下)
별점10.02,472명 참여 | 댓글267
2014.12.19
홍운의 본채 마당에 거대한 차일이 쳐졌다. 붉은 비단보가 깔린 단상에 상이 마련되었다. 숙수들이 만든 음식들이 연신 마당으로 날라졌다.
왁자한 잔치의 시작을 알리는 흥겨운 가락이 연주되었다.
녹음이 짙은 여름의 초입.
하늘과 땅, 바람과 구름, 세상 만물에 영과 라온, 두 사람이 하나 됨을 고하는 신성한 의식이 열렸다.
혼인을 축복하기 위한 걸음이 아침부터 줄을 이었다.
햇살이 제법 깊어진 시각.
처소에서 나갈 채비를 마친 영은 삐져나오는 웃음을 감당할 길이 없어 연신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혼롓날, 너무 좋은 내색을 하면 잡귀가 강샘한다 하였던가.
티끌만큼의 부정(不淨)도 타고 싶지 않은 사내의 마음이라. 그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기침만큼 숨길 수 없는 것이 기쁜 내색이었다. 어느새 시선은 라온이 기다리고 있을 별당으로 향했다.
“조금만 참으시옵소서. 곧 만나실 것이옵니다.”연신 조바심을 내는 제 주군의 모습에 박두용이 소맷자락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조바심내지 않는다.”말은 그리하면서도 목이 길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시간아, 어서 가라.
오늘따라 더디게 흐르는 야속한 시간에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갔다.
그때 문밖에서 후다닥 뛰어 들어오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드디어 시작인가?
잔뜩 부풀어 오른 영은 옷매무시를 정갈히 했다.
활짝 열린 문 안으로 한상익이 얼굴을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상익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마디에 영은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큰일이 나고 말았습니다.”“뭐라?”큰일?
경사스러운 날.
대체 또 무슨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 * *
“나는 이 혼인 반대야.”<나도 이 혼인 찬성할 수 없네.>앙칼진 명온 공주에 이어 영온 옹주의 손글씨가 라온의 손바닥 위에 떨어졌다.
“공주마마, 옹주마마.”라온은 난감한 얼굴로 두 여인을 번갈아 보았다.
얼마 전.
혼례를 위해 곱게 치장하던 라온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명온 공주와 영온 옹주였다.
두 사람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장 내관의 공로가 지대했다.
명온공주의 전각에서 일하게 된 장 내관은 왕세자께서 승하하신 이후에도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평소 세자저하와 관련한 일이라면 작은 사건에도 기뻐하고 슬퍼하던 장 내관이 아니던가. 그런데 저하께서 돌아가신 후에도 웃음을 잃지 않다니. 명민한 명온은 그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하여, 몰래 장 내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장 내관은 무시로 궁 밖 출입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혼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와병을 핑계로 궁을 나왔다.
하지만 아픈 사람치곤 그 걸음이 너무 가벼웠다.
장 내관의 뒤를 쫓던 명온 공주는 확신하였다. 장 내관에게 무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것을. 때마침 명온 공주를 찾았던 영온 옹주와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장 내관의 뒤를 밟았다.
그리고 결국은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명온 공주와 영온 옹주는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라온을 쳐다보았다. 특히나 명온 공주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내게 어찌 이럴 수가 있어?”오라버니께서 살아계신 것도 모자라, 오라버니와 라온이 혼인을 한다고? 아직 라온이 여인이었다는 충격에서 벗어나지도 못했건만.
“사정이 어찌 되었든 난 이 혼인 반대야. 절대 찬성할 수 없어.”단호한 명온의 모습에 라온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공주마마.”어찌해야 저 마음 풀어지려나.
“속상한 마음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너는 나를 세 번이나 속였다.”“네.”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었다.
“처음엔 김 도령인 척 가장하여 내게 연서를 보냈고, 그다음엔 사내인 척하였지. 그리고 이젠 세상 속에서 영영 사라진 척하더니. 이리 말짱히 살아 오라버니와 혼인을 하는 것이냐? 너는 나를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다.”“네, 맞습니다. 저는 공주마마를 단 한 번도 진실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습니다.”“역시…….”명온의 표정이 흐려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괜한 말을 하였건만. 라온은 그것이 사실이라 순순히 인정했다.
“저는 김 도령인 척 공주마마께 연서를 보냈고, 그리고 사내인 척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에서 사라진 저하와 혼인을 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마.”“…….”“다시 과거로 돌아간다고 하여도 저는 다시 공주마마께 연서를 보낼 겁니다.”“뭐라? 정녕 네가 나를 놀리려는 것이냐?”“그런 것이 아닙니다.”“아니라면 대체 무슨 심보더냐?”“공주마마께서 모든 것의 시작이셨기 때문입니다.”“뭐?”“공주마마께 보낸 가짜 연서 덕에 저하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거짓 사내 노릇을 한 덕에 궁에 들어가 세자저하를 다시 뵐 수 있었지요. 그러기에 다시 과거로 되돌아간다고 하여도 저는 그리할 겁니다.”“네게 나는 오라비에게 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하구나.”“우리 두 사람의 인연을 이어주는 귀한 오작교입니다.”“네가 좋았다.”“저 역시 공주마마가 좋았습니다. 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비록 진실한 모습으로 공주마마를 대할 순 없었지만. 공주마마께 보여 드린 제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니 그것마저 부정하지는 말아주십시오.”“…….”“하나만 여쭙고 싶습니다.”“무어냐?”“공주마마께 저는 무엇이었습니까?”“무슨 뜻이더냐?”“연서를 보내는 동안 저는 진심으로 좋은 벗을 사귀는 듯했습니다. 여인과 사내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익혀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공주마마의 생각이 좋았습니다. 서신에 담긴 공주마마의 마음에 매료되었습니다.”“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네 생각이 좋았다. 서신에 담긴 너의 결기와 의지가, 너의 올곧은 생각이 좋았다.”“그럼 그대로 좋아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사내가 아닌 그저 저의 모습을. 이런 저를 좋아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명온이 입을 삐죽거렸다.
“네가 사내라서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저 네가 너라서 좋은 것이다. 네가 홍라온이라서 좋았던 거야.”“공주마마. 정말입니까?”“그리 좋아할 것 없어.”“네?”“그래도 이 혼인은 절대 반대야.”“이 오라비가 죽는다고 해도 말이냐?”그때였다.
두 여인의 대화 사이로 영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하!”“오라버니!”성큼성큼 명온의 앞으로 다가선 영은 콩, 아프지 않게 공주의 이마에 알밤을 먹였다.
“오라버니.”명온의 눈에 슴벅슴벅 눈물이 들어찼다.
“이건 혼롓날 신부를 훔쳐 가 나를 놀라게 한 벌이다. 그리고 이건…….”영은 눈물을 글썽이는 공주를 부드럽게 안아주었다.
“놀라게 해 미안하구나. 그리고 잘 왔다.”어린 누이를 놀라게 한 미안함이 토닥이는 손길에 녹아있었다.
“오라버니…….”그제야 마음 한 자락이 풀린 명온공주가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너무합니다. 어찌 이렇게 큰일을 벌이시고 말 한마디 안 해줄 수 있습니까. 제가 얼마나…… 얼마나 슬펐는지 아십니까? 정말로 원망스럽습니다.”그 울음은 반 시진 동안이나 이어졌다.
“주군, 이러다 해가 지겠습니다.”보다 못한 한상익과 박두용이 동동 발을 구르며 말했다.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낸 명온이 고개를 들어 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저는 이 혼인 반대예요.”“이 오라비가 살 수가 없다 하여도 말이냐?”“어째서요? 어째서 살 수 없다 하십니까?”“저 사람 없이는 이제 내가 살 수가 없다. 저 사람 없는 삶을 사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그러니 명온아…….”“아무리 그래도…….”명온이 붉은 활옷과 족두리를 쓰고 있는 라온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저 모습으로는 절대 혼인할 수 없어요.”“뭐?”명온은 제 곁에 있는 한상익과 박두용에게 시선을 보냈다.
“오라버니가 뉘시더냐? 왕세자저하가 아니시더냐? 허면, 저 이는 뉘시더냐? 빈궁이시다. 그런데 어쩌자고 저런 복색이시더냐?”“네?”“앞장서라.”날카로운 눈빛으로 두 노인을 노려보던 명온 공주는 내내 곁을 지키고 있던 영온 옹주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뗐다. 그러다 멍하니 서 있는 라온을 돌아보았다.
“뭐하십니까?”“네? 저 말입니까?”느닷없는 존대에 라온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네. 어서 따라오세요.”재촉하는 명온 공주의 말에 라온은 주춤주춤 걸음을 옮겼다.
대체 무얼 하려 저러시나?
이상하게도 등 뒤로 불길한 예감이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두 시진 후.
라온의 예감은 현실로 드러났다.
* * *
봉황이 수놓인 청색 스란치마를 입고 그 위에 홍색 스란치마를 덧입었다. 그 위에 붉은 원삼을 입고 대를 찬 라온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면경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영 낯설었다.
하얀 진주 가루로 얼굴을 분칠하고, 붉은 꽃잎이 입술에 붉은 기를 덧칠했다.
향긋한 향신료를 덧발라 빗어 내린 머리는 곱게 땋아 목 뒤로 틀어 올렸다. 그리고 황금으로 만든 커다란 봉황잠으로 쪽을 지었다.
그것만으로도 과하다 생각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아름다웠다. 하지만 명온은 성에 차지 않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무언가 기다리는 듯 연신 밖을 살폈다.
대체 무얼 기다리시는 것일까?
궁금한 마음에 라온 역시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장 내관이 붉게 옻칠한 함을 들고 별당 안으로 들어왔다.
“분부하신 대로 준비하였나이다.”헉헉,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장 내관은 들고 있던 함을 명온에게 내밀었다.
대체 저게 무어기에?
궁금한 찰나.
명온이 함을 열었다.
이내 라온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건 청국에서 들여온 진주를 박아 만든 뒤꽂이지요. 그리고 이건 황금으로 만든 용잠입니다. 이건 마리삭 금댕기, 이건 가란잠, 또 이건 소립봉잠, 이건 앞꽂이…….”명온은 함 속에 들어 있던 비녀와 장신구를 하나하나 설명했다.
얌전히 그 설명을 듣던 라온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명온에게 물었다.
“그런데 공주마마, 이걸 다 제 머리 위에 얹으시려는 것은 아니시지요?”명온은 대답 대신 곁을 지키는 시비들을 돌아보았다.
“뭣들 하느냐?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혹시나 하는 것들이 역시나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곱게 빗어 내린 라온의 머리 위에 대수머리가 얹혀졌다. 그리고 그 위에 서른 가지가 넘는 비녀와 장신구가 빼곡하게 꽂혔다.
시간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갔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탁탁.
박을 치는 소리와 함께 홍운의 문이 활짝 열렸다.
흥겨운 웃음소리와 이야기소리로 가득했던 마당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이윽고 신부의 등장을 알리는 곡이 연주되었다.
이제나저제나 라온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그의 눈동자에 라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리도록 붉은 원삼 입고 찬연한 하늘 꽃밭일랑 머리에 인 라온이 그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조심스레 다가왔다.
쿵쿵, 심장이 요동쳤다.
바라보는 눈가에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엄격한 예법과 위엄 가득한 혼례의 형식 같은 건 영의 머릿속에서 깡그리 지워졌다.
영은 단숨에 단상을 내려와 라온 앞에 섰다.
“저하…….”박두용에게서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들었던 예식의 형식과는 전혀 다른 영의 행동.
라온은 놀란 표정으로 영을 바라보았다.
“잡아다오.”라온을 향해 손을 내민 영이 작게 속삭였다.
“저하.”“내 손잡고 놓지 마라.”라온의 입가에 긴 미소가 맺혔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영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순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에서 크고 작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엄격한 예법 대신 흥겨운 노랫소리가 그들을 반겼다.
위엄 가득한 혼례의 형식 대신 한 사내와 한 여인이 서로의 지아비와 지어미가 되는 마음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함께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의 등 뒤로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 * *
혼례를 어찌 치렀는지 의식이 가물거렸다.
라온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덧 깊은 밤이었다.
약과와 화전, 누름적과 산적이 놓인 간소한 술상이 영과 라온의 사이에 놓여 있었다.
“곤하지 않으냐?”영의 물음에 라온은 고개를 흔들었다.
“괜찮습니다.”“이리 오너라. 우선 그것부터 가벼이 하자꾸나.”영은 라온의 머리 위에서 찰랑거리는 떨잠과 비녀를 가리켰다.
메추리알만 한 진주, 붉은 산호, 여름 하늘색을 닮은 푸른 보석과 황금으로 뒤엉킨 머리는 하늘 꽃밭인 듯 선연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무게는 만만치가 않았다.
온종일 무거운 가체에 짓눌린 목이 뻣뻣해 보였던지라, 영은 서둘러 그것부터 벗겨 내려 하였다.
“홍라온.”부르는 소리에 라온은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고 했다.
그러나 가체로 인해 굳어버린 목이 좀체 돌아가지 않았다.
“이 미련한 녀석. 그러게 명온이가 아무리 고집을 부린다고 해도 이리 많이 꽂지를 말 것이지.”영은 라온의 곁으로 불쑥 다가가 앉았다.
맥없이 그의 손에 붙들린 라온은 영이 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늘게 몸통을 떨던 나비잠이 뽑히고 무거운 진주 비녀가 뽑혔다. 홍옥과 자수정으로 만든 떨잠이 온종일 노닐던 가체를 벗어났다.
그렇게 하나둘, 머리 위가 가벼워지자 그제야 마른 숨이 쉬어졌다.
한 꺼풀 한 꺼풀 온몸을 무장하던 것이 벗겨지고 지워졌다.
“이제야 내가 알던 홍라온 같구나.”라온의 얼굴을 살피며 영이 말했다.
라온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영의 다음 손길을 기다렸다.
이제 곧 원삼도 벗을 수 있겠구나.
하지만…….
가체를 풀어 내린 영은 어쩐 일인지 라온에게서 물러났다.
응? 왜 저러시지?
궁금한 찰나.
영의 입에서 가벼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찌 그러십니까?”걱정된 라온은 머루 알처럼 동그랗고 새카만 눈으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과즙을 한껏 베어 문 듯 달콤한 향내를 풍기는 붉은 입술이 그를 불렀다.
“저하…….”“…….”일순, 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가 얼마나 고운지 모르는지 라온은 연신 말간 얼굴을 갸웃거리며 영을 살폈다.
저 까만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온전히 담기는 것이 보고 싶었다. 저 열없이 벌어진 입술을 담뿍 입안에 머금고 싶은 사내의 열망이 영을 부추겼다.
그러나…….
‘조심, 또 조심하셔야 합니다. 회임하신 지 이제 겨우 석 달째입니다. 지금이 가장 조심해야 할 시기이오니. 그저 손만 잡으십시오. 그 외에는 절대 아니 되옵니다.’신방(新房)에 들어오기 직전.
당부에 당부를 거듭하던 박두용의 말이 귓가에 쟁쟁했다.
결국, 영은 라온의 손을 잡았다.
꼬옥, 아주 세게.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단단히 깍지 꼈다.
“그만 자자.”애써 감정을 숨긴 한마디와 함께 영은 금침 위에 누웠다.
단정하고 아주 반듯하게 누워 옆도 돌아보지 않았다.
보면 안고 싶어질 테고, 품에 안으면 입맞춤하고 싶어질 것이며 입맞춤 후엔…….
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버거웠다.
하지만 참을 수 있었다. 아니, 참으리라.
하지만 영의 그런 반듯한 행동이 라온의 마음에 근심을 만들어냈다.
저분이 어찌 저러실까?
틈만 나면 자신을 안으려 하셨던 분이 아니신가. 그런데 혼례를 치르고 이 방에 들어온 이후, 내내 자신과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그런 영이 라온은 내심 서운하였다.
내가 무얼 잘못하였나?
버성긴 마음으로 제 행동을 되짚어 보던 라온은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왜 이러십니까?”“무얼?”반듯하게 누운 영이 단정히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제가 무얼 잘못하였습니까?”“그런 것 없다.”“그럼 제게 무에 화가 나신 거라도 있습니까?”“어찌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내가 네게 화날 일이 무어가 있다고.”“그럼 왜 이러십니까?”“내가 무얼 어쨌다고 이러느냐?”“절 보지도 않으셨잖습니까. 그리고…….”안아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차마 입 밖에 꺼내놓지 못한 수줍은 말은 라온의 얼굴에 홍조로 피어났다.
“혹여 마음이 변하신 겁니까?”“그건 또 무슨 말이더냐?”“상선 할아버지께서 그러셨습니다. 사내들이란 쉬이 싫증을 잘 내는 법이니. 어제까지 좋아하던 것도 한순간에 마음이 떠나버린다고요. 그런 겁니까?”라온은 영의 곁에 바싹 다가가 물었다.
그 친밀한 접촉이 부담스러운 듯 영은 낮은 헛기침을 하며 숫제 벽을 향해 돌아누워 버렸다.
“저하…….”“그런 것이 아니다.”“그런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이러십니까?”“그러니까…….”마땅한 변명거리를 찾지 못해 말끝을 늘일 때였다.
“저하가 좋습니다.”명징한 고백이 영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아무 시름없이 저하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이 밤을 기다렸습니다. 제가 저하의 온전한 여인으로 세상에 고하는 이 날이 마냥 설레었습니다. 하지만 저만 좋았는가 봅니다.”어깨너머로 영을 들여다보던 라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자꾸만 자신을 피해 저리 자라처럼 몸을 웅크리시니. 차라리 자리를 피해드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찰나.
잡아당기는 단단한 완력에 몸을 휘청거리고 말았다.
어느 틈엔가 자리에서 상체를 일으킨 영은 제게서 멀어지는 라온을 힘껏 끌어당겼다.
거친 힘에 라온은 그대로 영의 품속에 안기고 말았다.
쿵쿵! 쿵쿵!
냉랭한 행동과 표정과는 달리 그의 심장은 무섭게 고동치고 있었다.
“저하…….”라온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들리느냐? 내가 지금 어떤 마음인지 들리더냐?”“헌데 왜 그러셨습니까?”“참는 것이다. 죽을힘을 다해 참고 있는 것을 왜 모르느냐?”“왜 참는 겁니까? 어째서요?”대답하는 대신 영의 시선이 라온의 배로 향했다.
덩달아 눈길을 옮기던 라온은 ‘아하’ 작은 감탄사를 내놓았다.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그런 겁니까? 그런 마음이란 말이지요?
순간, 정인의 소중한 마음이 뻐근하게 다가왔다.
연모를 품은 사내란 이리도 다정한가 보다. 연모란…… 천하를 아우르는 사내마저도 순진한 소년으로 만들어버리는 묘한 것이었다.
라온의 얼굴에 벅찬 웃음이 들어찼다.
망울을 터트리는 꽃봉오리처럼 한껏 부푼 미소를 짓던 라온은 그대로 영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라온아.”“사랑합니다.”“홍라온.”“그러니 저하께서도 저를 사랑하십시오.”“나는…….”“서로를 사랑하는 사랑받는 것. 그것이 저하와 저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그러니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리고 권리를 누리십시오.”“홍라온, 너를 어찌하면 좋을까.”그리고 이토록 네가 좋은 나를 어찌하면 좋을까.
영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사랑은 이토록 선명하고, 이토록 가슴 저리게 라온과 영을 잠식했다.
행여 이 사랑으로 인해 무너지고 상처받는다고 해도 어쩔 수 없으리라.
“저하.”라온의 목소리가 영의 턱밑에 달라붙었다.
영은 다시 눈을 꼭 감았다.
“저하, 의무를 다하십시오.”“할 수 없다.”“권리를 누리십시오.”“싫다.”“직무유기입니다.”“차라리 죄인이 되겠다.”“정말이십니까? 정녕 죄인이 되시겠다는 겁니까?”고집부리는 영에게 라온의 얼굴이 다가왔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영이 눈을 뜨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제 사내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엔 짓궂은 장난이 가득했다.
“뭐 하는 것이냐?”“저하를 죄인으로 만들 수는 없지요.”라온의 단호한 말에 흠칫 놀란 영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가 물러난 만큼 라온이 다가왔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어느새 차가운 벽이 등에 닿았다.
갇혀버린 그의 입술에 라온의 입술이 겹쳐왔다.
“이러면 아니 되는데…… 정녕 이러면 아니 되는데…….”영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봄날의 나비처럼, 그렇게 살포시 내려앉은 입맞춤은 무더운 여름의 열기를 향해 치달려갔다.
서로 맞잡은 열 손가락에, 서로 부딪치는 시선에, 그리고 주고받는 숨결에 행복이 알알이 맺혀 있었다.
사랑은 운명이 아니었다.
사랑하기에 운명이 되어 버린 것.
하여, 감히 저항하고 거역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었다.
하여, 사랑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여, 오래도록 행복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