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달의 나라 (中)
별점10.02,388명 참여 | 댓글261
2014.12.16
함경도 단천.
마을 한복판에 있는 관아 앞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러다 멀쩡한 사람 죽겠네.”“아이고, 언년이 아부지. 아이고, 누가 우리 언년이 아부지 좀 살려줘요.”쯧쯧, 혀 차는 소리와 함께 서러운 울음소리가 담벼락을 넘어갔다.
“왜 이리 시끄러우냐?”밖의 소란에 관아 대청마루에 앉은 사또가 호통을 쳤다.
마뜩찮은 표정으로 담장 너머를 바라보던 그가 다시 시선을 마당으로 옮겼다.
곤장을 맞을 죄인이 형틀에 묶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버러지 같은 놈.”귀찮은 기색으로 혀를 차던 사또가 엄한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저놈을 매우 쳐라!”“매우 치랍신다.”이방의 큰 목소리가 마당을 뒤흔들었다.
이윽고 부웅!
위로 한껏 올려진 곤장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철퍽, 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아이고, 나 죽네. 살려주십시오, 사또 나으리.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뭐라? 살려 달라? 살길 바라는 놈이 감히 법으로 정한 세금을 내지 않은 것이냐?”“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내는 것입니다요.”“시끄럽다! 네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놀리는 것이냐? 국법이 엄하거늘. 네가 나라에 낼 세금도 내지 않고 무사할 줄 알았더냐?”“사또 나으리. 아시다시피 지난해 가뭄이 심했지 않습니까. 가난한 소작농인 저로서는 세금은커녕 가족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습니다요. 그러니 이번 한 번만 굽어살펴 주십시오. 이번만 살려주시면 가을에 두 배, 아니 세 배로 내겠습니다요.”“네놈이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치지 않고.”또다시 곤장이 떨어졌다.
매를 맞는 늙은 사내의 입에서 신음 섞인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러나 비정한 매질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그만!”사또가 손을 들어 매질을 멈추게 했다.
“어떠냐? 이제 세금을 낼 생각이 좀 드느냐?”“낼 수만 있다면 백 번도 더 냈을 것입니다요. 하지만 정말로 한 푼도 없습니다. 세간살이도 모두 내다 팔아서 이젠 팔 것도 없습니다요. 사또 나으리.”사또의 입술이 비틀어져 올라갔다.
“네가 왜 팔 것이 없다는 게야?”“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듣자하니 네놈의 큰 딸년이 제법 밥값 할 나이가 되었다지? 마침 이곳에서 일할 아이가 부족하다. 그러니 그 아이를 데려오면 내 이번만큼은 참고 넘어가 줄 수도 있을 터.”“나, 나으리.”사내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요즘 들어 갑자기 사또가 사소한 일로 시비를 걸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오늘은 곤장까지 맞게 되었다.
설마, 그 이유가 언년이 때문이었을 줄이야.
“하, 한 번만 봐주십시오. 우리 언년이, 이제 겨우 열넷 밖에 되지 않은 철부지입니다요.”“열넷이라. 먹을 만큼 먹었구나.”“안 됩니다요. 우리 언년이는 절대…….”“쯧. 네놈이 정말 죽고 싶은 게로구나.”사또의 입아귀가 험악하게 비틀렸다.
좀처럼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내의 태도가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 사나운 눈빛을 번뜩이던 그가 이방에게 다시 명을 내렸다.
“여봐라! 저놈을 매우 쳐라!”곤장이 다시 떨어졌다.
그날 안사람의 등에 업혀갔다. 앞으로 적어도 석 달은 제대로 걷지 못할 것이었다.
* * *
“이번에 큰 고초를 당했으니, 며칠 후면 알아서 계집을 데려올 것입니다.”한바탕 소란을 끝난 후.
사또는 관아 안채로 들어갔다. 그곳에 이번 소란의 이유가 되었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서책을 보던 함경도 관찰사 김익수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네. 수고 많았으이.”김익수는 엽전 꾸러미를 사또에게 던졌다.
“오늘 고생이 많았네. 이걸로 아랫것들 단속 좀 하고, 자네 입도 축이게나.” “아니, 뭘 이런 걸 다.”말은 그리하면서도 사또는 슬그머니 엽전 꾸러미를 챙겨 소맷자락 안에 넣었다.
“나가보게.”“알겠습니다. 어르신.”사또가 물러갔다.
혼자 남은 김익수는 읽던 서책을 덮으며 혀를 찼다.
“쯧쯧. 미련한 놈 같으니라고. 어찌 그리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를꼬.”그는 곤장을 맞던 늙은 사내는 떠올렸다.
“그렇게 눈치가 없으니 일평생 남의 땅이나 일구다 죽는 게지.”적당히 눈치를 줬으면 알아서 딸년을 데려올 것이지. 그랬으면 서로 편했을 것이 아닌가. 굳이 귀찮게 사또까지 동원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
“흐흐흐. 그나저나 그 어린 것이 제법이더란 말이지.” 우연히 본 언년을 떠올리며 김익수는 입맛을 달게 다셨다.
사또의 말대로 이제 며칠 내로 그 계집은 자신의 손아귀로 넘어올 것이다. 그 어린 것과 무얼 할까 궁리하는 사이 어느새 밤이 깊었다.
하지만 김익수는 쉽사리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근래에 들어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머리맡에 서신 한 장이 놓여 있곤 했다. 그 서신엔 그가 그간 저지른 부정과 부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어느 맹랑한 놈의 장난질이라며 가볍게 넘어갔다. 다음 날에도 같은 서신을 받게 되자 불같이 화를 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하루, 이틀, 사흘…… 마침내 한 달 가까이 이어지자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제는 불안함을 넘어 두려웠다.
대체 어떤 자일까? 대체 뉘이기에 나를 이리 못살게 구는 것일까?
“모두 잘 지켜야 한다.”보료 위에 앉은 김익수는 문 닫힌 처소 밖을 향해 목청을 돋웠다.
처소를 지키는 호위무사의 수를 크게 늘렸다.
오늘은 안심하고 잘 수 있겠지.
마음을 놓은 김익수는 이부자리에 들었다.
며칠 밤을 꼬박 새운 탓인지, 머리가 땅에 닿기 무섭게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단잠은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털썩.
무언가 무거운 것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김익수의 잠을 깨웠다.
놀란 김익수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이게 뭐지? 언제부터 이곳에 놓여 있었던 것일까?
정체불명의 하얀 자루를 보며 김익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이게 대체 뭐란 말이냐?”꿈틀꿈틀 움직이는 것이 보따리 안에 필시 사람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화들짝 놀란 김익수는 떨리는 손으로 보따리를 풀었다.
이내 그의 앞에 동아줄에 꽁꽁 묶인 사또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 자네가 어쩌다 이리되었는가?”사또가 퉁퉁 부은 입으로 어렵사리 대답했다.
“이곳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괴한의 습격을 받았습니다.”“습격?”감히 관아에서 그 관아의 수령을 습격하는 간덩이 큰 놈이라니.
김익수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놈이다. 밤마다 머리맡에 서찰을 두고 가는 그놈이 틀림없었다.
“감히 관인을 노리다니.죽으려고 환장한 놈이구나.”김익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어떤 놈이란 말인가?”바로 그때였다.
그의 물음에 답이라도 하는 듯 돌연 닫혀 있던 방문이 열렸다.
잠시 후.
낯선 사내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삿갓을 쓴 키가 훤칠한 사내.
“네, 네놈은 누구냐?”사내는 대답 대신 동아줄에 묶인 사또를 턱짓했다.
김익수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네, 네놈이 감히…….”큰 소리로 사람들을 부르려던 김익수의 입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목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
어느 틈엔가 사내가 검을 뽑아 김익수의 목을 겨누고 있었던 것이다.
쉿!
사내가 손가락을 입술 위에 세웠다.
김익수는 사내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사내의 서늘하고 차가운 눈초리에 기가 질려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기가 막혔다.
저런 자가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올 동안, 밖을 지키는 놈들은 대체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밖을 지키는 무인이 소리소문없이 모조리 쓰러졌음을 김익수는 알지 못했다.
“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지금까지 그대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큰지 알고 있겠지? 스스로 물러나지 않으면 무서운 화가 닥칠 것이다. 모든 재산을 백성에게 나눠주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 지내거라. 그것만이 네가 온전히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김익수는 은연중에 머리채를 힘껏 흔들었다.
재산을 모두 나눠주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지 않아도 느닷없이 낙향한 부원군 대감으로 인해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어 버렸다. 밀리고 밀려 이 변방까지 온 것도 억울한데. 이 모든 걸 버리라고?
김익수는 억울한 얼굴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평탄했던 그의 인생이 갑자기 꼬이기 시작했다. 딴 놈들은 다 잘 먹고 잘사는데 왜 나한테만 이런 시련이 온 것일까?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었다. 절대 여기서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순 없다.
“너를 보낸 자가 누구냐? 아니다. 이리하자. 네가 얼마를 받았건 내가 그 열 배를 주마. 그러니 대신 너를 보낸 놈을 처리해라.”김익수의 말에 사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너는 도저히 안 되겠구나.”짧은 한마디와 함께 김익수의 뒤통수에 불이 번쩍 튀었다.
그대로 김익수는 의식을 잃었다.
* * *
다음날.
다시 정신을 차린 김익수는 발가벗겨진 채 마을 어귀에 있는 아름드리나무에 묶여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 이게 뭐야?”놀란 그의 입에서 빽,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허둥대며 자신을 묶고 있는 밧줄을 풀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없었다. 마침 그의 앞으로 아이를 업은 젊은 아낙이 지나갔다.
“여봐라.”김익수가 제법 엄중한 음성으로 젊은 아낙을 불렀다.
그러나 아낙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탁하고 가래침까지 뱉었다.
“저, 저 고얀 것을 보았나.”김익수는 이를 으득 갈았다.
내가 이 꼴을 면해 돌아가기만 한다면 저 버러지 같은 것을 살려두지 않으리라.
그 후로도 그는 온종일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사람은 쉴 새 없이 지나가는데, 정작 그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이 쉬도록 불러도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애초에 없는 사람 취급이었다.
김익수가 다시 관사로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야심한 시각에 이웃 마을에서 건너온 젓갈 장수가 아니었으면 영락없이 굶어 죽을 뻔하였다.
“내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복수를 다짐하며 관아로 들어섰지만, 김익수는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관아 마당 한복판.
응당 죄인이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할 그곳에 사또와 관인들이 오라에 묶인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리고 대청마루에는 처음 보는 낯선 이가 앉아 있었다.
“당, 당신 누구요?”삿갓을 눌러 쓴 사내를 향해 김익수가 물었다.
그의 물음에 삿갓 사내는 대답 대신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마, 마패…….”암행어사의 느닷없는 출현.
김익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때, 삿갓 사내의 단호하고도 엄중한 목소리가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함경 관찰사 김익수는 오늘부로 삭탈관직한다. 그의 모든 재산은 함경도의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것이며, 그의 소유로 된 모든 전답(田畓)은 나라에 환속 될 것이다. 또한, 백성의 삶을 궁핍하게 만들고 감히 세율을 마음대로 정하여 나라의 기강을 어지럽힌 죄를 물을 것이니. 죄인을 당장 의금부로 압송하라.”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관아 입구를 지키고 있던 포졸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김익수를 오랏줄에 묶었다.
“말도 안 돼…….”너무 느닷없는 상황에 김익수는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대청마루에서 내려온 어사가 김익수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김익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게, 진즉 하라는 대로 했으면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지 않았겠느냐.”“뭐, 뭐라고? 당, 당신 누구요?”“나? 사람들은 나를 김삿갓이라 부르더군.”말과 함께 사내는 쓰고 있던 삿갓의 끝을 살짝 들어 올렸다.
싱긋 웃는 미소가 유난히 아름다운 사내.
다름 아닌 병연이었다.
“말도 안 돼.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발악하듯 김익수가 포졸들에게 끌려 나갔다.
부패한 관리의 추락에 사람들은 야유와 욕설로 화답했다.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후.
병연의 곁으로 수하가 다가섰다.
품에서 작은 서책을 꺼내 무언가를 적어 넣던 그가 병연에게 물었다.
“다음 행선지로 떠날 차비를 하올까요?”묻고 있지만 이미 떠날 차비는 끝난 후였다.
남은 것은 오직 병연의 명뿐이었다.
그러나 전혀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아니다.”“네?”“내 며칠 다녀올 곳이 있다. 그러니 아이들과 함께 쉬도록 해라.”“어디로……?”수하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
병연은 이미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 * *
“다 됐다.”매듭지은 실 끝을 잘라낸 라온은 뿌듯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막 바느질이 끝난 배냇저고리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며칠 밤을 새운 덕분에 생각보다 일찍 끝낼 수 있었다. 게다가 화초저하의 도움도 있었고.
라온은 저고리 앞섶에 수놓인 작은 제비꽃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이 작은 제비꽃을 수자 놓기 위해 영의 손이 벌집에 쏘인 모양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매일 밤, 지치지도 않고 수놓기에 열중하던 그를 떠올리며 라온은 소리 없이 웃었다.
하루하루가 행복이라.
이제는 웃지 않는 때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리 행복해도 되려나. 덜컥덜컥 겁도 났지만, 두려워 움츠려있고 싶지는 않았다.
하여, 행복하면 행복하다 소리 내어 말하고 또 크게 웃었다.
배냇저고리를 곱게 개켜놓은 라온은 턱을 괸 채 동창 밖을 응시했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에 저녁별이 하나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언제 오시려나?”영을 기다리며 낮게 중얼거리고 있으려니,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저하?”라온은 한달음에 문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문밖에 서 있는 이는 영이 아니었다.
“이런. 내가 졸지에 불청객이 된 건가?”머쓱한 표정과 불퉁한 목소리.
“김 형!”라온이 얼굴에 반색하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김 형, 돌아오신 겁니까? 언제 오신 겁니까? 지금까지 어딜 그리 다녔던 겁니까?”“한 번에 하나씩 물어라. 대답하다 숨넘어가겠다.”“식사는요? 밥은 먹고 다니신 겁니까?”“우선, 안에 들어가도 돼?”“아, 제정신 좀 보십시오. 들어오십시오.”서둘러 병연을 안쪽으로 안내한 라온은 그가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맞은편에 자리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없다.”“어딜 그리 다녔던 겁니까? 이제 일은 끝난 겁니까? 더는 안 가셔도 되는 거지요?”“…….”“김 형.”숨도 쉬지 않고 안부를 묻는 라온을 병연은 말없이 응시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행복하냐?”툭, 가볍게 내어놓는 한 마디.
그러나 그 목소리에 깃든 깊은 마음이 라온에게도 전해졌다.
라온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아래로 떨어졌다.
“홍라온, 행복해?”재차 들려오는 물음.
“행복…… 합니다.”그래서 죄송합니다.
미안한 마음에 목소리가 입안으로 옴쳐들었다.
병연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온의 이마를 가볍게 퉁겼다.
“아얏! 김 형, 왜 이러십니까?”“네가 간사한 녀석인 줄은 진즉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그게 무슨 말씀입니까?”“얼마 전까지 저하 뵙질 못해 금방 죽을 것 같던 녀석이. 행복하면 온전히 그 행복 즐길 것이지. 어디서 또 그런 얼굴을 하는 것이냐.”“그게 아니라…….”대꾸할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하는 라온의 머리를 병연이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예전에 네가 말하지 않았어? 무릇 사람이나 사물을 대함에 예의가 있어야 한다고.”“김 형.”“온 힘을 다해 행복할 것. 그것이 네가 내게 보일 예의야.”“…….”툭.
라온의 손등으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어미가 울면 배 속의 아이는 울보가 된다더라.”“그건 어찌 아셨습니까?”“알다 뿐이냐. 너 걱정하지 않게 하라고 저하의 지청구가 하늘을 찔렀다. 그러니 울지 마라.”“네. 안 웁니다. 안 울어요.”그러면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성가신 녀석.”묵묵히 지켜보던 병연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숨죽여 흘리는 눈물 사이로 마음과 마음이, 진심과 진심이 흘렀다.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침묵이 흘렀다.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 시키려는 듯 다시 병연이 입을 열었다.
“아참. 이거…….”품을 뒤적이던 병연이 비단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선물이다.”“선물이요?”라온은 비단 주머니를 열어 안에 들어있던 것을 꺼냈다.
홍수정으로 만든 팔찌가 들어 있었다.
“김 형.”“고운 빛깔을 보며 아이를 생각하면 고운 아이가 태어난다고 하더군. 그리고 붉은색은 잡귀의 범접을 막아준다고 하니. 몸에 지니고 있어.”“김 형.”“손 내밀어 봐.”라온은 왼쪽 팔을 내밀었다.
그러나 병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쪽 말고 반대쪽.”“그러나 이 팔엔…….”병연은 주춤하는 라온의 팔을 잡아당겼다.
언젠가 그가 주었던 월하노인의 팔찌가 걸려있는 손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평생 함께 하고 싶었던 여인을 만났더랬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그의 사람이 아닐 운명.
그런 것이라면 마음 접어야지.
저 얼굴에 웃음 환히 피어나도록 마음 접어야지.
물끄러미 라온의 손목을 응시하던 병연은 붉은색 실로 만들어진 팔찌를 끊어냈다.
그리고…… 마음도 함께 잘랐다.
“고맙습니다.”고개를 숙이는 라온을 보며 병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일어나시는 겁니까?”“인제 그만 가봐야지.”“이제 막 돌아오셨는데, 또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짧은 말과 함께 병연은 방을 가로질렀다.
“김 형.”서둘러 라온이 그 뒤를 쫓았다.
“바람이 아직 차다. 그만 들어가.”당부의 말을 남긴 병연은 그대로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김 형. 어디서든 끼니는 거르지 마십시오. 아시죠? 여기가 김 형의 집이라는 것 말입니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언제든 오십시오.”어둠을 향해 라온이 소리쳤다.
“……성가신 녀석.”어둠 속에서 지켜보던 병연의 입에서 불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아쉬운 것은 없었다, 온 마음을 다해 연모하였으니.
안타까울 것도 없었다, 저리 무사하도록 지킬 수 있었으니.
그러나 내 몫이 아닌 사람.
그것이 아플 뿐이었다. 그것이 아주 조금 서러울 뿐이다.
하지만 욕심내지는 않으리라.
이번 생에서 아니 된다 하면 다음 생을 기다리면 될 터.
다음 생에서도 내 몫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다음 생을 기다릴 것이니.
그러니 너는…… 행복해라.
“아무 시름없이 행복해라, 홍라온.”돌아서는 병연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걸렸다.
바람이 발치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람을 마주한 채 걸어가는 그의 등 뒤로 저녁별이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