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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125화 (125/131)

125. 달의 나라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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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12

수원성에서 동남쪽으로 한 시진쯤 말을 달리면 울울창창한 회화 숲이 하나 나왔다.

아름드리 거목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으로 진입하면 큰 호수를 만나게 되는데, 그 호수 한가운데 인위적으로 만든 듯한 섬이 있었다.

바로 그 섬 위에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절로 흘리게 하는 아름다운 저택이 자리했다.

배를 타지 않는 이상,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구름다리뿐이었다.

푸른 여름의 초입.

천연의 요새로 만들어진 이 저택으로 은밀한 걸음들이 이어졌다.

늙고 젊은 사내와 여인들.

저마다의 분야에서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백운회의 일원들이었다. 그들은 구름다리를 지나 저택의 커다란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백운회의 비밀회합의 날.

사람들은 홍운(紅雲), 두 글자가 새겨진 현판 아래를 걸었다. 홍운은 궁을 달리 부르는 말이기도 했다. 말로 표현 못 할 중압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본채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익숙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자리에 정좌했다. 잠시간 가벼이 주고받는 눈인사와 작은 목례가 오고 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탁탁탁!

어디선가 박을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열한 칸 긴 장방형으로 만들어진 본채의 문이 활짝 열렸다.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시립했다.

잠시 후.

양옆으로 길게 도열한 사람들 사이로 푸른 철릭을 입은 영이 걸어 들어왔다.

맑고 선연한 눈빛, 단정한 이목구비.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위엄과 섬세한 아름다움을 한데 그러모은 듯한 그의 모습은 흡사 천인의 현신을 보는 듯 아득하였다.

그가 발자국을 뗄 때마다 도열한 자들의 고개가 바람에 몸을 뉘는 갈대처럼 굽어졌다.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영은 상석에 마련된 자리로 갔다.

“다들 자리하라.”미리 준비된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은 영이 짧게 한마디 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맨 앞에 서 있던 사람들부터 자리에 착석했다.

잠시 후.

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자리한 정약용이 앞으로 나왔다.

“강원도 북부에 봄부터 시작된 가뭄으로 굶어 죽는 백성들이 속출한다 합니다.”“강원도의 기근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지난달에 들어 알고 있는 일. 하여, 배고픈 자들에게 곡식을 나눠주고 훗날 그것을 되돌려받도록 하라는 명이 조정에서 내려간 것으로 아오.”“이미 명이 내려갔음에도 각 관아의 수령들이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습니다.”“이런 고얀 자들을 보았나.”정약용의 보고를 받는 영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지금 당장 강원도로 백운회의 사람을 보내시오. 그들의 진상을 낱낱이 알아보고 제대로 백성을 돌보지 않는 수령들의 명단을 작성토록 하오. 정녕 배고파 보지 못한 자들임이 분명하니. 진실로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야 할 것이오.”“명 받자옵니다.”영의 명을 받드는 정약용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제 백성들의 굶주림을 뻔히 보고도 모른 척했던 강원도 관아의 수령들은 배고파 죽는 것이 무엇인지 몸소 뼈저리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다음은 무엇이오?”영의 물음에 이번에는 젊은 사내가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함경도 관찰사 김익수의 악행이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김익수? 그자라면…….”“부원군 김조순 대감의 하수인 노릇을 하던 자로, 이번에 부원군께서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함경도로 좌천된 자입니다.”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리 된서리를 맞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였군.”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을 하던 영은 정약용을 돌아보았다.

“사람을 보내야겠소.”“함경도라고 하면 때마침 전임 회주가 일이 있어 걸음을 한 곳이니. 곧 기별을 띄우겠습니다.”“난고가 함경도로 갔소?”“네, 저하.”“한동안 안 보여 이상하다 했더니…….”영은 가라앉은 안색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혹여 따로이 하명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아니오.”정약용의 물음에 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연에게 하명할 일은 없었다. 다만, 병연이 너무 오래 돌아오지 않아 마음이 쓰였다.

왕세자의 승하 사건이 일어난 이후, 병연은 백운회의 보고에 따라 백성의 삶을 곤하고 궁핍하게 하는 탐관오리를 징벌하기 위해 팔도를 주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벌써 한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는 벗이 영은 마음에 걸렸다.

가라앉은 영의 표정을 본 것일까?

정약용이 가벼운 농으로 분위기를 전환했다.

“그런데 저하, 혹시 사람들이 전임 회주를 묘한 별칭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묘한 별칭?”“네. 언제부터이나 삿갓을 쓰고 다닌다 하여 그를 김삿갓이라 부른다 합니다.”“김삿갓? 하하하, 그 녀석이 들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그뿐만 아닙니다. 위장을 위해 술에 취한 연기를 하기도 하고, 밥값이라며 시를 남겨두는 기행을 하기도 한다 하더이다. 그것이 그의 본모습인 줄 알고 다들 그를 풍류시인이라 하더이다.”“풍류시인? 그 냉기 풀풀 날리는 녀석이 말인가?”엄숙한 회의장에 웃음이 돌았다.

그 이후로도 백운회의 보고가 이어졌다.

보고와 함께 올라온 문서들이 탁자 위에 차곡차곡 쌓였다. 차분한 보고가 끝나자 또 한 뭉치의 문서들이 탁자 위에 새로 올라왔다.

금색 수실이 달린 문서들로, 왕께서 친히 보내신 문서들이었다.

영은 금색 수실이 달린 문서부터 하나씩 펼쳐 꼼꼼하게 주석을 달기 시작했다.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마지막 문서를 덮기 무섭게 영의 앞으로 젊은 내관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장 내관이었다.

예의 해맑은 미소를 짓는 장 내관을 향해 영이 눈인사를 건넸다.

“아바마마는 어떠하신가?”“잘 계시옵니다.”왕세자의 죽음을 전해 들었을 때 왕께서는 하늘이 무너진 듯 슬픔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장 내관을 통해 은밀히 전해진 서찰을 받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고얀 녀석, 고얀 녀석.’웃는 왕의 입에서는 헛헛한 한마디만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에 말하기 좋아하는 자들은 왕께서 기어이 정신줄을 놓은 것이 아니냐며 수군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왕께서는 그저 영이 살아있음이 좋았다. 그리고 백운회의 회합이 있는 날이면 은밀히 장 내관을 보내 크고 작은 국사에 관한 영의 견해를 물었다.

문서를 챙기는 장 내관에게 영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장 내관. 그대가 고생이 많구나.”“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옵니다.”“힘든 일은 없느냐?”“힘들 것이 무어가 있겠사옵니까. 물론 저만 찾으시는 명온 공주마마와 이번 기회에 소인의 참모습을 알게 되신 주상전하의 성은이 한데 몰리니. 요즘 같으면 몸뚱이가 두 개면 딱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 모든 것이 손끝 야무진 제 탓이니.”손끝 야무진 장 내관이 영을 향해 열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였다.

그 모습에 영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  *  *

“사내는 여인 하기 나름이라더니.”백운회의 회합이 진행되는 본채 마당에 하얀 도포 차림의 사내들 몇 명이 시립해 있었다. 그중에는 장 내관을 따라 궁에서 나온 도기와 상열도 끼어 있었다.

왕세자의 얼굴에 어린 미소를 본 도기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원래 연모에 빠지면 다들 저리된다네.”상열이 알은 체를 하자 도기가 고개를 갸웃했다.

“상열이 자네가 그걸 어찌 아는가? 자네 혹시, 뉘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겐가?”“말도 안 되는 소리!”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던 상열이 도기를 향해 눈을 흘겼다.

“아, 사람. 그냥 물어본 것을 가지고 어찌 그리 까칠하게 구는가. 그보다 상열이, 이번에 내가 쓴 책 읽어봤는가?”“아참, 도 내관.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려 했는데. 이번에 자네가 쓴 이야기책 말일세.”문득 주위를 살피던 상열이 도기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뉘의 이야기인가?”“왜? 뉘의 이야기이면 어떤가? 재미있으면 그만이지.”“그건 그렇지만 이상해서 말이네. 마치 우리 저하와 홍 낭자의 이야기 같지 않은가?”“쉿! 상열이 이 사람, 누가 듣겠네.”도기가 통통한 손으로 서둘러 상열의 입을 막아 버렸다.

“자네, 어쩌려고 그런 이야기를 쓴 겐가?”본채 안의 기척을 살피던 상열이 거의 울상이 되어 속삭였다.

“우리가 비록 홍 낭자의 위세를 등에 업고 저하의 성은을 받았다곤 하지만, 우린 한낱 환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왜 몰라. 혹여 그분들께서 아시는 날엔…….”왕세자의 일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전 판내시부사 박두용과 전 상선 한상익을 떠올리던 상열은 저도 모르게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걱정 말게. 자네 말고 아무도 눈치챈 사람 없으니…….”도기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도 내관님.”갑자기 불쑥 나타난 하얀 얼굴에 도기와 상열은 저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고 말았다.

“아이고, 홍 낭자!”“엄마얏!”낮도깨비라도 본 듯 사색이 된 두 사람의 앞으로 라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찌 그리 놀라십니까?”“아니, 놀랐다기보다는…….”말끝을 길게 늘이던 도기가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홍 낭자,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지십니다.”도기의 말에 라온은 제 모습을 훑었다.

열두 폭 고운 스란치마와 매화꽃이 수자 놓인 저고리. 곱게 땋아 내린 머리에 금박 물린 댕기와 꽃잠 곱게 꽂고 있는 모습은 어느 귀한 사대부의 여식이라 하여도 믿을 만큼 고귀한 차림이었다.

“그렇지요? 제가 보기에도 과할 만큼 아름다운 차림입니다.”라온의 말에 도기가 통통한 볼을 서둘러 좌우로 흔들었다.

“아닙니다, 아니에요. 제가 말한 것은 차림이 아닙니다. 차림도 곱지만, 그것보다는 홍 낭자가 훨씬 더 곱습니다.”“그렇습니까?”“그렇다니까요.”도기가 동조를 구하듯 상열을 돌아보았다.

상열이 두말하면 입 아프다는 듯 고개를 위아래로 세차게 끄덕거렸다. 전에도 곱다 생각했는데, 여인 차림의 라온은 그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두 사람의 과한 칭찬에 라온의 볼이 발그레 붉어졌다.

그런 라온을 곁눈질로 응시하던 도기가 물었다.

“그런데 홍 낭자, 여긴 어쩐 일입니까? 혹여 세자저하를 봬오려고……?”“아, 맞다.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도 내관님께 물어볼 게 있어서요.”“저한테요?”“도 내관님. 이번 책, 혹시 저와 세자저하의 이야기를 쓰신 건 아니시죠?”품에 안고 있던 서책을 도기에게 보이며 라온이 물었다.

“아, 그게…….”도기가 볼우물을 깊게 만들며 어색하게 웃었다.

“티 나던가요?”“티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몇 장 읽기도 전에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라온의 말에 도기의 얼굴이 하얗게 사색이 되었다.

“당, 당장 전량 회수하여 폐기 하겠…….”“정말 재미있었어요. 특히 이 부분, 두 사람이 만나는 이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그렇지요. 제가 특히 공을 들여 썼습니다. 여기, 이 부분도 제가 특히 공을 많이 들였는데. 읽어 보셨습니까?”라온의 칭찬에 으쓱해진 도기가 자랑을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의 자랑이 이어지던 가운데 마침내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그때까지 해사한 웃음을 잃지 않던 라온이 돌연 진지해졌다.

“그런데 도 내관님. 그 끝 부분 말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네? 어떤 점이……?”“이 부분에서 사내가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여기 이 부분쯤에서 짜잔 하고 살아나와 여인과 평생 행복하게 잘 먹고 잘살아야지요.”라온의 말에 도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홍 낭자께선 무얼 모르시나 봅니다. 무릇 진정한 예술이란 아련하고 애틋하면서도 애잔한 눈물 속에서 완성되는 법이지요.”“도 내관님, 사랑의 완성은 행복입니다.”“일평생 먼저 떠나간 정인을 마음에 품고 사는 것도 어떤 의미로 행복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은 잃었지만, 대신 긴 여운을 한평생 품고 살아갈 게 아닙니까?”“말도 안 돼요. 그러니 이 부분은 고치세요.”“그럴 수는 없습니다. 홍 낭자께서 예술을 몰라서 그러시는데…….”두 사람이 티격태격할 때였다.

“지금 예서 뭐하는 겁니까?”라온의 머리 위로 두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 목소리는…….

사색이 된 라온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상선 한상익과 판내시부사 박두용이 저승사자인 마냥 나란히 선 채 라온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할, 할아버지들. 오셨습니까?”라온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오늘은 일찍 오시라 몇 번을 말씀드렸습니까?”라온을 보자마자 박두용의 지청구가 이어졌다.

“일찍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잠시 일이 생겨서…….”“이건 또 무엇입니까?”한상익이 라온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을 낚아챘다.

“천 년의 연모라.”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예로부터 여인이 아이를 품었을 때는 옆으로 누워 자지 않고, 비스듬히 앉지 않으며, 외발로 서지 않고, 맛이 야릇한 음식을 먹지 않는 법입니다. 사특한 색을 보지 않고,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고, 바른 것만을 보아야 하는 법이거늘. 어찌 이런 책을…….”라온이 회임한 것을 안 이후로, 두 노인은 태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건 압수입니다.”한상익은 라온의 서책을 품 안에 갈무리했다. 그리고 어서 따라오라는 듯 라온에게 눈짓을 보냈다.

라온의 어깨가 아래로 축 떨어졌다.

오늘도 기나긴 하루가 되겠구나.

“알았습니다. 갑니다.”한상익과 박두용의 뒤를 쫓기 전에 라온은 도기에게 당부했다.

“도 내관님, 마지막 부분은 꼭 고쳐야 합니다. 아셨지요?”“하지만 진정한 예술이란…….”“그리 해주신다면 제가 수인해 드리지요.”라온의 한 마디에 도기의 표정이 돌변했다.

“암요. 바꿔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바꾸려고 했습니다. 당장 바꾸겠습니다.”한순간에 돌변한 도기의 모습에 상열이 쯧쯧 혀를 찼다.

“상열이 자네, 어찌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가?”“몰라 그러는가?”“모르겠네.”“그럼 계속 모르게나.”또 다른 말다툼이 시작되는 것을 뒤로 한 채 라온은 종종걸음으로 두 노인의 뒤를 쫓았다.

*  *  *

라온의 거처는 본채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별당이었다.

별당 마당에는 걸음걸이 모양으로 반석이 놓여 있었다.

얼마 전, 잉태한 여인의 걸음걸이란 이러해야 한다며 박두용이 깔아놓은 것이다.

별채 마당으로 들어선 두 노인이 한끝에 서서 라온을 기다렸다.

라온은 두 노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뒤뚱뒤뚱 반석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문득 궁궐 후원에 있는 폄우사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왕세자 저하의 걸음걸이를 위해 깔아놓은 반석을 따라 걷다가 발을 잘못 디뎌 휘청거렸던 기억이, 그런 그녀를 영이 받아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리 뒤뚱거렸으려나?

아련한 기억에 잠겨 있으려니 재촉하는 박두용의 눈빛이 느껴졌다.

“흠흠.”짧게 헛기침을 흘린 노인들은 별당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따라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한 두 사람의 모습에 라온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들 저러시지?

궁금증은 이내 풀렸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한 무리의 여인들이 라온과 두 노인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분들은 누구십니까?”한상익과 박두용을 돌아보며 라온이 물었다.

맨 앞에 선 여인이 두 사람을 대신하여 대답했다.

“개성에서 여인 상단을 이끌고 있는 행수 이정연이라 합니다.”이 행수는 여인답지 않은 걸걸한 목소리와 말투, 그리고 호쾌한 행동을 지니고 있었다.

“홍라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엔 무슨 일로…….”어리둥절한 라온의 앞으로 박두용이 나섰다.

“이 행수, 준비하라 한 것은?”“네, 어르신. 기별 받은 대로 최상급으로 준비하였습니다.”가볍게 고개 숙인 이 행수가 뒤에 앉은 여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밖으로 나간 여인들이 각기 크고 작은 꾸러미를 들고 돌아왔다.

“이것은 청국에서 어제 들여온 비단으로…….”“이것으로 말하자면 저 아라사의 유명한 장인이 만든 향료로…….”“어제 막 세공을 끝낸 반지와 노리개, 그리고 떨잠이…….”물품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여인들의 모습에 라온의 의문이 커졌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상선 할아버지. 이 물건들은 다 뭡니까?”라온의 물음에 박두용은 초승달처럼 휘어진 눈매로 대답했다.

“오늘부터 당분간 태교 수업은 없습니다.”“정말입니까?”아, 드디어 해방이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라온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대신 오늘부터 다른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다른…… 준비라고요?”대체 무슨 준비입니까?

*  *  *

늦은 밤.

긴 하루를 마친 영은 버릇처럼 라온의 처소로 향했다. 온종일 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눈에 가시가 박힐 지경이었다.

“라온아, 홍라온.”별당 마당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영은 라온을 불렀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벌써 잠이 들었나?

그는 불을 환히 밝힌 별당 안으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무어냐? 아직 안 자고 있었더냐? 그런데 어찌 사람이 부르는데도 답이 없어?”방 안에 들어서자 작은 수틀과 씨름하고 있는 라온의 모습이 보였다.

“아, 저하. 오셨습니까?”그제야 영의 존재를 알아차린 라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밤이 야심한데 어찌 안 자는 것이냐?”“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지금까지 붙들고 있던 수틀을 보며 라온이 말했다.

“내일 하면 되질 않느냐.”“내일은 또 다른 일이 있습니다.”“그러하냐?”영의 얼굴에 서운함이 깃들었다.

잠들기 전까지 라온과 마주앉아 이야기나 나눠보려 했는데. 인사를 나눈 라온은 다시 수틀에 시선을 고정한 채 그에게는 눈길조차 건네지 않았다.

“라온아.”“네, 저하.”부드러운 대답과 달리 시선은 여전히 수틀에 매여 있었다.

“라온아.”“네. 말씀하십시오, 저하.”“네가 수자 놓는 데 그리 취미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구나.”기어이 영의 입에서 불만 섞인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내가 왔는데도 그리 수자 놓기에만 열중하니. 내 이만 갈까?”“…….”“왜 대답을 안 하는 것이냐?”“저도 저하와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내일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오늘 밤까지 이 수자를 놓아야지 내일부터 배냇저고리를 만들 수 있단 말입니다.”“내일 못 만들면 모레 하면 될 일.”“모레에는 누비이불을 만들어야 하고, 그다음엔…….”해야 할 일을 손으로 꼽던 라온이 푹 한숨을 쉬었다.

“쉽지가 않습니다.”“뭐가?”“어미 되는 것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누가 너더러 수자를 놓으라 하더냐? 누비이불이야 침모의 손을 빌려 만들면 될 것을.”“내 아이가 입을 옷입니다. 내 아이가 덮을 이불이고요. 어미와 아비의 정성이 들어간 옷과 이불을 덮어야 자라는 내내 안녕하다 들었습니다.”“그러냐?”덩달아 영의 입에서도 한숨 소리가 새어나왔다.

다시 라온이 일을 시작했다.

영은 쉴 틈 없이 움직이는 바늘을 노려보았다.

저 수틀과 바늘이 라온을 힘들게 하는 것이렷다?

외나무다리에서 원수라도 만난 듯 뚫어지게 수틀을 바라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비켜봐라.”“네?”“내 가만 지켜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 것 같구나. 내가 하마.”“섬세함이 필요한 일입니다. 사내대장부가 할 일이 못 됩니다.”“섬세함이라. 걱정 마라. 이 손으로 악기를 연주하였다. 그런데 어찌 이 간단한 것을 못할까. 네가 무리하면 배 속의 아이에게도 하나 좋을 것이 없을 터. 비켜 보아라.”“하지만.”“어허.”영의 재촉에 라온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켜주고 말았다.

“넌 그곳에 편히 앉아 동몽선습이나 읽고 있어라. 아이에게 들려주는 것이니, 졸지 말고 맑은소리로 읽어야 할 것이야.”짐짓 라온에게 엄포를 놓은 영이 바늘을 들었다.

“알겠습니다, 저하.”결연한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던 영과 라온은 각자 맡은 일에 열의를 다했다.

“천지지간만물지중 유인 천귀 소귀호인자 이기유오윤야라.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물의 무리에서 오직 사람만이 가장 귀하니…….”“아얏!”“사람이 귀한 까닭은 오륜에 있기 때문이다.”“아얏!”“저하, 피 납니다.”“난 괜찮다. 아직 바늘이 어색해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쓸 것 없다.”“정말 괜찮습니까?”“어허! 악기를 연주하던 손이래도. 섬세한 악기에 비하면 이런 투박한 바늘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 너는 읽던 거나 계속 읽어라.”“맹자왈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아얏!”“저하, 그러다 손가락이 남아나질 않겠습니다.”“나는 괜찮다. 그러니 걱정 마라.”하얀 달빛이 문풍지에 그려지는 두 사람의 그림자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밤.

만물이 잠든 가운데 그렇게 별당의 밤도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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