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그대, 영원토록 함께 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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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9
졸졸졸.
기분 좋은 물의 감촉이 발밑을 간질였다. 수면에 닿은 햇살은 비늘처럼 반짝거렸다. 속이 환하게 들여다보일 만큼 맑은 물속엔 이름도 알지 못할 물고기 떼가 가득했다.
“예뻐라.”라온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물속으로 손을 넣었다.
형형색색의 물고기를 잡으려 부채 모양으로 벌린 손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러나 어림없었다.
몸이 잰 물고기는 번번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곤 했다.
한참을 공을 들였지만, 결국 손에 쥔 것은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물뿐이었다. 그마저도 금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뺨을 스치는 바람도, 어깨를 감싸는 따뜻한 햇살도, 그리고 찰랑거리는 물의 감촉도, 어느 하나 안 좋은 것이 없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한 휴식.
라온은 잔뜩 풀어진 표정으로 냇가 언저리에 주저앉았다.
“저하도 함께 오셨으면 좋았을 텐데.”아쉬운 마음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녀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그리고는 불어오는 미풍을 한껏 느끼려 고개를 들었다.
“어?”무심코 하늘을 올려본 라온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푸른 하늘 한가운데, 눈부신 태양과 하얀 달이 나란히 떠 있었다.
유난히 크고 둥근 달의 모습이 탄성이 나올 만큼 고와 라온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다음 순간.
“어어어어어.”다급한 비명과 함께 라온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하늘에 있어야 할 하얀 달과 태양이 그녀를 향해 한순간, 그녀의 가슴팍으로 뚝 떨어졌던 것이다.
뭐야? 뭐야? 이게 무슨 상황이야?
헉!
마른 비명과 함께 라온은 눈을 떴다.
* * *
늦봄의 꽃이 화단에 만개했다.
서둘러 가는 계절이 마냥 아쉬운 듯 새벽녘부터 내리던 빗줄기는 아침이 되자 제법 거칠어졌다. 열린 문틈으로 스며든 바람에 어깨가 선득했다.
잠에 깬 라온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 추워.”간밤에 이부자리가 부실했던 탓일까?
엊저녁부터 으슬으슬하더니 이제는 가벼운 바람에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꿈은 그리도 예쁘고 고왔는데 몸은 어찌 이리 무거울까?
안개가 낀 듯 머릿속이 흐릿했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여전히 꿈길을 헤매는 듯 몽혼했다.
그간 쌓이고 쌓인 피로가 일시에 몰려든 것인지, 온종일 잠만 자고 싶었다. 만사 귀찮고 나른했다.
내가 어찌 이럴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 몸이 어찌 이리 바닥으로 축축 늘어지는 것일까?
기운을 차리려 애써 보았지만, 마음뿐.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진 몸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혹, 몹쓸 병이라도 걸린 것일까?
더럭 겁이 났다.
간밤에 어머니께서 쑤어주신 미음을 모두 토했다. 얼마 전부터 속이 좋지 않더니 어제는 급기야 토하기까지 한 것이다.
라온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행복해진 탓이려나? 쉽지 않은 삶이 너무 쉬이 풀린 탓일까?
갖가지 근심에 얼굴색이 어두워졌다.
“라온아.”때마침 방 안으로 들어서던 최 씨의 표정이 덩달아 낮게 가라앉았다.
“낯빛이 어찌 그러니? 몸이 많이 안 좋은 것이야?”“아니에요. 아무래도 긴장이 풀려 그런 것 같아요. 며칠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예요.”걱정하는 어머니를 안심시키려 라온은 애써 밝은 얼굴을 했다.
그러나 어미의 눈에 서린 근심은 쉬 걷히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구나. 의원이라도 불러야겠다.”최 씨가 서둘러 방을 나가려 할 때였다.
“여기 홍 낭자라고 있습니까?”바깥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창 문을 여니 마당 끝에 낯선 노파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십니까?”최 씨의 물음이 노파를 향해 날아들었다.
노파는 대답하는 대신 라온의 얼굴이 보이는 동창 밑으로 성큼 다가섰다.
“아가씨가 홍 낭자입니까?”노파의 물음에 영문 모를 표정을 한 라온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렇습니다만.”할머니는 누구세요?
* * *
라온이 낯선 노파의 방문을 받고 있던 그 시각.
영은 정약용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거 하실 곳을 정했습니다. 조만간 날을 잡아 그곳으로 옮길 것입니다.”“알겠소.”조용히 영의 눈치를 살피던 정약용이 말을 이었다.
“영안부원군께서 관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가셨습니다.”김조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군요.”“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간 김조순 대감이 했던 모든 행적을 낱낱이 파헤치니. 차마 세상 밖으로 드러나선 안 될 일들이 많았습니다.”“예를 들면 임신년의 민란을 부추겼던 서신 말이오?”“네. 그렇습니다.”“요행히 그것을 밝혀냈군요.”“서신을 전달했던 자를 찾았습니다.”“살아 있었소?”“용케 살아 있었습니다.”“외조부의 처지가 곤란해졌겠소.”“안동 일문이 권력을 잡게 된 계기가 되었던 사건이 아닙니까?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권력의 근간이 흔들릴 일이지요. 아니, 그들의 권력을 뿌리째 뽑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겁니다.”“…….”영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왕세자의 죽음 이후 영안부원군 김조순은 자신의 모든 위를 물리고 조정에서 물러났다. 대외적으로는 스스로 물러난 것 같았으나 실상은 전혀 달랐다.
실체를 잡을 수 없는 백운회가 그를 압박했던 것이다.
그동안 왕의 배후에 서서 이 나라를 좌지우지했던 그의 방식 그대로, 백운회는 김조순의 배후에서 그를 비롯한 안동 일문을 감시하고 있었다.
앞으로 그는 다시는 조정으로 돌아올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권력의 테두리 밖으로 물러난 그를 찾을 사람도 사라지리라.
그렇게 그는 집이라는 창살 없는 가옥에 갇혀 영영 세상 밖으로 다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김조순에게 내린 영의 형벌이자, 인과응보였다.
보이지 않는 감시의 눈길 속에서 쓸쓸히 갇혀 살아야 하는 그의 여생은 어쩌면 산 것만 못할 정도로 끔찍하리라.
남은 삶 동안, 지나온 세월을 되짚으며 참회의 눈물이라도 흘린다면 좋겠지만, 아마도 그분이라면 반성보다는 저주를 택하겠지.
언젠가 다시 권력의 한 중심으로 돌아갈 꿈을 꾸겠지.
그러나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
좁은 연못에 갇힌 잉어는 죽는 그 순간까지도 구름 위의 용을 꿈꾸며 말라죽을 것이다.
그것이 허망하고 헛된 꿈인지도 모른 채.
“풍양 조씨의 움직임은 어떠하오?”“그들 역시 크게 위축되었습니다.”“기울어진 추가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모양이오.”“그렇습니다. 위축된 풍양 조씨와 마찬가지로 기틀이 흔들린 김씨 일문 그리고 저하께서 뽑아놓은 각처의 인재들이 균등하게 관직을 나눠 가지며, 불안한 조정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습니다.”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 그리고 과거를 통해 새로 뽑은 관료들의 균형.
이것은 영이 오래전부터 꿈꿨던 일이었다.
짧은 대리청정기간 동안 쉼 없이 매진했던 일들이 이제야 조금씩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저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무엇이오?”“어찌하여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의 세력을 여전히 남겨두셨습니까?”정약용의 물음에 영은 미소를 지었다.
“선생도 알다시피 비록 그들이 관직을 독점하고 많은 폐해를 남겼다 하나, 뛰어나고 바른 인물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요. 또한, 그들을 모두 몰아낸다고 흐려진 물이 단숨에 맑아지는 것도 아니니. 내가 할 일은 멈춰진 물길을 트고, 흐름을 만드는 것이었소.”“옳은 말씀이십니다.”영을 바라보는 정약용의 눈에 감탄하는 빛이 떠올랐다.
참으로 총명하신 분.
자칫 개혁이라 하면 과거의 모든 것을 뒤집어엎는 것으로 착각하는 이가 많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 아니었다.
과거를 반성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되 균형 또한 놓치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개혁이리라.
영의 판단과 선택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은 지혜로도 놀라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때, 영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선생. 듣자하니 조만영 대감의 몸이 근래 많이 불편한 모양이던데.”“아, 그것 말입니까? 음식을 잘못 먹어 탈이 생긴 모양입니다.”“음식?”“평소 약과를 즐겨 먹었는데, 아무래도 상한 것을 먹었는지 피똥을 싸며 뒷간을 벗어나지 못한다 하더이다.”영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하필이면 약과라.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인데, 이 일에 선생이 관여한 건 아니겠지요?”의미심장한 영의 물음에도 정약용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럴 리가요.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그렇소? 이상한 일이군. 얼마 전 백운회의 한 사람이 선생의 심부름으로 약과 한 상자를 조만영의 집으로 보낸 적이 있다 하던데.”그제야 정약용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헛기침을 흘렸다.
“험험. 그저 작은 보복일 뿐입니다. 그자가 저하께 하려 했던 못된 짓에 비하면 그야말로 보잘것없는 일이지요.”“그 보잘것없는 일이라는 게 평생 뒷간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오? 하하. 참으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구려.”“그래도 죽지는 않았습니다.”정약용이 냉정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평생에 걸쳐 천천히 말려 죽일 생각입니다. 감히 세자저하를 노린 죄, 이리 쉬이 용서할 수는 없지요. 죽는 그날까지 그들의 몸,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조각조각 분쇄할 생각입니다. 그들은 차라리 그냥 죽는 게 나으리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무섭소. 선생과 적이 되면 평생 발 뻗고 잘 생각은 버려야겠구려.”“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언제까지는 저하의 편일 테니까요.”“라온이 내 곁에 있기 때문이겠지요.”정약용은 부정하지 않았다. 세자저하와의 인연은 그녀로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라온이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늘어난 셈이오.”“공이 또 그 아이에게 가는 것입니까? 요즘은 모든 이야기의 귀결이 라온이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가벼이 농을 건넨 정약용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영은 작게 미소만 지을 뿐,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
연신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어쩐지 정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듯했다.
정약용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하, 왜 그러십니까? 무슨 근심이라도 있으신 겁니까?”“그것이…….”잠시 머뭇거리던 영이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열 때였다.
“저하.”두 사람이 앉아 있는 문밖에서 낮은 부름이 들려왔다.
일순, 영의 표정이 돌변했다.
“들라.”그의 명이 있기 무섭게 문이 열렸다.
이윽고 단아한 인상의 노파가 허리를 조아린 채 안으로 들어섰다.
“어찌 되었는가?”평소와 달리 조급증이 난 얼굴로 영이 물었다.
언제나 평정심을 잃지 않던 왕세자라.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광경에 정약용의 고개가 외로 기울어졌다.
무슨 일이시기에 저러실까?
정약용은 의아하신 시선으로 영과 노파를 번갈아 응시했다.
그러나 이어지는 두 사람의 행동은 더욱 기이했다.
일언반구 없이 노파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영이 서둘러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것이다.
의문은 더욱 깊어졌다.
“저하, 왜 그러십니까?”“선생, 오늘은 그만 자리를 파해야겠소.”다급한 한마디를 남긴 영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댓돌에 놓인 신을 신는 둥 마는 둥 하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지금 당장 가야 했다.
지금 당장 라온을 보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다 한순간.
급한 걸음을 세운 영은 문득 궁궐이 있을 법한 먼 허공을 응시했다.
*
‘청이 있사옵니다.’‘청?’‘이 궁에서 제가 살아갈 명분을 주옵소서. 저하께서 아니 계시면 제가 이 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사옵니다. 제게는 이 궁에 남아 있을 이유가 필요하옵니다.’‘하여,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묻는 영의 귓가에 하연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던 영의 표정이 시간이 갈수록 싸늘하게 식어갔다.
뒤이어 이어지는 차가운 한 마디.
‘거절하오.’‘……그리하실 줄 알았습니다. 하오나 저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옵니다.’
*
상념에 빠져 있는 영의 머리 위로 붉게 노을이 번지고 있었다.
하늘 귀퉁이가 고스란히 담긴 그의 눈에 문득 이채가 스며들었다.
“야박하다 해도 어쩔 수 없소. 그러나 나는 지켜야겠소.”짧지만 단호한 한마디가 허공중에 번져나갔다.
바람에 실린 그의 목소리가 궁궐까지 닿기를 바라며 영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사람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직 한 사람, 자신만을 바라보는 오롯한 정인을 향해 그는 뛰듯 날듯 달려갔다.
* * *
“초저녁부터 무슨 잠을 그리 주무신대요?”저녁 밥상을 들고 들어서던 방심의 목소리에 까무룩 졸던 라온은 잠에서 깨어났다.
올해 열여섯 살이 된 방심은 안가(安家)의 부엌일을 도와주는 아이였다.
“요즘은 어째 병든 닭처럼 툭 하면 조신대요?”“그러게 말이다.”“어디가 많이 안 좋으셔요? 걱정들 많이 하시던데.”“괜찮아질 거야.”“우리 엄니가 그랬는데, 밥이 보약이라고 했네요. 드셔요. 퍽퍽 드셔야 기운도 퍽퍽 들지요.”“그래. 먹자. 먹어야지.”라온은 밥상에 놓인 수저를 들었다.
맛있게 구워진 생선과 향긋한 내음을 풍기는 봄나물이 놓인 밥상.
여느 때라면 보기만 해도 군침을 흘렸으리라. 그러나 오늘은 어쩐 일인지 욕지기가 먼저 치밀었다.
“왜요? 못 드시겠어요?”“응.”“에구, 자꾸만 이러시면 어쩌신대요?”“너라도 먹을래?”라온이 방심에게 상을 밀었다.
“됐어요.”먹는 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던 방심이 어쩐 일인지 밥을 마다했다.
“왜? 무슨 일 있니?”라온의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무릎걸음을 한 방심이 바싹 다가와 앉았다.
“그게 말이지요…….”잔뜩 울상을 한 방심의 하소연이 시작되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반 울음 섞인 방심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러니까 점돌이가 며칠 전 밤에 네 손을 잡고, 입도 맞춰 놓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동한단 말이야?” “네. 그뿐이 아니라니까요.”“그뿐이 아니라면?”“이번에 천안댁 아주머니가 데리고 온 송이라는 아이가 있는데요.”“천안댁의 먼 인척이라는 그 아이?”“네. 어미가 전라도 어디의 유명한 기녀라더니. 제 어미 닮았는지 송이 그것이 제법 곱상하게 생겼습니까요. 그 얼굴에 눈이 뒤집혔는지. 점돌이 그 망할 놈이 눈만 뜨면 송이 근처를 기웃기웃하며 제 속을 긁고 있다니까요.”“그런 나쁜 녀석을 보았나. 그래서 가만있었어? 한번 따져보지 그랬어?”“웬걸요. 해봤지요.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나하고 입 맞추고 손잡을 때는 언제고 이제는 송이한테 한눈을 파느냐 따졌지요.”“그러니 뭐라던?”“네. 자기는 기억나지 않는데요. 뒷간 갈 때 마음이랑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더니. 이걸 두고 한 말인가 봐요.”울먹울먹 이야기를 이어가던 방심이 기어이 울음보를 터트리고 말았다.
“점돌이 이 녀석을!”잠시 울분을 토하던 라온은 방심의 귓속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정말요? 정말 그렇게 하면 될까요?”“여인보다 사내의 질투가 더 무서운 법이야. 내가 말한 대로 한번 해봐. 분명 점돌이도 후회할 거야.”해결책을 들은 방심이 연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조금이라도 빨리 라온에게서 들은 대로 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뭐 하고 있어? 어서 나가보질 않고.”“하지만 아가씨 식사 끝나시면 밥상도 치워야 하고…….”“이깟 밥상, 내가 치우면 되지 뭐.”“그래도 되겠어요?”“되고말고.”보다 못한 라온이 방심의 등을 떠밀었다.
“이러는 거 천안댁 아주머니 알면 경을 칠 텐데.”“이러다 송이한테 점돌이 마음 빼앗길 텐데.”라온의 한 마디에 쭈뼛거리던 방심은 후다닥 마당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그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무얼 좀 먹은 것이냐?”“저하.”라온의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리운 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 *
“언제 오셨습니까?”“아까.”영은 내내 앉아 있던 툇마루를 가리켰다.
그곳에서 그는 방심과 이야기를 나누는 라온을 지켜보았더랬다.
“오셨으면 말씀을 하시지요.”“말하면 괜히 방해만 된다고 했을 텐데.”영의 말에 라온이 어색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누군가의 고민을 해결해 줄 때는 그 고민을 해결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라온이었다.
“그래, 방심이의 고민은 해결해 주었느냐?”“네. 별거 아니었습니다. 점돌이가 방심이 마음을 알아보려고 수를 쓰는 것이었습니다.”“하여, 어찌하라 하였느냐?”“관심 두지 말라 하였습니다.”“뭐?”“과년한 여인의 손을 잡고 입까지 맞춘 사내가 갑자기 모르쇠로 일관한다 하니. 이쪽에서 할 일 역시 모르쇠로 일관하는 일밖에는 더 뭐가 있겠습니까.”“그러다 정말 점돌이가 영영 방심이에게 관심을 두지 않으면 어찌하려고?”“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럴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까요.”“어찌 그리 확신하느냐?”라온이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왜냐면 며칠 전에 점돌이가 절 찾아와 어찌하면 방심이와 친해질 수 있는지 방도를 물었으니까요.”“그래서?”“투기를 유발하라 하였지요. 송이라는 아이에게 관심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그러다 정말 점돌이가 송이라는 아이를 좋아하게 되면 어찌하려 그러느냐?”“연모하는 사이가 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그야 물론 마음이겠지.”“맞습니다. 그럼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무어라고 생각하십니까?”“글쎄…… 무어더냐?”“바로 시기입니다. 서로의 마음이 딱 맞는 시기가 중요한 겁니다. 지금이 방심이가 점돌이에게 무관심한 척 행동하기에 적당한 시기인 겁니다. 시간이 조금만 지나도 어찌 될 줄 모르니까요. 점돌이가 안달이 나서 참지 못하고 돌아오면, 그때는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라 할 것입니다.”동의하듯 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란 무릇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마음이 빼앗기니. 조금이라도 틈을 주지 않는 것이 상책이지.”“저하도 그러십니까?”“무어가?”“눈에 보이지 않으면 금세 다른 것에 마음 빼앗기시느냐 묻는 것입니다.”“어찌 보이느냐?”영의 물음에 잠시 생각하던 라온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어찌 그리 웃기만 하고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냐? 말해 봐라. 내가 어찌 보이느냐?”“말하지 않을 겁니다.”“뭐라?”“저하의 마음을 어찌 제게 물어보시는 겁니까? 저하의 마음이니, 저하 스스로 답을 구하십시오.”라온의 맹랑한 대답에 영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그러다 이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세 가지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겠구나. 내 너를 만난 후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다른 이를 품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저하의 마음이 앞으로 어떠할지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내가 그리 못 미더웠더냐?”“글쎄요.”라온이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그 모습을 보던 영의 입가에 짓궂음이 피어올랐다.
“좋다. 네가 그리 나온다면 나도 별수 없구나.”“뭐가요?”“너에게 긴하게 해 줄 말이 있었는데…… 해 주지 않으련다.”“하지 마십시오.”마음이 불퉁하여 괜히 저러는 거로 생각한 라온이 딴에는 배짱을 부렸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진짜로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힐끔 영의 눈치를 살피던 라온이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정말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있다.”“정말입니까?”“왕세자가 거짓말하는 거 봤느냐?”거짓말을 안 하셨지만, 죽은 척하는 건 봤습니다.
속말을 입 안으로 꾹꾹 삼킨 라온이 영을 올려다보았다.
“무엇입니까?”“말하지 않으련다.”“궁금합니다. 말씀해 주십시오.” “싫다. 가르쳐주지 않을 것이다.”“가르쳐 주십시오.”“싫…….”싫다 말하는 영의 입술 위로 나풀거리는 봄나비처럼 라온의 입맞춤이 날아들었다.
열없이 벌어진 잇새로 나른한 숨결이 새어나왔다. 전신을 아릿하게 녹이는 듯한 그 따뜻한 온기는 향긋한 향내와 함께 영에게로 전해졌다.
제법 굳건했던 제방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른 사막에서 단비를 맛본 사람처럼 영은 조갈증이 일었다. 라온이 건네는 달콤함에 취한 채 그대로 그녀의 일부분으로 종속되어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라온이 돌연 그에게서 입술을 거둬들였다.
영을 바라보는 눈빛에 올망하게 들어차 있는 짓궂음.
“하하하하.”영의 입에서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홍라온, 마냥 귀여운 어린 짐승인 줄 알았더니 못 본 사이에 제법 영리해졌다. 마치 승기를 잡은 듯 어깨까지 으쓱하는 그 모습에 영은 눈빛을 빛냈다.
네가 그리했단 말이지? 그렇다면…….
“좋다. 네 성의를 보아 말해주마.”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영이 입을 열었다.
라온은 꼴깍 침까지 삼키며 영의 입술을 응시했다.
저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까?
잔뜩 궁금한 그녀의 귓가에 영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내 라온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믿을 수 없다는 듯 그녀가 소리쳤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회임이요?”누가요? 제가요?
‘회임’이 무슨 말인지 미처 인지하기도 전에 다시 속삭이는 영의 목소리가 라온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고맙다.”진심을 담은 한마디.
마치 둔기에 뒤통수를 맞기라도 한 듯 한동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라온은 그제야 제 배로 시선을 내렸다.
내가 회임을 하였다고?
내 속에 생명이 자라고 있었던 말이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찌하여 온몸이 땅 밑으로 가라앉는 듯 나른하고 무거웠는지.
아이가 어미에게 신호를 보낸 것이다.
무딘 어미에게 나 여기 있으니 알아 달라 속삭였던 것이다.
문득 코끝이 알싸해지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기분이 어떠하냐?”“무어가요?”“어미가 되는 기분 말이다.”“저하께선 어떠하십니까? 아비가 된다 생각하시니…… 기분이 어떠하십니까?”라온의 물음에 영은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좋다.”“얼마나 좋으십니까?”“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좋구나.”라온은 제 앞에 서 있는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만의 사내.
나만의 정인.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나의 지아비.
그런 사내를 라온은 온 마음을 다해 사모했다.
또한, 그 사내가 전하는 애끓는 사랑에 온전히 행복했다.
삶은 때론 불행하기도 했고, 또 때로는 외롭기도 하였으며, 어느 날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괴로운 날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어느 계절의 한 자락에서 우연히 만난 인연.
느닷없이 행복이 다가왔다.
라온은 자분자분 조심스러운 손길로 제 배를 어루만졌다.
그리고 말했다.
“저도 좋습니다. 세상을 다 가진 것보다…… 그보다 훨씬 더 좋습니다.”두근거리는 작은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삶은 이렇게 그녀가 모르는 낯선 귀퉁이에 또 다른 행복을 숨겨두고 있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행복한 순간.
되돌아보면 소중하지 않은 시간들이 없으리라. 길고 긴 삶도 찰나의 순간들이 한데 모여 이어진 세월이니…….
그러니 오늘은 어제보다 더 행복해야지.
그리고 밝아오는 내일은 좀 더 행복하리라.
서로를 마주 보는 영과 라온의 얼굴에 달빛처럼 하얀 웃음이 맺혔다.
구름에 달빛 저무니
여윈 꿈 서러워라
살아가지 않고 살아가리니
그대,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리니
아린 꿈 눈물겨워 잠에서 깨어나니
서글픈 달밤이어라.
떠나지 않고 떠나가리니
그대, 그리워하지 않고 그리워하리니
구름이 달빛 그리니
따뜻한 봄날이어라
사랑하고 사랑하리니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리니
그대, 영원토록 함께 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