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홍운탁월(烘雲托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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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5
쿵쿵! 쿵쿵! 쿵쿵!
누군가 바로 귓가에서 큰북을 쳐대는 것만 같았다.
제 심장 소리에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영의 모습에 라온은 머릿속이 아득했다.
눈 뜨고 꾸는 꿈이려나?
그것도 아니면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일까?
행여 눈이라도 깜박였다간 저 모습 사라질까 두려워 그녀는 이를 악문 채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저하…….”정말 저하십니까?
눈앞의 영이…… 그의 따뜻한 체온이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차마 그를 향해 손을 내밀 수도 없었다. 행여 만지면 사라질 것 같아 달려가 저 너른 품에 안길 수도 없었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때, 영이 고개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 맞췄다.
라온과 눈을 마주치는 영의 입가에 미소가 새겨졌다.
“라온아.”“저하, 화초저하…….”그예 라온의 눈가에 눈물이 떨어졌다.
그리워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이름. 눈앞에 있음에도 차마 손 내밀지 못할 만큼 소중한 사람.
하지만 좀처럼 믿어지지 않는 현실에 라온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져 버려 어리보기처럼 눈물만 흘렸다.
영이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라온아, 홍라온.”언제나처럼 다정함이 가득 깃든 목소리였다. 자신을 향해 한껏 양팔을 벌린 사내의 모습이 새의 둥지처럼 그립고 또 따스해 보였다.
라온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신, 정말 살아 있는 겁니까?
“홍라온, 이리 와.”감히 거역할 수 없는 음성.
오직 한 사람, 그의 온화한 목소리에 석상처럼 굳어 있던 라온이 천천히 발을 뗐다.
“저하, 저하, 저하.”할 줄 아는 말이라곤 그저 ‘저하’인 것처럼 라온은 쉼 없이 영을 부르며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내 영의 너른 품이 느껴졌다. 제 등을 끌어안은 그의 단단한 팔이, 힘차게 뛰는 심장의 고동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숨결이…… 온전히 느껴졌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살아 있다.
눈앞에 서 있던 영의 모습은 허상이 아니었다. 지금 그녀가 안겨 있는 사내는 결코 꿈의 한 자락이 아니었다.
“저하, 저하. 살아 계셨습니다. 살아 계셨어요. 이럴 줄 알았습니다. 정녕 이럴 줄 알았습니다.”나만의 사람,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하는 온전한 이유.
라온의 얼굴에 그제야 안도의 미소가 번져나갔다. 오그라들었던 숨이 이제야 쉬어졌다.
온통 무채색이었던 라온의 세상에 다시 색이 덧칠해졌다. 멈춰있던 삶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억눌렀던 슬픔의 무게만큼 라온의 눈물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영은 그녀를 품속에 안고선 놓아주지 않았다. 토닥토닥 다독이는 그의 다정한 손길에 서러웠던 마음이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다.
라온의 울음을 본 영은 후회했다.
이리 아파할 줄 알았으면 진즉 귀띔해 줄 것을.
그 마음 읽기라도 한 듯 라온이 영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한마디 귀띔이라도 해 주셨으면 얼마나 좋습니까?”“그러게나 말이다. 내가 이리 못난 사내로구나. 내가 잘못하여 너를 울렸다.”듣는 귀가 많으면 말하는 입도 많은 법. 게다가 감시하는 눈길이 곳곳에 숨어 있었다. 그들을 철저하게 속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 사람에게도 숨겨야 했다.
하여, 말하지 않았건만……. 말하고 싶어도 참았건만…….
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에 미안함으로 말미암은 아린 기운이 가득 찼다.
순순히 제 잘못을 시인하는 영의 모습에 라온은 문득 심각해졌다.
“왜 이러십니까?”“뭐가?”“정말 어디가 편찮으신 겁니까? 아직 다 낫지 않으신 겁니까?”“왜 이러느냐?”“이런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제가 왜 말씀 안 하시었냐고 물으면 감히 왕세자에게 따지느냐 호통치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뭐라? 하하하하.”전혀 예상하지 못한 라온의 말에 영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녀석답구나. 이래야 홍라온이지.
이러니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이지. 이러니 세상 가장 높은 자리를 내던지고서라도 너를 얻고 싶은 것이겠지.
긴 웃음을 토해내던 영은 라온의 작은 몸을 더욱 깊숙이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긴 채 라온이 물었다.
“지금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모두들 저하께서 돌아가신 줄 알고…….”“알고 있다.”“어찌 된 일입니까? 설마…… 이번 일, 저하께서 꾸미신 것입니까?”“그래.”“정녕…… 저하께서 거짓으로 돌아가신 척하여 세상을 속인 거란 말입니까?”“그래. 그런 것이다.”“그런데 어찌 이리 감쪽같이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습니까?”지켜보는 눈이 많으니 속이는 것도 더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으리라.
“네 할아버지가 많은 도움을 주셨다.”“할아버지께서요?”“다산 선생의 약초에 대한 해박한 지식 덕분에 나는 저들이 내게 하려는 짓을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선생의 도움으로 저들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었다. 아마도 저들은 자신들이 나를 죽였겠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놀란 라온이 영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영은 허락하지 않았다. 갓 태어난 어린 새를 품는 어미 새처럼 영을 라온을 품에서 내려놓지 않는다.
“저하…….”“그래.”“어찌하여 그리하셨습니까? 저하께선 왕이 되실 분이잖아요. 세상의 주인 되실 분이지 않습니까. 그런 분께서 어쩌자고 이런…… 엄청난 일을 꾸미신 것입니까?”영은 라온의 작은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대답했다.
“살기 위해서 죽은 것이다.”또한, 지키기 위해 죽은 것이다.
“네?”살기 위해 죽은 것이라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이 나라 조선은 오래전부터 사대부들의 나라였다. 어느새 왕은 조정 대신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허수아비에 불과했지. 나라의 권력은 사대부의 손아귀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하여, 그들에게서 권력을 되찾으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기 위해 밤을 꼬박 새우며 음악을 만들고 춤을 만들며 연회준비를 하셨잖습니까. 여러 가지 제도와 법규를 다시 만들어 그들을 꼼짝 못하게 하셨잖아요.”“그래. 그리하였지. 그러나 라온아…… 나는 알게 되었다.”“무엇을요?”“권력이라는 것이 사람을 얼마나 탐욕스럽게 만드는 것인지를.”핏줄을 나눈 외할아버지마저 손주의 목숨을 노릴 만큼 사람을 탐욕스럽게 만들었다.
마음을 전하는 영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하지만 라온은 그 속에 담긴 아릿한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지키려는 나는 밝은 곳에 있고, 날 노리는 자들은 어두운 곳에 숨어 있더구나. 그들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어떠한 짓도 서슴지 않으니, 내가 밝고 높은 곳에 머무는 한, 그들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아무리 온몸을 촘촘히 감싸도 어딘가엔 빗방울이 튀기 마련이었다.
이번은 어찌어찌 막아내더라도 언젠가는 당하고 말리라. 그리되면…… 그렇게 그가 쓰러지면, 그가 하려던 모든 것들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저하…….”지금까지 그리 무서운 곳에 살고 계셨던 겁니까? 지금까지 그리 위험한 자들과 대적했던 것입니까?
저분의 어깨에 놓인 짐의 무게가 결코 가벼우리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내가 짊어진 운명의 무게만 할까, 생각했더랬다.
그러나 아니었다.
라온이 보고 어림짐작했던 것은 영이 짊어진 짐의 아주 작은 귀퉁이에 불과했다. 왕이란, 만백성의 어버이란, 자신뿐만이 아니라 백성의 삶의 무게까지 짊어져야 하는 고된 자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만두시는 겁니까?”“그만두는 게 아니다.”“그럼요?”“다른 방법으로 저들과 싸우려는 것이다.”“다른 방법이요?”“저들과 싸우기엔 고작 법을 바꾸고, 감시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더구나. 지키는 사람은 하나인데, 노리는 자는 수백 수천이니, 제아무리 울타리가 높다 한들 제대로 지킬 수 있을 리가 없지.”영은 나라의 근본을 바로 세우면 그 아래의 질서는 자연히 잡힐 것으로 생각했다. 실제로 어느 정도 성과도 거두었다.
하지만 권력을 탐하는 욕심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고 집요했다.
가진 자는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지키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어르고 달래고 협박해도, 제 손에 든 것을 나누려 하지 않았다.
하나를 벌하면,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열이 달려들었다. 그렇게 쳇바퀴 돌듯 모든 상황이 반복되었다.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높은 곳에 앉아 아래를 굽어보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말이다.”왕은 하늘을 향해 우뚝 선 장대와 같았다.
길고 가는 막대기 끝에 놓인 의자 하나. 그곳이 바로 왕의 자리요, 세상을 보는 위치였다.
지상과 왕이 앉아 있는 자리의 간격은 너무도 멀었다.
임금은 높은 곳에서 천하를 굽어본다 생각하지만, 실상 제대로 보는 것은 하나도 없고, 그저 풍경만 살필 뿐이었다.
백성 역시 임금을 우러러보지만,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어떤 기대도 보살핌도 바랄 수 없었다. 백성에게 임금은 너무 먼 존재였다.
“내 외조부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왕이 될 사람이기에 저들의 표적이 된다고 하셨다. 내가 해처럼 밝게 빛나는 존재이기에 저들이 쏘는 화살을 피할 수도 없다 하셨지. 하여…… 나는 달이 되기로 하였다.”“달이요?”“그래. 하늘을 지키는 것은 해뿐만이 아니다. 하루 중 절반인 밤을 지키는 것은 달이다. 이제부터 나는 저들보다 어두운 곳에서 저들을 지켜볼 참이다. 나는 저들에게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줄 것이야.”가장 높은 곳을 버린 대신, 가장 낮은 곳을 택했다. 이제 그들보다 더 낮고 어두운 곳에서 그들을 지켜볼 생각이다.
은밀한 곳에 숨어 욕심을 키우며 이쪽을 훔쳐보던 자들은 이제 오히려 감시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교활한 음모로 왕실과 백성을 겁박하던 자들 역시 두려움에 떨게 되리라.
“…….”세상 사람들이 모두 우러르는 자리를 미련 없이 내려놓은 영을 라온은 아픈 눈으로 응시했다.
영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릇된 것을 바로 잡길 원했고, 그 때문에 혹여 죽게 된다 하더라도 여한이 없을 사람이었다.
그가 만일 죽음을 두려워했다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손으로 눈을 가린 채, 세상일로부터 등을 돌렸겠지.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높은 곳의 한계를 깨달았기에, 오히려 아래에서부터 다시 시작하려 했다. 그래서 기꺼이 가진 모든 것을 거침없이 던져버렸다.
탐욕스런 자들이 그토록 원하던 왕의 자리마저.
저 마음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가 가려는 길이 지금보다 쉽지 않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여, 마음이 아팠다.
하여, 더더욱 그의 손을 힘껏 잡아주고 싶었다.
“왜? 어찌하여 그리 보는 것이냐?”“걱정되어서요.”“뭐가?”“세상 물정 모르시는 화초저하께서 스스로 세자자리까지 박차고 나오셨으니. 이제 뭘 해먹고 살아야 하나 걱정입니다.”“요 맹랑한 녀석을 보았나.”라온의 농에 굳어 있던 영의 마음이 조금은 느른하게 풀어졌다.
마주 보던 두 사람의 얼굴에 풀썩 웃음이 피어났다.
“저하께서 하고 싶은 대로 하십시오. 저하께서 달이 되신다면 저는…… 저하의 곁을 맴도는 구름이 되렵니다.”“구름?”“홍운탁월이라는 말 들어보셨습니까? 진정으로 아름다운 달빛이란 달 스스로 빛나는 것이 아니라 구름이 그려내는 달빛이라 하였지요. 저하를 빛내드릴 수 있는 구름이 되렵니다. 지친 저하를 포근히 감싸 안을 수 있는 그런 구름이 되고 싶습니다. 언제까지고…… 저하께서 밀어내실 때까지 저하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렵니다.”“좋구나. 달이 되는 것도, 구름이 되어 내 곁에 있겠다는 너도…… 한없이 좋구나.”“하오면 이제 무엇부터 하시렵니까? 저는 무엇부터 하면 되겠습니까?”“우선은…….”영은 라온의 어깨에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여름꽃처럼 맑고 청아한 그녀의 향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우선은 너와 함께 원 없이 붙어 있는 것부터 해야겠다.”“네? 하지만 이 나라는 어찌하려고요?”“우선은 내 숨통부터 트자꾸나. 너 없는 동안에 숨이 꽉 막혀 죽을 뻔하였단 말이다.”“하오나 국상 중입니다. 세상이 발칵 뒤집혔단 말입니다. 그런 판국에…….”“무어냐? 말을 바꾸려는 것이냐? 이제 보니 아까 한 말들은 모두 거짓부렁이었구나.”“아까 한 말이라뇨?”“뭐든 하겠다고 하질 않았느냐? 내가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는 여인이 되겠다고 맹세하질 않았느냐?”“들으셨습니까?”영이 죽은 줄 알고 했던 넋두리를 들은 모양이다.
설마…… 다 들으셨으려나?
“들었다. 그리고 죄다 내 머릿속에 새겨 넣었다.”“생각하실 것도 많으신 분께서. 어쩌자고 그런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하려 하십니까?”“내겐 그 무엇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니. 기억할 수밖에. 자, 이제 어찌할 것이더냐? 네 입으로 스스로 맹세한 것을 지키겠느냐? 아니면 거짓말쟁이가 되겠느냐?”“…….”물끄러미 영을 올려다보던 라온이 졌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말씀 따르겠습니다. 함께 붙어서 무엇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지금 당장 하고 싶은 것이 있느니.”“그게 무엇입니까?”“무엇인지 알아맞혀 봐라.”“알아맞혀야 하는 겁니까? 그냥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내가 살아있기만 하면 맹랑한 말대답은 아니 하겠다고 맹세한 것 같은데…….”“…….”“왜 입을 다무는 것이냐?”“말대답 아니하려고요.”“녀석…….”영은 라온의 콧방울을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그 가벼운 장난에 라온의 코끝이 불그레 붉어졌다.
“아픕니다.”손등을 코끝을 비비던 라온은 밉지 않게 영을 흘겨보았다. 그러나 자신을 향한 그의 시선에 이내 눈길이 풀어지고 말았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의 눈동자에 아련한 온기가 들어찼다.
말하지 않아도 능히 알아지는 마음이 있었다.
영을 말간 눈으로 응시하던 라온은 문득 까치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촉’ 수줍은 입맞춤이 영의 입술 위로 떨어졌다.
마음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한 충동적인 행동.
뒤늦게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라온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부끄러워 허둥대는 라온에게 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무얼 한 것이냐?”“하고 싶은 것을 맞혀 보라면서요.”“지금 내가 이걸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이더냐?”“아닙니까?”그렇잖아도 발그레 붉어진 얼굴에 불길이 화르르 이는 듯했다.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영은 자꾸만 고개를 외로 트는 라온의 얼굴을 양 손아귀에 담았다. 그리고는 라온의 붉은 얼굴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깃털 같은 속삭임과 함께 그의 입술이 라온의 여린 입술 위로 부드럽게 겹쳐 왔다.
* * *
입술을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촉감 사이로 뜨거운 열기가 스며들었다.
영이 걸어온 삶의 단단한 조각들이 뜨거운 숨결이 되어 라온의 입속을 범람했다. 그렇게 그의 생(生)이, 그의 지난했던 과거가 그녀의 입속에서 부드럽게 융화되어갔다.
사람이 사람을 마음에 품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지나온 과거도 품는다는 뜻이리라.
그의 고통과 아픔이, 외로움과 슬픔이 라온을 만나 위로받았다.
또한, 라온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짐의 무게가 영을 만나 조금씩 가벼워지고 있었다.
어루만지고 보듬는 손길과 주고받는 숨결 속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격려했다.
“라온아, 홍라온.” 네가 좋다.
너를 사모한다.
“저하…….”저도 저하가 좋습니다.
저도 저하를 사모합니다.
거칠어진 숨결 사이로 수줍은 마음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 입술이 영의 입술과 마주칠 때마다 저릿한 감각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몸속에 뜨거운 공기가 가득 들어찬 것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는 영영 하늘 위로 솟구칠 것만 같아 라온은 영을 단단히 잡았다. 그의 목 뒤로 팔을 둘러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영이 그녀를 도왔다.
여린 허리를 힘껏 끌어당겨 조금의 빈틈도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마치 한몸인 듯 밀착된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유백색의 달빛이 따뜻하게 흘러내렸다.
긴 입맞춤이 끝난 후.
아련한 여운이 남은 얼굴로 라온이 물었다.
“이제 무얼 하고 싶으십니까?”“이다음엔…….”라온을 바라보는 영의 눈빛이 의미심장해졌다.
라온의 입 안에 마른 침이 고였다.
설마…….
그녀는 시선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 수풀이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풀벌레 소리와 달빛만이 가득한 자선당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영과 라온, 두 사람만이 있을 뿐이었다. 라온의 얼굴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하게 떠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꼬르륵.
느닷없는 소리가 팽팽하게 부풀어 오르던 공기를 순식간에 가라앉혀 버렸다. 영의 시선이 라온의 배로 향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작게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귀까지 빨개진 라온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입가에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던 영은 라온의 얼굴을 끌어당겼다.
“가자.”“어딜 말입니까?”차마 그와 시선조차 마주하지 못한 라온이 물었다.
“허기부터 채워야겠다.”“괜, 괜찮습니다.”“너 말고 나 말이다.”“네?”“오랜 시간 아픈 척 누워 있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더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다. 이대로 두면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정말이십니까?”“왕세자가 거짓말하는 거 봤느냐?”짓궂은 개구쟁이처럼 웃음을 터트리던 영은 라온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무얼 드시고 싶으십니까?”“말하면 만들어 줄 테냐?”“제가 할 줄 아는 것이라면 최선을 다할 겁니다.”“그럼…….”잠시 턱을 만지며 생각에 잠겼던 영이 이내 말을 이었다.
“약과가 먹고 싶구나.”“약과요?”“그래. 네가 만든 약과가 또 먹고 싶구나.”말을 하며 영은 달게 입맛을 다셨다.
그런 그를 라온이 이상하다는 듯 응시했다.
“저하께서 어떻게 제가 만든 약과를 드셨다는 겁니까? 언제요? 어디서요?”
* * *
“빈궁마마, 그것이 무엇이옵니까?”작은 나무 목곽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하연의 곁으로 빈궁전 지밀상궁인 허 상궁이 다가왔다.
“빈궁마마, 이건 일전에 왔던 생각시가 올린 것이 아니옵니까?”허 상궁의 물음에 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목곽은 라온이 가져온 것이 맞지만, 속에 든 것은 라온이 아니라 하연의 사가에서 보내온 약과였다.
목곽 안을 들여다보던 하연의 입게 쓸쓸한 웃음이 맺혔다.
참으로 묘한 인연이질 않은가.
사가의 아비가 이 잔인한 것을 하연에게 맡기고 간 얼마 뒤, 마치 언질이라도 받은 듯 라온이 빈궁전을 찾아왔다. 그녀 역시 약과를 하연에게 건넸다.
그 밤의 라온은 가문과 왕세자를 두고 갈등하던 자신의 모습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애써 아픈 마음을 숨긴 채 순한 웃음을 짓던 라온은 약과를 내려놓으며 딱 한마디만 하였다.
“그분을 잘 부탁합니다.”까칠한 얼굴엔 왕세자를 향한 그리움이 세월의 더께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그런 얼굴을 하고서도 기꺼이 연적에게 달콤한 약과를 내밀었다.
정인을 잘 부탁한다는 이 한마디를 위해 저 죽을지도 모를 자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제야 하연은 깨달았다.
자신과 왕세자가 사람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저 여인과 왕세자의 인연은 그야말로 하늘이 짝 지운 인연이라는 것을.
그 고귀한 사랑에 강샘마저 일었다.
그러나 어찌 사람의 연이 하늘의 연을 넘어설 수 있을까.
필요로 만난 인연이 어찌 죽음조차 도외시한 사랑을 넘볼 수 있을까.
소리 없이 패배를 인정한 하연은 기꺼운 마음으로 약과를 받았다. 그리고 아비가 보낸 약과를 꺼내고 그 자리에 라온이 것을 채워 넣었다.
다소 서툰 모양의 약과였지만 그 속에 담긴 마음만은 그 어떤 귀한 음식에 담긴 것보다 더 크고 단단했다.
그것을 들고 영을 찾아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마음을 시험했다.
그러나 그런 하연을 비웃기라도 하듯 왕세자께선 약과에 담긴 마음을 단숨에 알아차렸다.
뭐가 들었는지도 모르는 약과를 거리낌 없이 먹는 그를 보며 하연은 확신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은 그리 서로를 알아차리고, 느끼고 있었다.
“허 상궁.”“네. 마마.”“이것을 그만 태우게나.”“지금 말이옵니까?”“그러네. 지금 당장 이것을 태워버리게나.”“알겠사옵니다. 마마.”세자빈의 명에 허 상궁은 약과가 든 목곽을 들고 뒷걸음질로 방을 나갔다. 그녀가 물러가고 난 뒤, 텅 빈 방 안에 홀로 남은 하연은 창가에 기대섰다.
유난히 달빛이 곱고 밝은 밤이었다.
“저하, 이제 행복하십니까?”원하시는 대로 두 날개를 활짝 펼 수 있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엄격한 규범과 형식으로 무장한 궁이라는 새장을 벗어나 하늘 위로 훨훨 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이 나라 백성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보다 조금은 더 편하고 조금은 더 평등하고, 조금은 더 억울하지 않은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뇌리로 문득 그 밤의 일이 떠올랐다.
*
“마지막으로 청이 있사옵니다.”“청?”“이 궁에서 제가 살아갈 명분을 주옵소서.”“……!”“저하께서 아니 계시면 제가 이 궁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사옵니다. 제게는 이 궁에 남아 있을 이유가 필요하옵니다.”그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연이라 하여도 상관없었다.
하연에게도 긴 세월을 견뎌낼 이유가 필요했다.
이 궁에서 살아남아야 할 명분이…… 삶의 뚜렷한 목적이…… 필요했다.
*
상념은 오래가지 못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귀밑 자분치를 흔들었다. 그 서슬에 정신을 차린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 속 깊숙이 밤이 흘러들어 왔다.
푸른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 고운 미소가 걸렸다.
* * *
둥근 달이 별로 만든 꽃밭을 거닐고 있었다.
어디선가에서 몰려온 구름이 달과 어우러져 하늘 꽃밭을 유유히 흘러갔다.
영과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자선당의 수풀 사이를 걷던 라온이 물었다.
“하오면 저하, 제가 만든 약과의 맛은 어떠하셨습니까?”영은 밝게 웃으며 대답했다.
“맛있었다. 참으로 맛있었어.”구름을 비집고 나온 따뜻한 달빛이 두 사람의 어깨 위를 어루만졌다.
풀벌레 울음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하얀 달빛.
따뜻한 봄날은 그렇게 시름없이 깊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