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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122화 (122/131)

122. 인의 연(印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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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2

며칠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자다 깨다, 다시 잠들기 반복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난 라온은 열없는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어났니?”때마침 방으로 들어서던 최 씨가 반색하며 라온의 곁으로 다가왔다.

“어머니.”“그래. 뭐 좀 먹어야지.”“괜찮아요.”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집 안이 조용하네요.”“응. 단희는 구할 물건이 있다고 강나루에 잠시 나갔단다.”“다른 분들은요?”“……두 어르신이랑 김 선비는 그날 이후로 나가셔서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단다.”“그날 이후요?”“……그래.”차마 왕세자께서 세상을 떠난 날이라는 말은 입에 담을 수 없었다. 라온을 바라보는 최 씨의 표정이 꺼질 듯 가라앉았다.

그런 어미를 텅 빈 눈으로 응시하던 라온이 몸을 일으켰다. 핑 하고 현기증이 일었지만, 라온은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몸을 세웠다.

“왜? 뭐 필요한 거라도 있는 게야?”“아니요. 좀 씻으려고요.”“그래. 얼른 씻고 와. 어미가 밥 맛나게 차려줄 테니.”“네, 어머니.”애써 미소를 지은 라온은 우물이 있는 뒷마당으로 향했다.

세상은 여전했다.

아침이 되면 해가 뜨고 계절은 질주하듯 푸른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세상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다.

다만…… 한 사람만 사라졌을 뿐이었다.

*  *  *

라온이 집을 나선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갑자기 텅 비어 버린 듯한 라온의 표정이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그날 이후 처음으로 몇 숟가락 밥도 먹고 머리까지 곱게 빗겨달라고 하는 걸 보고 최 씨는 외출을 허락했다.

그렇게 집을 나선 라온이 향한 곳은 운종가였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덧 구 영감의 담뱃가게 앞이었다.

“그래. 이곳이었어.”라온이 중얼거렸다.

이곳에서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뜻하지 않은 그분과의 만남과 전 판내시부사 박두용의 제안. 그리고 그 이후의 많은 일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

서글픈 추억과 행복한 시절의 잔영이 고스란히 이곳에 남아있었다.

멍하니 가게 안을 들여다보는 라온의 뇌리에 언젠가 이곳에서 단희의 향낭을 팔던 때가 떠올랐다.

서로 경쟁하듯 향낭을 팔던 윤성과 병연, 그리고 세자저하…….

세 사람의 모습이, 특히 라온에게 향낭을 내밀던 영의 얼굴이 생시처럼 생생하게 눈앞을 아른거렸다.

라온이 향낭을 잡으려 손을 내밀었지만, 움켜쥔 손안에 깃든 것은 텅 빈 허무함뿐이었다.

아무리 잡으려 애써도 허상인 양 그의 모습은 잡히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라온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온아, 홍라온. 잘 지내느냐?

안부를 묻는 것만 같았다.

차마 그의 빛바랜 미소를 떨쳐낼 수가 없어 라온은 가게 앞을 서성거렸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진 것인지 가게 앞에 놓인 작은 툇마루에서 곰방대를 물고 있던 구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구 노인은 쓰개치마를 뒤집어쓴 라온을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무슨 일이시오? 담배 사러 오신 건 아닌 듯한데…….”뻐끔, 하얀 연기를 뿜어내던 구 노인이 말을 이었다.

“옳거니. 고민을 상담하러 오신 모양이구려.” “…….”“우리 삼놈이 소문 듣고 가게로 발길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한둘이 아니라오. 허나, 아쉽게도 우리 삼놈이는 이제 여길 안 온다오.”“그렇습니까?”“그렇다오. 궁에 들어가 잘 먹고 잘 사는 줄 알았더니…….”낮은 한숨과 함께 긴 연기를 뿜어내던 구 노인이 라온을 응시했다.

“그런데 고민이 있기에는 아직 어린 것 같은데. 무슨 고민이 있어 찾아온 게요?”“…….”“허긴, 고민이라는 것이 나이의 많고 적음을 따지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니. 한번 말해보오. 내 우리 삼놈이만큼은 아니라도 곁에서 보고 들은 풍월이 있으니. 어쩌면 처자의 시름을 한 줌이나마 덜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소. 따로 셈을 받지는 않을 것이니. 한번 털어놔 보오.”구 영감의 인자한 목소리에 머뭇거리던 라온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합니다.”텅 빈 눈동자에 말간 하늘이 담겨 있었다.

“어허, 그런. 어디서 잃어버렸는데 그러오?”“모르겠습니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대체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처자한테는 퍽이나 소중했던 것인가 보오.”“네. 제 목숨보다 더…….”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 소중한 것이라면 손에 쥐고 놓지 말지 그랬소.”“그러게 말입니다. 그 사람 손, 절대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을 그랬습니다.”설사, 그래서 내가 죽게 되더라도.

그랬다면 적어도…… 그 사람의 슬픈 소식을 듣고 이토록 찢어지게 괴롭지는 않았을 것을.

말을 하는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라온은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를 애써 눌렀다.

그때 구 영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런 그 사람이 어디 먼 곳으로 간 모양이오.”“네. 네. 그렇습니다.”“오래도록 돌아오지 못할 사람을 그리는 것만큼 괴로운 일도 없는 법이라오.”라온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구 노인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괴롭고 힘들겠소.”라온은 대답 없이 눈물만 떨궜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입을 다문 구 노인의 곰방대에선 연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곰방대에 남은 재를 툭툭 털어내고, 새 담배를 곰방대에 채운 노인은 곰방대를 빨며 말을 이었다.

“그리움에 사무쳐 잊을 수조차 없다면 차라리 예전에 함께 갔던 곳을 다시 되짚어 보는 건 어떻소?”“예전에 갔던 곳이요?”“사람이나 물건이나 인연이 있다고 하오. 정말 처자와 인연이 있는 것이라면 분명 어딘가에 있을 게요. 죽은 우리 할멈이 그랬소. 툭하면 뭘 잃어버렸는데, 애초에 인연이 없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잊더라고. 그런데 정말 꼭 필요한 건 어딘가에서 다시 튀어나오더란 말이지.”“정말…… 그럴까요?”“나이가 들면 늙기만 하는 게 아니라오. 이 늙은이 말을 한번 믿어보시오.”구 영감을 향해 라온은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고맙습니다.”돌아서는 그녀를 향해 구 영감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도 고마웠다, 삼놈아.”

*  *  *

잠시 후.

구 영감의 조언에 따라 라온이 걸음한 곳은 욕쟁이 할머니의 국밥집이었다.

영과 처음 만났던 날과 연등을 날리던 그 밤에도 이 국밥을 찾았었지.

아련한 시선으로 주위 광경을 훑고 있자니 노파가 다가왔다.

“어째 피죽도 한 그릇 못 얻어 처먹은 얼굴이야?”노파는 국밥이 놓인 소반을 라온의 앞에 내려놓았다.

“처먹어.”“……되었습니다.”다시 일어서는 라온을 노파가 도로 자리에 눌러 앉혔다.

“그 꼴로 어딜 가려고?”“할머니…….”“먹어. 이런 꼴로 다니는 거 그분께서 아시면 차마 발길 떼지 못하실 거다.”영과 함께 왔던 라온을 알아본 듯 노파가 말했다.

노파의 눈에 들어찬 물기를 차마 마주할 수 없어 라온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정말 발길 떼지 못할까요? 그럼 이렇게라도 잡으렵니다. 이렇게라도 해도 떠나지 못하게 하렵니다.

“죄송해요. 다음에 다시 올게요.”라온은 노파의 손길을 뿌리친 채 국밥집을 나섰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노파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노파는 진득하게 눈가를 적시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지랄 맞을 세상. 노을은 어찌 이리 고와?”괜스레 하늘을 향해 사납게 눈을 흘긴 노파는 부엌으로 사라졌다.

*  *  *

하늘 끝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세상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은 어느덧 어둠에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사위가 어두워지자 사람들은 제각기 집으로 향하는 걸음을 재촉했다. 오가는 사람들 틈에서 라온도 발을 재게 놀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라온은 높은 궁궐 담벼락 한쪽에 자리 잡은 작은 쪽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통통한 몸집의 환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기였다.

“홍 내관.”“도 내관님.”“기별 받고 조금 놀랐습니다. 궁에 들어가야 한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가볼 곳이 있어서요. 죄송해요. 자꾸만 곤란한 부탁을 드려…….”라온이 미안한 기색을 보이자 도기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홍 내관, 그런 말 말아요. 우리가 어디 남입니까?”말과 함께 도기는 서둘러 라온을 문 안으로 들였다. 그 와중에도 도기는 주위를 경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라온을 궁 안으로 들인 도기는 품에 안고 있던 것을 라온에게 내밀었다.

머리에 쓰는 쓰개치마였다.

“쓰개치마라면 제 것이 있습니다.”“하지만…… 그건 색이 있어 남들 눈에 띄기 쉽습니다.”오늘따라 고운 빛깔의 옷으로 차려입은 라온을 보며 도기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궁궐을 오가는 궁인들 모두가 상중(喪中)임을 알리는 하얀 복색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영의 죽음을 확인하는 것만 같아 라온은 차라리 눈을 감고 말았다.

“홍 내관.”재촉하는 도기의 목소리에 라온은 하얀 쓰개치마를 머리 위에 썼다.

어둠을 틈 타 두 사람이 향한 곳은 자선당이었다.

“홍 내관. 정말 여길 들어갈 겁니까?”자선당의 솟을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도기가 라온에게 물었다.

“네.”“내 생각에는 안 들어가는 게 좋을 듯싶은데.”말꼬리를 흐리던 도기가 라온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건 비밀인데 내 특별히 홍 내관에게만 말하는 겁니다. 사실 홍 내관이 떠난 이후로 이 자선당에 다시 원혼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더러는 세자저하의 혼백을 보았다는 이도…… 헙!”생각 없이 주절대던 도기는 서둘러 제 입을 막았다.

“어쨌든 홍 내관, 그냥 들어가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아닙니다. 들어가겠습니다. 들어가게 해주십시오.”“정히 그런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서글프게 젖은 라온의 눈빛에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도기가 옆으로 비켜섰다.

“고맙습니다, 도 내관님.”“고맙기는 뭘요. 우리가 남인가요.”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도기를 뒤로한 채 라온은 자선당 안으로 발을 디뎠다.

그녀가 떠난 뒤로 자선당은 방치된 채 버려졌다.

돌보는 이 없는 마당을 무성하게 자란 잡초가 채웠다. 방 안 역시 먼지가 뽀얗게 앉은 채였다.

라온은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 있는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앉았다. 고개를 드니 병연이 앉아 있던 대들보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병연을 만났던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물러가라, 귀신!’병연을 귀신으로 오해한 그녀에게 돌아온 것은 눈물이 나올 만큼 아픈 꿀밤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던 불퉁한 목소리.

‘계속 사람, 귀신 보듯 할래?’‘사람……입니까?’‘네놈 눈에는 내가 귀신으로 보이느냐?’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린 라온은 저도 모르게 하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입으로는 싫다 하면서도 은근히 자신을 챙겨주던 병연이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의 호의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터라 처음에는 그것이 호의인 줄도 몰랐다.

다만, 곁에 누군가 있음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뒤돌아보니 그건 누구에게서도 받을 수 없었던 귀한 마음이었다.

“감사합니다, 김 형.”라온은 대들보를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문득 등 뒤에서 병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동쪽 누각 근처로는 가지 마라.’‘왜요?’‘잡스런 것이 나와.’고개를 돌리고 있던 라온의 입가에 말간 미소가 피어올랐다.

동쪽 누각의 잡스러운 것.

그저 원혼을 뜻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일국의 왕세자를 뜻하는 말인 줄 어찌 알았으랴.

라온은 그리운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머리 위로 둥근 달이 떠올라 있었다. 달빛을 조족등 삼아 풀숲을 헤치고 누각을 향해 걸었다. 도기의 말이 머릿속을 맴맴 울렸다.

‘홍 내관이 떠난 이후로 자선당에 다시 원혼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무성합니다. 더러는 세자저하의 혼백을 보았다는 이도…….’그 소문이 차라리 사실이었으면 좋겠다.

원혼이라도 반가우리라.

다시 볼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기꺼이 죽으리라.

풀숲 한가운데 선 채 라온은 영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거짓말쟁이.”듣는 이 없는 넋두리가 라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언제나 곁에 있겠다고 하시었잖습니까. 이리 고운 옷 입고 있으면 데리러 오시겠다고 했잖습니까. 그런데 왜 안 오십니까? 이리 곱게 머리 빗고 저하 원하는 대로 곱게 차려입었는데. 어찌 안 오십니까?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지 않게 하겠다고 하셨잖아요.”라온은 바닥에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끄윽, 끄윽.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내리눌러놨던 눈물이 이제야 흐르기 시작했다.

영이 죽었다는 소식에 정신을 잃었다 다시 깨어난 이후론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었다. 아니, 울 수가 없었다.

울어버리면, 그렇게 울면 정말로 그분이 죽은 것이 될 테니까. 그것을 인정해 버리면 이 세상을, 이 고단한 삶을 더는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기다렸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영은 오지 않았다.

“저하는 거짓말쟁이십니다.”그리 잘난 척하시더니. 결국, 이리 가신 겁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손 놓지 않는 건데. 마지막으로 그 품에 안겼을 때 돌아가기 싫다고 어리광이라도 부릴 것을. 곁에 있게 해 달라고 억지라도 써 볼 것을…….

“가지 마십시오.”라온은 달을 올려보았다.

“가지 말란 말입니다. 절 두고 가지 마세요. 뭐든 하겠습니다. 하라시는 대로 다 할 겁니다. 저하의 고운 여인이 될 겁니다. 저하 말씀에 토도 달지 않겠습니다. 가지 마십시오. 저하만 보겠습니다. 저하의 목소리만 듣겠습니다. 그러니 가지 마십시오. 가지 마요. 가지 말란 말입니다. 제발…… 가지 마세요.”이제 당신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없는 세상에 절 홀로 버려두지 마십시오. 너무 힘들어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하루가 천 년처럼 느껴진단 말입니다.

이럴 거면, 이리 쉽게 떠나실 거면 어찌 알게 하셨습니까? 그냥 모른 척하시지 그랬습니까? 왜 제게 손 내미셨습니까?

어찌하여 따뜻한 품을 알게 하셨습니까? 어째서 제게 기댈 등을 내어주신 것입니까? 이리 쉽게 떠나실 거면서…… 이렇게 세상에 홀로 남겨두실 거면서…….

왜 웃으셨습니까?

왜 제 이름 부르셨습니까?

저하로 인해 세상이 더는 힘들지 않았습니다.

저하가 계셔 처음으로 세상에 태어난 것이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행복이 뭔 줄 제게 가르쳐주셨으면서.

저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바보로 만드셨으면서…… 그리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셨습니까?

어떻게 쉽게 절 떠날 마음이 생겼단 말입니까?

가지 마십시오.

“아니, 그렇게 혼자 보내지 않을 겁니다.”턱 끝에서 떨어지는 눈물을 소매로 쓱쓱 닦아낸 라온은 누각 위로 걸음을 옮겼다.

누각 위에 올라서니 달빛이 한층 더 밝게 느껴졌다.

저 달이 마치 영인 듯 느껴졌다.

“제 손잡는 그 순간부터 저하는 제 사내였습니다. 저만의 사내였습니다. 그러니 보내지 않을 겁니다. 그리 마음대로 절 떠나게 놔두지 않을 겁니다.”저하와 잡은 손 절대 놓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리 쉬이 보내드릴 줄 아셨습니까? 절대 이리 허망하게 보내지 않을 겁니다.

라온은 달빛이 고스란히 박혀 있는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밤하늘이 담긴 연못에 바람이 일었다.

일렁거리는 수면으로 제 모습이 어룽거렸다.

살아 있지만 살아 있지 않은 자의 모습. 그녀의 영혼은 영이 세상을 떠난 그 순간 이미 세상과 일별했던 것이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제 운명을 서러워했던 적 없었다. 기구하고 척박한 삶이야, 힘없는 백성의 운명 같은 것이었다.

그저 조금 더 곤하고, 조금 덜 힘들 것의 정도 차이였을 뿐. 그러니 서럽거나 화날 일도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저하 살아계실 때는 온전한 그의 여인이 되지 못했던 운명이, 그분 돌아가시는 그 순간조차 지킬 수 없었던 처지가 서러웠다.

깊은 한과 절망이 라온을 잠식했다.

현기증이 일었다. 입술을 태운 갈증이 목을 타고 심장까지 태운 듯했다. 가슴이 새카맣게 변했다. 머릿속은 아예 하얀 재만 남았다.

눈을 뜨면 울음이고, 감으면 후회고, 잠이 들면 염원하고, 새벽이 밝아옴을 원망하였다.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 비로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먹먹한 가슴이 쪼개지고, 갈라지고, 무너져서 저 연못 아래로 죄다 쓸려 내려간 것만 같았다.

혼백을 그 사람이 모두 가져간 것 같았다.

가슴에 시린 가시가 박힌 듯했다.

단단한 몸이 살얼음이 부서지듯 깨졌다.

하여, 몸속에 든 것을 영과 함께 거닐었던 곳에 흘리고, 뿌리고, 묻어버렸다. 마지막 남은 한 톨의 영혼마저 죄다 이 자선당에 심어두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흘려버리고 나니, 남은 것은 빈껍데기뿐이었다.

아니, 그래도 남은 것이 있는지 한숨과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허망한 고통에 온몸이 바스러지는 듯했다.

그러나 연못에 비친 얼굴은 괴로움이 아닌 두려움으로 얼룩져 있었다.

두려웠다. 그리고 무서웠다.

그가 없는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는 사무친 외로움이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바싹 메마른 눈동자로 제 얼굴을 응시하던 라온은 흔들리던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본 적 없었다. 무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해야 했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먼 허공을 바라보던 라온은 절을 올렸다.

달을 향해…… 그리고 이 누각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자취를 향해.

한 번, 두 번.

탄식하듯 이어진 두 번의 절, 그리고 그리움을 품은 반 배.

라온은 저 멀리 하늘 위로 떠가는 고요한 달을 조용히 응시하였다.

먼 데 가지 마십시오. 곧 저하 계신 곳으로 갈 테니…… 제가 붙잡을 수 있는 없는 먼 곳까지 가지 마십시오. 가시면 안 됩니다.

“그거 아십니까, 저하. 사실은 제가 더 참았습니다. 저하의 손 잡고 싶고 저하께 입맞춤하고 싶었지만…… 참았던 겁니다.”영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처음으로 라온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사모합니다.”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아픈 고백.

좀 더 일찍 할 것을.

좀 더 많이 속삭일 것을.

“제가 저하를…… 더 많이 사모하였습니다.”라온은 누각의 계단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한 걸음.

어느새 연못 물이 발끝에 와 닿았다.

검은 밤하늘을 담고 있던 라온은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바로 그때였다.

“라온아.”거친 숨결이 들어찬 마른 음성.

분명 그리움이 만들어 낸 환청이리라.

귓전에 달라붙는 음성을 떨쳐내며 라온은 마지막 한 걸음을 떼려 했다.

그 순간.

“홍라온!”환청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도 선명한 부름.

일순, 라온의 심장이 멎었다.

갑자기 귓속에서 휘잉 바람이 불었다.

몸속에 흐르는 피가 한 번에 빠져나가는 듯한 아득한 느낌.

라온은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렸다.

이내 유백색 달빛이 은은히 스며든 누각의 가장자리에 시선이 멈췄다.

그곳에 길게 늘어진 긴 그림자가 보였다.

알알한 그리움이 듬뿍 담긴 두 눈과 아릿한 서늘함이 깃든 콧날, 그리고 붉은 잇꽃을 닮은 입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꺼져가던 얼굴에 작은 불씨가 타올랐다.

눅눅하게 젖은 눈동자가 휘둥그레 커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긴 그림자가 저벅저벅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따뜻한 숨결이 라온의 얼굴 위로 내려앉았다.

그것은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의 생생한 온기였다.

처음 만난 그 날처럼…… 그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하?”정말 저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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