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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121화 (121/131)

121. 그럴 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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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8

새벽녘에 내린 는개비로 세상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그러나 메마른 땅을 적신 물기로 초록의 싱그러움은 무서운 기세로 산하를 뒤덮어갔다.

이른 아침.

지저귀는 새소리가 라온의 단잠을 깨웠다.

라온이 몸을 일으키자 머리맡에 앉아 있던 최 씨가 안쓰러운 눈으로 돌아보았다.

“벌써 일어난 게야? 좀 더 자질 않고서.”지난밤, 라온은 늦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겁 없이 궁으로 들어간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노심초사하던 최 씨는 가벼워진 라온의 표정을 보고 한시름 놓았다.

삶은 여전히 고되었고, 세상 역시 그들 세 모녀에게 녹록치 않았다.

그래도 이리 살아 있으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실컷 잤어요. 그러는 어머닌 언제 일어나신 거예요?”라온이 무릎걸음으로 최 씨에게 다가갔다.

“나도 이제 막 일어났다.”“그런데 어머니, 이건 다 뭐예요?”라온은 최 씨가 곱게 개고 있는 옷가지를 보며 물었다.

며칠 전부터 어머니가 밤잠 아껴가며 만든 것인 듯한데.

대체 뉘 옷일까?

호기심을 보이자니 아직 두 눈에 잠이 덕지덕지 묻은 단희가 어미 대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언니 옷이잖아요.”“내 옷?”라온은 곱게 개켜 있는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소맷자락에 작은 패랭이꽃이 수자 놓인 소박한 무명저고리와 치마.

“이건 제가 수놓은 거구요.”이불을 뒤집어쓴 단희가 곁으로 와 설명을 덧붙였다.

“원래는 치맛단에도 수놓고 싶었는데.”작게 하품을 하며 아쉬운 한 마디를 내놓는 단희를 라온은 힘껏 끌어안았다.

그런 라온을 올려다보며 단희가 물었다.

“마음에 들어요?”“마음에 들다뿐이니.”“다행이다. 그리고 이거…….”귀엽게 혀를 빼물던 단희가 머리맡에 있는 작은 보퉁이 속에서 뭔가를 꺼내 라온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야?”“옷 만들고 남은 걸로 만들었어요.” 조각조각 이어진 향낭을 보며 라온의 입매가 길게 늘어졌다.

“곱다.”“어제 낮에 상선 할아버지랑 꺾은 봄꽃 가득 담았어요. 향기도 좋을 거예요.”“단희야…….”“상선 할아버지가 그러시는데, 세자저하께서 좋아하시는 향이래요.”“정말?”“네. 세자저하께서 앞으로는 내내 곱게 단장하고 있으라고 하셨다면서요. 옷이랑 향낭은 그리 곱지 못하겠지만, 우리 언니랑 향내가 이리 고우니. 아마 저하께서도 흡족해하실 거예요.”“옷도 향낭도 정말 고와.”“진짜요?”“응. 궁에서 귀하고 고운 옷들 많이 봤지만, 우리 어머니랑 단희가 만든 옷보다 고운 건 보지 못했어.”바늘땀 하나하나에 어머니의 마음과 단희의 정성이 알알이 배어 있었다. 세상의 그 어떤 귀한 비단으로 만든 것보다 곱고 귀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뭐 하고 있어? 일어났으면 어서들 씻질 않고서.”그렁그렁 눈물이 찬 얼굴로 두 자매를 돌아보던 최 씨가 괜스레 목소리를 높였다.

“씻고 오면 머리 빗겨주실 거예요?”단희가 어리광을 부리듯 물었다.

“당연하지.” “와, 그럼 지난번에 광통교에서 보았던 그 대가댁 아가씨처럼 머리 땋아주실 수 있으세요?”“그 대가댁 아가씨보다 훨씬 곱게 땋아 줄 것이야. 아직 이 어미 솜씨 못 봤지? 오늘 이 어미가 하늘 선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곱게 머리 빗겨 줄 것이니. 누가 먼저 할 테냐?”“저요, 제가 먼저예요.”잔뜩 신이 난 단희가 날다람쥐처럼 쪼르르 뒷마당에 있는 우물로 달려갔다. 그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 철부지의 모습인지라.

라온과 최 씨는 서로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화사한 웃음소리와 함께 행복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삶은 여전히 고되었고, 세상은 여전히 녹록치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살아있기에 내일은 더 행복한 날이 되리라.

그리 벅찬 날들이 시작되는 아침이었다.

*  *  *

“어머니, 어때요? 언니 어때, 단희야.”고운 치마에 붉은 댕기를 길게 드리운 라온이 팽이처럼 팽그르르 돌았다. 그 덕에 치맛자락이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잔뜩 신이 난 그녀가 최 씨와 단희에게 물었다.

“우리 라온이 곱구나.”“정말 고와요, 언니.”최 씨의 말에 단희가 양 엄지를 세웠다.

“뭐가 그리 곱다고 난리들이야?”그때 문이 빼꼼 열리고 한상익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상선 할아버지.”단희가 붙임성 있게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날도 더워지는데 귀찮게 왜 이리 달라붙어?”“이제 봄꽃이 피기 시작했는데, 뭐가 덥다고 그러셔요.”“더우니 덥다 하지.”단희의 말에 괜스레 버럭 화를 내지만 한상익은 제 옆구리에 붙어 있는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우리 언니 어때요? 곱지요?”단희의 물음에 한상익이 눈매를 매섭게 떴다.

“당연하지. 우리 저하께서 얼마나 안목 높으신 분이신데. 우리 저하께서 저만큼도 안 된 여인을 마음에 품었을까?”말투는 여전히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라온을 바라보는 한상익의 눈에는 따스한 온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눈에도 라온의 모습은 하늘 선녀처럼 곱디고왔다.

이대로 우리 저하 곁으로 데리고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분 좋아하실 모습을 떠올리니 늙은 심장이 두근거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리할 수 없는 현실에 한상익이 마른 한숨을 내쉴 때였다.

“한가야, 한가야!”숨넘어가는 목소리가 마당을 가로질렀다.

간밤에 인덕원으로 은밀한 걸음을 했던 박두용이었다.

“벌써 오는 거냐?”한상익이 여상한 목소리로 그를 맞이했다.

사흘에 한 번씩 박두용은 내시들이 모여 사는 인덕원을 찾고는 했다. 궁 안의 소식을 전해 듣기 위함이었다.

비록 쫓기는 몸이었지만, 그와 왕래하는 내시 중 누구 하나 그들을 밀고하는 이는 없었다. 이 모든 것이 보통 사람들보다 더 끈끈한 유대감으로 묶여 있는 환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은 오후나 되어야 돌아오곤 했는데.

한상익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가야, 한가야. 이를 어쩌냐? 이를 어쩌면 좋으냐?”숨이 턱까지 차오른 박두용이 전에 없이 우는 소리를 흘렸다.

“박가야, 왜 그러느냐?”심상치 않은 오랜 지기의 모습에 한상익의 표정이 굳어졌다. 반백 년을 박두용과 동고동락했던 한상익이었지만 저런 모습은 처음이었던 것이다.

“소, 소식 들었느냐?”“소식? 무슨 소식?”“저하께서…… 저하께서…….”고름을 매만지던 라온은 박두용의 입에서 영의 이야기가 나오자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대체 무슨 일인데 저러실까?

답답하고 궁금하기는 한상익도 마찬가지였다.

급기야 가슴까지 쾅쾅 쳐가며 한상익이 소리쳤다.

“무슨 이야긴데 이리 호들갑이냐? 우리 세자저하께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거냐?”“그게 말이다…… 그게…….”“뭐냐? 무슨 얘긴데 이리 뜸을 들여?”한상익은 자꾸만 머뭇거리는 박두용을 재촉했다.

“박가야, 성질 급한 놈은 심장병 걸려 죽겠구나. 대체 무슨 일인데 이래?”“저하께서…… 우리 저하께서…….”긴 한숨을 몰아쉬던 박두용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승하하셨다고 하는구나.”일순간, 모든 것이 멈춰버렸다.

*  *  *

시간이 오랫동안 멈춰 있었다.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침묵의 시간 동안 모두의 시선은 박두용에게 못 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라온의 얼굴에는 미처 거둬들이지 못한 수줍은 미소가 말라버린 박제처럼 걸려 있었다.

내가 무얼 잘못 들었나? 아니, 잘못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재차 묻는 물음에 박두용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어트렸다.

“세자저하께서…… 저하께서 세상을 떠나셨…….”“박가, 네 이놈! 네가 정말로 노망이 났구나.”박두용이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상익이 소리쳤다.

버선발로 마당으로 내려선 그는 박두용의 멱살을 와락 움켜쥐었다.

“이 늙은 놈이. 지금 뭐라고 헛소리를 한 게냐? 응?”“한가야…….”박두용의 주름진 눈가에 진득한 눈물이 맺혔다.

지켜보던 라온이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내시부사 할아버지께서 무얼 잘못 아신 거 같습니다. 저하께선 강건하십니다. 제가 어제 뵈었습니다.”“…….”“정말입니다. 어제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런 이상한 말씀일랑은 마십시오.”“…….”“조금 수척해지시긴 했지만 정말 말짱하셨단 말입니다. 그런 분이 어찌 하룻밤 사이에…… 어찌…….”돌아가십니까?

차마 삿된 말을 입에 담고 싶진 않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절대 입에 담을 순 없었다.

라온은 아랫입술을 거칠게 악물었다. 한참이나 밭은 숨을 몰아쉬던 그녀는 박두용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아침부터 농이 지나치십니다.”버럭 고함을 지르는 라온의 눈에 막 마당으로 들어서는 병연의 모습이 들어왔다.

“김 형.”그녀는 단숨에 병연의 곁으로 달려갔다.

“김 형, 내시부사 할아버지 좀 어찌해 보십시오. 아무래도 의원을 찾아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하십니다. 자꾸만 이상한 소리를 하십니다. 저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죠?”병연의 동조를 구하듯 라온이 말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병연은 라온을 시선을 회피할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김 형. 왜 그러십니까?”“…….”“아니죠?”확인하듯 다시 물었지만 병연은 대답 대신 먼 허공을 응시했다.

라온의 눈에 불이 일었다.

“다들 왜 이러십니까? 아침부터 뭘 잘못 드시기라도 한 겁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절대 그럴 리 없어요.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제가 가봐야겠습니다. 제가 궁에 가봐야…….”당장에라도 궁으로 달려가려는 라온을 병연이 말렸다.

“라온아, 홍라온. 진정해라. 우선은 진정해.”“지금 제가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다들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는데 제가 어찌 진정합니까? 보여 드릴게요. 세자저하 강건하신 모습 보여 드릴 겁니다. 그러니 기다리세요.”급기야 라온은 마당으로 내려섰다.

“라온아.”순간, 그 곁을 지키던 병연이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방금 백운회의 긴급 회합이 있었다. 거기서…….”“김 형.”그의 품에서 라온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 마십시오, 아무 말도.

듣지 않을 겁니다. 아니, 들리지 않습니다.

그녀는 저를 가두고 있는 병연을 밀쳐냈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저하만…… 세자 저하만 뵙고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바로…….”꺼져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라온은 달리기 시작했다.

궁으로 가야 했다.

세자저하께서 계시는 곳으로.

그런데 어찌 몸이 이리 굼뜬 것인지, 어찌 다리가 이리 후들거리는 것인지, 어찌 머릿속이 빙빙 도는 것인지, 어찌 심장이 이리 딱 멈춰버린 것만 같은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  *

“상위복.”희정당 지붕 위에서 왕세자의 영혼을 부르는 외침이 울러 퍼졌다.

그러나 애타는 부름은 허무한 울림이 되어 되돌아올 뿐이었다.

“상위복.”어디로 가시었나이까?

아직은 가지 마시옵소서. 아직은 떠나실 때가 아니 옵니다.

“상위복.”펄럭.

주인 잃은 검은 곤룡포가 푸른 창공을 애처로이 맴돌았다.

하늘을 유영하는 곤룡포의 모습이 흡사 계절을 이겨내지 못한 여린 꽃잎 같았다.

“저하…….”“저하, 세자저하…… 흐윽.”통곡소리가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붙잡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은지 왕세자의 영혼은 무장무장 먼 북쪽 하늘을 향해 떠나갔다.

순조 30년, 푸른달 초엿새.

왕세자께서 돌연 승하하시니, 세상은 깊은 슬픔에 빠졌다.

*  *  *

“김 형, 대체 사람들이 어찌 저리 우는 것입니까?”돈화문 앞으로 몰려든 유생들이 궁궐 담벼락 아래서 통곡하고 있었다.

생경한 그 모습에 라온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라온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대로 마음만 졸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 어쩌다 왕세자께서 돌아가셨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흘러나오게 된 것인지 확인해야 했다.

행여 그 일로 인해 영의 눈앞에서 죽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해야만 지금 당장 자신이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라온아.”그녀의 어깨를 붙잡는 묵직한 손길.

“그만해.”“무얼 그만하라는 겁니까? 김 형께서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믿기십니까?”“내가 알아보마. 내가…….”“싫습니다.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겠습니다. 제가 확인할 겁니다. 제 눈으로 본 것만 믿을 겁니다. 세자저하께서 직접 하시는 말씀만 들을 겁니다. 그러니 비키십시오.”“라온아, 홍라온.”“제가 봐야 합니다. 제가 봐야…….”저하 아니지요?

제발 아니라고 해주세요, 네?

“가야 합니다.”“저곳은 위험하다. 궁은 네게 위험한 곳이야.”“상관없습니다. 제가 어찌 되든 아무 상관없습니다. 제까짓 것이 어찌 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그때 병연이 라온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사나웠다.

“누가 그리 말했어?”“김 형…….”“누가 너를 네까짓이라 말했어?”“…….”“너를 가벼이 여기지 마. 그랬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다.”그녀에게는 시선조차 돌리지 않은 채 병연은 말을 이어나갔다.

“내겐 그 무엇보다 소중한 사람이다, 너는.”“김 형.”“그러니…… 솜털 하나 다쳐서는 안 된다.”“…….”병연을 바라보는 라온의 눈 속에 어룽어룽 눈물이 고였다.

저를 귀히 여겨주시는 김 형의 마음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놓아주십시오. 저는 가야 합니다. 저하께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나 입 안에 가득 찬 말은 끝내 라온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갑자기 안개 속을 걷는 듯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다.

맥없이 허물어지는 라온을 병연은 품에 안았다.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여린 몸은 풀썩풀썩 울음을 토해냈다.

안쓰러운 시선으로 라온을 내려다보던 병연은 궁궐의 높은 담벼락을 올려다보았다.

“세자저하, 대체 어떻게 된 거야?”정말 우릴 두고 가버린 거야?

벗의 얼굴이, 영의 미소가 라온의 얼굴 위로 겹쳐 보였다.

“정말 가버린 것이라면 내가 용서 못 해. 이 녀석을 두고 가버린 거라면…… 내가 용서 안 해.”그러니 저하, 괜찮다고 해줘.

병연의 간절한 바람이 궁궐 담장 위로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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