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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120화 (120/131)

120. 달빛 고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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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5

“세, 세자저하…….”김조순의 입에서 신음 같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영의 긴 그림자가 김조순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어찌 죽은 사람 바라보듯 놀라십니까?”영의 건조한 물음에 김조순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 그것이 아니오라…….”“아니면 죽었다고 믿고 싶으셨던 겁니까?”말과 함께 영은 품에서 작은 봉투를 꺼내 서안 위로 툭 던졌다.

봉투를 본 김조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것은 한 시진 전, 그가 궁으로 몰래 들여보냈던 것이었다.

이 작은 봉투는 김조순이 이루고자 하는 대업의 시작이었으며, 또한 영이 멀쩡히 나타난 것을 보고 귀신 보듯 놀란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도 몰래 은밀히 궁 안으로 들여 지금쯤 영의 뱃속에 있어야 할 물건인데, 이것이 어찌 여기에 있단 말인가.

놀람으로 인해 멈췄던 사고가 빠른 속도로 돌아갔다. 이내 김조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저도 모르게 꽉 움켜쥔 손아귀에 미처 완성하지 못한 용이 구겨지고 있었다.

“이것을 어디에서 구하셨소?”물어보는 음성이 바람에 휩쓸리기라도 한 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걸 음식에 타려 하는 자의 손에서.”영의 대답을 들은 김조순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말았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듯했다.

그렇게 잠시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눈으로 손안에 있는 구겨진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내 김조순의 입에서 헛헛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허허허. 과연 세자저하십니다. 설마, 이게 내 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늘.”순식간에 웃음을 거둬들인 김조순이 말을 이었다.

“그럼 한양으로 오기로 한 사병들에게서 연락이 끊긴 것도 세자저하께서 하신 일입니까?”“그들은 지금쯤 관군에게 사로잡혀 압송되고 있을 것이오.”“허허허허.”김조순은 다시 넋 나간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꽁꽁 숨겨두고 은밀히 진행하였던 일인데, 나만 혼자 그리 생각하였던 모양입니다. 어찌 아시었습니까?”“백운회가 애를 썼지요.”“결국, 그들이군요. 언젠가 그들이 내 일을 어그러트릴 줄 알았습니다. 하여, 약한 곳을 찔러 와해시켰거늘. 아직도 그들의 힘이 이리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탄식하듯 낮게 중얼거리며 김조순은 영을 올려보았다.

영의 무심한 시선과 한참을 마주하던 김조순은 문득 눈빛을 날카롭게 벼렸다.

“아니군요. 그들의 힘이 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이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 때문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정체를 밝히며 백운회에 숨겨둔 내 사람들 역시 노출되고 말았지요. 그것이 실수였군요. 살을 내 주고 뼈를 취한다고 한 것이 모든 것을 내준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허허허.” 자조 섞인 넋두리가 김조순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라온의 정체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백운회에 숨겨놓은 김조순의 사람들이 실체를 드러내고 말았다.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한 거로 생각했건만. 아니었다. 새로 백운회의 회주가 된 정약용은 이것을 기회로 백운회의 불순한 무리를 모조리 색출해냈다.

덕분에 백운회에 남아 있는 것은 진정한 영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이번 음모를 사전에 파악하고 차단할 수 있었던 것은 백운회에 단 한 명의 세작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여, 영이 새로운 판을 짤 수 있었고 정약용의 지혜가 그 위에 덧칠해졌다. 그리고 그 아래의 충신들이 맡은 바 임무에 충실했다.

물론 그 계기가 된 것은 분명 라온이었다.

김조순의 눈에 서늘한 푸른빛이 번뜩였다.

“결국, 계집 하나 때문에 대업을 망쳤단 말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다 생각한 천한 계집이 사사건건 내 앞을 가로막는구나.”그때였다.

이를 갈아 문 채 탄식을 이어가는 김조순에게 영이 물었다.

“어찌하여 그랬습니까?”“이걸 가지고 오신 걸 보면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게 아닙니까? 구태여 이 늙은이가 기력을 소모할 필요가 무에 있겠습니까.”“대답하십시오. 나는 들어야겠습니다.”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외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질문을 이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음에도 어찌 가진 모든 것을 걸고 그리 큰 모험을 하셨는지 그 연유를 들어야겠습니다. 그릇된 욕심입니까?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탐욕 때문이었습니까?”“욕심이고, 탐욕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결코 그릇된 것은 아니외다.”“반정을 꿈꾸는 것이 어찌 그릇되지 않다는 말입니까?”“더 높은 것을 추구하는 것은 본디 사람의 본능이거늘. 어찌 그릇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아쉬운 것은 내가 꿈꾸던 자리에 지나치게 유능한 저하께서 계셨다는 것이지요.” “권력을 탐하는 것이 본능이라 하셨습니까? 그리 말씀하시는 분께서 어찌 외손주를 죽이려 하셨습니까? 자손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역시 사람의 본능입니다.”“무릇 큰 뜻을 위해선 작은 것은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니까요.”“권력은 크고 사람은 작다. 이것이 외조부의 뜻이며 생각이십니까? 그렇다면 틀렸습니다.”“무엇이 틀렸습니까?”“권력도 재물도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할 수가 있는 것이니, 가장 큰 것은 사람입니다.”“노비며, 양반이며, 구분 짓고 가장 높은 곳에서 유유자적 신선놀음하는 것이 바로 당신이 앉은 그 자리가 아닙니까? 실상은 알지도 못하면서 책에서 읽은 도리를 읊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그래서 바꾸려 한 것입니다. 그래서 변화를 꿈꿨던 것입니다. 아니, 변해야만 하는 겁니다. 백성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땅에 어찌 꿈이며 희망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김조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래서 내가 그리하였던 겁니다. 이래서 나의 핏줄임에도 저하에게 위해를 가하려 했던 겁니다. 세자저하의 생각은 위험합니다. 그것은 지금껏 지탱해오던 조선을 무너트릴 겁니다.”“옳지 못한 과거라면 버릴 줄도 알아야지요. 그래야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역시, 세자저하와 내 생각은 이미 바다를 사이에 둔 것만큼 멀고도 아득하여 영원히 접점을 볼 수 없을 듯하군요. 어차피 패자의 생각은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니. 이것이 역사이며 또한 승자의 논리. 말을 더해 무엇 하겠습니까?”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무상한 표정이 된 김조순이 영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만 죽이시오.”“…….”“허허허, 이것이 권력을 탐하다 죽는 자의 말로라 생각하니, 그리 나쁘지도 않은 것 같소이다. 외손주의 손에 죽는다. 결국, 깨끗한 세자저하의 이름에 처음으로 흉측한 기록을 남기게 되는 것이 아니겠소?”“제 손에 죽기 원하십니까?”“저하께선 결국 이루실 겁니다. 그럴 마음이 있으시고, 그럴 능력이 되시니. 그 누구도 저하의 상대가 되지 못하겠지요.”“…….”“마지막 가는 길이니 내 외손주에게 조언해도 되겠습니까?”“……하시지요.”“사람을 믿지 마세요.”“…….”“일평생 권력을 탐하며 숱한 사람을 만났지요. 그 아수라장을 헤쳐 가며 깨달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교만한지 알게 되었습니다. 권력과 욕심 앞에서는 그 어떤 이상도 허물어지기 마련이지요. 저하의 이상이 높고 고귀하다 한들, 저하를 따르는 이들의 이상도 높을 수는 없는 겁니다. 저하는 숱한 배신에 실망하게 될 것이며…….”김조순은 두 눈에 뚜렷한 빛을 품고 말을 이었다.

“권력을 탐하는 또 다른 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제가 죽게 될 것이란 말입니까?”“그렇습니다. 결국, 그리될 겁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되겠지요.”“어째서요?”“왕이란 언제나 가장 높고, 가장 밝은 곳에 있어야 하니까요. 그런 만큼 표적이 되기도 쉬운 법이지요. 반면, 권력을 탐하는 자는 항상 자세를 낮추고 어둡고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음모를 꾸미니. 천하의 저하라 한들 어찌 이들을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김조순은 영을 비웃기라도 하듯 싸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백운회가 언제까지 세자저하의 편으로 남아 있을 것 같습니까? 그들 또한 사람인 이상 언젠가는 변하겠지요. 그들이 세자저하에게서 등을 돌렸을 때, 과연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람을 조심하세요. 이것이 이 할아비가 저하께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조언입니다.”말을 마친 김조순은 옷매무새를 단정히 했다.

마지막을 위한 준비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어릴 적에는 제법 외조부를 쫓아다녔다. 저분의 너른 어깨가 좋았고 넉넉한 웃음에 마음이 놓이곤 했다.

어린 영에게 외조부는 든든한 울타리였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었다. 하지만 조금씩 세상에 눈을 뜨게 되면서 알게 되었다.

이 나라를 이리 만든 장본인.

왕을, 아버지를 힘없는 허수아비 왕으로 만든 이가 다름 아닌 외조부였다는 사실을.

사랑하고 믿었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믿고 싶었다.

혈육이지 않은가. 제 혈관에 흐르는 피톨의 절반을 물려주신 분이기에…… 믿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니었다.

끝까지 김조순은 왕이 허수아비 왕으로 남아 있길 원했다. 자신과 맞서는 왕세자를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영이 외척들을 조정에서 몰아낸다고 해도 언젠가 그들은 돌아오리라.

이 땅에 권력이 남아 있고, 사람의 욕심이 남아 있는 한, 끝없이 소용돌이치는 탐욕의 늪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들끓는 분노가, 걷잡을 수 없는 화가 영의 피를 차갑게 식혔다.

왕은 높고 밝은 곳에 있고, 그를 노리는 탐욕은 낮고 어두운 곳에서 호시탐탐 때를 노리고 있었다.

영은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가슴 속에 새겼다.

비록 권력을 탐하여 제 혈육까지 죽이려 한 비정한 할아버지일지 모르나, 마지막 조언만은 그의 인생에서 꼭 필요한 교훈이었다.

영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김조순을 바라보았다.

그 증오에 찬 시선을 마주한 김조순이 목을 길게 늘였다.

“자, 이제 죽이십시오.”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행동.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후회와 미련도 없었다.

영은 감정 없는 시선으로 외조부의 주름진 뒷덜미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돌조각처럼 굳어 있던 영이 김조순을 향해 천천히 몸을 굽혔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는 외조부를 죽이지 않을 겁니다.”뜻밖에 말에 김조순은 고개를 들어 영을 올려다보았다.

“살아 계십시오.”“나를…… 용서하시는 겁니까?”영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신에게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드릴 생각입니다.”김조순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그려졌다.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라니.

영은 무심한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외조부께서 하신 조언은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 하지만 내 꿈과 이상을 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아직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왕은 높은 곳에 있으나,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이번처럼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저하의 목숨을 얼마든지 노릴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허망한 꿈을 꾸신단 말입니까?”발악하듯 소리치는 김조순을 돌아보던 영은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나는 꿈을 꿀 것입니다. 설사, 나의 꿈 때문에 내가 산 자가 아니 된다 하여도. 내가 왕이 못 되는 한이 있어도. 나는 결코 내 마음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영은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은 당신이 평생을 꿈꿔온 하늘. 그 하늘을 영원히 마주하지 못할 것입니다. 못에 갇혀 사는 잉어처럼, 평생 감시의 눈길을 달고 살게 될 겁니다. 그리하여, 그 썩어빠진 두 눈으로 당신께서 일평생 쌓아올린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모습을 지켜보게 할 겁니다. 약조하지요. 그 과정은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느낄 만큼 참혹한 모습일 터이니.”김조순을 뒤로한 채 영은 그대로 방을 가로질러 나가버렸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김조순이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날…… 날 가두겠단 말인가? 작은 못 안에. 영원히 흙바닥을 뒤지는 잉어로 살게 하겠단 말인가? 꿈도 이상도 없이, 그저 허망하게 작은 뜰 안에 갇혀 멀건 하늘만 보게 하겠단 말씀이신가?”김조순의 표정이 축 늘어졌다.

탁! 하고 미닫이문이 닫혔다.

외부와 차단된 방 안이 그렇게 좁고 갑갑해 보일 수 없었다.

다리가 근질거렸다.

영이 말한 작은 못이 이 방 안을 뜻하는 것 같아 미칠 것만 같았다.

순간, 문 닫힌 김조순의 사랑채에서 울음 같기도 한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오랜 세월 그가 그려왔던 그림들이 거침없이 찢겨나갔다.

한 노인이 일평생을 꿈꿔왔던 염원과 야망 역시 갈기갈기 조각났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른 후.

김조순의 방안에서 울음 같기도 하고 흐느낌 같기도 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 할아비를 이곳에 영영 가둬둔다 하였습니까? 좋습니다. 좋아요. 이번의 승부는 내가 패했으니 감수해야지요. 하지만 나는 졌지만, 나의 뜻과 계획은 아직 꺾이지 않았습니다. 듣고 있습니까? 저하!”

*  *  *

세자빈의 처소에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어쩌자고 그리하셨단 말입니까?”하연의 질책에도 조만영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조금 전 조만영은 김조순과 손을 잡고 은밀히 거행한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여식에게 전했다.

하연의 얼굴에 경악이 들어찼다.

아비가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설마 이처럼 큰일을 꿈꾸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과한 꿈을 꾸었던 조만영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이 일로 어렵게 일어난 가문의 위세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게 생겼다. 아니,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감히 역심을 품었으니, 가문이 몰살된다 하여도 달리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하연의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세자저하의 그늘에 있었더라면 아버님께서 원하시는 부귀와 광영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이리 두렵지는 않았을 겁니다.”“이제 와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아버님께서 저지른 일입니다. 그러니 책임도 아버님께서 지셔야지요.”“네. 그래야지요. 내가 실수한 일이니, 내가 감수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빈궁마마.”“…….”“나 하나쯤 어찌 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것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이건 집안 전체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빈궁마마의 어미는 물론이고, 이제 갓 태어난 어린 조카 역시도 생명을 부지하지 어려울 겁니다.”“아버님.”하연의 눈동자에 기어이 눈물이 들어찼다.

아버지의 억지가, 그의 강요가 그녀를 외롭고 힘들게 하고 있음을 왜 모르시는 것일까?

그러나 그런 여식의 속내일랑은 모르쇠로 일관한 조만영이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여식을 바라보는 아비의 얼굴에 두려움과 비정함이 동시에 떠올랐다.

영을 떠올리면 오금이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왕세자의 다리를 부여잡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올곧은 저하께서는 절대 용서하시지 않으리라.

이대로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었다.

아직은 기회가 있었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나무상자 하나를 하연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게 무엇이어요?”말과 함께 하연은 나무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고급스러운 약과가 가득 들어 있었다.

“저하께서 약과를 즐겨 드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것을 세자저하께 올리십시오.”“그게 무슨 말씀이어요?”하연의 눈동자에 깊은 파문이 일었다.

아비의 얼굴에 들어차 있는 것은 독 오른 독사의 그것보다 더 지독한 독기였다.

“설, 설마…….”“빈궁마마, 선택하십시오.”“선택이라뇨?”“세자저하이십니까? 아니면 빈궁마마를 낳아주고 길러준 집안입니까?”“……!”하연의 얼굴이 하얗게 바래졌다.

*  *  *

자시초(子時初: 밤 11시)

동궁전, 영의 처소 앞을 지키던 최 내관의 고개가 꾸벅꾸벅 허공에 흔들렸다. 요 며칠, 제대로 눈을 붙인 적 없었던 터라.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용했다.

그러나 그의 달콤한 잠은 얼마 가지 못해 방해받고 말았다.

사각거리는 비단 자락 끌리는 소리.

눈앞에 나타난 붉은 스란치마에 최 내관은 주름진 눈을 황급히 손등으로 비볐다.

고개를 드니 하연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빈궁마마 아니시옵니까?”서둘러 일어나 머리를 조아리는 그를 향해 하연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하시게.”“하오나 빈궁마마. 너무 늦었사옵니다.”“고하여 주게.”좀처럼 보이지 않는 하연의 고집에 최 내관은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이내 목청을 가다듬은 최 내관이 안쪽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세자저하, 빈궁마마 입시옵니다.”안에서는 아무런 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빈궁전으로 돌아가셨다 날이 밝으면…….”그때 하연이 최 내관을 제치고 앞으로 나섰다.

“저하, 신첩이옵니다.”“…….”“저하, 신첩 들어가겠사옵니다.”“빈궁마마…….”최 내관이 안절부절못하며 하연을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어느새 하연은 인기척이 들려오지 않는 영의 처소 안으로 발을 디뎠다.

찰나 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눈만 끔뻑거리던 최 내관이 이내 불안한 얼굴로 문 앞을 서성였다.

탁.

처소 안으로 들어선 하연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저하.”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방 안을 휘 에둘러 보던 그녀가 조용한 걸음으로 영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박자박.

단정한 걸음이 지척에까지 다다랐음에도 영은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품에 안고 있던 작은 꾸러미를 조용히 내려놓은 하연이 영에게 다시 속삭였다.

“저하, 신첩이옵니다.”“…….”“깨어 계신 것 알고 있사옵니다.”하연이 지금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편찮으신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사옵니다.”

*  *  *

영은 눈을 떴다. 그리고 상체를 일으켰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하연이 단정히 그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이 밤에 무슨 일이오?”“드려야 할 것이 있어 이런 무례를 저질렀습니다.”“내게 줘야 할 것이 있다 하였소?”영의 물음에 잠시 멈칫하던 하연은 한쪽 옆에 놓아두었던 꾸러미를 내놓았다. 푸른 비단보로 감싼 나무 목곽.

“이게 무엇이오?”“마침 좋은 약과를 구했습니다. 저하께 꼭 드리고 싶어 이 밤에 왔사옵니다.”“약과라…….”목곽을 바라보는 영의 시선이 문득 애틋해졌다.

약과를 즐기던 한 사람이 떠올랐던 까닭이었다.

궁에 들어와 가장 맛있었던 음식을 꼽으라 했더니 주저하지 않고 약과를 소리치던 라온이 생각나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배어 나왔다.

“저하…….”하연의 목소리가 영의 상념을 깨트렸다.

“정녕 그리 하셔야겠습니까?”“무슨 말이오?”“신첩은 눈과 귀가 어두워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귀에도 여러 소문이 들려옵니다. 저하께서 큰 뜻을 품고 관료들과 대립하고 있다 들었사옵니다.”“빈궁께서도 내 뜻과 이상을 알고 있지 않았소?”“저하께서 품고 계신 세상을 저 또한 그리고 있습니다. 하오나, 그 뜻이 아무리 고귀하다 해도 가시는 길이 피로 얼룩지길 바라지는 않습니다. 저하. 정녕 그리 매정하게 하셔야겠습니까? 그들과 화합하여 이상을 품을 수는 없사옵니까?”“그리할 수 있었다면 내 어찌 이런 일을 꾸미겠소.”“저하…….”“이미 활을 떠난 시위요.”영의 매정한 목소리가 하연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그렇군요.”쓸쓸히 웃던 하연이 목곽을 앞으로 내밀었다.

“하나 드시어요.”물끄러미 그녀가 내민 약과를 내려다보던 영이 그것을 건네받았다.

막 입에 넣으려는 그에게 하연이 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무어가 말이오?”“저를 믿으실 수 있겠사옵니까? 제 사가에서 어떤 일을 벌였는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제가 올리는 음식입니다. 저를…… 제 마음을 믿으실 수 있으십니까?”하연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영은 약과를 입에 넣었다.

“저하…….”“내가 걸어온 길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소. 앞으로 가야 할 길 역시 유혈 낭자할진대. 고작 이 정도 일을 두려워해서야 어찌 큰 뜻을 펼칠 수 있겠소.”“저하.”“나는 맞설 것이오. 그 어떤 왕보다 더 치열하게 그들을 막을 것이오.”“어찌 막겠다는 것이옵니까? 어떻게 그들과 맞서겠다는 것입니까? 그들은 저하께서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두렵고 지독한 자들입니다. 어두운 그늘에 숨어 흉측한 음모를 꾸미는 자들입니다.”“알고 있소. 하여, 나는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싸울 것이오.”“네? 그게 무슨 뜻이옵니까?”“빈궁.”“네, 저하.”“나는…… 달이 될 것이오.”“달이라뇨?”“어둠과 한몸이 되는 달이 될 것이오.”영의 말에 하연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그 말씀은…….”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하연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영은 약과 하나를 더 집어 입속에 넣었다.

“일평생 살면서 이리 맛난 약과는 처음 먹어 보는 것 같소.”슬픈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연은 문득 동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달빛이 참 곱군요.”영도 창밖을 보았다.

달이 구름 사이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렇구려.”달과 영을 번갈아보던 하연의 눈가에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달이…… 달빛이 참으로 고운 날입니다.”

*  *  *

하연이 떠난 동궁전에 깊은 적막이 다시 찾아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동궁전의 문이 급하게 열렸다. 어린 소환내시가 종종걸음으로 나와 최 내관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뭐라? 지금 뭐라 하였니?”다그치는 최 내관의 목소리에 어린 소환 내시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자시말(子時末:새벽 1시).

세상이 캄캄한 어둠에 완전히 파묻혀버린 시각이었다.

*  *  *

“다시 말해보라.”침중한 왕의 음성이 허공을 뒤흔들었다.

“그것이…… 전하…… 전하……흐윽.”왕의 앞에서 최 내관은 어린아이처럼 어깨를 흔들며 흐느끼고 있었다. 갑갑증을 느낀 듯 왕이 그의 가까이 다가왔다.

“울지 말고 다시 말해보라. 지금 뭐라 하였느냐?”“저하께서…… 세자저하께서…….”순간, 휘청 무릎이 꺾인 왕은 그대로 최 내관의 앞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허탈한 눈으로 동궁전이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영아…… 결국 이리되었구나. 내가…… 너를 이리 만들었구나.”고개를 숙이는 왕의 손등으로 툭,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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