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한번 환관은 영원한 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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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1
소환내시 교육장의 후미진 전각 한 귀퉁이.
그곳은 불통내시라 하여 내시들의 괄시를 받는 도기와 상열의 거처였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고. 불통내시라는 꼬리표가 달린 그들에게도 한때나마 따뜻한 봄날은 있었더랬다.
바로 라온과 함께했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라온의 정체가 발각되고 난 후, 그들은 다시 궁의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불통내시 상열은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늦도록 뒤척이던 그는 결국 방을 나와 툇마루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이보게, 상열이. 어찌 잠을 못 자는가?”덩달아 잠이 깬 도기가 길게 하품을 하며 옆자리에 앉았다.
“도 내관, 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뭐가 그리 이상한가?”“아침에 보았던 생각시 말이네. 암만 생각해도 홍 내관과 똑 닮았더란 말이지.”“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만…… 하지만 말일세.”“상열이, 자네도 생각해 보네. 자네가 역적의 자식이고 게다가 사내도 아닌 여인의 몸으로 국법을 어기고 환관 노릇까지 하였단 말일세. 그것만 해도 죽을죄인데, 이제는 관군들에게 쫓기는 몸까지 되었어. 그런 판에 궁에 들어올 엄두를 내겠는가?”“나야 절대 못 하지.”“그래, 바로 그 걸세. 그러니 아침에 보았던 그 생각시가 아무리 홍 내관을 닮았다고 해도 그 생각시는 절대 홍 내관일 수 없단 말일세.”“그야 당연한 말이네만…….”도기의 말에도 상열은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어쩐지 홍 내관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홍 내관 목숨은 하나가 아니라 둘인가? 아무리 간덩이가 붓다 못해 배 밖으로 나온 사람이라 해도 그런 일은 절대 못 할 걸세.”“그래도 홍 내관이면…….”“아, 이 사람! 아니라니까!”좀처럼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상열을 향해 도기가 목소리를 높일 때였다.
“용케 절 알아보셨군요.”“그것 보게. 맞다질 않은…… 어?”“헉!”상열과 도기의 입에서 동시에 바람 빠지는 듯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들 앞으로 생각시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정말로…….”도기와 상열, 두 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한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홍 내관?”
* * *
도기와 상열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말로 아침에 봤던 생각시가 정말 라온이었을 줄이야.
그녀를 잡기 위해 조선 팔도가 발칵 뒤집혔다. 으슥한 곳에 숨어 있어도 모자를 판에 여봐란듯이 궁을 활보하고 있단 말이야?
“허. 허허.”두 내관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러다 이내 도기는 손으로 두 눈을 벅벅 비볐다.
“내가 헛것을 보나?”아무리 눈을 비비고, 감았다 다시 떠도 라온을 닮은 생각시의 모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기까지 했다.
“잘 지내셨습니까?”해사한 미소와 함께 건네는 인사말.
‘정말 홍 내관이네.’한동안 멍한 얼굴로 라온을 바라보던 도기가 돌연 팽 앵돌아진 모습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없습니다.”“도 내관님.”도기의 싸늘한 반응에 라온은 당황하고 말았다.
“화나셨습니까?”“그럼 화 안 나겠습니까? 그동안 우릴 그리 감쪽같이 속여 놓고선…….”“죄송합니다.”목숨이 달린 일이라 차마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없었습니다. 진심이 담긴 라온의 사과에도 도기는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보다 못한 상열이 끼어들었다.
“홍 내관, 정말 홍 내관입니까?”“네.”“정말 여인이었군요.”“여인이라 죄송합니다. 진즉 말씀드려야 할 일이었는데…….”어쩔 수 없이 택했던 환관의 삶.
그렇기에 남을 속이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정체가 발각되면 나 하나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통내시들에게는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라온에게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고, 말로 표현 못 할 끈끈한 정과 의리로 엮여 있었다.
“뭐…… 쉽게 털어놓지 못할 이야기지요.”어쩔 수 없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는데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서운한 얼굴로 말을 하던 상열은 도기를 힐끔거렸다.
“도 내관은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간 다른 내시들한테 받은 설움이 홍 내관을 보자 터진 듯합니다.”“다른 내시들한테 받은 설움이요?”“홍 내관 일로 내시부에 한바탕 폭풍이 불었지요. 날벼락을 맞은 내시들이 홍 내관 대신 도 내관을 찾아와 화풀이를 했거든요.”상열의 말에 라온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랬군요. 저 때문에 정말 많은 고초를 치르셨습니다. 죄송합니다.”“우리 같은 신세야 모시는 웃전들의 심기에 따라서도 하루에 몇 번씩 치도곤을 당할 때도 있지요. 그러니 그런 일쯤이야 무에 대수겠습니까.”상열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도기가 속없이 웃는 상열을 향해 눈을 흘겼다.
“상열이 자넨, 잘도 웃음이 나오는구먼.”“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제 와 지난 일을 곱씹어봐야 뭐하겠는가.”도기를 달래던 상열이 라온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입니까?”“도 내관님과 다른 분들을 뵈러 왔습니다.”상열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긴 환관들만 출입할 수 있는 곳입니다. 행여 다른 이의 눈에 띄었다간…….”바로 그때였다.
딱!
온몸으로 나 화났소, 시위하고 있던 도기가 돌연 상열의 뒤통수를 힘껏 후려쳤다.
“아얏! 도 내관, 어찌 이러는가?”“이보게 상열이. 말을 하기 전에 이 머리로 생각이라는 걸 하라고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그건 또 무슨 소린가?”“자네 방금 홍 내관에게 뭐라 했는가?”도기의 말에 잠시 눈동자를 굴리던 상열이 울상을 한 채 말을 이었다.
“혹시 홍 내관이 더는 내관이 아니라는 말 때문에 그러는 겐가? 하지만 사실이지 않는가. 달리 시킬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함께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우릴 찾아올 이유가 무에 있겠나?”도기가 눈을 빛냈다.
“사람을 꼭 필요할 때만 만나는가?”“그럼?”“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정이란 그런 게 아닌가? 그리고 자네, 홍 내관이 더는 내관이 아니라 했나?”“그랬네.”“아닐세. 상열이, 자네가 잘못 알고 있네. 한 번 환관은 영원한 환관일세.”“처음부터 홍 내관은 사내가 아닌 여인이었네.”“그게 무에 대순가?”“뭐?”“여기 우리 중에 사내가 어디 있는가? 자네는 사낸가?”“아니. 그건 아니지만…….”한때는 사내였네.
말하고 싶었지만, 도기의 기세등등한 눈빛에 눌려 상열은 입도 달싹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도기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나 홍 내관이나 다를 것이 없네. 일평생을 거짓 사내 노릇을 해야 했던 홍 내관이나 사내이나 온전한 사내가 아닌 우리 신세나 다를 것이 무언가. 중요한 건 사내냐, 아니냐가 아니라…… 홍 내관이 내관이었고, 또 우리 동료라는 것이네.”상열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미안합니다, 홍 내관. 홍 내관이 생각시 모습을 하고 있어 나도 모르게.”라온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정말 죄송합니다.”자신을 생각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감사하면서도 미안했다.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목이 메어왔다. 눈가가 뜨뜻해지고 코끝이 알큰해졌다.
라온은 눈가에 맺힌 습윤한 물기를 서둘러 닦았다.
소맷자락으로 코끝을 훔치던 도기가 그런 그녀의 턱밑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홍 내관.”“네.”“지금 제정신입니까? 지금이 어느 때라고 궁에 들어온 겁니까?”“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요.”“아무리 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그렇지. 이 험악한 시기에 궁에 들어오면 어쩌자는 겁니까? 죽고 싶어서 환장했습니까? 사방에 홍 내관을 잡겠다고 눈을 벌겋게 뜨고 있는 판에.”“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궁에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아서요.”말과 함께 라온은 품에 안고 있던 대나무 소쿠리를 내려놓았다.
“이게 뭐요?”“약과입니다.”“약과요?”“제가 궁에 들어와서 먹어본 것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것이 바로 이 약과였습니다. 하여, 오늘 종일 만들었습니다. 딴에는 최선을 다했는데. 맛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이걸 주겠다고…….”도기의 통통한 볼이 실룩거렸다. 코끝이 발갛게 달아오른 그가 소맷자락으로 눈가를 비볐다.
“이깟 약과로 내 마음이 풀릴 거로 생각하지 마세요. 어림도 없어요.”말과 달리 어느새 소쿠리 안의 약과를 우물거리며 도기가 말했다.
“압니다. 두고두고 갚을 겁니다.”라온의 말에 문득 생각났다는 듯 도기가 소맷자락을 뒤적거렸다.
“정 미안하다면…….”도기가 라온의 앞으로 쓰윽 서책 몇 권을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이번에 새로 지은 책이지요. 이 책에 홍 내관의 수인을 받고 싶어 하는 이가 있어서…….”“일이 그 지경이 되었는데, 아직 제 수인을 받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까?”“오히려 그 때문에 더 열렬히 추종하는 사람이 생겼지요. 세상의 어느 여인이 그처럼 대담한 일을 하겠느냐면서 암암리에 찾는 자가 줄을 잇고 있지요.”라온은 웃으며 세필 붓을 들었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습니다.”그때 상열이 도기를 말렸다.
“지금 그걸 할 때가 아닐세.”“상열이, 중요한 일이라네. 방해하지 말게.”“아니, 도 내관……. 저기 좀 보게나.”상열이 전각의 담벼락 아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도기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장, 장 내관님.”어둠 속에서 해맑게 웃고 있는 장 내관을 보는 순간, 상열과 도기는 퉁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언, 언제 오셨습니까?”행여 라온에게 불벼락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두 내관은 제 몸뚱이로 라온을 가리려 안간힘을 썼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인간벽 뒤에 선 라온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걱정 마세요. 장 내관님은 경계하지 않으셔도 돼요.”“정말요?”“네. 제가 이 궁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이렇게 약과를 만들어 두 분을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다 장 내관님 덕인걸요.”“그렇군요.”라온의 설명에 겨우 안심한 도기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제 볼 일은 다 끝난 것이오?”어느새 세 사람의 곁으로 다가온 장 내관이 라온에게 물었다.
“네.”“잘 되었군요. 그럼 이제 궁을 나가면 되는 것이지요? 사실 심장이 벌렁벌렁해 죽을 지경…….”“한 군데만 더 가면 될 것 같습니다.”“뭐라고 했소? 한 군데 더?”“네. 꼭 뵈어야 할 분이 있습니다. 그래도 되겠지요?”“그리 꼭 뵈어야 한다면 어쩔 수가 없지요. 따라오세요.”마른 입맛을 쩝쩝 다시던 장 내관이 다시 재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라온이 도기와 상열을 향해 작별을 고했다.
“그래요, 홍 내관. 조심히 잘 가세요.”상열이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수인하지 못한 서책과 라온을 번갈아 보던 도기는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접은 그가 영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라온의 등을 떠밀었다.
“홍 내관, 뭐합니까? 어서 가질 않고서요. 상열이, 뭐하는가? 주위를 살펴보게. 혹여 지켜보고 있는 눈이 있는지.”“알았네.”눈빛을 주고받은 상열과 도기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라온은 두 불통 내시들의 비호 아래 내시들의 처소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녀가 사라진 후에도 도기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연신 주위를 살폈다.
“도 내관. 이제, 그만 해도 되네. 벌써 저 멀리 갔다네.”상열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제야 몸의 긴장을 푼 도기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에구구. 긴장했더니 온몸의 힘이 쭉 풀린 것 같네.”“그나저나 홍 내관은 이 와중에 누굴 또 보러 가는 걸까?”“난들 알겠는가.”“하긴. 저 속내를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그런데 홍 내관은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겪으면 겪을수록 저 사람 간덩이는 철갑으로 만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네.”“이보게, 상열이. 홍 내관이 사람이 예사 사람인 줄 아는가.”“뭐, 내가 모르는 다른 이야기라도 있는가?”“있다뿐인가? 지금까지 자네는 홍 내관에 관한 십 분의 일도 알지 못한 것이네. 곧 나올 새로운 책에는 홍 내관이 어찌 거짓 사내로 살아야 했는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이야기가 고스란히 들어 있을 것이네.”“자네는 그걸 안단 말인가?”“이 사람, 내가 누구인가? 도 내관 아닌가. 홍 내관이 가장 믿고 신뢰하는 도 내관.”“하지만 자네는 홍 내관이 여인이었다는 것도 모르지…….”상열이 도기의 말에 토를 달려는 순간이었다.
“어?”턱을 괸 채 하늘을 올려다보던 도기가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왜 그러는가?”“별이 떨어지네.”“별이?”상열은 도기가 가리키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밝은 별똥별 하나가 서쪽 하늘을 가로지르며 떨어지고 있었다.
“또 뉘가 세상을 떠나시려나…….”낮게 읊조리던 도기가 양손을 모았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십시오.
이름 모를 영혼을 위한 기원이 그의 입속에서 새어나왔다.
* * *
깊은 밤, 어둠을 틈타 김익수가 김조순을 찾아왔다.
서안을 사이에 두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김익수를 향해 김조순이 입을 열었다.
“어찌 되었는가?”물어보는 김조순의 얼굴에 초조함이 어려 있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수원이 예서 천 리 길인가, 만 리 길인가. 어찌하여 이리 더디다는 겐가?”“사람을 보냈으니 곧 기별이 올 것입니다.”“허허. 지난번에도 그리 말하지 않았는가.”김익수는 대답 대신 탄식 같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심코 움켜쥔 손을 펴보니, 땀으로 축축했다.
흐르는 강물처럼 쉼 없이 구르고 흐르던 운명이 마지막 순간에서 예기치 못한 암초를 만난 느낌이었다.
이제 그들만 오면 대업을 이룰 수 있는데, 어찌 된 이유에선지 오래전에 도착했어야 할 사람들에게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참의영감께서 계셨더라면…….”김익수의 입에서 아쉬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만약 김윤성, 그가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 허술하게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다. 부드러운 웃음 속에 날카로운 칼끝을 숨기고 있던 사내. 어떤 일을 행할 때 소름이 끼칠 정도로 치밀했던 사람이었다.
대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보니 그의 부재가 갈수록 더더욱 크게 느껴졌다.
“찾는다는 방을 붙였으니. 살아 있든 죽었든 곧 소식이 오겠지.”김조순이 애써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 한구석에 서린 못마땅한 기색을 읽을 수 있었다.
김익수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뱀조차 제 새끼를 품는 녀석이 있다는데. 제 손자가 행방불명된 지 오래건만, 어찌 저분의 마음에 담긴 것은 애끊는 심정이 아니라 못마땅한 기색이란 말인가.
새삼 두려움을 느낀 김익수가 더욱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하오면,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김익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조순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마중을 대신했다.
은밀한 대화가 오가던 방 안으로 깊은 침묵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김익수가 물러간 뒤 내내 눈을 감고 있던 김조순은 종이를 꺼내 펼쳤다. 좀처럼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멀리서 은밀히 불러들인 사병들은 어찌하여 소식이 없단 말인가.
이번 거사에 동참한다 하였던 사람 중에도 중요한 몇이 돌연 불참을 선언하거나 소식이 불통되었다. 누구보다도 열성적으로 임했던 사람들의 돌연한 행동이 김조순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좀처럼 동요하지 않던 그의 얼굴에 잔 파문이 일었다.
“미련한 것들.”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김조순의 목소리에 짜증이 깃들었다.
겁 많고 소심한 자들. 따뜻한 봄날이 도래했는데도, 버릇대로 이불 속에 웅크릴 생각뿐이라니.
“차라리 잘 되었군. 이 기회에 무능한 자들을 솎아낼 수 있겠어.”불편한 마음을 털어내기 위해 김조순은 붓을 들었다.
종이 위를 흘러가는 붓이 큰 뜻을 풀어냈다.
그림이란 참으로 신비했다. 하얀 공간 안에 의미 없는 먹을 뿌리고, 찍고, 긋는 사이 어느새 나비가 되고, 새가 되고, 범이 되고, 천하가 되었다.
어느 그림도 작은 점부터 시작하기 마련이었다.
그 점과 선을 어떻게 긋고 뿌리냐에 따라 명품도 되고, 볼품없는 졸작도 되었다. 시작은 같으나 어찌 그리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양지차를 보였다.
사람의 운명도 그림과 다를 것이 없었다.
가슴에 품은 뜻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 또한 하늘을 나는 용이 되기도 하고, 땅바닥을 구르는 버러지가 되기도 했다.
김조순은 용을 꿈꿨다.
아무렴, 이 땅에 사내로 태어났으니, 응당 땅을 구르는 버러지보다 용을 꿈꿔야 하지 않겠는가.
그 과정이 지난하고 참혹하여, 때로 생살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는다 하여도, 좁은 못을 벗어나 구름을 굽어볼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었다.
붓에 감긴 먹이 종이 위에 풀어졌다. 엉클어진 마음도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번잡한 생각들이 하나둘 사라졌다.
그렇게 김조순이 그림에 몰두할 때였다.
“이제는 용을 그리십니까?”느닷없는 목소리가 그의 머리 위에 떨어졌다.
김조순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예기치 못했던 방해로 유연하게 이어지던 선의 흐름이 끊기고 말았다.
염원하던 눈도 새겨 넣었다. 야망과 관록이 넘치는 눈빛이 참으로 마음에 들었다. 잉어 그림이었으면 그는 이미 크게 만족하고 대소를 터트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잉어가 아닌 용이었다. 용에게는 잉어에게는 없는 것이 있었다.
구름을 가르고 천기를 읽는 뿔이 그것이었다.
그 뿔만 완성하면 되는데, 무심한 목소리가 그의 정기를 흩트려놓고 만 것이다. 몰입이 깨지니, 마음이 사라지고, 마음이 사라지니 그림의 생기마저도 없어졌다.
“누구냐?”던지듯 붓을 내려놓은 김조순이 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내 그의 앞으로 긴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김조순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