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 하루
별점10.02,334명 참여 | 댓글175
2014.11.18
이른 새벽.
궁의 담장 아래로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사람이 드문 시각이었지만 오가는 궁인들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이는 없었다.
앞서 걷는 이가 교묘히 눈에 띄지 않는 곳을 골라 걸었던 탓이었다.
“참으로 신기합니다.”장 내관의 뒤를 쫓아 걸음을 옮기던 라온이 낮게 속삭였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움직이는 장 내관의 모습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어찌 이리 사람들의 동선을 모조리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저러니 매보다 날카로운 세자저하의 눈을 피해 동궁전에서 5년을 넘게 버텨내실 수 있었겠지.
새삼 존경심이 일었다.
라온의 눈빛을 알아차린 장 내관이 뿌듯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홍 내관 아니, 홍 낭자도 피나는 노력을 한다면 내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제법 흉내는 낼 수 있을 겁니다.”장 내관의 말에 라온은 고개를 갸웃했다.
“피나는 노력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럼 장 내관님도 이런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을 하신 거란 말입니까?”“나야 워낙에 타고난 것이 있기에 아주 조금, 새털처럼 가볍게 연습을 했지요.”“결론은…… 어쨌든 연습을 하셨다는 말씀이네요.”“그렇지요.”“궁금합니다. 장 내관님은 어쩌다 이런 기술을 익히게 된 것입니까?”라온의 물음에 장 내관이 미소를 보였다.
언제나 보여주던 해맑은 미소가 아니었다. 무언가 의미가 담긴 듯한 쓸쓸한 웃음.
그 웃음 끝에 장 내관이 입을 열었다.
“홍 낭자가 역적의 자식이라는 것이 알려지고 난 뒤, 궁은 한바탕 난리가 났지요. 불온한 마음을 품고 궁에 들어온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연일 추국청에 핏물이 마르지 않았소.”“모두 저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저 때문에 죄 없는 분들이 험한 일을 당했습니다.”죄스런 마음에 라온의 어깨가 아래로 축 쳐졌다.
“분명 죄 없는 자도 있었지만, 아닌 자들도 있었소.”“네? 무슨 말씀입니까?”“이 궁에 불온한 마음을 품고 스며든 자가 진짜 있었다는 말이오.”“설마요.”라온이 못 믿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좀처럼 변함없는 장 내관의 진지한 표정에 미간을 찡그리고 말았다.
“설마…… 정말 그런 사람이 있었던 겁니까? 대체…… 대체 누가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것입니까?”물어본다고 한들 장 내관님이 알 리 없으리…….
“납니다.”“네?”내내 옴친 소리로 속삭이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목청을 높이고 말았다. 아차 싶은 마음에 서둘러 제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별다른 인기척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라온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대체, 대체 그게 무슨 말입니까? 역심을 품은 자가, 다름 아닌 장 내관님이시라뇨?”“지난 임신년의 민란으로 목이 베인 역적의 수가 수백이었소. 그리고 홍 낭자처럼 한순간에 역적의 핏줄이 되어 쫓기게 된 사람들의 수는 수천 명이 넘었지요. 그 중 대부분이 관군에게 잡혀 죽었소. 하지만 천운이든 요행이든 어찌어찌 살아남은 이도 적지 않았습니다.”“저처럼 말입니까?”“네. 홍 낭자처럼. 그리고 나처럼 말입니다.”“장 내관님……!”“내 아버지는 홍 낭자의 아버지를 도와 민란을 주동하셨다 하오.”“…….”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짐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과 같은 운명인 것을.
항상 해맑게 웃고 다녔던 그의 미소에 이처럼 무거운 운명이 걸려 있는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불평등한 세상에 반기를 든 것이 어찌 죄가 되겠소. 하지만 세상은 내 아버지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나와 어머니는 죄인의 핏줄이 되어 숨어 다녀야 했지요.”아버지를 언급할 때, 장 내관은 평소와 달리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굵은 목소리를 냈다. 남들이 뭐라고 하던 장 내관은 아버지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틀리지 않고 잘못되지 않았는데, 고개 숙일 이유도, 당당하지 못할 까닭도 없었다.
장 내관의 해맑은 모습 뒤에 숨어 있던 진실.
라온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세상이 자신에게만 야박한 줄 알았다. 운명이라는 무거운 짐에 짓눌린 사람은 저 혼자인 줄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장 내관 역시 라온과 닮은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궁에 들어오신 겁니까?”장 내관님도 힘든 생활고에 쫓겨 어쩔 수 없이 환관이 되신 겁니까?
“복수하기 위해서지요.”장 내관은 라온의 물음에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복수요?”“내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돌아가시게 만든 장본인을 내 손으로 죽이고 싶었소. 그게 힘들다면 왕실의 대(代)라도 끊어 놓으리라 결심했소. 그리 독한 마음을 품고 궁으로 들어왔지요.”라온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장 내관님. 지금 화초저하를 죽이려 궁에 들어왔다는 말씀이십니까?
장 내관을 바라보는 라온의 눈에 날카로운 경계심이 서렸다.
“아이고, 그리 노려볼 것 없어요.”장 내관이 양손을 활짝 피고는 손사래를 쳤다.
어느새 부모의 복수를 읊던 당당한 사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평소의 장 내관으로 돌아왔다.
“하지만…….”“그 사나운 마음일랑은 진즉 접었어요.”“어찌 일평생을 갈아왔던 복수의 마음을 접을 수 있단 말입니까?”라온은 쉬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에 찬 눈빛으로 장 내관을 응시했다.
“이 모든 것이 세자저하 때문이오. 세상을 바꾸려는 그분의 의지가, 백성을 자신의 몸처럼 생각하시는 그분의 마음이 내 마음을 이긴 것이요.”“정말입니까?”장 내관이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묘한 일이오. 평생 원수라 생각했던 사람의 자식이 나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니. 내가 간절히 원하고 바라던 것을 그 역시 바라고 있었다니. 그걸 알고부터는 모든 걸 내려놓았습니다.”“내려놓으셨다 하심은…….”“세자저하의 곁을 맴돌며 알게 되었지요. 정녕 내 아버지를 죽게 만든 것이 주상전하가 아니라는 것을요.”담담하게 말하는 장 내관의 목소리에서 라온은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고 끓어오르는 저릿한 격통.
복수를 포기하기까지 어찌 그리 쉬웠을까.
목숨을 걸고 궁에 들어왔던 사람이었다. 복수를 향한 그 마음이 얼마나 깊고 강했을까.
그 마음을 내려놓기까지 얼마나 격한 고통을 견뎌내야 했을까.
가슴을 죄어오는 듯한 아픈 감정이 조용조용한 목소리에 알알이 배어있었다.
라온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왕세자께선 대하면 대할수록 감탄이 절로 드는 분이시니. 행여 그분께 안 좋은 해코지를 했다간 죽어서도 편한 잠을 잘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소. 그러니 어찌 그분께 나쁜 마음을 품을 수가 있겠소. 어찌 그분께서 아끼시는 분들께 사나운 행동 할 수가 있겠소. 아이쿠, 어찌 그리 우시오.”뒤늦게 라온의 눈물을 본 장 내관이 옷소매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한 모양입니다. 귀하신 분께서 이리 함부로 슬퍼하시면 안 되는 거예요. 잊지 마세요. 홍 낭자야말로 제 복수를 해줄 사람의 유일한 안식처임을.”“미안합니다.”“뭐가 미안하오?”“전 그런 줄도 몰랐어요. 장 내관께서 그리도 아프신 줄. 그 웃음에 그리도 서러운 상처가 있는 줄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장 내관이 맑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야말로 감탄했습니다. 홍 낭자, 어찌 여인의 몸으로 그리 대담한 일을 하셨습니까? 저는 한낱 복수심에 휘둘려 인생을 허비했지만, 홍 낭자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버리려 하셨으니. 이 어찌 놀랍고 대단하지 않겠습니까?”장 내관은 라온을 향해 양 엄지를 치켜세웠다.
“홍 낭자, 정말이지 천하제일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최고의 배포와 마음씨요. 천하에 따를 사람이 없어요. 아마 세자저하께서도 그런 홍 낭자가 좋으셨겠지요. 그러니 그리 가까이 두시는 것이겠지요. 이제 그만 우세요. 자꾸 그리 우시니, 제가 관한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아닙니다. 그쳤습니다. 이젠…… 그쳤어요.”라온은 손등으로 슥슥 눈물 자국을 지웠다.
말갛게 웃는 그녀를 보며 장 내관 역시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예쁩니다. 그리 웃으시니 비로소 제가 아는 홍 내관…… 아니, 홍 낭자가 맞으신 듯합니다.”그 후로 두 사람은 푸른 새벽길을 조심조심 걸었다.
서로 말은 없었지만,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로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 했다. 같은 처지였다는 이유만으로 헤어졌던 형제를 다시 만난 것처럼 기쁘고 또 반가웠다.
“자, 이제 다 왔소이다.”얼마나 걸었을까?
장 내관의 등 뒤로 작은 나무문이 보였다. 궁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었다. 조심스레 문을 연 장 내관이 라온에게 눈짓했다.
“홍 낭자, 서둘러야 하오.”마지못해 문밖으로 나간 라온이 장 내관을 돌아보았다.
“장 내관님.”“네.”“이제 복수는 접으신 것이지요?”마지막으로 다짐을 받아놓듯 라온이 물었다.
예의 해맑은 표정으로 웃던 장 내관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요.”“네? 하지만 좀 전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세자저하께 품은 나쁜 마음을 접으셨다고요.”“당연하지요. 내 진짜 원수를 찾았는데 그분을 원망할 이유가 없질 않겠소.”“진짜 원수?”“이 나라를 이리 만든 장본인들. 내 아버지를 역적으로 만든 자들. 나는 그자들에게 복수할 거요.”“그럼 백운회의 일원이 되신 이유도…….”“당연히 그자들과 싸우기 위함이지요.”“그자들과 싸우기 위해…….”라온은 저 멀리 아침 햇살이 내려앉는 중희당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시선을 내려 장 내관을 응시했다.
언제나 해맑게만 보이던 그의 웃음 속에 아비의 복수를 위해 그림자처럼 숨어 지내던 그의 삶이, 그의 의지가 느껴졌다.
문득 라온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문턱을 사이에 두고 궁 밖에서 서 있던 그녀가 다시 궁 안으로 걸음을 옮긴 것은 찰나 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느닷없는 일에 장 내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홍 낭자, 어찌 다시 궁으로 들어오는 게요?”“생각해보니 깜박 잊은 것이 있어서요.”말과 함께 라온은 왔던 길을 되돌아 걷기 시작했다.
“깜빡 잊은 것이라니? 무엇입니까? 홍 내관. 아니, 홍 낭자. 어딜 가는 것이오?”“제가 잊은 것이 있다니까요.”“아, 이러면 안 되는데. 저하께서 꼭 궁 밖으로 나가게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이러면 아니 되는데. 정말 이러면 안 되는데.”울상을 한 장 내관이 라온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랐다.
발목을 스치는 바람이 아직은 서늘한 인시말(寅時末:새벽 5시).
궁의 하루가 시작되는 가장 부산한 때였다.
* * *
방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제법 깊었다.
그러나 동궁전의 시간은 멈춰버린 듯했다. 산 자의 무덤처럼 고요한 영의 처소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섰다.
정약용이었다.
“저하.”그의 나직한 부름에 영이 감은 눈을 떴다.
잠시 에두르는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던 영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정약용이 서둘러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사람은 무사히 궁을 나간 것이오?”“장 내관에게 길 안내를 맡겼으니 별 탈 없이 나갔을 것입니다.”“다행이오.”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거운 침묵을 깨며 영이 입을 열었다.
“그들은 지금 어찌하고 있소?”“저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연일 한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마음 같아서는 잔치를 하고 싶으나, 남의 눈치가 보여 대놓고 하지 못하는 것이겠지.”“들리는 말에 의하면 앞으로의 일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는 듯합니다.”“그렇군요.”벌써부터 왕세자가 죽은 이후의 천하를 넘보는 신하들이라니.
자신의 예측이 맞아떨어지는 것이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하였다. 그들 역시 나의 백성일진대…….
영의 눈치를 살피던 정약용이 어려운 질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마음의 결정은 하시었습니까?”“…….”“저하.”“간밤에 아바마마께서 나를 찾아오시었소.”“주상전하께서 말씀이옵니까?”“내게 이리 말씀하시더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비 노릇을 할 터이니 원하는 대로 살라고 말이오. 생각해보니 기억이 닿는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내가 아닌 왕세자로만 살아온 듯하오. 단 한 번도 나를 위해 살아왔던 적이 없었소.”“저하…….”정약용은 차마 말끝을 잇지 못했다.
“하오면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아바마마의 분부 받자올 생각이오. 앞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볼까 하오.”영의 눈 속에 단단한 결의가 들어찼다.
그 눈빛을 읽은 정약용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다시 물었다.
“정녕, 그리하셔야 하겠습니까?”“이 자리에 누워 있는 동안 내내 생각해 보았지만, 이 방법밖에는 없소. 궁 안팎에서 나의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자들과 싸워 이 나라를 지켜내기 위해선 이 방법이 최선인 듯하오. 그리고…….”영은 정약용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의 온전한 사내가 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오.”
사시초(巳時初: 아침 9시).
먼 데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찬란한 봄볕에 풀잎에 맺힌 이슬이 자취를 감추었다. 바람에 제법 포근한 기운이 들어찼다.
* * *
계동 김익수의 높은 담벼락 너머로 왁자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김익수의 사랑채 대청마루에는 기름진 잔치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음식상 주위에는 대전에 있어야 할 조정 대신들이 각기 한 명씩 기생을 낀 채 흥청거렸다.
가장 상석에 앉은 김익수는 불콰한 얼굴로 술잔을 내밀었다.
“뭐하느냐? 술잔이 비질 않느냐?”그의 재촉에 시중을 들던 기생 애월이 농익은 미소를 흘렸다.
“천천히 드시어요. 그러다 체하시겠어요.”“하하하, 즐거운 마음으로 마시는 술이니라. 요즘 같아서는 돌도 씹어 먹겠구나.”“무에 좋은 일이라도 있으시어요?”“있다마다. 아니, 이제 곧 있을 게다.”김익수는 궁궐이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게 뭘까? 쇤네가 알면 안 되는 것이어요?”은근슬쩍 김익수의 어깨에 제 가슴을 비비던 애월이 야살을 떨었다.
“요것, 하는 짓이 아주 여우가 따로 없구나.”“곰보다 여우가 낫다 하질 않습니까?”“하하하, 네 말이 옳다.”휙, 애월의 허리춤을 힘껏 잡아당긴 김익수는 음흉한 눈길로 저고리 앞섶을 더듬었다.
“어머나, 대감. 아직 날도 저물지 않았사와요.”“그게 무에 대수더냐?”“저 같은 계집이야 아무렇지 않겠지만, 대감께선 문제가 되질 않겠어요? 사람들이 흉을 본답니다.”“흥, 제깟 것들이 감히 흉이나 볼 수 있겠느냐? 이제 곧 세상이 내 발아래 놓일 것인데. 감히 뉘가 나서서 나를 흉본단 말이냐?”“세상이 대감의 발아래 놓인다고 하시었어요?”“그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확신하는 듯한 김익수의 단정에 애월이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호호호, 이 애월이가 귀한 분을 뫼시게 되었군요.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 훗날 세상을 가진 다음에 쇤네를 잊으시면 아니 되어요.”“글쎄다. 나이가 들어선지 요즘은 어제 일도 깜빡깜빡하니…….”“뭐여요?”김익수의 말에 애월이 앵돌아진 모습으로 몸을 틀었다.
순식간에 그의 품을 벗어난 애월의 모습은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요고요고. 이 발칙한 것을 보았나. 네가 감히 내게 등을 돌리는 것이냐?”“하룻밤이면 잊힐 계집인데 마음을 주어 무얼 하겠나이까?”“성심을 다하면 될 것이 아니더냐?”“하오면 쇤네를 기억해 주실 것이어요?”그때였다.
한쪽 옆에서 두 사람의 행태를 지켜보던 형조판서가 술잔을 기울이며 끼어들었다.
“애월아, 그분 말씀 믿지 마라.”“그게 무슨 말씀이어요?”“지난밤에 품었던 미금이에게도 그리 말씀하신 분이시니.”“어허. 형판, 이럴 거요?”방해를 받은 김익수가 형판에게 손짓을 했다.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애월이 김익수의 팔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영웅은 호색이라지요. 이 애월이, 영웅을 뫼시게 되어 광영입니다.”“뭐라? 영웅?”입 안의 혀처럼 구는 애월의 모습에 김익수가 웃음을 터트렸다.
지켜보던 자들의 입에서도 너털웃음이 새어나왔다.
“하하하, 병판 대감. 간만에 계집다운 계집을 품게 생겼습니다.”“형판, 어찌 부러운 눈빛이오?”“그러는 대감께서도 만만치가 않습니다.”농지거리가 오가는 사이 애월이 김익수를 사랑채로 끌어당겼다.
그녀를 바라보는 김익수의 눈에 탐욕이 일었다.
어느새 시간은 유시(酉時:오후 5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늘 귀퉁이로 노을이 붉게 타올랐다.
아스라한 붉은빛은 금세 천지를 뒤덮었다.
* * *
사위가 짙은 어둠으로 가득한 시각.
김조순의 집으로 은밀한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그림자는 익숙한 듯 김조순의 사랑채로 걸음을 옮겼다.
“대감마님.”낮은 읊조림에 사랑채의 동창이 비스듬히 열렸다.
“알아보라고 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대감마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그래?”김조순의 입가에 차가운 냉소가 피어올랐다.
하마터면 감쪽같이 속을 뻔하였구나.
왕세자의 속임수에 깜빡 넘어갈 뻔했다.
“역시 우리 저하시로구나.”“네.”“하여, 그분께선 어찌하고 있더냐?”“은밀히 외척들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이런.”벌써부터 잔치를 벌이고 있는 외척들의 앞날이 훤히 보였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방에서 불러들인 사병들은 어디까지 왔다더냐?”“곧 수원성에서 출발할 예정이라는 기별이옵니다.”“그래?”이미 엎질러진 물.
여기서 멈춘다면 언제 다시 일을 도모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김조순은 서안에 놓인 작은 봉투를 동창 밖으로 던졌다.
“이번에는 실수가 없어야 한다.”“명심하겠나이다.”그림자는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그리고 은밀하게 사라졌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동창을 닫은 김조순은 바닥에 놓인 그림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완성하지 못한 잉어 그림.
잔뜩 미간을 찡그리던 그는 돌연 공들여 그린 그림을 사납게 구겨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새로운 종이를 펼친 김조순이 다시 붓을 잡았다.
유려하게 움직이는 그의 붓끝에서 새로운 그림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연못 밖을 차고 나오는 잉어 그림이 아닌 하늘을 노니는 용을 그린 그림이었다.
술시(戌時: 저녁 7시), 하루를 끝낸 만물이 조용히 제 둥지를 찾아갔다.
낮이 밤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었다. 세상의 더러움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