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라온에게만 허락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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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4
몽혼한 꿈 자락은 언제나 사나웠다.
언제부터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힘껏 맞서 싸우다 눈을 뜨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 영을 깨운 것은 사나운 꿈자리가 아니었다.
머리맡에 느껴지는 인기척.
누구지? 어의인가? 그것도 아니면 빈궁?
감고 있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영은 궁금증에 휩싸였다.
그러나 이내 그의 미간에 보일 듯 말 듯한 주름이 그려졌다.
무람없이 그의 곁자리를 파고드는 체온.
감히……!
저도 모르게 눈을 뜨려던 찰나.
문득, 그의 뺨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액체가 느껴졌다.
눈물.
그것은 분명 눈물이었다.
대체 누가, 왜?
각혈한 채 자리보전하고 누운 지 열사흘. 이 궁에서 자신을 위해 이토록 뜨거운 눈물을 흘릴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왕세자란 존재는 두려워하고 경외할 대상이었지, 이리 걱정하고 안쓰러워할 상대는 아니었던 까닭이었다.
영과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그것은 영과 부부의 연을 맺은 세자빈과도 마찬가지였다.
하연은 영을 염려하였으나 언제나 일정한 거리, 그 이상은 침범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으리라.
아쉽거나 섭섭했던 적은 없었다. 되레 지금처럼 허물없이 다가온 존재가 영은 내심 언짢았다.
동시에 의문도 들었다.
대체 뉘이기에 이리 겁 없이 행동한단 말인가? 대체 누가……!
영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하.”얼굴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과 떨리는 음성.
여린 들꽃처럼 초록의 생기를 머금고 있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깨닫는 순간, 영의 미간에 그려졌던 주름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라온아, 홍라온. 정말 너더냐? 정말 네가 온 것이더냐?’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영의 숨이 한순간 멈췄다.
너무도 생생한 감각에 전신에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그럴 리 없었다.
라온이 이곳에 있을 리 없다.
지금쯤 그녀는 이곳 한양이 아니라 멀고 먼 전라도 강진에 있는 안가에 몸을 숨기고 있을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러니 이건 꿈이다.
켜켜이 쌓인 그리움이 만들어 낸 신기루.
그래도 좋았다. 비록 꿈이라 해도 바로 곁에서 느껴지는 라온의 체온이, 그를 위해 흘리는 그녀의 눈물이 한없이 좋았다.
열사흘 전.
처음 피를 토하고 쓰러졌을 때는 단순한 과로로 인한 병환으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건강했던 그가 갑자기 각혈하고 쓰러진 이유. 다름 아닌 몸속에 조금씩 쌓여가던 독 때문이었다.
다행히 그의 곁에 병과 약초를 다스리는데 능통한 다산 정약용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원인조차 모른 채 죽어갈 뻔했다.
궁궐이라는 완벽한 고치 속에서도 영은 안전하지 못했다.
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조용하고 은밀한 공격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두운 구석에서 느닷없이 이루어지는 기습이나 역모보다도 오히려 더 치명적이고 악독한 계책.
누가 적인지, 누가 진정한 아군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의 심중에 들어있는 칼끝이 과연 어디까지 뻗칠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하여, 제법 사나운 생각을 했다.
위기를 기회로.
적의 은밀한 공격을 역이용할 묘안을 떠올렸다.
다행히 그의 곁엔 믿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라온으로 인해 백운회 내부의 썩은 곳을 도려낸 것은 오히려 천운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라온이 아니었다면…….
그녀로 인해 백운회 내부에 독버섯처럼 자란 세력을 떼어내지 못했다면,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방법이었다.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된 것은 다산의 지식과 지혜였다.
다산은 제일 먼저 그의 몸에 쌓인 독을 씻어냈다. 선생이 처방한 탕약은 물 한 모금 마실 수 없을 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덕분에 영의 안색은 나날이 창백해져 갔다. 하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건강했다.
왕세자가 앓아누웠다는 소식이 입에서 입을 통해 외부로 새어나갔다.
영을 진정으로 아꼈던 사람들은 하늘과 땅에, 그리고 바다에 엎드려 그의 안녕을 기원했다.
그러나 간사한 자들은 각자의 이해타산을 셈하기 시작했다. 잠시 뜸했던 외척들의 문턱이 드나드는 사람들로 다시 닳았다.
백운회의 활약으로 영은 자리에 누운 채로 궁궐 안팎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에게 독을 먹인 자들의 정체마저도 알게 되었다.
외척들.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와 맞서고 있던 외조부의 무서운 욕심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영은 지독한 허무를 느껴야만 했다.
혈육의 배신.
아니, 배신이랄 수도 없으려나. 처음부터 그분과는 걷는 길이 달랐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외손자에게 이런 짓까지 할 수 있을까.
입맛이 쓰디썼다.
그러나 이내 영은 자신의 순진한 생각에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본디 권력이란, 왕의 자리란 피의 제단 위에 세워지는 것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요하다면 제 아들마저도 거리낌 없이 죽일 수 있는 것이 왕이고, 권력이었다.
하물며 외손자쯤이야…….
새삼 자신이 앉아있는 자리가 얼마나 차갑고 비정한 자리인지 깨달았다.
약한 자는 밟히고 강자라 해도 빈틈을 보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리.
남들보다 더 강하고, 더 완벽해야 했다.
비정하고 냉혹한 저들보다 더 차가워져야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그래야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곪아 문드러진 종기를 긁어내야 새살이 돋아날 수 있는 법. 온몸을 파고드는 종기를 어떻게든 긁어내야 했다.
그것을 긁어내기 전에는 절대 쓰러질 수 없다. 호시탐탐 왕의 자리를, 이 나라를 노리는 자들이 있는 한 무너질 수 없었다.
그들이 감히 권력을 탐할 수 없도록 강건해지리라.
마음속에 더러운 탐욕을 품은 자들을 잡기 위해 영은 덫을 놓았다. 그리고 그들은 영이 원하는 곳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가슴을 짓누르는 지독한 공허는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갑자기 일평생 살아왔던 궁이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졌다.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무얼 해도 즐겁지가 않았다. 그 어떤 것을 먹어도 맛을 음미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마침내 그 연유를 알았다.
외로웠던 것이다.
그리웠던 것이다.
곁을 지켜주던 따뜻한 체온이, 자신을 위해 눈물 흘리는 라온이 없는 세상은 영에겐 그저 의미 없는 잿더미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꿈을 꾸는 것이리라.
영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대로 영영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행여 꿈이 깰까 싶어 그는 감은 눈을 더욱 힘껏 감았다.
그때였다.
“어찌 이리 수척해진 겁니까? 보나 마나 제대로 잠도 아니 주무셨겠지요. 분명 수라도 계속 거르셨을 테고요.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제가 저하 때문에 못 살겠습니다. 어찌 이리 사람을 걱정하게 하시는 겁니까? 한 나라의 왕세자라는 분께서 이리 누워만 계시면 어떡합니까? 저도 참 바보입니다. 아무리 당부한다고 하여도 고분고분 말씀 들으실 분이 아니신데.”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
또다시 뺨을 적시는 뜨거운 눈물.
꿈이라 생각하기에는 너무 생생했다. 그리움이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하기엔 그 울림이 지독하게 깊고 무거웠다.
영은 천천히, 아주 느리게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울고 있는 여인이 들어왔다.
그리고 점점 선명해지는 눈동자에 한 사람의 모습이 또렷이 맺혔다.
라온이었다.
꿈이…… 아니었다.
너무도 선명한 저 얼굴은 정녕코 꿈이 아니었다.
‘네가 여긴 어떻게…….’왈칵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꽉 채웠다.
동시에 심장을 죄는 듯한 근심도 떠올랐다.
너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된다. 이곳은 위험해. 행여 너를 보기라도 한다면…….
당장에라도 라온을 궁 밖으로 보내야 했다. 누군가 훔쳐보는 눈이 있기 전에 그녀를 보내야 한다. 그것이 옳은 것이다.
하지만…….
보내고 싶지 않다.
아니, 보내기 싫었다.
그때, 물기 섞인 라온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러시면 제가 어찌 떠납니까? 이리 약도 안 드시고 고집을 부리시면 제가 어찌 마음 편히 살 수가 있겠습니까?”“그리 걱정되면 안 떠나면 되질 않느냐?”“저도 마음은 굴뚝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겐 저마다 사정이란…… 저하?”한탄하듯 중얼거리던 라온이 문득 말을 멈췄다.
순간, 영은 라온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겼다.
울지 마라, 울지 마. 나는 괜찮으니 울지 마라.
작은 몸이 맥없이 그의 가슴팍에 무너졌다. 물기 흥건한 그녀의 눈빛이 그의 눈을 아프게 찔러왔다.
그 눈을 보니 꽉 막혔던 숨통이 이제야 트였다.
살 것 같았다.
이제야 살 이유를 찾았다.
이제야 살아낼 이유를 깨달았다.
너였다.
내가 살아야 할 이유도, 또한 내가 죽을 단 하나의 이유.
바로 홍라온, 너였다.
영은 파르르 떨리는 라온의 입술에 제 입술을 겹쳤다.
* * *
들이마시는 달콤한 숨결에 살아있는 생생한 삶의 생기가 가득 찼다.
죄고, 풀고, 당기고, 미는 아련한 속삭임에 신경이 느른해졌다.
이대로 풀썩 바닥으로 아스라이 사라져버릴 것 같아 라온은 영의 옷자락을 단단히 바투 잡았다.
“저하.”“…….”“어디에도 가지 마십시오. 아니, 보내지 않을 겁니다.”저하께서 사라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대로 영영 제 곁을 떠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가지 않는다. 그러니 너 역시 내 곁에 있어라.” “네. 네, 그럴 것입니다.”등 뒤로 영의 단단한 팔이 느껴졌다.
그의 결박이, 오롯이 자신만을 바라보는 그의 품속에서 라온은 비로소 웃을 수 있었다.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비록 찰나의 순간이라 하여도…… 저하의 곁에 머물 것입니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제 자리는 저하의 옆이라는 것을요.
저하의 곁에서만 제대로 숨을 쉬고 살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흘렀다.
얼마나 흘렀을까?
결코, 끝내고 싶지 않은 길고 긴 입맞춤이 끝났다.
한몸인 듯 서로를 품고 있던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희미한 불빛에 영의 얼굴이 보였다. 안색은 창백했으니 형형한 눈빛은 여전했다.
“저하, 어찌 된 겁니까? 정말…… 괜찮으십니까?”“괜찮다고 하질 않느냐?”“하지만 어의가 하는 말이 자꾸만 약을 토하신다고…….”“먹어선 안 되는 것을 자꾸 먹이니 토할 수밖에.”영의 의미심장한 말에 라온은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그건 차차 알려주마. 그보다 넌 어찌 된 것이냐? 어찌하여 네가 궁에 있는 것이냐? 그리고…….”영의 시선이 훑는 듯 라온의 차림새를 더듬었다. 생각시 복색을 한 그녀가 신기한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복색은 다 무어냐?”“저도 차차 설명을…… 아얏!”속내를 알려주지 않는 영이 조금 야속해 나름 새침을 떨자니 영의 가차 없는 응징이 이어졌다.
영에게 두 볼이 잡힌 라온은 울상을 지었다.
“저하는 되면서 왜 저는 안 되는 겁니까?”“이런 맹랑한 녀석을 보았나. 어디서 왕세자와 맞먹으려 드는 것이냐?”“언제는 우리 두 사람, 평등하다고 하시더니. 불리하면 꼭 왕세자 운운하십니다.”“억울하면 다음 생에선 네가 왕세자로 태어나면 되겠구나.”“꼭 그럴 겁니다.”영을 밉지 않게 흘겨보던 라온이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다음 생에 제가 왕세자가 되면…….”그런데 왕세자가 되면 무얼 한다?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때 영이 라온의 볼을 놓으며 말을 이었다.
“왕세자가 되어 무얼 할지는 다음 생에서 생각하고. 말해보아라. 대체 궁엔 어찌하여 되돌아온 것이냐?”“아참! 그게…….”머뭇거리자니 영이 눈매를 매섭게 치떴다.
딴에는 눈에 힘을 준 채 영과 시선을 마주하던 라온은 결국 고개를 떨어트렸다.
“고민 상담하러 왔습니다.”“고민 상담?”“네.”“대체 뉘의 고민 상담을 하기에 겁 없이 궁에 들어온 것이냐?”“그런 분이 있습니다.”“그런 분?”“더는 묻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리 보셔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라온의 말에 날카롭게 날을 세우던 영이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바마마시로군.”도망 중인 죄인을 감히 궁에 들일 수 있는 분, 임금밖에는 없었다.
“어찌 아셨습니까?”반사적으로 라온이 되물었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뒤늦게 제 실수를 깨달은 라온이 황급히 입을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하여, 아바마마께서는 무슨 고민이 있으시기에 너를 부른 것이더냐?”“모르겠습니다.”“몰라?”“네. 정말 모르겠습니다. 딱히 어떤 고민을 털어놓으시진 않으셨습니다.”“그래?”“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뭐라 말씀하시었는데?”“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잘 부탁한다고도 하셨습니다.”“고맙고 잘 부탁한다?”문득 영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라온이 영의 처소로 오기 반 시진 전.
왕께서 영을 찾아왔다. 잠시 눈을 감고 있는 아들의 곁을 지키던 임금께선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영아, 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너에게 아비 노릇 한번 하고 싶구나. 그러니 너도 이제부터 네가 하고픈 대로하면 될 것이다.’처음에는 무슨 말씀인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라온을 만난 지금, 그 말 속에 숨어 있는 저의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라온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언제나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서 있던 왕께서 어떤 결심을 하시게 된 것이 틀림없었다.
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라온을 응시했다.
그 누구의 말로도 움직이지 않던 분이시다. 심지어 자식인 자신의 간청에도 할 수 없노라 고개만 젓던 분.
그런 분의 마음을 이 여인이 움직였다.
참으로 묘한 사람, 대체 어찌한 걸까?
티끌 하나 없는 맑은 눈빛 때문일까?
라온은 한순간에 상대의 마음 벽을 허물어 버리는 재주가 있었다.
이 머릿속에 대체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이 마음속에는…….
이 작은 머리와 마음에 오직 자신만을 채워놓고 싶은 열망이 영을 뒤흔들었다. 그가 진실로 원하는 단 한 가지가 이 여인이듯, 라온이 원하는 단 하나의 사내이고 싶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라온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영과 시선을 맞췄다.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던 영이 불현듯 고개를 내렸다.
“저하, 왜 이러십니까?”“몰라 묻는 것이냐?”잠긴 듯한 목소리로 묻는 영의 물음에 라온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습니다.”안다. 알고 있다.
화초저하께서 저런 표정을 지으실 때 무엇을 생각하시는지.
그의 눈 속에 들어찬 열망이 가감 없이 라온에게 느껴졌다.
영의 아름다운 입술은 어느새 습관처럼 라온의 입술 위를 겹쳐왔다.
내뿜는 날숨이 거칠었다.
잇새를 간질이는 뜨거운 숨결.
위험해.
라온은 잘게 몸을 떨었다.
저도 모르게 처소 밖의 사정을 살피며 라온이 말했다.
“저하, 이러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왕세자께서는 크게 편찮으신 분. 적어도 외부엔 그렇게 알려진 상태였다.
그런 분께서 이러시는 걸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아니, 어쩌면 실제로 많이 아프신데도 내게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 이러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제대로 미음 한술 뜨지 않으셨다던 분께서 어디서 이런 힘이 나는 것일까?
영에게서 주춤 한 걸음 물러서던 라온은 울상을 짓고 말았다.
달아나는 중간 그에게 무릎이 잡혀 휙, 끌어당겨졌던 까닭이었다.
“저하, 이러지 마십시오.”“왜?”“누가 보면 어쩌려고요?”“보지 않는다. 아무도 못 봐. 지금쯤 최 내관이 눈에 불을 켜고 처소 주위를 물리고 있을 터. 그러니 넌 아무 걱정 마라.”“그래도…….”웅얼거리던 라온의 목소리는 그대로 영의 입속으로 스며들었다.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던 작은 주먹은 한순간에 포박되었다.
동시에 해일처럼 밀려오는 거친 힘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던 라온은 뒤로 휘청 넘어지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영은 라온을 놓지 않았다.
마치 어미 손을 부여잡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라온을 품에 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 * *
세자저하의 처소 안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 앞을 지키던 송 내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 내관님.”“뭔가?”“좀 전부터 저하의 처소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송 내관의 말에 최 내관은 연신 헛기침을 흘렸다.
“흠흠. 아무래도 저하께서 많이 불편하신 듯하네.”“저런. 대체 얼마나 불편하시기에…….”처소 안을 바라보는 송 내관의 눈 속에 걱정이 가득 들어찼다.
“최 내관님, 아무래도 어의영감을 불러야 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저하께서 어의도 귀찮다 물리셨다네.”“하지만 저리 힘들어하시는데. 들어보십시오. 신음이 짙은 것이, 저하께서 보통 힘드신 것이 아닌 듯합니다.”송 내관은 당장에라도 동궁전 밖으로 달려 나갈 듯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저하께서 잠시 눈 좀 붙이시겠다 하셨네. 아무도 귀찮게 하지 말라 하셨으니, 멀리 물러가 있게.”어찌 이리 경망스러운지. 어찌 하나같이 우리 저하를 가만히 버려두질 않는 것인지.
최 내관은 송 내관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하오나…….”“어허! 아무도 안으로 들이지 말라는 저하의 엄명이 있었다고 하질 않았는가. 자네, 번잡스러우니 처소 밖으로 나가 있게나.”“최 내관님.”“내 말 못 들었는가?”“아, 알겠습니다.”최 내관의 불호령에 송 내관은 목을 움츠린 채 전각 밖으로 물러났다.
“자네들도 모두 물러가 있으시게나.”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지밀나인들까지 밖으로 물린 최 내관은 근심 가득한 눈으로 처소 문을 응시했다.
“어이할까, 어이할까. 우리 저하를 어이할까. 잠시도 쉬지 않고 신음하시는 걸 보니, 편찮으셔도 많이 편찮으신 듯하구나.”라온이 곁에 있음에도 저하의 고통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처소 안의 사정을 오해한 최 내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금방이라도 꺼질 듯 수심 가득한 표정의 내관은 그렇게 날이 밝을 때까지 홀로 처소 앞을 지켰다.
* * *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안타깝도록 짧았다.
문밖으로 푸른 새벽이 스며들었다.
먼 데서 느껴지던 최 내관의 인기척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서릿발 같은 왕세자의 위세에 차마 제대로 아뢰지 못했지만 늙은 내관은 연신 헤어질 시각임을 알려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은 좀처럼 이불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라온을 끌어 앉은 채 그는 그녀의 작은 어깨를 얼굴을 묻었다.
그립도록 아련한 향기.
아득하도록 따뜻한 체온.
놓아주고 싶지 않다. 보내기 싫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곧 궁은 혼란에 휩싸일 것이고 그만큼 위험해지리라. 이런 곳에 라온을 머물게 할 수는 없었다.
영은 여전히 타오르는 정염의 불꽃을 애써 꺼트렸다.
“홍라온. 라온아.”“네, 저하.”“이제 그만…….”잠시 말을 멈춘 채 낮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다잡은 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만 너는 가야 한다.”라온의 머리가 아래로 기울여 졌다.
“꼭 가야 합니까?”아니 가면 안 됩니까?
속내가 훤히 드러나는 몸짓에 영의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허물어진 마음을 단단히 한 영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가야 한다.”“화초저하와 함께하고 싶습니다.”저하 홀로 두고 궁을 나갈 수는 없습니다.
“라온아.”영은 제 앞에서 처음으로 투정부리는 라온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곧 네게로 갈 것이다. 그러니 기다려다오.”“정말 오실 겁니까?”“왕세자가 괜한 말 하는 것 봤느냐?”“못 봤습니다. 아니, 행여 보았다고 해도 저는 못 본 겁니다. 그러니 그 약조 지키셔야 합니다.”“그래. 그러니 너는 나를 믿고 기다리면 되는 것이다. 고운 옷 입고 기다려다오.”“알겠습니다. 저하 말씀대로 고운 치마 입고 기다릴 것입니다.”행여 오지 않으신다면…… 제가 저하께 갈 겁니다.
영을 향해 돌아누운 라온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손끝으로 영의 얼굴을 더듬어 내려갔다.
짙은 눈썹, 사내다운 콧날, 여린 꽃잎처럼 한없이 부드러운 입술.
눈 속에, 심장에, 기억의 마디마디에 그 모습을 각인시킨다.
이제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영의 모습이 선명했다.
만족한 듯 해사한 미소를 입가에 짓던 라온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합니다.”수줍은 고백이 영의 심장에 파문을 일으켰다.
반짝이는 빛무리가 전신을 간질이는 듯 연신 따뜻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이윽고 영의 입에서도 주문 같은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오직 라온에게만 허락된 말.
“사랑합니다.”다른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마음.
이제 막, 말을 배운 아이처럼 두 사람은 오직 이 한마디만을 서로의 귓가에 속삭였다.
행복한 충만함이 영의 마음을, 라온의 심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순조 30년, 푸른달 초닷새(5월 5일)
운명의 날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