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괜찮다, 괜찮다
별점10.02,839명 참여 | 댓글328
2014.11.11
“며칠 사이 수척해지셨습니다.”조만영은 여식의 안색을 살피며 말문을 열었다.
“도통 잘 드시지 못하신다니요?”“저하께서 저리 계시는데 제가 어찌 음식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하연이 날숨과 함께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옥체라도 상하시면 어찌하려 그러십니까?”“걱정하지 마시어요. 그보다 어머니는 요즘 어찌 지내십니까?”“혁이 처가 엊그제 몸을 풀었습니다.”집안에 새로운 아이가 태어났다는 경사스러운 소식에 하연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이는 건강합니까? 새언니는요?”“아이도 그리고 그 어미도 무탈합니다.”“다행입니다. 정말 장한 일을 하였어요. 이번에 몇 째지요?”“다섯째입니다.”“그렇군요. 집안의 경사입니다.”하연이 함박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끄덕거릴 때였다.
“마마, 빈궁마마. 쇤네 한 상궁이옵니다.”문밖에서 들려온 한 상궁의 목소리에 하연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무슨 일이냐? 혹여 세자저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냐?” 하연은 방으로 들어서는 한 상궁에게 다그치듯 물었다.
“저하께옵서 이제는 물조차 넘기시지 못하신다고 하옵니다. 저녁에도 탕제를 올렸건만. 몇 모금 마시지도 못하시고 모두 토하셨다 하옵니다.”“아아. 이 노릇을 어찌할까.”하연의 한숨이 깊어졌다.
약을 마셔야 병세에도 차도를 보이련만.
이제는 탕제조차 마시지 못할 정도라 하니.
그러다 문득 하연이 한 상궁에게 시선을 던졌다. 평소라면 뒤로 물러났을 한 상궁이 어쩐 일인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할 말이라도 있는 것이냐?”하연의 물음에 한 상궁은 대답 대신 조만영을 건너보았다.
“아버님께 무얼 숨기겠느냐. 말해보아라. 무엇이냐?”“아뢰옵기 황공하오나…….”안심시키는 하연의 말에도 한 상궁은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어허! 무슨 일이냐 묻질 않느냐?”하연이 재촉했다.
그제야 달싹거리던 한 상궁의 입술이 열렸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빈궁마마. 지금 궁 안에 해괴한 소문이 돌고 있사옵니다.”“해괴한 소문이라니?”“그것이…….”다시 한 상궁이 말끝을 늘이자 하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지레 놀란 한 상궁이 어깨를 움츠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입에 담기도 해괴한 일이옵니다.”“말해보라.”“세자저하의 병환이 단순한 병증이 아니라는 소문이 궁 안에 자자하옵니다.”“그게 무슨 말이더냐? 단순한 병증이 아니라니? 그럼 무어란 말이더냐?”무에 하기 어려운 말을 하려는 듯한 상궁은 조만영과 하연의 안색을 한참을 번갈아 살폈다.
“얼마 전, 동궁전 수라간의 어린 나인이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 일이 있었사옵니다.”“뭐라? 피를 토했어?”하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전해 듣기로는 그 병증이 흡사 세자저하와 비슷하였다고 하옵니다.”“그럴 리가 없질 않으냐. 저하의 병증은 기망이라 하질 않았더냐. 그 병이 전염되는 것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어린 나인이 같은 증세를 보인단 말이더냐. 하여, 그 아이는 어찌 되었느냐?”“사라졌사옵니다.”“사라져?”“네. 사라졌다 하옵니다. 같은 처소를 쓰는 나인이 분명 숨통이 붙어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하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다 돌아와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합니다.”“궁 안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더냐?”“궁을 이 잡듯 훑었지만 그 아이를 본 자가 없사옵니다.”“해괴하구나.”서안 위에 올려진 하연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무언가 그녀가 알지 못하는 무서운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한 상궁이 그녀의 추측에 불길을 덧댔다.
“더 이상한 것은 죽은 나인이 즐겨 먹던 것이옵니다.”“즐겨 먹던 것?”“네. 워낙에 먹기를 좋아하던 나인이 평소 작은 단지에 든 것을 가래떡에 찍어 먹고는 했다 하옵니다. 헌데 나인이 사라지던 날, 그것도 사라졌다고 하옵니…….”한 상궁이 말을 끝맺기 직전.
쾅!
조만영이 별안간 바닥을 힘껏 내리쳤다.
놀란 한 상궁과 하연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조만영은 찌를 듯 날카로운 눈매로 한 상궁을 노려보았다.
“지금 뭐하는 짓인가?”“대, 대감.”“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삿된 말을 입에 담는 게야?”“제 말이 아니라 궁 안에 떠도는…….”“어허. 이 사람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가?”조만영의 호된 호통에 한 상궁은 서둘러 입을 다물고 머리를 조아렸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괴이한 소문으로 우리 빈궁마마의 총기를 흩트리시려거든 썩 물러가게.”조만영의 언짢은 표정에 한 상궁은 울상이 되었다.
주춤주춤 빈궁의 처소를 나서는 그녀의 등 뒤로 조만영의 혀 차는 소리가 따라붙었다.
“아버님, 어찌 그러셔요?”하연은 한 상궁을 쫓아낸 조만영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만약 한 상궁의 말이 사실이라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왕세자에게 위해를 가하고 있음을 의심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의심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하연의 마음이 급해졌다.
“아닙니다. 이럴 때가 아니라 소문을 소상히 조사해 봐야겠습니다.”하연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빈궁마마, 어딜 가시려고요?”“중전마마를 찾아뵈어야겠습니다. 세자저하의 안위와 관련한 중차대한 일입니다. 서둘러 가야…….”“하지 마십시오.”방을 가로지르는 하연의 등 뒤로 조만영의 목소리가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 * *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무에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어 하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향해 조만영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였습니다.”“어째서요?”“지금 그리 궁을 휘저어서는 절대 아니 됩니다. 세자빈마마께서 그리 하시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되레 방해가 될 것입니다.”“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함께 듣지 않으셨습니까?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세자저하께서 편찮으신 것이 어쩌면 우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당장 이 일을 조사해야 합니다. 만약…… 만약 천에 하나, 만에 하나 불순한 마음을 품은 이가 있다면 찾아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중전마마께 이 일을 아뢰어야 한단 말입니다.”하연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가지 마십시오, 마마.”“……아버님.”“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등 뒤에서 들려오는 아비의 단호한 목소리.
하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이하여 아버지께선 이리도 날 막으려 하신단 말인가.
내 생각이 어리석다 생각하시는 것일까?
아니다. 이 일은 절대로 그냥 넘어갈 일이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머리털이 쭈뼛 곤두서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하연은 심호흡을 하며 주먹을 동글게 말아 쥐었다.
“아버님께서 그리 말씀하셔도 저는 해야겠습니다. 그 누구도 아닌 세자저하의 일입니다. 제 지아비의 목숨이 달린 일이란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병의 이유를 안다면…….”“이미 늦었습니다. 그분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실 겁니다.”“지금…… 뭐라 하셨습니까?”하연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버님, 혹여 무에 알고 계신 것입니까?”“저하께서 스스로 자초하신 일이옵니다.”“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어요?”하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조만을 바라보는 눈빛이 전에 없이 서늘했다.
“설마, 저하께 위해를 가한 사람. 아버님입니까?”“아닙니다. 하지만…….”“하지만이라뇨?”“그들을 말리지도 않았습니다.”“……!”하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러니 마마, 마마께서도 아무것도 하지 마십시오. 저하는 이미 늦었습니다. 가망이 없으세요.”“……그래도 제가 하겠다면 어찌 되는 겁니까?”“우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나겠지요. 엊그제 갓 태어난 어린 핏덩이까지 하나 남김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조만영의 겁박 담긴 말에 하연은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왜 그러셨습니까? 어째서요?”아비를 향해 돌아서는 하연의 눈에 눈물이 서렸다.
비록 도타운 사이는 아니라 하지만 하늘과 땅에 부부의 연을 맺었음을 고했던 사람이었다. 연모는 아니라 해도 사람과 사람 간의 정과 의리로 일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변했다.
모든 상황이 뒤틀리고 말았다.
“저하께서는 저와 우리 가문에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헌데 왜 그러셨어요?”“저하께서는 그 영민함이 지나치셨습니다.”“하여, 더 많이 가지려 이리하신 것입니까?”조만영이 물끄러미 하연을 바라보았다.
“빈궁마마의 말씀처럼 세자저하께서는 우리 집안에 넘칠 만큼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부귀영화가 과연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화무십일홍. 붉은 꽃도 열흘을 못 가는 법. 하물며 다른 분도 아닌 세자저하께서 과연 우리 가문으로 기울어진 권력과 부귀를 그냥 보고만 있겠습니까?”“그래서요?”“그래서 두려웠습니다.”“그분이 얼마나 공명정대한 분인지 누구보다 아버님이 잘 알고 계시질 않습니까?”“그 공명정대함이 우리에겐 독이 될 겁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건 없는 관심입니다. 공평무사한 세자저하의 일산(日傘)보다는 자신의 사람에게 편파적으로 그늘을 드리워주는 외척의 일산이 우리에겐 더 필요합니다.”“달도 차면 기우는 법입니다. 뭐든 과하면 탈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저에게 그리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과한 것이 과연 어느 정도입니까? 안동 김씨에게 허락된 영화를 어찌 우리 풍양 조씨라고 누리지 말란 법이 있겠습니까? 이 가슴에 야망을 품은 후로 세자저하는 참으로 어렵고 위험한 사람이 되었습니다.”하연은 기어이 눈을 감아 버렸다.
더는 아비의 욕심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나가세요.”“이 모든 것이 마마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집안의 광영을 위한 일임을 잊지 마세요.”“지금 당장 궁 밖으로 나가세요. 다시 부를 때까지 집안에서 꼼짝도 하지 마세요.”아비의 탐욕이, 권력을 향한 그의 열망이 소름 끼쳤다. 두려웠다.
“빈궁마마.”“물러가라 하였습니다.”조금의 곁을 보이지 않는 하연의 모습에 조만영은 긴 한숨을 쉬었다.
하연은 아비가 방을 나갈 때까지 눈을 감은 채 외면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 긴 시간이 흘렀다.
“마마…….”한 상궁이 방으로 들어와 석상처럼 서 있는 하연을 가만 흔들었다.
그제야 하연은 바닥으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마마! 어찌 이러십니까?”놀라 달려드는 한 상궁을 뿌리친 채, 하연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처음 궁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평범한 삶일랑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지아비의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아비의 죄를 어찌 씻어야 하나?
어찌해야 이 죄를 갚을 수 있단 말인가.
입술을 악무는 하연의 눈가에 기어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영을 진맥하는 어의의 입에서 시름 섞인 탄성이 흘러나왔다.
“어허.”늙은 어의는 최 내관을 돌아보았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시게. 탕제를 드셔야 하네. 탕제를 드시지 못하시면…….”삿된 말을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어의는 말끝을 흐렸다.
왕세자께서 발병하신 지 벌써 열사흘 째였다.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는데다 올리는 탕약마저 넘기질 못하셨다. 이러다 정말 큰일이 날까 두려웠다.
“허면 처소에 있을 것이니. 무슨 일이 있으면 그 즉시 기별을 주게나.”마지막 당부의 말을 남긴 어의는 내의원들과 의녀들을 이끌고 동궁전을 나섰다.
한바탕 소용돌이가 훑고 간 동궁전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최 내관은 언제나처럼 모두가 사라진 영의 처소 앞을 지켰다.
그런 그의 곁으로 사락사락 비단 자락 스치는 소리가 다가왔다.
자줏빛 치마에 옥색 저고리.
힐끗, 뒤를 돌아보니 낯선 궁녀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최 내관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곳은 궁녀라고 해서 아무나 들어올 수 있었던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왕세자께서 위중한 상태.
허락받지 않은 궁녀의 출현에 최 내관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예가 어디라고 감히! 널 이곳에 들여보낸 이가 뉘더냐?” “제가 해보겠습니다.”“무슨 소리냐?”“탕약을 드셔야 한다 들었습니다.”“헌데?”“제가 해보겠습니다. 저하께서 탕약을 드실 수 있다고 제가 해보겠습니다. 그러니 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이런 맹랑한 것을 보았나. 예가 어디라고 그런 헛소리를 하는 것이냐!”성은에 눈이 먼 어린 것의 미친 헛소리가 분명했다.
최 내관은 귀찮은 날파리 쫓듯 팔을 휘저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낯설다 생각한 생각시의 얼굴이 어째서인지 눈에 익었다.
곧이어 주름이 가득한 눈두덩에 경련이 일었다.
“너는…….”말을 하던 최 내관은 어린 궁녀를 후다닥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갔다.
“대체 여기서 뭐하는 겐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최 내관은 궁녀 복장을 한 라온을 염려 어린 목소리로 나무랐다.
하지만 그의 지청구일랑 라온의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줄곧 영의 처소 안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가 말했다.
“최 내관님, 부탁합니다.”“홍 내관…….”“여기서 죽으라면 죽겠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세자저하 얼굴 한 번만 뵙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애원하는 라온의 눈에 어릉어릉 눈물이 고였다.
그러나 눈물방울이 채 고이기 전에 라온은 손등으로 쓱쓱 물기를 지워냈다.
여기서 울 수는 없었다.
세자저하께서 저리 누워계신데 자신마저 나약한 모습으로 있을 수는 없었다.
라온은 입술을 악물었다.
어떻게든 잡아야 했다.
그분께서 쉬이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도록 지켜내야 했다.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던 최 내관이 한쪽 옆으로 길을 터주었다.
“이 은혜, 죽어서도 안 잊겠습니다.”“은혜라 생각할 일 없네. 부디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만 기억하게나.”“알겠습니다.”꾸벅 고개를 숙인 라온이 서둘러 영의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최 내관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오늘 밤도 긴 밤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늙은 환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 * *
라온은 천천히 방을 가로질렀다.
방 안을 가득 채운 탕약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한 발짝, 또 한 발짝 영에게 다가갈수록 심장이 거칠어졌다.
“저하…….”낮은 음성으로 영을 불러보았다.
목소리 끝이 절로 떨렸다.
그러나 누워 있는 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 발짝 더 그에게 다가섰다.
“저하, 화초저하.”부르는 음성에 왈칵 울음이 묻어 나왔다.
끅끅 터지는 울음을 애써 짓누르며 라온은 영의 머리맡에 앉았다.
영의 곁을 떠난 지 두 계절.
수척해진 그의 얼굴과 파리한 안색.
그녀가 떠나 있던 날 동안 그가 어찌 지냈는지 능히 짐작되었다.
외로우셨습니까?
홀로 또 얼마나 참으셨던 겁니까?
툭.
저도 모르게 눈물 한 방울이 턱 끝으로 떨어졌다.
서둘러 눈물을 훔친 라온은 잠든 영의 얼굴을 가만가만 손끝으로 더듬었다.
“저하.”짙은 눈썹과 사내다운 기상을 품은 콧날, 새의 깃털처럼 부드러운 입술과 베일 듯 날카로운 턱선.
매일 밤 꿈꾸던 그의 얼굴 그대로였다.
하지만…….
“어찌 이리 수척해진 겁니까? 보나 마나 제대로 잠도 아니 주무셨겠지요. 분명 수라도 계속 거르셨을 테고요. 제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제가 저하 때문에 못 살겠습니다. 어찌 이리 사람을 걱정하게 하시는 겁니까? 한 나라의 왕세자라는 분께서 이리 누워만 계시면 어떡합니까? 저도 참 바보입니다. 아무리 당부한다고 하여도 고분고분 말씀 들으실 분이 아니신데.”툭.
또다시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라온은 듣는 이 없는 지청구를 이어나갔다.
“이러시면 제가 어찌 떠납니까? 이리 약도 안 드시고 고집을 부리시면 제가 어찌 마음 편히 살 수가 있겠습니까?”“그리 걱정되면 안 떠나면 되질 않느냐?”“저도 마음은 굴뚝입니다. 하지만 사람에겐 저마다 사정이란…… 저하?”지금 설마, 저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까?
놀라 영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 찰나.
어느새 몸을 일으킨 영이 제 얼굴을 더듬던 라온의 손목을 힘껏 잡아당겼다.
라온의 얼굴이 그대로 영의 가슴에 폭 파묻혔다.
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뜻한 영의 체온이, 그의 향긋한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럼에도 믿기지 않았다.
“저하? 정말 저하십니까? 저하, 저하!”“그리 부르다 닳겠구나.”“괜찮으신 겁니까?”“괜찮다.”“하지만 어의가…… 사람들이…….”갈피를 잡지 못한 라온의 말이 허공을 둥둥 맴돌았다.
의미 없이 달싹거리는 그녀의 입술 위로 봄볕 같은 입맞춤이 떨어졌다.
“저하…….”한없이 따사롭고, 한없이 향긋한 입술이 라온의 말을 막았다.
말캉한 분홍의 혀끝이 울먹이는 그녀를 달랬다.
순간, 모든 것이 정지했다.
눈물도, 탄식도, 깊은 시름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울지 마라, 울지 마라.
괜찮다, 괜찮다.
전신을 나른하게 만드는 아련한 다독임.
심장에서 일어난 저릿한 감각이 혈관을 타고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