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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115화 (115/131)

115. 혹시 나, 꿈꾸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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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7

“뭐하시오? 주상전하께 예를 올리세요.”장 내관의 옴친 목소리가 하얗게 바래진 라온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너무 놀라 멍해 있던 라온은 서둘러 왕을 향해 절을 올렸다.

하지만 그다음엔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곁을 지키던 장 내관이 뒷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라온은 연신 불안하게 눈동자를 움직였다.

왕께서 계신다는 중압감이, 이 땅에서 가장 높은 분이 앞에 있다는 무게가 라온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때 어두운 방 안쪽에서 몸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왕과 라온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주렴이 흔들렸다.

이윽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라온이 앞으로 하얀 버선발이 다가왔다.

“네가 홍경래의 자손이더냐?”“네?”더럭 겁심이 일었다.

주상전하께서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누구의 딸이고, 내 아비가 누구인지.

역시 주상전하께서는 나를 벌주기 위해 부르신 것일까?

차마 고개조차 들지 못한 라온은 더욱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왕이 다시 물었다.

“맞느냐?”“네. 홍, 경자 래자 쓰시는 분이 제 아비가 맞사옵니다.”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비였다.

역적의 자식이라는 굴레를 어린 자식에게 덧씌운 아비.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면 거짓이리라. 하지만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라온의 혈관에 흐르는 붉은피톨의 절반이, 그녀의 뼈와 살이 그분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고되고 견디기 어려운 삶이었지만, 그런 삶이라도 살아갈 수 있게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아비에게 감사했다.

살아있기에.

영을 만날 수 있었기에.

그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라온의 목덜미 뒤로 왕의 물음이 떨어졌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홍가 라온이라고 하옵니다.”“그렇구나.”잠시 말이 끊겼다.

곱씹듯 낮게 라온의 이름을 되새기던 왕이 다시 물었다.

“듣자하니 네가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되었다던데. 사실이냐?”“사실입니다.”“어째서냐?”“네?”“어찌하여 그런 중죄를 저지른 것이냐?”“그것이…….”대답을 하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자니 왕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미웠던 것이더냐?”라온이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왕의 담담한 눈빛과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다시 숙였다. 왕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네 아비를…… 죽였다. 그런 내가 미운 것이 아니더냐? 하여, 내게 복수하기 위해 여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궁에 들어온 것이 아니더냐?”왕의 물음에 라온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맹세컨대, 그런 마음일랑은 추호도 없었습니다.”“허면 무엇이냐? 여인인 네가 목숨을 걸고 궁에 들어온 이유. 무엇이 너를 그리 만든 것이냐?”“……지키기 위함이었습니다.”주저하던 라온이 대답했다.

“지키기 위함이었다?”라온을 바라보는 왕의 얼굴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사실 제게 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병약하여 늘 자리를 보전하고 누워있어야 했던 가엾은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 큰돈이 필요했습니다.”“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모름지기 가족이 아픈 만큼 힘들고 괴로운 일도 없겠지. 허나, 돈이 필요했다면 차라리 다른 일을 할 생각을 해야지. 어찌 여인의 몸으로 내시가 될 생각을 했더란 말이더냐?”“그 당시,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밖에는 없었습니다. 당장 큰돈이 필요했고, 마침 궁에 들어가면 필요한 돈을 구할 수 있다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리하였습니다.”“하여, 겁도 없이 죽을 자리인 줄도 모르고 궁에 들어왔다는 것이냐?”“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단희가 어찌 되는 것이었습니다. 행여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살아갈 자신이 없었습니다.”“……제 목숨보다 동생의 목숨이 더 중요하다?”“그 아이를 잃고 슬퍼하실 어머니를 볼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키고 싶었습니다. 제가 살기 위해, 제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그 아이를 지켜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동생을 살리기 위해 여인의 몸으로 죽을 지도 모를 일을 하게 되었단 말이로구나. 채 여물지 못한 네가…… 제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찼을 터인데.”“소중한 이를 지키는데 여인과 사내의 구분이 어찌 있겠습니까. 내 가족을 지키는 데 나이의 많고 적음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모든 것은 마음에 달린 것으로 생각합니다.”“마음에 달렸다?”“전하의 말씀대로 저는 여인이고 또한 어렸습니다. 하지만…… 아비를 대신해서 제 어머니와 단희의 울타리가 되고 싶었습니다. 두 사람이 기댈 수 있는 든든한 기둥이고 싶었습니다.”“그 마음이 너를 겁 없게 만들었구나.”“두려워할 짬이 없었습니다. 제겐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이었지만 겁난다고 하여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피하면 모진 세상이 단희에게 달려들 것이고, 제 어머니의 어깨를 짓눌렀을 테니까요.”“……아비를 대신하여. 그리하였단 말이로구나.”라온의 대답에 왕의 표정이 일변했다.

무언가 둔중한 것에 맞은 듯 그는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 위에 군림하고 살아왔다.

세상을 굽어보고, 자신에게 머리 숙이는 사람들의 조아림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어찌하여 이리 무겁단 말이더냐.

아비를 대신하여 죽음을 각오했다는 라온의 말에 왜 이리 가슴이 아프단 말인가.

잊고 살았다.

아니, 잊으려 애썼던 무게였다.

큰 뜻을 펴고 이루려면 사소한 부성애(父性愛)쯤은 잊어야 한다 생각했다.

그것이 제왕이라 배웠다.

그리 배우고 알았으니, 당연히 그리 행했다.

걱정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근심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두려움이 컸다.

충신이라는 자들의 감언과 이설은 달콤했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이치대로 흐를 것이라는 충언은 정신마저 흐리게 만들었다.

세월이 오래 흘러 심신이 쇠약해지자, 비로소 눈앞을 가린 자만의 막이 녹아내렸다. 그간의 무능과 부지가 위액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라 목구멍을 칼칼하게 만들었다.

장성한 자식이 그제야 눈에 보였다.

자신과 달리 올곧고 강직하게 자란 아들을 보며 속으로 적잖이 만족도 하였다.

보아라. 진정 자식을 위해서라면 거친 풍파를 무서워해서는 안 되느니.

비바람 맞고 자란 내 아이가 저리도 당당하게 살고 있지 않으냐. 주위의 험악한 시선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은 채 힘차게 걷고 있지 않으냐.

애써 돌보지 않았더니, 오히려 잘 컸구나.

그런 말들로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알고 있었다.

자식의 당당한 포부는 자신의 무능에 대한 저항이었고, 날카롭게 벼린 눈씨는 아비를 이리 만든 간신들에 대한 분노임을.

후회되었다.

서슬 퍼렇게 대치하는 아들과 대신들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자신이 그렇게 한심하고 비참할 수 없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을꼬.

깊은 시름에 잠긴 후에야 이유를 알았다.

자신이 제 노릇을 하지 못해서였다.

왕이 왕 답지 못하여, 궁궐의 법도가 어지러워졌다.

자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아비는 총명한 아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다.

모든 게 자신의 무능 탓이다.

알고도 하지도, 알려 하지도 않았다.

그동안 모든 것을 피해왔다. 애써 외면했다.

왕이 되어 그가 한 일이라고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그저 굽어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웃고, 울고, 탓하고, 논하였으나, 정작 해야 할 일은 모두 조정대신들의 손을 빌렸을 뿐이었다.

가장이 바로 서야 가정이 안온하고, 임금이 제대로 서야 나라가 평안한 법이거늘.

그가 한 실수를 이제 아들이 바로 잡으려 했다.

정비하지 않은 정원은 이미 잡초밭으로 변했고, 곳곳에 가시넝쿨과 늪 천지였다.

무심한 얼굴로 터벅터벅 걷는 아들의 몸은 이미 곳곳이 생채기로 가득했다. 더러운 늪이 아들의 발을 삼키고 무릎을 먹고, 허리를 휘감고 있었다.

이 모두가 내 탓이다.

그럼에도 그 누구 하나 질책하지 않았다.

누구 하나 너의 잘못이라 탓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라온을 만나 그간 묻어두었던 곪은 상처를 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나조차 못한 일을…….”왕으로서도 하지 못한 일을 저 유약하디 유약한 어린 여인이 하고 있구나. 제 가족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제 목숨을 걸었구나.

부끄러웠다.

초라해 보였던 아이가 이젠 너무도 눈부셔 보였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문득 입안에 거위침이 돌았다. 허허로운 웃음이 임금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허허허허.”느닷없는 웃음소리에 놀란 라온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내 왕의 반듯한 이마와 오뚝한 콧날이, 자애롭게 웃는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왕의 위엄이 라온을 향해 찌르듯 다가왔다.

동시에 묘한 친근함도 느껴졌다.

아마도 화초저하 때문이리라.

그분보다는 조금 더 푸근한 인상을 지녔지만, 주상전하의 용안에서 언뜻언뜻 영의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 할 말이 있을 때의 눈빛이, 라온을 놀릴 때의 조금은 개구진 표정이 처음 마주한 왕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라온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먼 훗날, 화초저하께서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일까?

뻣뻣하던 어깨가 부드러워졌다.

등줄기를 짓누르던 긴장도 조금은 무뎌졌다.

왕은 속내가 훤히 드러나는 라온의 얼굴을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과연 소문이 사실이구나.”“소문이요? 무슨 소문 말씀이십니까?”“네가 다른 이의 고민을 그리 잘 해결해 준다는 소문 말이다.”“네. 그런 일을 한 적이 있긴 하오나…….”“고맙구나.”“네?”라온은 왕께서 하신 말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되어야 했던 이유를 말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고맙다고 하시는 것일까.

왕은 그녀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넉넉한 웃음과 함께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면 참으로 묘한 인연이로구나.”자신의 무능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는 영과 아비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목숨 걸고 노력하는 라온.

처지도 신분도 다르지만, 어찌 보면 이리도 닮은꼴이란 말인가.

아들이 어찌하여 이 아이를 그토록 마음에 들어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잘 부탁하마.”“…….”왕의 말에 라온은 난감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이번에도 역시 왕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고맙고, 또 무엇을 잘 부탁하신다는 것일까?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릴 찰나.

툭툭.

가벼운 다독거림이 라온의 어깨를 두드렸다.

놀람에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주상전하께서 대체 왜 이러실까?

그러나 라온의 의문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위로하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린 왕은 그대로 밖으로 사라졌다.

왕께서 나간 이후에도 라온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왕을 만났던 일도, 그분께서 자상한 얼굴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던 것도 모두 꿈속의 일인 듯 아득했다.

뭐야? 혹시 나, 꿈꾸는 거야?

라온은 제 볼을 꼬집었다.

“아얏!”꿈은 아니었다.

*  *  *

검은 밤의 융단 위로 먼 과거의 기억을 품은 별들이 떠올랐다.

전각을 나온 라온은 눈을 찌르는 별빛을 올려다보았다.

보석을 흩뿌려놓은 꽃밭처럼 봄의 밤은 취하도록 아름다웠다.

하여, 라온은 잠시간 넋을 잃고 밤하늘을 응시하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라온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무람없이 잡아오는 작은 온기.

놀란 라온이 고개를 내렸다.

열없이 벌어진 입가에 이내 반가운 미소가 맺혔다.

“영온 옹주마마.”<아바마마는 뵈었는가?>“네. 뵈었습니다. 혹시…… 제 이야기를 주상전하께 하신 분, 옹주마마십니까?”라온의 물음에 영온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쩐지. 주상전하께서 어디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지 궁금했는데,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라온은 몸을 굽혀 영온과 눈을 맞췄다.

“잘 지내셨습니까?”<난 잘 지냈네. 그러는 홍 내관은 잘 지냈는가?>영온이 커다란 눈동자를 굴려 라온을 살폈다.

라온이 입고 있는 생각시 복장이 신기한 듯 작은 입술이 연신 달싹거렸다.

“네. 잘 지냈습니다.”<생각시 복색이 제법 잘 어울리는군.>“송구합니다.”본의 아니게 영온에게도 거짓말을 한 셈이 되었다.

“사실은 저…….”<알고 있었네. 자네가 여인이라는 것을.>라온의 눈이 커졌다. 그러다 수줍게 웃는 영온의 미소를 보게 되었다.

비로소 라온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송구합니다.”<상관없다네.>“그런데 옹주마마, 여기서 절 기다리신 겁니까?”끄덕끄덕.

<장 내관이 갑자기 일이 생겨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전해달라고 하였네. 돌아올 때까지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이야.>“아하, 그랬군요. 그럼 그 말씀을 전해주시려고 기다리신 것입니까?”<그것도 있고…….>“무에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잠시 짬을 내 주겠는가?>“짬을 내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제가 사실 궁에 몰래 들어온 거라서요.

라온은 차마 뒷말을 하지 못한 채 말끝을 흐렸다.

그때였다.

영온이 다짜고짜 라온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옹주마마, 잠시만요. 저…… 이러시면 안 됩니다.”라온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영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옹주마마, 왜 이러십니까?”대체 어딜 가시는데요?

*  *  *

“여긴…….”라온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영온옹주가 이끈 곳은 다름 아닌 동궁전이었다.

흘러간 계절만큼 세월의 더께가 덧씌워져 있긴 했지만, 동궁전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라온은 언제나 영이 서 있던 중희당의 이 층 누각으로 시선을 돌렸다.

‘라온아, 홍라온. 이리 오너라.’누각 위에 서서 자신을 부르던 영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괜스레 그녀를 놀리고 이마를 쥐어박던 영의 짓궂음이 그리웠다.

라온은 아련한 시선으로 영의 처소를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불이 켜져 있는 저곳에 화초저하께서 계시리라.

지금쯤이면 최 내관님께서 따뜻한 대추차를 올렸겠지. 하지만 서책을 들여다보시던 화초저하께선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을 테고.

최 내관님께서 안절부절못하며 연신 저하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것이 뻔했다.

영의 작은 일 하나에도 전전긍긍하던 최 내관을 떠올리며 라온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웃음은 금세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웠다.

영과 공유했던 사소한 일상이,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던 그의 모습이 그리워 가슴이 울컥거렸다. 커다란 가시를 삼킨 듯 목이 따끔거리고 명치께가 아려왔다.

당장에라도 저 돌계단을 올라가 영의 처소로 뛰어들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라온은 여전히 쫓기고 있는 죄인이었고, 영의 발목을 잡는 족쇄였다.

<들어가 보지 않겠는가?>영온이 애써 다잡은 라온의 마음을 흔들었다.

라온은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이리 저하께서 계시는 동궁전에 다시 발을 디딘 것만으로…… 충분합니다.”라온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잠시 아련한 눈길로 영의 처소를 바라보던 그녀는 끝내 발길을 돌렸다.

가야지. 그만 떠나야지.

자꾸만 발길 잡는 미련을 서둘러 떨쳐낸 라온은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영의 처소 문이 벌컥 열렸다.

황급히 뛰어 나가는 어린 내시의 모습에 라온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잠시 후.

어린 내시는 한 무리의 내의원들과 의녀들을 이끌고 다시 돌아왔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라온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설마…… 아니지요?

화초저하,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요?

라온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뇌리를 짓누르는 불안한 상상을 서둘러 털어냈다.

애써 환히 웃음을 지으며 라온은 영온에게 물었다.

“옹주마마, 이상하게 궁이 어수선합니다. 혹시…….”잠시 말을 끊은 라온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별일 없을 거야. 그래, 별일 없어.

라온은 티끌 한 점 없는 영온의 맑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마침내 묻고 싶었던 한 마디를 입 밖으로 끄집어냈다.

“옹주마마, 혹시 저하께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아니지요? 아무 일도 없으시지요?

제발 아무 일도 없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라온은 간절한 눈빛으로 영온을 바라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여린 온기가 라온의 손바닥 위를 누볐다.

그리고 전해진 잔인한 소식.

<저하께서는 지금 병환 중이시라네.>순간, 가슴 속에서 뭔가가 툭 하고 끊어졌다.

심장이 천 길 벼랑 아래로 떨어졌다.

라온은 차마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영의 처소로 고개를 돌렸다.

“저하…….”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무엇도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영의 얼굴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잡기 위해 라온은 두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허공을 허방 짚은 듯 연신 몸이 휘청거렸다.

라온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돌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다른 이의 눈에 띄게 된다고 하여도 상관없었다.

지금 당장 의금부로 끌려가 치도곤을 겪게 된다고 하여도 이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저곳에 그가 있었다.

내 그리운 이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턱턱 막힐 만큼 아릿한 사람이 있었다.

나만의 사람이, 오직 나만의 정인이…… 저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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