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114화 (114/131)

114. 저기 계신 분이 누구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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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4

늦은 밤.

북촌, 좌의정 김익수의 집으로 안동 김씨와 외척들의 은밀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간밤에 어의가 올린 탕재를 한 모금도 넘기지 못하셨다고 합니다.”“저하께서 자리에 누우신 지 벌써 이레입니다.”“그 이레 동안 차도를 보이시기는커녕 병색이 더욱 깊어지시니.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겠소.”형조판서의 말에 김익수가 문득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의원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자하니 병세가 도무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고 하더이다.”“이대로 영영 못 일어나시는 건…….”“쉿! 누가 듣겠소이다.”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우는 김익수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좀 전까지 가식일지언정 왕세자를 걱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보다 병판, 이리 손 놓고 있어도 되는 것이오?”김익수의 은밀한 목소리가 병조판서를 향했다.

“그게 무슨 뜻이외까?”“왕세자의 안위가 바람 앞의 등불입니다. 이 일이 혹여 불순한 자들의 귀에 들어가면 어찌하려 하오? 이 나라 조선이 뿌리째 흔들릴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란 말이오.”“허면…….”“우선 도성문부터 닫아걸어야지요. 그리고 수상한 자는 하나 남김없이 죄 잡아들여야지요.”형조판서의 말에 동조하듯 김익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병조판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허나, 아직 부원군 대감께서 아무런 말씀도 없으셨습니다.”“하나씩 준비하라는 명을 내리셨소.”일순, 병조판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입니까?”“부원군께서는 지금까지 그리지 못하신 그림을 완성하시고자 하십니다.”“그 말씀은…….”김익수의 눈빛이 더욱 은밀해졌다.

“조용히, 그러나 신속하게 움직여야 합니다.”“물론이오.”“드디어 이씨(李氏)의 조선이 아닌 우리 안동 김씨(金氏)의 조선이 열릴 때가 된 것이외다.”그때였다.

방 한편에 앉아 내내 침묵하던 한성판윤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무 섣부르게 움직이는 건 아닙니까?”“그게 무슨 말이오?”한창 꿈에 부풀어 있다 찬물이라도 맞은 듯 김익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가 노려보는 시선으로 한성판윤을 응시했다.

김익수의 사나운 눈빛에 주눅이 든 한성판윤이 오그라든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왕세자저하 쪽의 움직임을 좀 더 살핀 다음에 움직여도 늦지 않을…….”탁!

김익수가 마주하고 있던 탁자를 세차게 내리쳤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이외다. 허고, 지금이 그때라는 것을 어찌 모르시오?”“허나……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그럽니다.”“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간밤에 번을 서던 수문장 하나가 이른 아침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 자가 하는 말이 새벽에 은밀한 통로를 통해 궁을 빠져나가는 그림자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꼭…….”“꼭 무엇이오?”“세저저하 같았다고…….”한성판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김익수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난 또 뭐라고. 쯧쯧. 병세가 깊어 제대로 눈도 못 뜨시는 분을 두고 그 무슨 어이없는 말이오?”“그건 나도 알지만, 워낙에 눈썰미가 좋은 자의 말인지라…….”“한성판윤께선 그리 간덩이가 작아서야 어찌 큰일을 도모할 수 있겠소?”한성판윤의 말을 그저 겁 많은 소인배의 두려움쯤으로 치부해버린 김익수는 병조판서를 돌아보았다.

“이번 일의 성패는 병판의 손에 달려있다고 부원군 대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최대한 조용하게, 그러나 신속하게 도성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믿고 맡겨주십시오.”“이제 곧 다시 우리 세상이 열릴 겁니다.”김익수의 말에 병조판서의 입가에 위험한 미소가 떠올랐다.

“참으로 듣고 싶었던 말입니다.”벅차오른 표정으로 서로 마주 보는 두 사람의 곁에서 한성판윤만이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그를 끌어당겼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한성판윤은 조용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분위기에 도취된 사람들은 그의 부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  *

순조 30년, 푸른달 초닷새(5월 5일).

동궁전의 무거운 공기가 전염병처럼 궁 안으로 번졌다.

궁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살얼음판을 걷듯 매사에 조심했다. 숨소리 하나 크게 내쉬는 이가 없었다.

음울한 분위기는 소환내시 교육장에까지 이어졌다.

혹여 철없는 어린 환관들이 우환 중에 웃음소리라도 낼까 싶어 몸가짐, 입단속을 평소보다 더욱 철저히 했다.

“궁 안팎의 신경이 날카롭게 서 있는 것을 너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야.”대청마루에 올라선 성 내관의 목소리가 서릿발 같았다.

소환내시들은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왕실의 우환 중에는 결코 큰 소리를 내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그때였다.

조용하던 소환내시 교육장 안으로 누군가 급히 뛰어 들어왔다.

“성 내관님! 성 내관님!”대전의 조 내관이었다.

“어허! 어찌 이리 요란을 떠는 것이냐?”성 내관은 못마땅한 듯 눈초리를 사납게 치떴다.

그제야 몸가짐을 단정히 한 조 내관이 종종걸음으로 성 내관에게 다가섰다.

“대전으로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대전은 왜?”“삼정승께서 들어 계십니다. 그분들께서 성 내관님을 찾으십니다.”“나를?”일순, 성 내관이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말을 언제나 잊지 않고 있었다. 왕세자께서 자리를 보전하고 누우신 지금이 어쩌면 자신에겐 천재일우의 기회일지도 모른다.

성 내관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와중에도 소환내시들에 대한 지시를 잊지 않았다.

“모두 각 처소로 돌아가 대기하고 있어라.”말을 마침과 동시에 성 내관은 조 내관과 함께 대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 내관의 모습이 교육장 대문 밖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도기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휴우, 하마터면 숨 막혀 죽을 뻔했네.”“내 말이 그 말일세. 쯧쯧. 천하의 성 내관께서 어쩌다 소환내시 교육까지 맡게 되셨는지.”“화무십일홍이라, 열흘 붉은 꽃이 없다더니. 성 내관님의 처지가 딱 그 짝이 아닌가.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던 성 내관님이 오늘날 저 모양, 저 꼴이 되실 줄 누가 알았겠는가.”“사람은 자고로 줄을 잘 서야 한다고 하더니. 성 내관님이 바로 훌륭한 교훈인 것 같으이.”도기의 말에 상열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모르는 소리 마시게. 줄 서기로 따지자면 성 내관님을 능가하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네. 그런 분도 저 모양이 되셨는데. 줄 서기는 무슨!”“상열이, 이 사람아. 그러기에 자네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소리를 듣는 걸세.”“뭐?”“요즘이 어떤 시댄데 성 내관님 같은 얄팍한 줄서기를 한단 말인가.”“그건 또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요즘은 자고로 진정성을 갖고 매사에 임해야 한다네.”“진정성?”“그렇지. 진정성. 사람을 대함에 있어 진정성을 가져야만 그 마음이 전해지듯, 줄서기를 할 때도 진정성을 가져야 한다네. 이 사람이 내 마지막 동아줄이다, 이 사람만이 날 탄탄대로로 인도해줄 사람이다. 이런 진정한 믿음으로 줄을 서야 비로소 올바른 줄서기라 할 수 있지.”뒷짐을 진 채 가드락가드락 우쭐대던 도기가 은근슬쩍 품속에서 서책 한 권을 꺼냈다.

“여기 진정성이 담긴 줄서기에 관해 기술해 놓은 책이 있다네.”도기는 상열을 비롯한 소환내시들을 둘러보며 목청을 높였다.

“이 책 안에 요즘 같은 시국에 어찌 처신해야 할지, 그리고 우리가 잡아야 할 동아줄이 어떤 줄인지 자세히 쓰여 있다네. 내 자네들에게 단돈 닷 푼에…….”“흥. 그 책도 보나 마나 엉터리겠지.”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온 차가운 비아냥거림이 한창 끓어오른 도기의 흥을 깨트렸다.

도기의 통통한 볼살이 부르르 떨렸다.

“누구냐? 누가 감히 이 도기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냐?”“그럼 아니란 말이오? 지금까지 홍 내관이 여인인 줄도 모르고 그자의 일대기를 썼던 사람, 다름 아닌 도 내관이 아니오.”“그러고 보니 그러네.”도기의 줄서기 책에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소환내시들은 돈주머니를 쥐고 있던 손을 서둘러 소맷자락 안으로 갈무리했다.

도기를 보는 소환내시들의 눈매가 따가워졌다.

라온의 일로 내반원 소속의 환관들 모두 한차례 곤욕을 치렀다.

그녀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었던 자들은 하나 빠짐없이 의금부의 조사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자칫했으면 저 사람의 세 치 혓바닥에 또 깜빡 속을 뻔했네.”“그러게나 말이야.”도기를 매서운 눈초리로 흘겨보던 소환내시들은 곧 그 자리를 떠났다.

결국, 도기의 곁에 남은 것은 상열을 비롯한 불통내시들뿐이었다.

“그러게 책은 또 왜 썼는가? 홍 내관의 일로 내시들 사이에서 자네 책에 대한 평판이 곱지 않다는 걸 잘 알지 않는가.”상열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도기를 응시했다.

“흥. 저리 인정머리 없는 것들 때문에 우리 환관들의 평판이 안 좋은 것이네.”“그건 또 무슨 말인가?”“저희가 내가 쓴 책 덕을 얼마나 보았는가. 홍 내관을 보고 꿈을 키우던 자들이 한순간에 저리 등을 돌리다니. 허허허, 세상에서 가장 간사한 것이 사람이라더니.”한탄하던 도기는 소환내시 교육장을 나섰다.

라온으로 인해 한동안 환관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도기였다.

라온과 친분이 깊은 그와 연줄을 대기 위해 야살을 떠는 환관들로 연일 즐거운 비명을 지르던 게 엊그제 같았건만.

마지막 순간 그의 곁을 지키는 건 궁에서 가장 쓸모없다던 불통내시들뿐이었다.

“이리 모여 있으니 꼭 옛날로 돌아간 것 같으이.”어느새 후원 초입에 다다른 도기가 먼 과거를 회상하듯 아득한 표정을 지었다.

너른 너럭바위에 엉덩이를 걸치는 그의 곁에 상열과 나머지 불통내시들이 나란히 앉았다.

“생각해보니 내 인생을 통틀어 그때만큼 즐거웠던 적도 없었네.”“그게 다 홍 내관 덕분이지.”“그러게 말일세.”“그런 홍 내관이 역적의 자식이었다니.”“그런 홍 내관이 여인이었다니.”라온을 떠올리던 불통내시들의 얼굴에 원망의 빛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이내 그들의 입에서 원망과는 거리가 먼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보고 싶구먼.”“많이 그리워.”“여인이면 어떻고 역적의 자식이면 어떤가. 홍 내관은 홍 내관일 뿐인 것을.”“우리 홍 내관, 그동안 얼마나 고충이 심했겠는가. 그 비밀을 안고 살아야 했으니.”“그러게나 말일세. 진즉 알았더라면 이 너른 가슴으로 다 들어주고 이해해줬을…….”말을 하던 상열의 목소리가 문득 잦아들었다.

갑자기 넋이 나간 듯 어느 한곳을 뚫어지라 쳐다보는 그의 모습에 도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보게, 상열이. 자네 왜 그러는가?”“어라? 이상하네.”“왜? 뭐가 이상하다는 겐가?”“정말 이상하네.”“거참, 사람. 뭐가 그리 이상하다고…….”상열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도기도 일순 말을 멈췄다.

연노랑 개나리가 만발한 전각 담벼락 아래로 작은 체구의 생각시 하나가 고개를 푹 숙인 채 걸어가고 있었다.

도기가 어린 생각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처음 보는 궁녀 같은데…….”도기의 중얼거림에 상열이 대구하듯 말했다.

“그렇지. 도 내관, 저 궁녀 분명 처음 보는 궁녀 맞지.”“분명 그러한데…….”버릇처럼 통통한 볼살을 만지작거리던 도기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을 이었다.

“헌데 어찌 이리 낯이 익은 걸까?” “그런가? 자네도 저 궁녀 얼굴이 낯설지 않은 겐가?”“저 궁녀를 어디서 봤더라?”검지로 미간을 긁적이던 상열이 짝 손바닥을 부딪쳤다.

“이제 보니 저 궁녀, 홍 내관을 많이 닮았…… 설마?”“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가?”“말도 안 되네.”“아니, 말이 꼭 안 된다고 생각할 건 아니지 않은가.”“죽기를 작정하지 않고서야 여기가 어디라고 나타나겠는가.”“그렇지?”“그렇지.”금세 결론을 내린 도기와 상열은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나저나 홍 내관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상열의 물음에 도기가 단정하듯 말했다.

“글쎄. 지금쯤 궁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잘 먹고 잘살고 있을 게 분명하네.”“그렇겠지.”“그럴 걸세.”

*  *  *

“그쪽이 아니라 이쪽입니다.”도기와 불통내시들이 앉아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전각 담벼락 아래.

장 내관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시로 신분을 숨긴 채 궁으로 들어온 라온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장 내관을 돌아보았다.

순간, 장 내관이 펄쩍 뛰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고개를 들면 아니 된다 말하지 않았소. 행여 아는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어찌하려 그럽니까?”“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장 내관의 서슬에 놀란 라온은 서둘러 고개를 바닥으로 향했다.

라온은 시선을 신발 끝에 둔 채로 걸음을 옮겼다.

장 내관이 라온과 그녀의 가족들이 숨어 있던 안가를 찾은 것은 어젯밤이었다.

느닷없는 장 내관의 출현에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행여 자신을 잡으러 온 것은 아닌가 하여 지레 겁도 먹었다.

경계하는 라온에게 장 내관은 백운회의 일원이라는 징표를 내보였다.

장 내관님이 백운회의 사람이었다니. 그것도 할아버지께서 특별히 신임하신다고 하였다.

넓고도 좁은 것이 세상이라더니.

놀라는 라온에게 장 내관은 은밀히 궁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 있다고 하였다. 왕실의 높은 분께서 그녀를 찾는다는 것이었다.

궁으로 돌아가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

거절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라온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장 내관을 따라나섰다.

영을 보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그녀를 용감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궁에서 그녀는 영은 만나기는커녕 고개조차 마음대로 들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걸음을 옮기는 장 내관을 쫓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후원 깊숙한 곳으로 걸음을 옮기던 장 내관이 문득 라온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홍 내관, 어쩌자고 도성 바로 코앞에 숨어 있었던 것이오?”라온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원래는 저 멀리 강진까지 갔었습니다.”“헌데요? 헌데 어쩌자고 다시 돌아온 것이오? 그러다 잡히면 어쩌려고.”“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씀 모르십니까? 이미 도성과 그 인근은 관군들이 훑고 지나갔을 터. 조용히 다시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이곳보다 안전한 곳은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아하, 관군들의 허를 찌른 게로군요.”“말하자면 그런 것입니다.”“과연…….” 작게 감탄하던 장 내관은 엄지를 치켜들었다.

“덕분에 내 발품을 많이 팔지 않아도 되었소.”하마터면 강진까지 걸음 할 뻔했던 장 내관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라온이 물었다.

“장 내관님, 대체 누가 저를 보고 싶다고 하신 것입니까?”“가보면 알 겁니다.”짧게 대답한 장 내관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대체 누군데 저러실까?

장 내관답지 않게 도무지 입을 열지 않는 모습에 라온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시 돌아온 궁은 어쩐 일인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마도 나 때문이겠지.

역적의 자식이 환관 노릇을 하였으니. 그것도 사내도 아닌 여인이 그리 궁을 휘저었으니. 어쩌면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난 이후일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은 궁녀와 환관들을 힐끔대며 라온은 잰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먼 하늘에 석양이 깔리기 시작했다.

궁이 이렇게 넓은지 새삼 깨달았다.

곤한 걸음에 라온의 다리가 부어갈 때쯤, 궁의 후미진 골목을 돌고 돌던 장 내관이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다 왔소.”“여긴 어딥니까?”라온은 격자무늬의 아름다운 문살을 응시하며 물었다.

대답 대신 전각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왔느냐?”울림이 느껴지는 낮은 목소리.

장 내관이 서둘러 허리를 조아렸다.

“네. 방금 당도하였나이다.”“안으로 들라.”나지막한 목소리에 장 내관은 라온의 등을 밀었다.

얼결에 떠밀려 안으로 들어선 라온의 눈에 주렴이 쳐진 긴 장방형의 방이 들어왔다.

“뭐하십니까? 어서 인사 올리지 않고서.”“네? 하지만 뉘신지 알아야…….”주렴 너머의 희미한 그림자를 건너보는 라온에게 장 내관이 낮게 속살거렸다.

“주상전하십니다.”“아, 네. 주상전하시군…… 네?”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장 내관의 말을 따라 하던 라온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그녀는 놀란 눈으로 주렴을 응시했다.

그리고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저기 계신 분이 누구시라고요?”주상전하요?

화초저하의 아버지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이 나라의 임금님께서 저를 부르신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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