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각자의 자리
별점10.02,579명 참여 | 댓글387
2014.10.31
사방에 봄꽃이 만발했다.
온 산하가 꽃향기에 취해도 동궁전은 여전히 겨울인 듯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왕세자께서 급환으로 쓰러진 이후, 동궁전의 궁인들은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향금이는 어디에 있는 것이냐?”세자저하의 아침 수라 준비로 바쁜 수라간에서 윤 상궁의 높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의원에서 내려온 약방문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청구에서 들여온 귀한 강황을 향금이 치웠다는 말에 윤 상궁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 귀한 것을 말도 없이 치워버린 것에 화가 났고, 그런 향금이 도통 보이지 않는 것에 분노가 치밀었다.
향금과 같은 처소를 쓰는 곽 나인이 쭈뼛대며 말했다.
“간밤에 기침이 심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영 일어나지 못했습니다.”“뭐야? 그럼 아직도 처소에서 뒹굴고 있단 말이더냐?”“그, 그러니까…… 네.”정확히는 앓고 있었지만 지금 윤 상궁에겐 향금의 상태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쯧쯧, 궁녀라는 것이 어찌 몸뚱이 간수를 하였기에 아프다는 것이냐? 궁녀란 함부로 아파도 안 된다는 것을 정녕 모른단 말이냐?”“…….”잔소리를 늘어놓던 윤 상궁이 곽 나인에게 턱짓했다.
“뭐 하고 있는 게야? 당장 가서 향금이를 데려오질 않고서.”“……네. 마마님.”윤 상궁의 서릿발 같은 명에 곽 나인은 발바닥이 보이지 않도록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소에 도착한 곽 나인은 신발조차 제대로 벗지 못한 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향금아, 향금아.”곽 나인의 부름에도 향금은 꼼짝하지 않았다.
잠이 깊이 들었는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미동도 없었다.
“밤새 기침하더니. 이제야 잠이 들었나 보네.”향금을 바라보는 곽 나인의 눈에 애잔함이 들어찼다.
향금과 그녀는 아기나인 시절부터 함께 한 동무였다.
의지할 곳 없었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부모였고, 자매였고, 이 궁에서 유일한 의지처였다.
그러기에 곽 나인은 곤히 잠든 향금을 선뜻 깨우기 어려웠다.
한참을 망설이던 곽 나인은 마지못해 향금의 어깨를 가만 흔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푹 재우고 싶었지만, 그들은 궁녀였고, 윤 상궁의 말처럼 궁녀란 웃전의 명 없이는 함부로 아파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향금아, 얘, 향금아. 일어나봐.”“…….”“윤 상궁 마마님께서 어서 오라고 하셔.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야. 아침부터 눈초리가 위로 치켜 올라간 것이 심상치가 않아. 아무래도 일어나봐야 할 것 같아.”곽 나인은 향금이 덮은 이불을 끌어내렸다. 그 서슬에 향금의 팔이 툭 떨어졌다.
아직 어린 태가 남아있는 향금의 포동포동한 손안에는 어이없게도 가래떡 하나가 들려 있었다.
“으이고, 이 먹보.”이 아픈 와중에도 가래떡이라니.
황당한 표정을 짓던 곽 나인은 곧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동궁전의 수라간 나인이 된 향금에게 유일한 낙이 바로 요 가래떡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유난히 주전부리를 좋아하던 향금은 윤 상궁의 눈을 피해 이렇게 가래떡 몇 가닥을 숨겨놓고 짬이 날 때마다 먹곤 했던 것이다.
그나저나 가래떡이 입에 들어갈 정도면 살 만한가 보네.
간밤에 향금의 기침이 심해 내심 걱정했던 곽 나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나, 향금아. 그만 일어나. 윤 상궁 마마님이 기다리고 계신단 말이야. 그분 성정 잘 알잖아. 지금 신경이 날카로우셔. 이러다 무슨 날벼락을 받을지 몰라.”잠든 향금을 깨우기 위해 곽 나인은 그녀의 어깨를 제법 세게 잡아당겼다.
순간, 툭.
향금의 고개가 맥없이 베개에서 떨어졌다.
아무리 깊은 잠이 들었다 해도 이렇게 의식이 없을 수 있나?
어쩐지 향금의 상태가 여느 때와 다르게 느껴졌다.
의아한 생각에 곽 나인은 고개를 돌리고 있는 향금을 굽어보았다.
“향금아, 향금…… 아악!”돌연 곽 나인의 입에서 비명이 새어나왔다.
향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놀람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향금아, 향금아.”곽 나인의 눈동자에 맺혀 있는 향금의 입가엔 붉은 피가 흥건했다.
* * *
“어린 것이 그것을 가래떡에 묻혀 여러 날 먹은 듯합니다.”문풍지에 그려지는 그림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김조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어떤 동요도 없었다. 어리고 무지한 것의 죽음에 마음을 쓸 만큼 그는 자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김조순은 어린 궁녀의 죽음 따윈 상관하지 않은 채 지금 막 완성한 잉어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뭔가 미흡한 그림.
가파르게 휘어진 김조순의 미간이 못마땅한 심경을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잠시 후.
새 종이를 펼친 그는 붓끝에 다시 먹물을 묻혔다.
“하여, 그 아이는 어찌하였느냐?”“발견했을 때는 이미 늦었사옵니다. 아직 숨이 붙어있긴 하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옵니다.”“궁의 분위기가 뒤숭숭할 때다. 이런 시기에 궁에서 사람이 죽게 해서는 아니 될 것이야.”“여부가 있겠습니까. 오늘 밤 안으로 조용히 궁 밖으로 내보낼 생각입니다.”“궁 안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겨서는 아니 될 게야.”“걱정 마십시오.”“허고, 내의원에서는 아직 아무런 기별이 없느냐?”“젊고 강건하신 분이라 아직…….”“그만 가 보시게.”낮은 한마디에 그림자는 곧 김조순의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
사위가 고요한 침묵에 물들었다.
김조순은 능숙한 붓놀림으로 고요에 먹을 덧칠했다.
어쩐지 이번에는 감이 좋았다.
이번에 제대로 된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김조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느닷없는 방해꾼 탓에 그 미소는 사라지고 말았다.
“대감마님!”문밖에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묻는 김조순의 음성이 날카로웠다.
“소인, 칠복이입니다요.”윤성의 몸종 칠복이 문을 열고 주섬주섬 안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네가 무슨 일이냐?”“대감마님, 우리 참의영감 좀 찾아주십시오.”“참의를 찾아달라니. 윤성이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것이냐?”“참의영감께서 도통 보이질 않으십니다요.”칠복의 우는 소리에 김조순은 붓을 내려놓았다.
“대감마님, 아무래도 사람을 풀어 찾아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요.”“어디 기생집에 퍼질러 있는 것이겠지.”“소인도 그리 생각했습니다요. 그래서 도성에 있는 기루란 기루를 다 뒤져도 보았습니다요.”“헌데?”“뵈질 않습니다요. 몇 날 며칠을 헤맸지만, 참의영감의 그림자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습니다요. 우리 참의영감, 근래에 들어 술독에 빠져 사시긴 했지만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요. 혹여 나쁜 마음이라도…….”쾅!
김조순이 탁자를 내리쳐 칠복의 입을 막았다.
미간을 한데로 모은 김조순은 반쯤 완성된 잉어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거칠게 내려친 손바닥이 종이에 구김을 만들었다.
설사, 제대로 된 잉어를 그린다 하여도 그림을 그릴 종이가 구겨졌으니, 완벽한 완성은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칠복의 우는 소리가 이어졌다.
“대감마님, 우리 참의영감 좀 찾아주십시오.”“시끄럽구나.”“대감마니임.”“물러가라. 분명 어디서 술에 절어 흐느적대고 있을 것이니. 집안 시끄럽게 하지 말고 조용히 기다리거라.”“하지만…….”“어허! 물러가라는 말 못 들었느냐?”김조순의 불호령에 칠복이 마지못해 물러갔다.
그렇지 않아도 도망간 홍경래의 식솔을 쫓던 박만충의 연락이 끊겨 마음이 불편하던 차였다.
그런데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일로 흥을 깨다니.
윤성을 떠올리던 김조순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못난 놈.”그깟 계집 때문에 천명을 내팽개치다니.
십 년 공들인 탑이 고작 계집 하나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윤성을 생각할수록 라온에 대한 증오가 커져 갔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생각에 잠겼던 그는 이내 굳은 표정을 풀었다.
뭐,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이제 곧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자신의 숨통을 죄어오던 손주가 사라지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김조순이 종이를 새로 꺼냈다. 멈췄던 붓이 유연한 몸짓으로 종이 위를 미끄러졌다.
이내 먹빛 잉어 한 마리가 거친 물결을 갈랐다.
“물고기는 물에 살고, 들짐승은 들에 사는 법. 사람은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짐 지워진 숙명이 있으니. 그것이 순리이자 운명. 저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를 꿈꾼다 하시었습니까?”어느새 잉어 한 마리가 완성되었다.
물길을 헤집던 잉어가 급기야 물 밖으로 튀어 올랐다.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입에 담으니 그것이야말로 궤변이며, 역리이지 않겠소? 젊은 치기로 벌인 일일 터. 허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할아비가 손주의 잘못을 바로잡을 터이니.”김조순의 입술이 미소를 그렸다.
“순리. 이제 곧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갈 것이야. 암, 그렇고말고. 허허허허.”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김조순의 입에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 * *
유난히 길었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해시말(亥時末:밤 11시).
세상이 완연한 어둠에 묻혔다.
그러나 해가 다 기울기 전부터 불을 밝힌 동궁전은 대낮처럼 환했다.
동궁전 마당을 오가는 궁녀와 환관들의 발걸음은 여전히 종종걸음이었다. 전각 안팎에 약 달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약탕기를 달구는 불씨는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았다.
“어떠하신가?”밖과는 대조적으로 영이 누워있는 침소는 불빛을 한껏 낮춘 채였다.
온종일 하얗게 바랜 낯빛으로 왕세자의 곁을 지키던 하연이 막 진맥을 마친 어의에게 물었다.
어의의 표정이 안으로 옴쳐들었다.
“송구하옵니다.”“그런 이야기를 듣자 물은 것이 아니질 않은가. 어떠하신가? 차도를 좀 보이시는가?”“그것이…… 좀처럼 차도를 보이지 않으시옵니다.”“그게 무슨 소린가? 어찌 차도를 보이지 않으신단 말인가?”“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臣) 역시 영문을 모르겠사옵니다.”“영문을 모르겠다니? 그런 말이 어디에 있는가?”“기망의 증세를 완화시키는 처방을 하였사오나…….”“헌데?”“좀처럼 증상이 나아지질 않고 있사옵니다.”“허면? 허면 어찌하면 좋겠는가? 어찌하여야 저하께서 자리를 떨치고 일어나실 수 있겠는가?”“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방도가…….”“기다리란 말인가? 정녕 그 방법밖에는 아무런 방도가 없단 말인가?”“송구하옵니다.”“……알겠네. 그만 물러가게.”세자빈의 힘없는 축객령에 어의는 뒷걸음질로 영의 처소를 나갔다.
이내 차가운 침묵이 방안에 내려앉았다.
하연의 힘없는 시선이 잠든 영의 얼굴을 더듬었다.
왕세자께서 갑자기 피를 토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걱정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선뜻 나서지 않았던 것은 평소 강건했던 영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자께선 그날 이후 도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다.
걱정되어 찾은 왕세자의 낯빛은 그녀의 생각보다 좋지 못했다.
조금도 곁을 주지 않는 분이시라. 연모니 뭐니, 그런 마음일랑은 없으리라. 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비록 허울뿐인 빈궁의 자리이나, 지아비를 생각하는 하연의 마음은 서로를 연모하는 정인들처럼 정직했다.
세자에 대한 걱정에 그녀는 좀처럼 동궁전을 나설 수 없었다.
되짚어 생각하면 이리 가까운 곳에서 이리 오래 왕세자를 바라본 적,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연에겐 언제나 어려운 분이셨다.
딱 정해진 거리. 그 이상은 절대 내주지 않으시기에 섣불리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이분의 마음에 뉘가 있는 줄 너무도 잘 알기에 차마 마음 곁자리 내달란 말 할 수 없었다.
본실의 자격 운운하기엔 염치가 서지 않았다.
처음부터 끼어든 것은 자신이었으니까.
하연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때 등 뒤로 최 내관이 다가왔다.
“빈궁마마.”“…….”“그만 빈궁전으로 돌아가 쉬시옵소서. 이러다 혹여 빈궁마마께서도 옥체 상하시게 될까 염려되옵니다.”“난 괜찮으이.”“저하께서도 염려하실 것이옵니다. 나중에 깨시면 소인이 혼쭐이 날 것이옵니다.”“아닐세. 저하의 곁을 지킬 것이네.”고개를 저은 하연이 고집을 부렸다.
그때였다.
“이럴 때일수록 빈궁마마께선 빈궁마마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옵니다.”최 내관의 단호한 한마디가 하연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하연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최 내관을 바라보았다.
“방금 나의 자리라 하였는가?”“네. 빈궁마마의 자리라 하였사옵니다.”“그렇다면 더더욱 세자저하의 곁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지어미가 아픈 지아비의 곁을 지키는 것이 당연한 것이니.”“평범한 지어미가 아니시고 지아비가 아니시옵니다.”“무슨 말인가?”“세자저하가 뉘시옵니까? 이 나라의 국본이십니다. 빈궁마마께선 장차 이 나라의 국모가 되실 분이십니다. 이럴 때일수록 의연한 모습으로 세자저하의 빈자리를 메워주시옵소서. 그것이 빈궁마마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것이 빈궁마마의 자리이옵니다.”노신(老臣)의 말에 하연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어미가 아닌 세자빈.
지어미가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세자빈이 있어야 할 자리.
문득 하연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나는 범상한 범부가 아니었지. 나는 이 나라 왕세자의 빈이었지.
하연은 최 내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리석은 아녀자의 미욱한 생각을 깨쳐주어 고맙네.”이윽고 잠든 영에게 깊게 고개를 숙인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소인이 모시겠나이다.”어느새 조족등을 밝힌 최 내관이 빈궁전으로 향하는 하연의 앞길을 밝혔다.
* * *
밤이 깊어지자 처소를 지키던 환관과 궁녀들도 밖으로 물러갔다.
조용한 방안엔 번을 서는 환관 세 명만이 남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문 앞을 지키던 최 내관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다.
유유히 하늘을 유영하던 달이 창 중앙에 자리했다.
시간이 되었다.
의식이 혼곤한 영을 잠시 바라보던 최 내관은 고개를 숙인 채, 뒷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최 내관이 자리를 비우자 어둠에 가려져 있던 두 사람의 그림자가 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조용하고 은밀한 몸짓은 이내 영의 바로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잠시 후.
두 그림자 중 하나가 잠든 영을 향해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존귀한 왕세자의 귓등에 얼굴을 바싹 들이댄 그림자가 낮게 속삭였다.
“저하.”낮은 부름.
영은 미동이 없었다.
잠시 경계하는 듯 주위를 둘러보던 그림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하.”“…….”“저하, 소인 장 내관이옵니다.” 속삭이는 목소리가 허공중에 번져나가는 순간.
내내 잠들어 있던 영이 돌연 눈을 떴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무엇이냐?”나지막한 목소리.
그에 답이라도 하는 듯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있던 그림자가 영의 곁으로 다가왔다.
“백운회의 새로운 수장께서 세자저하께 보고드릴 것이 있다 하옵니다.”장 내관의 말에 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그의 앞에 부복하고 있던 그림자 역시 고개를 들었다.
“보고할 것이 있다 하였소?”형형한 눈빛의 초로의 노인을 내려다보며 영이 말했다.
“그렇사옵니다. 저하.”정약용은 왕세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보고하시오.”정약용과 시선을 마주하던 영이 눈빛을 빛냈다.
좀 전까지 파리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던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정약용을 바라보았다.
강력한 의지가 담긴 영의 얼굴에서 병색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깊은 밤.
내내 누워있던 자리를 떨치고 일어선 왕세자는 동궁전을 가득 채운 탕약 냄새가 무색할 만큼 강건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