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르미 그린 달빛-112화 (112/131)

112. 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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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8

김조순의 사랑채 깊숙한 곳으로 안내된 조만영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 벽에 잉어 그림이 가득했다.

“그림을 좋아하시는가 봅니다.”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올리며 조만영이 입을 열었다.

“즐겨 그리기는 하는데 도통 실력이 늘지 않소.”“문외한인 사람이 얼핏 보기에도 뛰어난 듯한데,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그려.”“그리 보아주시니 고맙소.”조만영은 한동안 잉어 그림을 바라보았다.

마주 보이는 벽에 커다랗게 채워진 잉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깊은 물속을 벗어나 허공으로 솟구치는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었다.

“혹자는 그런 말을 하더군요. 잉어는 본래 용에 대한 추상이라고요. 화려한 비늘과 물살을 헤치는 고아한 자태가 구름을 넘나드는 용을 떠올리게 한다지요.”“못에 매여 사는 잉어가 어찌 용과 같을 수 있겠소. 잘 해봐야 이무기. 그야말로 하늘과 땅을 비교하는 것과 같소.”“잉어는 분명 못에 갇혀 사는 미물일지나, 부원군 대감의 그림은 하나같이 못을 벗어나 하늘을 담으려 하고 있으니. 어찌 이무기 정도로 만족할 수 있겠소?”조만영의 의미심장한 말에 김조순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어찌 그리 웃으시오?”“예전에 저하께서 조 대감과 똑같은 말씀을 하셨지요.”“그랬소?”“그때 저하께선 이런 말씀도 덧붙였지요. 사람에겐 응당 어울리는 자리가 있으니. 제 본분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말이외다.”“옳으신 말씀이오.”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조만영이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지켜보던 김조순은 그의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허면, 조 대감. 조 대감은 조 대감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무어라 생각하오? 우리 김씨 일문이 세자저하에게 축출되고 나면 그 자리를 풍양 조씨가 메울 수 있을 거로 생각하시오?”“…….”술잔을 들던 조만영의 눈썹이 잘게 떨렸다.

김조순이 맥을 제대로 짚었기 때문이다.

“허허허, 설마 그리 어리석은 꿈을 품은 것은 아니겠지요? 저하께서는 그 누구보다 공명정대하신 분이오. 그런 분께서 외척에게 힘을 실어줄 리 있겠소?”김조순의 말에 조만영은 연신 불편한 헛기침을 흘렸다.

“저하께서 주상전하를 대신하여 대청하신 이후로 과거시험이 쉰 번이 넘게 치러졌소. 그뿐만 아니라 능력이 있는 자들이면 적서는 물론이고 신분에 상관없이 등용하시겠노라 공포하시었소.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아시오? 우리 일문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모든 권력을 내려놓는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풍양 조씨에게로 가지 않을 것이란 뜻이외다.”조만영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부원군께서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오?”“우리 일문은 이 나라 조선을 움직이는 힘이었소. 허나 세자저하께서 조금씩 우리의 손발을 떼어내기 시작하셨지요. 그것이 불과 3년 전의 일이었소. 그리고 지금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소. 이제는 한낱 호사가들의 농 짓거리에나 오르는 지경이 되었소.”“부원군 대감께서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겐 세자빈이 계시지요. 세자빈께서 자리를 굳건히 하고 계시는데, 어찌 우리 일가가 안동 김씨 일문과 같은 길을 걸으리라 생각하시는 것이오?”“틀린 말은 아니지요. 허나, 조 대감께서도 잊지 마셔야 할 사실이 있소. 내가 바로 세자저하의 외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조만영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김조순은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세자저하는 외할아버지에게조차 백성의 안위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냉정한 사람이오. 그런 사람이 과연 세자빈의 그늘이라고 사정을 달리 하겠소이까? 지금 우리의 모습이 훗날 풍양 조씨의 모습이오.”“…….”“토사구팽. 쓸모가 없어지면 충실한 사냥개도 삶아 먹히는 법이오.”“우리 일문이 그렇게 될 거란 말이오?”“세자저하의 영민함은 도가 지나치오. 이대로 가면 결국 우리 일문은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오.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 일문의 머리를 모두 모아도 세자저하 한 사람을 능가하지 못하니……. 그렇게 우리 일문이 사라지면 어찌 되겠소? 세자저하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어딜 향할 것 같소?”조만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김조순이 뱉은 단어 하나하나가 그의 심장을 찔렀다.

세자저하의 냉정하고 지나칠 정도로 공명정대함은 늘 그를 불편하게 했다. 저하에겐 옳고 그름이 있을 뿐, 내 편과 네 편은 없는 듯 보일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과연, 세자빈의 그늘만을 믿어도 될까?

“그러면…… 어찌해야 한단 말이오?”조만영의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그 허술한 빈틈을 김조순이 파고들었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소용이 없소이다. 생각해 볼 수 있는 수단은 이미 모두 세워 보았소. 결과는 아시다시피 좋지 않았소.”“그렇다면…….”“이제 최후의 수단을 마련할 때가 아닌가 싶소.”조만영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김조순의 목소리에서 음모의 냄새가 풍겼다.

질식할 것 같은 치명적이고도 위험한 악취.

불편한 것은 그 악취의 근원이 다름 아닌 손주를 향한 외할아버지라는 것이다.

권력과 탐욕이 얼마나 무서울 수 있는 것인지, 조만영은 김조순을 통해 조금이나 느낄 수 있었다.

조만영은 굳은 표정으로 김조순을 응시했다.

“하지만…… 정말 그리된다면 빈궁마마와 우리 가문은 그야말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될 것이오.”풍양조씨가 조정에서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세자저하의 성은 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에게 문제가 생기면, 조만영과 풍양 조씨에겐 그야말로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조만영의 속내를 읽은 김조순이 말을 덧붙였다.

“이대로 저하께서 보위에 오르신다 하여도 빈궁마마께서 회임하지 못하신다면 그 신세가 다를 것이 무어가 있겠소.”“그 무슨 망발이시오? 빈궁께서 회임하지 못하실 거라니.”“두 분의 사이가 겉으로는 살가워 보이나, 실은 함께 밤을 보내지 않는다고 하던데…….”“어험.”정곡을 찔린 조만영은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왕세자와 빈궁께서 함께 밤을 보내지 않는다는 김조순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러기에 조만영은 불안했다.

하연이 세자빈이 되었을 때, 조만영은 세상을 다 가진 듯했다.

저하의 성은이 빈궁전에 쏟아지고 있으니, 이런 때 빈궁께서 아드님까지 낳으신다면 그야말로 호랑이 등에 날개를 단 격이 되리라.

하지만 그의 야망은 이내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만나고 말았다.

왕세자께서 세자빈을 품지 않는다는 은밀한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처음 한동안은 낯을 가려 그런 것인 줄 알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 사이에 또 다른 내막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조만영이 사갈 같은 김조순의 제안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세자빈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리라.

권력은 결국 왕세자의 아이를 잉태한 여인과 그 집안으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걱정 마시오. 내 기필코 빈궁마마와 풍양 조씨 집안을 지켜주리라.”“어떻게 말이오?”김조순이 술잔을 기울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세자빈께서 회임하면 되는 것이 아니겠소?”“물론이지요. 하지만 세자께서 통 곁을 주지 않으시니…….”무심코 대답하던 조만영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짙은 음모의 형체를 이제야 깨달았던 까닭이었다.

“서, 설마 거짓 회임이라도 하자는 말이외까?”놀라는 조만영과는 달리 김조순의 태도는 태연자약했다.

“세자빈께서 진실로 회임을 하든, 거짓 회임을 하든 상관없소. 그저 빈궁께 아드님이 생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지요.”“그 무슨 터무니없는…….”“터무니없는 소리가 아니외다. 두 사람의 은밀한 내막은 결국 두 사람만이 알고 있을 터. 세자빈께서 회임하셨을 때, 마침 세자께서 아니 계신다면 누가 감히 세자빈을 의심하겠소이까? 오히려 대를 이을 왕손의 탄생을 기뻐하게 될 것이오.”“마, 말도 안 됩니다. 그, 그것을…… 어찌…….”김조순의 생각이 이리도 치명적이고 악독할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조만영은 말까지 더듬었다.

“진정하고 내 말을 차분히 생각해 보시오. 만약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대감의 집안이 어떻게 되겠는지 말이오.”조만영은 침묵했다.

영이 하연에게 마음이 없음은 이미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워낙 완고한 분이라, 시간이 흐른다고 그런 상황이 나아질 리 없을 터.

조만영은 탄식 섞인 한숨을 토해냈다.

이대로 놓아버리기엔 권력이라는 이름의 꿀은 지나치게 달았다.

조만영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의 입술이 열린 것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의 일이었다.

“내, 내가 무얼 하면 되겠소?”조만영의 물음에 김조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그저 없는 듯 그 자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되오.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니.”김조순의 말에 조만영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날의 술자리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김조순의 집을 떠날 때, 조만영은 불콰하게 취해있었다.

*  *  *

언제나 계절은 준비할 사이도 없이 불쑥 삶을 차지하고는 했다.

멀리 산봉우리엔 아직 하얀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건만, 말갛게 드러난 산자락은 어느새 연분홍빛 봄이 조금씩 꽃망울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새 봄이구나.”이른 새벽, 애련정을 찾은 왕은 봄과 겨울이 공존하는 후원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지난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았구나.”“덕분에 봄 가뭄은 없을 것 같사옵니다.”뒤따라 애련정에 발을 디딘 영이 말했다.

왕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점의 차이.

같은 것을 보고 한 사람은 근심하였지만, 한 사람은 다음의 희망을 보았다. 누군가에겐 추운 계절이지만, 누군가에겐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언제나 오늘이 아닌 내일을 바라보고 사는 왕세자의 모습이 왕은 흐뭇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너무 급히 서두르는 것은 아닌지.

“함경도와 전라도의 관찰사를 파직하였다고?”“네, 아바마마.”“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그들은 지난해 가을, 수해를 입은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던 구휼미를 빼돌렸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백성에게 세금을 거둬 고충을 가중시켰사옵니다.”“천하의 나쁜 자들이구나.”“네.”“그런데 세자.”“말씀하시옵소서.”“왕이란 무릇 백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은 당연하다. 허나, 조정 대신들 역시 너의 백성이라는 것을 잊지 마라. 그들의 볼멘소리에도 조금은 관심을 보여야 할 것이다.”왕의 말에 영의 눈에 날카로운 기운이 일어섰다.

“간밤에 부원군 대감께서 대전을 다녀가셨다는 소릴 들었사옵니다. 무슨 말씀이라도 있으셨습니까?”영의 물음에 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구나.”“알고 있사옵니다.”“무릇 사람이란 다그치기만 해서는 아니 된다. 채찍을 내렸으면 당근을 주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느니.”“그들은 제 몫의 당근뿐만 아니라 배고픈 자들의 당근마저도 빼앗은 자들입니다. 호락호락 굴었다간 다시 저들의 술수에 놀아나게 될 것입니다.”타락과 부패에도 정도가 있다.

먹을 게 없어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백성의 고혈을 쥐어짜는 인면수심이 도처에 판을 치고 있으니. 모른다면 모를까 직접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을 어찌 모른 척할 수 있을까.

새 땅을 일구려면 일단 썩어버린 오물부터 깨끗하게 치워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영의 이런 단호함이 때론 왕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말하지 않았더냐? 너에겐 너의 편이 필요하다. 아직 너의 자리가 탄탄하지 않은 상태인데. 섣부른 싸움은 너를 고립되게 만들 것이야.”“조금의 어려움 때문에 옳지 않은 자들과 타협할 수는 없사옵니다.”“불의와 타협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저들이 도망갈 구멍 하나쯤은 남겨두고 쫓으라 하는 것이다.”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 왕께서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영은 아비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소자에게 맡겨 주시옵소서.”“너를 믿는다. 믿기에 근심하는 것이다.”너의 강직함을, 너의 곧은 성정을 알기에…….

“너는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 아직 모른다. 저들에겐 피도 눈물도 없다. 사람의 마음 같은 것은 진작 버린 자들이다.”“…….”“영아, 나는 네가 다칠까 겁이 나는구나. 두려워 너의 등 뒤에 숨은 아비라도 아비는 아비. 거센 바람 앞에 너를 세운 주제에 이리 걱정만 하는구나.”“걱정 마시옵소서. 저들이 사람의 마음을 버렸다고 하셨사옵니까?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습니다. 저들을 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을 터이니 말입니다.”영이 자리를 털고 나섰다.

한번 세운 의지를 꺾지 않는 왕세자가 왕은 걱정스러웠다.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왕의 얼굴에 그늘이 가득했다.

왕세자는 아직 저들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사갈 같은 자들이었다. 원하는 바를 위해서는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내가 잘못 생각하였나? 아직 어린 왕세자를 너무 빨리 저들 앞에 내세운 것은 아닌가?

걱정과 함께 후회가 밀려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톡톡.

작은 온기가 왕의 소맷자락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무심히 고개를 돌리는 왕의 입가에 모처럼 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영온이구나.”어린 옹주와 눈높이를 맞춘 왕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 온 게야?”아비의 물음에 영온 옹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다 무슨 까닭인지 커다란 두 눈으로 왕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왜? 이 아비의 얼굴에 무어라도 묻었느냐?”왕의 물음에 영온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검지를 펴 왕의 손바닥에 손글씨를 썼다.

<무슨 근심이라도 계시옵니까?>“그래 보이느냐?”<네. 아바마마의 용안에 깊은 시름이 보입니다.>“허허허, 우리 영온이에게 아비가 들키고 말았구나. 그래. 근심이 있느니.”순순히 시인하는 왕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던 영온이 무언가를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영온이 쓰는 손글씨를 지켜보던 왕의 얼굴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남의 고민을 그리 잘 해결해주는 사람이 있다더냐?”

*  *  *

이른 아침.

세자궁 수라간 궁녀 향금은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자 그녀는 앞치마에 숨겨두었던 작은 가래떡을 꺼내 입안에 넣었다.

말랑거리는 떡의 촉감이 입안 가득 번지자 갑자기 기분이 나른해졌다.

호랑이 같은 윤 상궁마마님이 보시는 날에는 경을 치고도 남을 일이었다.

하지만 윤 상궁은 세자저하의 아침 수라를 가지고 중희당에 들어간 후였다. 윤 상궁이 다시 수라간으로 돌아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시간이 남았다.

향금은 한껏 느긋한 얼굴로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오물오물 떡을 씹었다.

하루 중 그녀에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고,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맛있는가?”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

놀란 향금은 덜 씹은 떡을 그만 꿀꺽 삼키고 말았다.

“누, 누구십니까?”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눈앞으로 얼굴 하나가 불쑥 다가왔다.

“아, 깜짝이야.”“이런. 내가 놀라게 했는가?”엉덩방아를 찧는 향금의 모습에 장 내관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장 내관님이 아니십니까?”“그래. 나 장 내관일세. 그런데 괜찮으신가?”“어찌 그리 기척도 없이 다니십니까?”“하하하, 내가 워낙에 발소리를 안 내고 다니는 게 버릇이 되다 보니.” “간 떨어질 뻔했습니다.”향금은 적잖이 놀란 듯 마른 한숨을 내쉬며 장 내관을 흘겨보았다.

“그런가? 미안하이.” “그런데 장 내관님이 수라간에 무슨 일이십니까?”“아차! 내 정신을 좀 보게나. 세자저하 드실 숭늉 가지러 왔다네.”“세자저하께 올릴 숭늉이요?”“그렇다네.”“그건 최 내관님께서 직접 가져가시는 게 아니었습니까?”“오늘부터 내가 가져가기로 하였다네.”“아,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아무 말씀도 없으셨지?”고개를 갸우뚱하던 향금이 서둘러 안쪽으로 종종걸음쳤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오래 기다릴 수도 있으니. 천천히 하시게.”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수라간 안쪽으로 사라졌던 향금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숭늉이 담긴 작은 소반을 장 내관에게 건넸다.

“조심, 또 조심해서 가져가셔야 할 것입니다.”“숭늉 한 사발 가져가는 것이 무슨 대수라고…….”“그릇에 담긴 그대로 고스란히 세자저하께 올리셔야 합니다. 아시지요? 세자저하의 성정, 엄격하기 그지없다는 것을요. 혹여 무슨 실수라도 하셨다간 장 내관님은 물론이고 우리 수라간 궁녀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걱정하지 마시게. 내가 누구인가? 조선 최고의 내관들도 견뎌내기 힘들다는 동궁전에서 5년을 넘게 견뎌낸 장 내관이 아닌가. 세자저하께서도 인정한 손끝 야무진 내관, 그것이 바로 나란 말일세. 그보다…… 무슨 땀을 그리 흘리는가? 어디 아픈 것이 아닌가?”“아, 예. 요즘 무리를 하였는지, 툭하면 이리 땀이 나네요.”향금은 소맷부리로 이마를 훔쳐냈다.

“저런 쯧쯧. 그리 무리를 해서야 되겠는가? 최고상궁께 말씀드려 며칠 쉬는 게 어떻겠는가?”“식은땀 좀 흘린다고 해서 쉴 수야 없지요.”“모르는 소리. 수라간의 궁녀란 그리 몸이 허해서는 아니 되네. 자고로…….”장 내관은 허리를 쭉 펴며 말을 이었다.

“건강한 몸에서 건강한 음식이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자네들의 몸이 건강해야 우리 세자저하께서 건강한 음식을 젓수지 않으시겠는가.”“뭐, 아주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그런데…….”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장 내관을 향금이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금 그거 안 가져가시면 다 식을 겁니다. 세자저하께서는 너무 뜨거운 것도 아니 드시지만, 너무 차갑게 식은 숭늉도 아니 드시지요.”“아차차. 내 정신 좀 보게. 그럼, 이만 가네.”말이 끝나기 무섭게 장 내관은 수라간을 나섰다.

허둥지둥 걸음을 옮기는 그의 등 뒤에서 향금의 걱정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가십시오. 그러다 넘어지겠습니다.”“걱정 마시게. 나 장 내관일세. 손끝 야무진 장 내관.”장 내관이 한쪽 손가락을 활짝 펼쳐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  *  *

수라상이 차려진 중희당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방 안에서 들려오는 것은 기미 상궁의 음식 씹는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시간을 들여 기미를 마친 음식이 영의 앞에 놓였다.

“저하, 젓수옵소서.”최 내관의 은근한 재촉에 영은 마지못해 숟가락을 들었지만, 딱히 입맛이 없었다.

근래 조정의 일들을 처리하느라 과로한 탓인가.

목구멍이 간질간질하고 입안이 깔깔했다.

그 어떤 산해진미를 앞에 갖다놓아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저하, 찬이 마땅치 않으시옵니까?”묻는 최 내관의 얼굴에 근심이 서렸다.

수라상 너머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수라간 궁녀들의 얼굴에도 걱정이 가득하였다.

“어찌 이리 못 드시는 것이옵니까?”“입맛이 없구나.”“하오면 무에 입맛 나는 것으로 다시 올리라 하올까요?”“되었다. 그만 물리거라.”“새벽에 올린 미음도 절반이나 남기시질 않으셨사옵니까. 조금만 더 젓수옵소서.”최 내관이 애원했지만, 영은 고개를 저으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최 내관의 주름진 얼굴에 더욱 깊은 골이 파였다.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장 내관이 숭늉이 든 소반을 들고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이건 무언가?”“숭늉이옵니다.” 마침 잘 되었다는 듯 최 내관이 서둘러 숭늉을 영의 앞에 내밀었다.

“저하, 그럼 이 숭늉이라도…….”영은 전전긍긍하는 최 내관을 달래기 위해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어떠시옵니까, 저하. 괜찮으시옵니까?”“그래. 이건 그나마 먹을만하구나.”수라상을 받은 이후 내내 불편한 표정을 짓던 영은 알맞게 식은 숭늉을 훌훌 마셨다.

최 내관의 주름진 미간이 그제야 겨우 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쿨럭…… 쿨럭, 쿨럭, 쿨럭.”“저하…….”왕세자의 갑작스러운 기침에 최 내관의 얼굴이 하얗게 탈색되었다.

“저하! 왜 그러시옵니까? 어인 기침이옵니까?”“괜찮다. 별거 아니다.”그러나 괜찮다는 말과는 달리 영의 입에선 연신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순조 30년 4월 22일 밤.

기침을 하던 왕세자께서 한 사발이나 됨직한 피를 쏟았다.

목구멍이 부어 음식을 못 넘기는 ‘기망’이란 급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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