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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미 그린 달빛-111화 (111/131)

111. 널 지킬 수 있게 해주어…… 정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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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4

“뭐 하고 있는 게냐?”차마 걸음을 떼지 못하는 라온의 팔을 채천수가 잡아당겼다.

그와 겨루고 있던 두 사내는 채천수와 나머지 두 노인에게 무참히 밟힌 후였다.

“그놈. 하필 잘라도 거길…….”바닥에 주저앉아 끙끙대는 젊은 사내들을 보며 박두용이 쯧쯧 혀를 찼다. 앞으로 저들은 사내도 계집도 아닌 삶을 살아가겠지. 그 삶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잘 알기에 조금은 가엾게도 느껴졌다.

그때, 따악 뜨거운 기운이 박두용의 뒤통수를 가격했다.

“에라이, 미친 노인네야. 네 목숨줄 노린 놈들을 가엾게 생각하는 게냐?”채천수가 눈을 부라렸다.

“목숨은 목숨이고 가엾은 건 가엾은 거지.”“그런 쓸데없는 정은 개나 물어가라고 해라.”“뭐야?”“이놈이. 살려줬더니 고맙다는 말은 못 하고.”“이놈아, 네가 언제 나를 살려 줬느냐? 내가 네놈을 살려준 것이다.”투닥거리는 두 사람 사이로 한상익이 끼어들었다.

“이 철없는 사람들아. 싸우더라도 분위기 좀 봐가며 싸워.”“네놈은 뭔데 끼어들어?”“저리 비켜. 내 오늘 이놈하고 저승길 함께 가련다.”다시 소매를 걷어 올리는 채천수의 등을 한상익이 잡아당겼다. 그리고 라온에게 눈짓을 했다.

“살 길을 열어줬으니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저 젊은이가 원하는 일이고 또한 저하께서 원하는 일이다.”“하지만…….”“네가 있으면 되레 방해만 될 게다.”한상익의 말에 라온은 병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저분의 말씀이 옳다. 네가 있으면 내가 마음껏 싸우질 못할 거야.”“김 형.”“암자 뒷문으로 나가면 작은 오솔길이 있어. 그 길을 따라 한 시진만 가면 된다.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어라.”병연의 말에 라온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이 아파왔다.

심장이 돋아난 칼날이 마음을 사납게 헤집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자신 때문에 병연이 저리 피 흘리고 있는데, 작은 도움조차 되지 못하는 무기력함이라니.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오직 하나였다.

병연을 믿는 것.

그리고 마음속으로 그를 응원하는 게 고작이었다.

“김 형, 꼭 오셔야 합니다.”라온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실린 간절한 염원이 병연에게 생생하게 와 닿았다.

“그거 아느냐?”병연이 돌연 질문을 던졌다.

“네?”“너를 만나 내가 오래전에 잃은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그게…… 무엇입니까?”병연은 대답 대신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당장에라도 생명을 잃을지 모르는 심각한 상황.

그러나 그것을 까맣게 잊을 만큼 환하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고맙다.”이렇게 다시 웃음 지을 수 있게 해 줘서.

내 곁에 와 줘서.

이리 널 지킬 수 있게 해주어…… 정말 고맙다.

“이제, 그만 가라.”“기다릴 겁니다. 안 오시면 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그래.”기다려다오. 그리고 모든 근심 다 잊어버린 얼굴로 날 향해 웃어다오.

나는 그것이면 된다.

라온과 그 일행들이 뒷문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병연이 박만충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제 제대로 한번 해 볼까?”병연은 지금까지 잡고 있던 검을 놓아주었다.

내내 힘을 주던 박만충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나뒹굴었다.

“네놈이 기어이…….”박만충의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그는 분을 참지 못한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검을 고쳐 쥐는 그의 앞으로 병연이 성큼성큼 다가갔다.

크게 다친 쪽은 병연이었으나, 두려움에 떠는 사람은 오히려 박만충이었다.

“기어이…… 기어이 그대가 끝내 내 앞을 가로막는구려!”이를 으득으득 갈던 박만충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짐승처럼 붉은 눈빛으로 득달처럼 병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병연은 차분한 눈으로 검을 들었다. 박만충을 보는 그의 두 눈에는 측은함이 어려 있었다.

내가 라온을 만나 웃음을 되찾았듯, 넌 부원군을 만나 짐승 같은 본성을 끄집어내게 되었구나.

그러고 보면 참 거울 같은 녀석이다. 홍라온, 그 녀석은 말이다.

병연은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

박만충도 발작적으로 검을 허공에 그었다.

두 검이 허공에서 부딪히며 귀기 서린 푸른빛을 번뜩였다.

*  *  *

좁은 암자를 뒤덮던 쇳소리는 금세 끝이 났다.

쨍그랑.

박만충의 칼날이 두 동강이 난 채 바닥을 뒹굴었다.

병연의 검에 허벅지를 당한 박만충은 바닥을 엉금엉금 기었다. 병연에게서 최대한 멀어지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이었다.

그러나 불과 네 평 남짓한 방.

달아나기에는 지나치게 협소했다.

금세 병연의 발치에 잡혀버린 박만충이 그의 다리를 붙들고 애원했다.

“사, 살려주시오.”“내가 왜 널 살려줘야 하지?”“백운회에 있을 때 그대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지 않소? 그대 역시 나를 좋게 본 것 알고 있소. 그러니 그간의 정리를 보아서라도 제발 살려주시오.”그의 간사한 혓바닥이 뱉어내는 말을 병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되받아쳤다.

“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자가 남의 목숨은 그리 가볍게 여겼는가? 용서? 백운회를 배신하고, 세자저하의 기대를 버리고, 나와 등을 돌릴 때 이만한 각오도 없었단 말이냐?”병연의 검이 박만충의 발등에 꽂혔다.

“으아아악!”박만충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윽고 그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난, 난 그저 시키는 대로……. 이 나라 조선을 위해 앞장선 것뿐이란 말이오.”“조선을 위해서?”악에 받친 박만충이 병연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렇소. 난 이 나라를 위해 헌신한 것이었소.”“그래서 세자저하를 배신했단 말이냐? 네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아니, 난 틀리지 않았소. 틀린 것은 세자저하시지. 그리고 당신도 틀렸소.”“세자저하께서 뭐가 잘못되었단 말이냐? 그분께선 이 나라 백성을 위해…….”“백성을 위해 노력하신다고? 크하하.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이더냐?”“사람에겐 모름지기 태어난 순간부터 주어진 역할이 있는 법. 왕에겐 왕의 역할이, 사대부에겐 사대부의 역할이 있듯 평민과 노비에게도 각각의 역할이 있는 법이오. 하물며 개미나 벌 같은 미물조차도 각자의 역할이 있소. 그런데 세자저하께서는 백성을 위한다는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이 모든 규칙과 질서를 어지럽히려 드시니……. 어찌 그 행동이 이 나라 조선을 위한다 할 수 있겠소?”병연의 두 눈에 뜨거운 불길이 일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주어진 역할이라 했느냐? 그렇다면 라온은 어떠하냐? 그 아이는 어린 시절 이미 역적의 자식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단희는 어떠하냐? 그 아이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역적의 자식이었다. 설마, 하늘이 이 두 아이에게도 역적이라는 역할을 맡겼단 말이더냐?”“그렇소.”박만충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대답했다.

“길을 걸으면 벌레를 밟게 되고, 횃불을 밝히면 나방이 달려들어 죽는 법. 세상의 순리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희생은 어쩔 수 없는 법이라오. 원망하려거든 하필 역적의 자식으로 태어나게 한 하늘을 탓해야 할 터.”“질서를 위해 누군가가 희생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그게 무슨 소리요?”“세상의 균형을 위해 하늘이 그리했다면, 하늘을 보지 않을 것이다. 죽는 게 억울하다 했느냐? 시켜서 한 일이라 했느냐? 아니, 틀렸다. 모든 것은 네가 결정한 것이다. 높은 사람의 명이라 하여 고민 없이 따른 것, 이것은 엄연한 너의 결정이다.”“그건 궤변이오.”박만충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어쩌면 네 말이 옳을지도 모르겠구나. 넌 시키는 대로 한 부속에 불과할 뿐일지도 모르지. 잘못 만들어진 망가진 부속.”인성을 상실한 인간.

박만충을 바라보는 병연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일말의 감정이 그의 속에서 사라졌다.

병연은 허공으로 검을 추켜들었다.

기겁한 박만충이 그의 발치에 매달렸다.

“제발 용서하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부원군이 협박을 해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했던 일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살려만 주신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바닥을 기라면 기고, 발바닥을 핥으라면 핥을 것이니, 살려주십시오.”“…….”그러나 박만충을 향한 병연의 검은 그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박만충의 목덜미에 병연의 검 끝이 닿는 순간이었다.

“너도 나와 똑같은 놈이다!”두 눈을 부릅뜬 채 박만충이 소리쳤다.

“뭐?”“나를 죽인다면 너 역시 똑같은 살인자다. 필요해 의해 사람을 죽이는 나나, 계집 하나 살리겠다고 여러 사람을 죽인 너나, 다를 것이 무엇이냐? 손에 피 묻히는 건 피차 마찬가지가 아니더냐?”이를 드러내며 히죽대는 박만충의 얼굴이 병연의 눈동자에 맺혔다.

이런 자와 내가 같다고?

그래,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기에 라온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를 베고, 상처 입히는 잔인한 모습. 그 녀석에게만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히죽대는 박만충의 얼굴 위로 제 얼굴이 겹쳐 보였다.

검을 든 병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죽일 가치도 없는 놈.”낮게 중얼거리며 병연은 돌아섰다.

그때였다.

미친 듯 히죽대던 박만충이 돌연 품에서 단도를 꺼내 들었다.

“죽어라!”사력을 다한 그가 등을 돌린 병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쓱.

방을 나서던 병연이 등도 돌리지 않은 채 검을 휘둘렀다.

시린 빛줄기를 뿌린 검은 잠시 후, 다시 검집으로 갈무리되었다.

동시에 병연을 향해 달려들던 박만충은 그대로 바닥으로 털썩 떨어졌다.

“처음부터…… 살려둘 생각이 없었군.”바닥으로 고꾸라진 박만충의 가슴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왜 내가…… 죽어야 하지? 어째서 내가……? 난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박만충의 허망한 중얼거림이 피 거품과 함께 사라졌다.

병연은 암자를 나섰다.

하늘에서 내린 눈송이가 그의 볼에 와 닿았다. 체온에 녹은 눈송이와 함께 얼굴에 묻어 있던 핏물이 흘러내렸다.

‘기다릴 겁니다. 안 오시면 오실 때까지 기다릴 겁니다.’머리카락을 흩날리는 매서운 바람 끝으로 라온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곧 가마.”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온몸에 덕지덕지 묻어있는 죽음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병연은 눈을 한 움큼 집어 들었다.

고단한 그의 삶이 하얀 눈 속에 씻겨 나가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하얀 눈밭에 붉은 꽃잎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병연이 벗어놓은 비루한 삶의 한 자락이었다.

핏물과 함께 제 마음속에 남아 있던 찌꺼기까지 모조리 훌훌 털어버린 병연은 라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영은 창덕궁의 높은 누각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세상은 눈 속에 갇혀 버렸다.

“저하.”시린 바람을 맞으면서도 망부석처럼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그의 곁으로 최 내관이 다가왔다.

“대전에 드실 시각이옵니다.”“시간이 벌써 그리되었구나.”낮게 한숨을 쉬던 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율이는 아직이더냐?”그 순간.

작은 미풍과 함께 한율이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영의 눈동자에 이채가 들어찼다.

“기별이 왔느냐?”“네. 저하.”“하여, 어찌 되었느냐?”“모두 무사히 안가(安家)로 몸을 피하셨다고 하옵니다.”“그래, 다행이구나.”그제야 오래 묵은 체기가 내려가는 듯했다.

내내 갑갑한 숨을 내쉬던 영은 가뿐해진 표정으로 대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영이 대전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신료들이 앞다퉈 입을 열었다.

“저하, 추국청을 설치하시옵소서.”“역당의 잔당들을 찾아내셔야 하옵니다.”“저하, 한시가 바쁘옵니다. 저들이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 모를 일이옵니다. 하오니…….”“그만하라.”영이 낮은 목소리로 대신들의 입을 막았다. 일순, 대전은 찬물이라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어좌에 몸을 실은 영은 찬찬한 시선으로 대신들을 돌아보았다.

마치 그들의 머릿속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영의 입가에 옅은 조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부원군께서 역도를 잡기 위해 보내셨다던 추격대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는 거요?”영의 물음에 김조순이 딱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갑자기 내린 눈으로 발길이 잡힌 모양이옵니다.”“그렇군. 그렇다고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영이 단상 아래 열을 맞춰 앉아 있는 대신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들으시오. 이제부터 역도의 무리를 발본색원할 것이오.”“성은이 망극하옵니다.”자신들의 뜻이 관철되었다 생각한 대신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성은을 외쳐댔다.

그들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영이 말을 이었다.

“어영대장은 지금 당장 제조와 도제조와 함께 궁 안을 샅샅이 뒤지시오. 조금이라도 행적이 미심쩍은 자가 있다면 지위고하와 이유를 불문하고 잡아들여야 할 것이오.”“명 받자옵니다.”“이 일은 지위고하를 막론하여야 할 것이오. 궁에 있는 궁녀는 물론이고 환관, 무관, 그리고 문관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철저히 조사토록 하시오. 조사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있는 사람은 과거의 행적까지 모조리 수색하여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할 것이오.”순간, 대전에 작은 술렁거림이 일었다.

지위고하에 상관없이 모든 자를 조사하라?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있으면, 과거의 일까지 모조리 뒤져라?

세자저하의 말대로 따르면, 만약에 있을 역도뿐만이 아니라 비리와 부패한 내용이 모조리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되는 게 아닌가?

현재 관직이 있는 자들 중엔 은밀한 뒷거래로 자리를 차지한 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번 일로 그들 역시 무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당했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대신들의 표정이 멍해졌다.

뜻하지 않은 왕세자의 명에 몇몇 외척이 고개를 위로 들었다. 그러나 영은 그들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행여 이 일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그자를 역도의 배후로 보고 철저하게 조사하여 응징할 것이오.”명을 내린 영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신들을 버려둔 채 그대로 일어나 대전을 나갔다.

그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거침없는 행보가 시작되었다.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아이와 노인이 보호받고 여인이 여인으로 살 수 있는 나라.

하여, 홍라온이 온전한 모습으로 바로 설 수 있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영의 걸음이 세상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  *  *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김조순의 사랑채에서 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근래 들어 연일 웃음꽃이 피던 모습과는 사뭇 그 광경이 달랐다.

모여 있는 사내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왕세자의 명으로 궁에 숨어든 역적의 무리를 가려내기 위해 궁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밝혀지고 잡히는 것은 부정부패를 저지른 외척세력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역적을 잡겠다는 명분으로 조선 8도로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 그리고 안동 김씨 일문이 저지른 비리들이 대거 밝혀지고 있었다.

왕세자가 쏜 화살이 언제 자신을 향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영의 지위를 흔들겠다는 것이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된 것이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병조판서의 우는 목소리가 김조순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내내 수염을 쓸어내리며 침묵하던 김조순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허허허. 그날 보였던 모습은 이걸 위한 숨겨진 칼이었군. 과연, 과연 저하시로군.”어쩐 일로 순순히 자신의 의견에 따라 준다고 하였다.

이 모든 것이 역당을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외척을 몰아내기 위한 왕세자의 계책이었다.

역도의 무리가 숨어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관인들의 비리를 끄집어내기 위한 좋은 핑계가 되고 말았다.

아직 연치 어린 세자에게 놀아난 꼴이 아니던가.

김조순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대감.”“어찌하면 좋겠는가? 이미 우리는 가진 패를 모두 쓰고 말았네.”“하오면 이대로 두 손 놓고 지켜보고만 계실 것이옵니까? 무슨 수를 써야지요.”“지금까지 세자께서는 우리가 내놓은 모든 수를 역이용하셨다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가 가진 모든 기틀이 무너지고 결국은 저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흘러가겠지.”“…….”“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밖에 없네.”“하나밖에 없다 하시면? 혹시…….”김조순의 말을 곱씹던 예조판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던 김조순이 문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대감.”문풍지에 그려지는 그림자를 향한 그의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문이 활짝 열렸다.

이윽고 열린 문틈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아니, 저 자는…….”“저 자가 어찌 이곳에?”날 선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내는 긴 방을 가로질러 김조순의 앞에 섰다.

“어서 오시오, 조 대감.”김조순이 눈앞에 선 사내를 향해 시선을 올렸다.

그와 시선을 마주한 이, 다름 아닌 세자빈의 아비인 조만영이었다.

이해와 득실.

정치에서 필요한 것은 오직 이 두 가지였다. 그러기에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었다.

깊은 밤.

강직한 영에게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 부러질지언정 절대 굽히지 않는 왕세자와는 절대 성사될 수 없는 거래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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