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너에겐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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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21
잠든 영의 미간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목덜미로 흥건한 땀이 흘렀다. 허공을 바투 쥔 손은 연신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끈적이는 아교처럼 악몽이 그를 옭아맸다.
그리운 것을 찾지 못한 영의 입에서 기어이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온아, 라온아.”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뒤척이는 몸짓이 더욱 사나워졌다.
“라온아, 안 된다. 안 돼…… 안 돼!”마른 비명이 높아지고 갈라졌다.
급기야 영은 발작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감은 눈을 떠보니 캄캄한 어둠이 그를 맞이했다.
“꿈이었구나.”허망한 중얼거림이 바람처럼 입술 사이를 맴돌았다.
땀으로 흥건해진 이부자리를 젖혔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영은 손을 뻗어 머리맡을 더듬었다. 잠들기 전 최 내관이 두고 간 자리끼가 만져졌다.
영은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기 위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주전자 하나 가득 들은 물이 순식간에 비워졌다.
그럼에도 갈증은 여전했다. 성마른 목마름이 숨통을 죄어왔다.
답답해. 답답해. 바깥바람이라도 쐬며 괜찮아지려나.
근원을 알 수 없는 갑갑함이 가슴을 내리눌렀다.
영은 서둘러 처소를 나섰다. 비척거리는 걸음이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다.
“저하, 벌써 기침하시었사옵니까?”왕세자께서 침수 드신 지 고작 반 사진이 흘렀을 뿐이었다.
영을 바라보는 최 내관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잠시 바람이나 쐬려는 것이니, 쫓아올 것 없다.”말을 했지만, 고집불통 최 내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그는 졸음이 묻은 눈을 비비며 조용히 영의 뒤를 쫓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
등 뒤에 긴 행렬을 꼬리처럼 붙인 채, 영은 걸음을 옮겼다. 처소를 나서니 시리도록 하얀 눈이 그를 반겼다.
영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저녁 무렵부터 다시 시작된 눈은 세상을 온통 눈밭으로 바꾸고도 그 기세가 수그러지지 않았다.
길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바람을 폐 속 가득 담았다.
그러나 무겁고 갑갑한 마음은 여전했다.
“내 속이 어찌 이리 답답한 것이냐? 어찌 이리 불안한 것일까? 너는 아느냐? 라온아…… 내가 어찌 이럴까?”버릇처럼 라온에게 말을 걸던 영은 문득 입을 닫았다.
이내 그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떠올랐다.
또 깜박 잊고 있었다. 이제 이 궁엔 라온이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 불안함의 근원을.
홍라온, 그녀의 부재가 기울어버린 추처럼 그를 불안하게 했다.
그 허전함과 허망함이 그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사나운 꿈이라도 꾸셨나이까?”최 내관의 걱정스러운 음성이 영의 귓전을 두드렸다.
“그래.”아주 사나운 꿈을 꾸었다.
라온이 영영 떠나버리는 꿈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녀를 찾을 수 없는 꿈을 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보내지 말 것을 그랬다. 곁에 꽁꽁 숨겨 둔 채 살 것을…….
버성긴 가슴에 후회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그럴 수는 없지. 내 마음 편하자고 그 사람을 일평생 숨어 살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리웠다.
너무나 그립고 걱정되어 미칠 것만 같았다.
“율아.”눈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영은 입을 열었다.
하얀 입김이 허공에 채 번지기 전에 율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곳에 보낸 아이들에게서는 아직 기별이 없느냐?”“눈길에 발이 묶인 듯하옵니다.”“그래?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니겠지? 부원군이 보낸 자들이 벌써 그 사람을 찾아낸 것은 아니겠지?”“걱정 마시옵소서. 행여 그렇다고 하여도 난고께서 곁을 지키고 있지 않사옵니까? 하오니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그래, 난고가 있지. 그 녀석이 곁에 있지.”영은 애써 마음의 불안을 털어냈다.
오늘만큼 자신의 신분이 답답하다 느낀 적이 없었다.
왕세자란, 그 고귀한 자리란 가장 높은 곳에 있어 뭐든 일을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가장 높은 곳에 있기에 우두커니 바라만 볼 수밖에 없는 자리였다.
사모하는 정인의 곁을 지킬 수 없는 사내란 참으로 무기력했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먼 허공으로 시선을 던지는 일뿐이었다.
홍라온, 너 괜찮은 거지?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나는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아무 일도…….
어딘가, 라온이 있을 그곳을 영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 *
“헉헉.”마른 숨이 턱밑에 딱 달라붙었다.
그러나 긴 날숨 한번 제대로 쉬지 않은 채 병연은 암자를 향해 내달렸다.
살아남은 박만충과 그의 수하들이 암자로 갔다 했다. 그들이 암자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아야 한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두런거리는 목소리와 바쁘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
박만충 일행이 틀림없었다.
병연은 달리는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하얗게 눈 쌓인 설산을 나는 듯 뛰어올랐다.
잠시 후, 거친 숨을 몰아쉬는 병연의 눈에 박만충의 모습이 들어왔다.
험한 길을 질러간 끝에 간신히 박만충 앞을 막아 막아설 수 있었다.
“누구냐?”느닷없이 길을 가로막는 불청객의 등장에 박만충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이윽고 병연을 알아본 그의 입아귀에 비릿한 웃음이 피어올랐다.
“하하하, 이게 누구신가? 회주가 아니시오? 회주께서 여긴 무슨 일이시오?”능청을 떨며 조롱하는 그의 말에도 병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는 그대는 여기에 무슨 일인가?”“나야 찾을 사람이 있어서 왔지요.”박만충의 입술 끝이 뒤틀려 올라갔다. 바라보는 눈빛이 음험해졌다.
“비켜주시는 게 어떻겠소? 난 엄연히 이 나라 조선을 위해 역적의 무리를 잡으러 온 것이오.”병연은 대답 대신 옆구리에 찬 검을 꺼내 들었다.
박만충의 눈썹이 사납게 휘어졌다.
“오늘따라 귀찮은 것들이 어찌 이리 달라붙는 것인지 모르겠구나.”병연을 노려보던 박만충은 곁에 있는 수하에게 눈짓을 보냈다.
“너는 아이들과 함께 여기에서 저자를 막아라. 그리고 너와 너, 너희 둘은 나와 함께 간다.”명령을 내린 박만충이 걸음을 옮겼다.
“어림없다!”병연이 박만충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박만충의 수하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고 달려들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으로 날아드는 십여 자루의 칼날.
어쩔 수 없이 병연도 검을 뽑아 대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놈을 막아야 한다.”수하들에게 엄포를 놓은 박만충이 암자를 향해 몸을 날렸다.
“멈춰라.”병연이 이를 악물고 몸을 날렸으나, 앞을 가로막는 칼들로 인해 다시 한 번 발길을 멈추고 말았다.
병연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이 이들부터 정리하는 수밖에 없었다.
병연의 검이 서늘한 광채를 흩뿌렸다.
춤을 추듯 나비 몇 마리가 무인들 사이를 날아다녔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검무.
하지만 그 차가운 숨결에 닿은 자들은 어김없이 설원 위에 붉은 꽃을 피우며 쓰러져야 했다.
순식간에 다섯이 쓰러졌다.
하지만 남은 자들은 쓰러진 자들보다 많았다.
병연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저 멀리 어둠에 잠겨 있는 암자의 모습이 눈동자에 아리게 박혔다.
기다려라, 라온아.
곧 돌아가마. 곧…….
그러니 잠시만, 잠시만 무사히 있어다오.
잡고 있던 검을 고쳐 쥔 병연은 비상하는 새처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윽고 하얀 눈밭에 다시 푸른 불꽃이 튀었다.
생과 사를 가름하는 푸른빛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하얀 눈밭은 점점 붉게 물들어갔다.
* * *
병연이 돌아오면 언제라도 떠날 수 있게 만만의 준비를 끝낸 라온은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어머니와 단희, 그리고 자신을 무섭게 쏘아보는 세 노인.
한양을 떠나올 때부터 노인들의 눈빛은 줄곧 저러했다. 애써 무시했지만 저리 지척에서 쏘아보니 라온은 온몸이 저릿할 지경이었다.
보다 못한 단희가 제일 성난 빛으로 쏘아보는 채천수의 시선을 쓱 막았다.
“그만 노려보세요. 그러다 우리 언니 얼굴에 구멍 나겠어요.”혈육을 감싸는 단희의 다부진 말에 채천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저놈 때문에 어떤 꼴이 되었는지 아는 게냐? 평생 공들인 내 모든 것이 무너졌어. 그리고 이젠 쫓기는 신세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팔자가 되었단 말이다. 그런데 복수는커녕 노려보는 것도 못한다는 게야?”“하지만…….”반박하려는 단희를 라온이 황급히 말렸다.
“그만둬, 단희야.”“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시잖아요.”“내 잘못이야.”단희의 머리를 쓰다듬어준 라온이 채천수에게 깊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엄공 어르신. 정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한양을 떠나오면서 입에 닳도록 했던 말이었다.
하지만 채천수는 팔짱을 끼며 콧방귀만 뀌었다.
“잘못하였다, 한마디로 끝날 일이 아니다. 세상일이 모두 그렇게 끝나면 순라군이 왜 있겠느냐?”“정말 너무하셔요.”단희가 다시 볼멘소리를 냈다.
그때였다.
묵묵히 곁에서 지켜보던 최 씨가 돌연 채천수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송구합니다.”최 씨까지 나서자 채천수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새겨졌다.
“딸아이를 사내로 키운 것은 저입니다. 역적의 식솔을 잡기 위해 관군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지요. 살고 싶었습니다. 어린 새끼들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딸아이를 사내처럼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최 씨의 말에 라온을 바라보던 박두용과 한상익의 눈빛이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최 씨는 그렁그렁 눈물이 들어찬 눈으로 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만든 계책입니다. 그들이 찾는 것은 계집아이와 그 어미이니. 저리 사내아이로 만들면 관군들의 눈을 피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이 아이를…… 라온이를 그만 나무라십시오. 탓하시려거든 저를 탓하십시오. 이 아이의 죄라면 못난 어미를 둔 죄뿐입니다.”“아닙니다. 어머니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일입니다. 궁으로 들어간 건 순전히 제 선택이었어요. 돈을 많이 주신다는 바람에 제가 국법을 어긴 것입니다.”라온이 저고리 고름으로 눈물을 훔치는 최 씨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지켜보던 단희의 커다란 눈에서도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언니. 미안해요. 다 저를 위해서……. 제 병 때문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팔짱을 낀 채 지켜보던 채천수가 눈초리를 위로 치켜떴다.
“이것들이! 어디서 불쌍한 척을…….”그때 박두용이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 인정머리 없는 놈아. 저 아이들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세 모녀의 처연한 모습에 가슴 뭉클해진 박두용은 눈가에 맺힌 물기를 닦아냈다. 한상익이 박두용을 거들고 나섰다.
“박가야. 저놈이 어찌 일평생을 엄공으로 살아올 수 있겠느냐? 다 저 인정머리 없는 심보 덕분이다.”“하긴. 얼마나 독하면 사내의 보물에 칼질하는 도둑놈이 되었겠는가. 보통 독한 마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암암, 그렇고말고.”박두용과 한상익이 쿵짝을 맞춰 채천수를 나무랐다.
“이것들이! 아주 작당을 하고 내 피를 말리려 드는구나.”어이없는 표정을 짓던 채천수가 제 가슴을 쿵쿵 치며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누구 하나 들어주는 이가 없었다.
그렇게 세 노인의 투닥거림이 이어질 때였다.
벌컥.
굳게 닫혀 있던 암자 문이 느닷없이 열렸다.
“오라버니세요?”한양을 떠난 뒤로 병연을 부쩍 따르던 단희가 단숨에 문밖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아악.”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한 사내가 단희의 머리채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여기들 있으셨소? 한참을 찾지 않았소이까. 하하하.”나지막한 웃음과 함께 박만충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사람들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서로 잡아먹을 듯 투닥거리던 노인들은 라온과 최 씨의 앞을 둥글게 병풍처럼 둘러쌌다.
“허허. 세 분도 여기 함께 계셨습니까? 덕분에 따로 찾으러 다녀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되었군요. 하하하하.”호통하게 웃은 박만충이 눈을 가늘게 뜨며, 섬뜩한 빛을 번뜩였다.
“자, 그럼 쉴 만큼 쉬셨으니 그만 가셔야지요.”“가다니, 어딜 간단 말이냐?”한상익이 박만충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소리쳤다.
“어디긴, 어디겠습니까? 한양이지요. 가셔서 죗값을 받으셔야 할 것이 아닙니까?”“죄? 지은 죄가 없는데, 무슨 죗값을 받으란 말이냐? 어림도 없는 소리.”채천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늘따라 짜증나게.”거듭된 방해에 그는 화가 치밀 대로 치민 상태였다.
그가 돌연 발을 들어 채천수의 옆구리를 힘껏 내리찍었다.
느긋하게 말이 오가다 돌연 벌어진 일.
채천수는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고스란히 그 발길을 얻어맞고 말았다.
“어이쿠. 이놈이 한다는 신호도 없이…….”마른 비명과 함께 채천수가 한쪽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에 침을 탁 뱉은 박만충이 뒤따라 들어온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노인네들이 나잇살 처먹고도 아직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르는 모양이다. 정신 사나우니 깨끗하게 치워버려라.”“네. 알겠습니다.”수하들이 쓰러진 채천수를 무자비하게 치고 밟았다.
“아이고. 이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노인네를 잡는구나. 네놈들은 부모도 없느냐?”“채가야, 괜찮은 거냐?”박두용과 한상익이 채천수를 밟고 있는 두 사내에게 달려들었다.
좀 전까지 서로를 타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어느새 하나로 똘똘 뭉친 세 노인은 젊은 사내들과 한데 엉키며 단결력을 자랑했다.
“네 이놈들. 내가 뉘인 줄 아느냐? 내가 바로 조선 최고의 환관, 박두용이다.”“나도 똑똑히 봐라. 주상전하께 어주를 세 번이나 하사받은 능력 있는 환관, 한상익이다.”소매를 걷어붙인 두 노인의 모습에 박만충의 수하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 노인네들이 지금 뭐라고 앵앵거리는 거야?”“죽고 싶어 환장했나.”그때였다.
박두용과 한상익 덕분에 겨우 두 사내의 매질에서 벗어난 채천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네놈들이 지금 누구를 건드렸는지 아느냐?”“이건 또 뭐야?”얼굴에 작은 흉터가 있는 수하가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순간, 채천수가 숨겨두었던 칼을 꺼내 들었다.
초승달 모양의 단도.
엄공 채천수가 시술할 때 쓰던 그 단도였다.
“내가 누군 줄 아느냐? 조선 최고의 엄공, 채천수다. 어느 놈이냐? 누가 먼저 내 칼 맛을 볼 테냐? 내가 네놈들을 사내도 계집도 아닌 몸으로 만들어주마.”말과 함께 채천수가 사내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 *
“쯧. 한심한 놈들.”세 노인과 뒤엉킨 수하들을 보며 박만충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오늘 밤은 하나같이 짜증나는 일투성이다.
무엇하나 그가 원하는 대로 순탄히 진행되는 것이 없었다.
술에 취한 윤성의 방해를 받지 않나, 기습의 기회를 놓치고 회주에게 발목이 잡히질 않나.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윤성의 등을 찌른 일이었다.
윤성에게 수하 몇이 쓰러지자 그만 눈이 뒤집히고 말았다. 하여, 칼끝에 실린 힘을 조절하지 못했다.
귀찮게 달라붙는 날 파리를 떼어내는 심정으로 수하 하나를 방패 삼아 그의 등을 찌른 것이…….
‘너무 깊었어.’등을 찌른 위치가 좋지 않았다.
또한, 너무 깊었다.
찌르는 순간, 느낌이 왔다. 이건 살리기 어렵다는 것을.
사람 하나 죽이는 것이 무에 큰 대수일까? 여태까지 그가 죽인 자들을 손가락으로 꼽으면 열 손가락을 몇 번이나 접었다 펴야 했다.
문제는 윤성이 그가 모시고 있는 분의 손주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변명하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 도망치던 역모의 식솔들이 저지른 짓이었노라 하면 그만이다. 자신이 나섰을 때는 이미 늦었노라 말하면 부원군 대감께서도 이해하실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손주를 잃은 김조순의 분노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으리라.
‘공들인 탑이 무너질 수도 있겠어.’세작 노릇을 하면서까지 노력한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된 이상 공(公)으로 과(過)와 실(失)을 덮을 수밖에 없다.
완전히 메우지는 못해도 대충 덮는 정도는 가능하겠지.
“그러기에 이번 일이 더욱 중요한 것이지.”박만충은 머리채를 잡고 있던 단희를 방 한가운데 툭 집어 던졌다.
“순순히 가겠느냐? 아니면 강제로 끌고 갈까?”라온에게 다가서며 박만충이 물었다.
황급히 단희를 제 등 뒤로 돌려세운 라온은 그의 앞을 꼿꼿하게 막아섰다.
“뭐야?”이쯤 하면 지레 겁을 집어먹고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아니면 벌레처럼 기는 것이 정상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계집은 전혀 그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되레 눈빛을 빛내며 자신과 맞서고 있었다. 그것도 손에 무기 하나 들지 않고서 말이다.
“거짓 사내 노릇을 오래 해서 그런지, 계집치고는 제법 눈빛이 좋구나.”박만충은 라온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섰다.
여전히 라온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맑은 눈동자엔 지켜내겠다는 의지와 살아남겠다는 필사적인 신념으로 가득했다.
문득 그 눈동자에 박만충,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짜증나는 눈빛이군.”못마땅한 듯 쯧, 혀를 차던 그가 말을 이었다.
“감아라.”라온의 눈동자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기분 나빴다. 마치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라온은 말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눈 감으라 하였다.”“싫습니다.”무엇도 그의 뜻대로 해줄 생각은 없었다.
잘못한 것이 없었다.
누구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었다.
작은 미물 하나도 함부로 죽인 적 없었다.
그래도 만약 누군가 죄가 무어냐고 묻는다면, 살기 위해 몸부림친 죄밖엔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살기 위해 노력한 것이…… 어찌 죄가 되고 죄인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역적의 핏줄이라는 것이 그리도 큰 죄란 말인가.
여인의 몸으로 환관이 된 것이 정녕 죽음으로도 모자랄 무거운 죄였던가.
고단한 세상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쉬이 틈을 허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라온은 지지 않고 맞섰다. 어떻게든 싸워 이겼다. 어머니를 위해, 단희를 위해 이겨내야만 했다.
하여, 이번에도 질 수 없었다.
라온은 두 눈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런 자에게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순순히 끌려가 영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었다.
“정녕 네가 죽고 싶은 게로구나.”이를 갈아 무는 박만충의 말을 라온은 또렷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제가 죽으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텐데요?”저들이 원하는 것은 살아 있는 라온의 입.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말하고 토설하여 영을…… 화초 저하를 궁지로 몰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다.
“오냐, 네 말이 맞다. 너를 죽여서는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고개를 끄덕이던 박만충이 돌연 라온의 멱살을 잡았다.
라온을 제 쪽으로 바싹 끌어당긴 그가 들고 있던 검을 치켜들었다.
시퍼렇게 날이 선 검날이 라온의 눈앞으로 바싹 다가갔다.
“허나, 네 눈깔 하나 없다고 해서 문제 될 것도 없겠지. 살아서 데려오라고 했지, 몸뚱이가 온전해야 한다는 분부는 없으셨으니…….”피식, 조소를 짓던 박만충이 검에 힘을 주었다.
날카로운 칼끝이 라온의 눈동자를 향해 서서히 밀려들어 왔다.
바로 그때였다.
“그만둬.”라온의 눈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오는 박만충의 검을 누군가 손으로 잡았다.
“김 형!”온몸에 피를 흠뻑 뒤집어쓴 병연이 검을 맨손으로 잡았던 것이다.
놀란 라온은 검을 잡은 병연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에서 검붉은 핏물이 후두둑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라온을 바라보는 병연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내가 조금 늦었구나.”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여상한 눈길로 라온을 바라보던 병연이 말을 이었다.
“이자와 잠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을 듯싶다. 그러니 뒤로 물러가 있어.”“하지만 김 형…….”라온은 떨리는 눈으로 피 흘리는 병연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안타깝고 분했다.
아프고 서러웠다.
이런 신세인 것이. 이런 처지에 놓인 것이.
자신 때문에 아파하고 고생하는 김 형을 이렇게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곁에 있음에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이 너무도 비참하고 초라했다.
“뒤로 물러가.”“싫습니다. 김 형 없이는 아무 데도 안 갈 겁니다. 못 갑니다.”“……성가신 녀석.”고집을 부리는 라온의 이마에 쿡, 제 이마를 맞대며 병연이 낮게 속삭였다.
“너에겐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