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라온아…… 라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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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7
한 무리의 사내들이 눈 덮인 겨울 산을 오르고 있었다.
횃불도 밝히지 않은 채 어두운 숲길을 오르는 사내들의 기세는 거칠고 험악했다.
“서둘러라! 이제 곧 놈들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맨 앞에서 산을 오르던 박만충이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초조한 기색이 어려 있었다.
“곧장 왔어야 했는데…….”만약의 상황을 대비한다고 흩어진 무리를 다시 모으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허비되었다.
그 시간에 곧장 달려왔더라면, 지금쯤 놈들을 잡고도 남았으리라.
하지만 상대는 김병연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글이나 쓰는 문사인 줄 알지만, 사실 그는 조선의 무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최고의 무사였다.
그를 상대하기 위해 뛰어난 실력의 무사를 서른 명이나 추려 데려왔다.
“얼마 남지 않았다.”박만충은 산을 올려다보았다.
이 산길 끝에 작은 암자가 하나 있다고 했다.
병약한 계집과 늙은 노인들이 섞여 있으니, 이 밤에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터. 아마도 그 생쥐 같은 자들은 암자에 숨어 있으리라.
그야말로 독 안에 갇힌 쥐 신세.
박만충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곧 만나겠군.”낮게 중얼거리던 박만충은 날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깊은 밤입니다. 어딜 가는데 그리 길을 재촉하는 겁니까?”불시에 들려온 목소리에 박만충을 비롯한 사내들은 움찔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넓적한 바위 위에 한 사람이 비스듬히 앉은 채 술병을 기울이고 있었다.
뚫어져라 상대를 응시하던 박만충이 얼굴을 찌푸렸다.
“이제 보니 참의셨구려.”윤성 역시 박만충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 말은 내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이제 보니 당신이었군요.”“부원군께서 보내신 것이외까?”“그건 아닙니다. 그러는 당신은…… 할아버지의 명으로 이 어두운 산길을 오르고 있는 겁니까?”“그렇소이다.”윤성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박만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이내 피식 웃었다.
“참으로 열심이십니다.”“뭐요?”“할아버지의 한마디에 이 어두운 겨울 산을 오르니. 그 충심이 참으로 장하십니다.”칭찬하는 듯했지만 말하는 목소리에 조롱이 가득했다.
박만충의 미간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저도 모르게 부르르 주먹을 떨던 그는 솟구치는 살기를 애써 잠재웠다.
“도움을 주실 것이 아니라면 이만 가 봐도 되겠소?”대답을 원한 물음이 아니었다. 이제는 각자 제 갈 길 가자는 일종의 통보였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박만충은 수하들을 이끌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어진 윤성의 말에 그는 다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배신하는 기분이 어떻습니까?”“지금 뭐라고 하시었소?”“배신하는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습니다.”“참의께선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배신이라니? 누가 누굴 배신했다는 것이외까?”“백운회의 일원인 당신이 백운회의 수장이신 그분의 의지를 무시하고 행동하고 있으니. 이것은 배신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하하하. 잘못 알아도 한참을 잘못 아셨소. 나는 처음부터 부원군의 사람이었지 백운회의 일원이 아니었소. 애초에 백운회는 부원군 대감의 명으로 정탐을 간 것이었지요. 그런 내가 배신이라니요? 대업을 위해 적진에 홀로 투신하였으니, 충신이라 하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오.”“충신이라…….”“이 나라와 종묘사직을 위한 일이었지요.”“마음에 걸리지 않았습니까?”“무엇이 걸린단 말이오?”“세자저하께서는 당신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진심을 보고도 흔들리지 않았습니까? 기어코 그분에게 해를 끼칠 마음이 들었던 겁니까?”순간, 박만충의 한쪽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지요.”“그렇습니까?”사람의 마음을 두고 마치 장난을 치는 듯한 그 모습에 윤성은 씁쓸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역시…… 할아버지의 충직한 개가 확실하군요.”“뭐라고 하시었소?”“이런, 들었습니까? 나는 당신을 따라가려면 한참이나 멀었다고 말하는 중이었습니다.”“쯧.”박만충의 입에서 혀 차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모습을 힐끗 곁눈질로 지켜보던 윤성이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꿀꺽, 꿀꺽.
시원하게 몇 모금 마신 그가 질문을 다시 이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을 잡으면 어찌할 생각입니까?”“부원군 대감께서 살려오라 하셨소.”“오호라. 목숨은 살려 주시겠다?”“물론, 곱게 끝낼 생각은 없소. 이 고생을 하게 만들었으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할 생각이오.”말을 하는 박만충의 얼굴에 본능적인 잔인함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윤성의 표정이 흐려졌다.
“……꼭 그리해야 합니까? 그들은 아무 죄도 없습니다. 죄 없는 사람들을 그리 괴롭혀야겠습니까?”“나를 이리 힘들게 한 것이 그들의 죄요. 덕분에 이리 심신이 고달파졌으니. 그냥 온전히 보낼 줄 수는 없지 않겠소?”“그렇군요. 헌데 말입니다.”“아직도 할 말이 남은 것이오?”박만충은 짜증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지체되어 마음이 급하건만. 시답지 않은 말로 자꾸만 발목을 붙잡고 있는 윤성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박만충은 검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을 주었다.
윤성은 그런 그의 모습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느릿하게 바위에서 일어나 옷자락을 툭툭 털어냈다.
“내가 얼마 전까지 큰 고민거리가 있었습니다.”“지금 고민거리라 했소?”급기야 참고 참았던 박만충의 짜증이 폭발했다.
“보면 모르겠소? 지금 우린 참의의 농지거리에 장단을 맞춰 줄 시간이 없소이다.”그러나 윤성은 박만충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오늘 어떤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놨더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작은 보답이라고 하고 싶어졌습니다.”“…….”박만충은 이를 으득 갈았다.
이자가 실성하였나.
죽일 듯 윤성을 노려보던 박만충이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무시하고 그만 가자. 술 취한 주정뱅이의 헛소리다.”그의 명령을 받은 사내들은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바로 그때였다.
“헉!”“욱!”일행의 맨 끝에서 돌연 답답한 신음성이 울렸다.
“……!”박만충이 차가운 눈매로 뒤를 돌아봤다.
수하 둘이 가슴을 부여잡은 채 쓰러지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쓰러지는 수하들의 곁에 윤성이 서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수작이요?”윤성이 피식 웃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은인에게 보답하고 싶다고. 지금 당장 가진 것이 이 차가운 검 한 자루뿐이니, 이런 식으로라도 보답할 밖에요.”윤성의 손에는 어느새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 * *
“좋지 않군.”산 아래를 내려다보던 병연이 반듯한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바람에 흔들리는 숲의 그림자가 심상치 않다.
병연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얼마 전까지 맑은 달을 보여주던 하늘은 그새 변덕을 부려 먹구름을 한껏 몰고 왔다.
먹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달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병연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달빛이 산을 비출 때마다 그는 매서운 눈으로 산 아래를 살폈다.
유백색의 달빛이 산자락에 내려앉을 때마다 계곡 가까운 곳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쇠와 쇠가 맞부딪칠 때 생기는 불꽃이었다.
병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숲을 진동하는 심상치 않은 기운.
바람결에 느껴지는 희미한 피비린내.
전장에서나 맡을 법한 죽음의 향기가 고즈넉한 암자를 향해 스멀스멀 밀려들고 있었다.
병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잠시 생각하던 그는 서둘러 암자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서 자신의 검과 삿갓을 챙긴 병연은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잔뜩 흐리던 하늘에선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어깨에 쌓인 눈을 가볍게 털어낸 병연이 산 아래로 걸음을 옮길 때였다.
“김 형.”잠든 줄 알았던 라온이 빠른 걸음으로 병연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직 안 잤던 거야?”“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헌데…… 이 밤에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내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어디에 가시려고요? 대체 무슨 일입니까?”“별일 아니다.”병연의 대답에도 라온은 살피는 듯한 눈빛을 풀지 않았다.
이윽고 그녀의 눈동자에 병연의 검이 들어왔다.
“김 형, 그 검은 대체 뭡니까? 정말 별일 아닙니까?”“걱정 마라. 그저 가벼운 순찰쯤으로 생각하면 된다.”병연은 안심시키듯 말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이내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서 있는 라온에게 앞을 가로막히고 말았다.
“안 됩니다. 못 갑니다.”“라온아.”“김 형, 뒤쫓는 자가 있는 겁니까?”“…….”“그런 거라면 당장 사람들을 깨우겠습니다. 이대로 우리 도망가요. 그러면 됩니다.”“이 밤에 어딜 가겠다는 거야?”“이 밤에 김 형 혼자 위험한 곳에 가도록 내버려둘 순 없습니다.”“그럼 어찌할까? 아픈 단희를 데리고 이 산을 넘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저 노인들과 어머니를 모시고 이 눈 내리는 밤길을 걷을 수 있을 것 같아?”“하지만…….”더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라온은 아랫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병연의 말이 옳았다.
단희는 당분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힘겨워하고 있었다. 어머니 역시 많이 지치셨다. 노인들의 상태도 그리 좋지 않았다.
이들과 함께 지금 당장 길을 떠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불안했다.
불길함이 거머리처럼 뇌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는 절대 병연을 보낼 수가 없었다.
라온은 아랫배에 힘을 주며 소리쳤다.
“그래도 김 형, 우리 한번 해봐요. 되든 안 되든 한번 해보자고요. 이대로 김 형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저하도 곁에 없는데 김 형마저 안 계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저 혼자 저들을 지켜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김 형…… 저 혼자 두고 가지 마십시오.
잔뜩 고집을 부리는 라온의 머리 위로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성가신 녀석.”아릿한 눈으로 라온을 보던 병연의 입에서 기어이 불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낮게 한숨을 쉰 그가 삿갓을 풀어 라온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김 형.”“아침 일찍 길 떠날 것이다. 그러니 들어가 쉬어.”“…….”“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곧 돌아오마.”“…….”“라온아, 홍라온.”“약조하는 겁니까?”“그래. 약조하마.”병연이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손에 고리를 걸며 라온은 다시 한 번 다짐을 받았다.
“김 형, 약조하셨습니다. 정말 약조하신 겁니다.”“그래. 약조한다.”작게 고개를 끄덕인 병연은 산 아래로 몸을 날렸다.
“김 형, 약조 지키십시오. 꼭 지키셔야 합니다.”라온은 눈으로 하얗게 변한 숲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의 목소리는 바람이 되어 숲 곳곳으로 스며들었다.
* * *
병연은 달빛을 향해 달리는 늑대처럼 숲길을 달려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병연은 긴 숨을 토해내며 걸음을 멈췄다.
‘이쯤이다.’예리한 시선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불빛이 보였던 곳으로 향했다. 몇 발짝 걸음을 옮기자 짙은 피비린내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일순, 병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를 맞이한 것은 핏물로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와 그 주위에 널브러진 십여 구의 시체였다.
병연은 눈을 홉떴다.
대체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살아 있는 자는 아무도 없는 건가?
그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늦었습니다. 난고.”병연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 사내가 굽어진 소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너…….”피에 흠뻑 젖은 윤성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요즘 술을 너무 마셨나 봅니다. 고작 이 정도밖에 막아내질 못했습니다.”“이자들은 대체 누구냐?”“제 할아버지가…… 보낸 자들입니다.”“부원군 대감이? 혹시 너, 미리 알고 있었던 거냐?”“길을 떠나기 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윤성의 대답에 병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미련한 녀석. 그런 것이라면 처음부터 함께 하자고 해야 할 것이 아니냐. 대체 이게 무슨 꼴이야?”“그러게나 말입니다. 저 혼자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하하, 자만이었나 봅니다.”윤성의 숨결이 거칠어졌다. 그의 얼굴이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낯빛이 창백하다. 다친 거냐?”“별거 아닙니다.”“산 아래에 제법 쓸 만한 솜씨를 가진 의원이 있다. 우선 그리로 가서 치료부터 하자.”병연은 윤성을 부축하려 다가섰다. 그러나 윤성이 손을 들어 그를 거부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오랜만에 힘을 썼더니 조금 지친 것뿐입니다. 그보다 난고…… 서둘러 그 사람에게 가야 할 것 같습니다.”“왜…… 설마?”“네. 짐작하신 대로입니다. 몇몇 자들이 암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그 사람이 위험합니다. 그 사람을 지켜주십시오.”“…….”“아무래도 저는 많이 부족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이런 작은 보답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군요.”작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윤성을 아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병연은 몸을 돌렸다. 무정하게 몇 걸음 걷던 그는 문득 멈춰 서서 윤성을 돌아보았다.
“고맙다.”윤성은 하얗게 마른 입술을 길게 늘이며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벅저벅.
병연의 발자국이 윤성에게서 점점 멀어졌다.
얼마 후.
비스듬히 서 있던 윤성은 허물어지듯 스르륵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쿨럭, 쿨럭.”그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한 움큼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던 모양이군.”윤성은 입가에 묻은 핏물을 손등을 닦아냈다.
박만충에게 당한 등에서 연신 핏물이 흐르고 있었다.
“독한 놈, 수하를 방패 삼을 정도로 비정한 자일 줄이야. 난……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군.”씁쓸한 미소가 입가를 흘러내렸다. 점점 앉아 있는 것이 힘들어졌다.
윤성의 몸이 모로 기울어졌다.
잠시 후, 윤성은 바닥에 등을 기대고 누웠다.
“편하구나.”겨울 산이라.
당연히 차가워야 할 바닥이 어쩐 일인지 따뜻했다. 흥건하게 고인 피 웅덩이가 그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었던 탓이다.
따뜻하니 온몸이 느른해졌다.
기분 좋은 온기에 자꾸만 눈이 감겼다. 하지만…… 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이…….
윤성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눈이 내리는 하늘이 흐릿한 눈동자에 들어왔다.
만개한 꽃잎처럼 여리고 부드러운 눈송이가 그의 얼굴에 닿아 녹아내렸다.
눈꽃도 아름답지만…… 그가 보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
“달이…… 보고 싶었는데…….”오늘 밤엔 달이 보고 싶었다.
하얀 달이…… 시리도록 차가운 달이 보고 싶었다.
아니, 아니.
진실로 보고 싶은 것은 달이 아니라…… 달을 사랑한 한 사람이었다.
홍라온, 달빛처럼 해사한 웃음을 짓는 그 여인이…… 보고 싶었다.
“당신을 세자저하보다 먼저 만났더라면……. 당신을 세자저하보다 먼저 마음에 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좋았을 것을…….”다음 생에서는 절대 놓치지 말아야지.
애써 떴던 눈이 다시 감겼다.
“라온아…….”다음 생에서 다시 당신을 만난다면 그땐, 곱게 단장시켜 함께 봄나들이나 가야겠다.
눈이 부신 떨잠일랑 모두 모아 당신 머리 위에 어여쁜 꽃밭 만들어, 한 발짝 옮길 때마다 딸랑거리는 그 소리, 노래인 듯 들어야지.
허위허위 바람처럼, 들로 산으로 함께 다녀야지.
세상 사람들 모두 볼 수 있도록 깍지 끼고, 그 손 절대 놓지 말아야지.
다시는 이렇게 뺏기지 말아야지.
행복하게 한평생 함께하고 죽을 때도 내 품에 안고 있어야지.
그리고 하늘이 허락한 시간이 끝나, 끝내 당신이 내 곁을 먼저 떠난다면 그땐 나도 기꺼이 함께 죽어야지. 그리해야지…….
사람을 연모하는 일이 이리 행복한 일인 줄 진작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것이 이리 가슴 뛰는 일인 줄 알았으면 정말 좋았을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행복과 기쁨을, 슬픔과 고통을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한 사람 덕분이었다.
윤성의 흐릿한 눈동자에 라온의 얼굴이 떠올랐다.
순간, 그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태어나 처음으로 짓는 진실한 웃음.
너무 아름다워 눈물겨운 그런 환한 웃음을 얼굴 가득 지으며 윤성은 눈을 감았다.
“라온아…… 라온아…….”라온을 부르는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마치 좋은 꿈을 꾸는 듯 윤성은 행복한 얼굴로 긴 잠에 빠져들었다.
하얀 눈이 그의 몸 위에 소리 없이 쌓여갔다.
나는 꿈을 꾸었네.
꽃이 되는 꿈을.
나비가 되어 빛 속을 날갯짓하는 꿈을.
나는 꿈을 꾸었네.
구름이 되는 꿈을.
바람이 되어 세상을 맴도는 꿈을.
나는 꿈을 꾸었네.
그대가 나를 사랑하는 꿈을.
그대의 눈 속에 내가 온전히 담기는 꿈을.
영원히 그대와 함께 살아가는 꿈을.
나는 오늘도 꿈을 꾸네.
영영 깨지 않을…… 그런 꿈을 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