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마지막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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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4
“그리 좋은 달빛이라면, 그립던 분은 아니지만…… 이 불청객과 한잔하는 건 어떻겠습니까?”느닷없이 들려온 목소리에 라온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커다란 두 눈에 두려움이 들어찼다.
설마, 뒤쫓아온 자들인가?
그녀는 황급히 불 꺼진 암자를 돌아보았다.
어머니와 단희, 그리고 엄공 노인을 비롯한 세 사람의 환관이 고된 잠을 청하고 있었다.
그들을 깨워야 한다. 당장 도망가야 한다. 하지만 이 야심한 시각에 몸이 불편한 단희와 늙은 환관들을 데리고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격한 공포가 머릿속을 꽉 짓눌렀다.
그때였다.
“걱정하지 마라.”눈앞으로 단단한 등이 다가왔다.
거대한 바람벽처럼 라온의 앞을 막아선 병연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익숙한 발소리니까.”“김 형.”위태롭게 떨리던 마음이 그제야 조금 진정되었다. 두려움이 뒤엉켜 아득했던 눈앞이 맑아졌다.
산을 오르는 긴 그림자와 병연을 번갈아 보던 라온이 조심스레 물었다.
“김 형, 혹시 아는 분입니까?”“그래.”“아, 다행입니다.”낮게 한숨을 내쉬며 라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죽는 줄 알았네. 그나저나, 이 밤에 대체 누굴까?
세자저하께서 보낸 사람일까?
궁금해하는 찰나.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었던 달이 말간 얼굴을 내밀었다.
이내 어둠에 잠겨 있던 숲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숲을 가로질러 나타난 사내의 얼굴도 유백색의 달빛 아래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눈매를 가늘게 여민 라온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달빛 아래 서 있는 저 사내, 다름 아닌…….
“참의영감 아니십니까?”윤성의 등장에 라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까지 무슨 일이야?”여전히 라온을 등 뒤로 숨긴 채로 병연이 눈빛을 세웠다.
노골적인 적대감.
가파른 산길을 올라오느라 숨이 찼던 윤성이 허리를 숙인 채 숨을 골랐다.
“묻질 않아? 네가 여긴 무슨 일이냐고.”다그치는 병연의 물음에 윤성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숨 좀 고르고 얘기하면 안 되겠습니까?”“네 사정까지 봐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여긴 어찌 온 것이냐?”거듭되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 윤성은 메고 있던 봇짐을 끌렀다. 이윽고 봇짐 안에서 작은 술병 하나를 꺼냈다.
윤성은 제법 묵직한 그것을 병연의 눈앞에 흔들어 보였다.
“좋은 술이 생겨 난고와 한잔하러 왔습니다. 그리고…….”그는 병연의 등 뒤로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당신께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윤성의 시선이 라온에게 닿았다. 내내 병연의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라온이 고개를 내밀었다.
“참의영감,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겁니까?”“누가 알려 주었습니다.”“그게 대체 누굽니까?”
* * *
“세자저하…….”귓가로 들려오는 최 내관의 부름에 영은 고개를 들었다. 오랫동안 문서를 살핀 탓인지 눈이 침침했다.
손끝으로 가볍게 눈가를 문지르는 영의 앞으로 최 내관은 작은 다담상을 내려놓았다.
“무엇이냐?”“대추차이옵니다.”며칠째 밤잠을 제대로 못 주무시는 왕세자를 위해 최 내관이 준비한 대추차였다.
대추차를 보니 라온이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라 거르시면 안 됩니다. 내관들이 내오는 탕약과 차는 따뜻할 때 드십시오.>이렇게 미적대고 있으면 당장에라도 라온이 이리 잔소리할 것 같았다. 시선 닿는 곳마다 라온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손 내밀면 닿을 곳에 있던 그녀는 이제 영의 곁에 없었다.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 영의 표정이 굳어졌다.
쓸쓸한 숨결이 자선당에 내려앉았다.
최 내관의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하, 식기 전에 드셔야…….”“알았느니.”별다른 말없이 묵묵히 대추차를 마시는 영의 어깨가 오늘따라 지치고 무거워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최 내관의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왔다. 늙은 내관은 기척을 숨긴 채 눈가를 훔쳤다.
“어찌 눈물바람인 것이냐?”뒤통수에도 눈이 달린 것인지. 소리 없이 훌쩍이는 최 내관에게 짐짓 나무라는 듯한 영의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오이다. 소인, 울지 않사옵니다.”“그래, 울지 마라. 내 백성들 우는 모습, 보고 싶지 않아 이리 아등대는 것인데. 너희가 그리 힘없이 울어버리면…… 내가 너무 힘겹지 않겠느냐.”“저하…….”“그보다, 예조참의는 어찌하였다더냐?”“아침에 퇴궐하여 그 길로 한양을 떠났다고 하옵니다.”“그래.”“하온데 저하, 그분께선 대체 어딜 가신 것이옵니까?”“아마도 진실로 가고 싶은 곳이겠지.”나 역시 너무도 가고 싶은 그곳…….
바로 그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겠지.
영은 손에 들고 있던 검은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아침 무렵 중희당을 찾아왔던 윤성을 떠올렸다.
*
오랜만에 만난 윤성은 무척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파리한 안색에 짙은 눈그늘.
한바탕 열병이라도 앓은 사람처럼 초췌한 그에게선 옅은 술 향기가 느껴졌다.
“많이 상했구나.”“그렇습니까?제 입성을 에두르는 눈길로 훑어보던 윤성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영의 눈 속에 작은 이채가 서렸다.
윤성의 미소, 평소와는 달랐다.
평소에 보이던 가면 같은 미소가 아닌, 무방비 상태의 웃음이었다. 그 단단하고 철옹성 같은 녀석이 이리 쉽게 무너지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영의 얼굴에 애잔함이 피어올랐다.
“어디 아팠던 것이냐?”“네.”“지금은 괜찮으냐?”“아니요. 아직도 많이 아픕니다.”“허면, 이리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치료를 받으러 가야 할 것 아니냐?”“네. 치료를 받고자 이리 입궁한 것입니다.”“아픈 것이라면 의원을 찾을 것이지. 어찌 궁을 찾아온단 말이더냐?”“이 아픔의 근원, 다름 아닌 풀리지 않는 번민 때문입니다. 하여, 이 번민을 풀 방도가 없을까, 상담을 받고 싶었습니다. 마침, 남의 고민을 기가 막히게 잘 해결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도통 보이질 않는군요. 혹여 저하께서는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그걸 어찌 내게 묻는 것이냐?”“저하께서는 아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윤성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영을 향했다.
영은 헤집는 듯한 시선으로 그 눈빛을 마주했다.
술에 취한 윤성의 눈빛은 잿빛 안개 속에 갇혀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안개 뒤편에 잔뜩 웅크리고 있는 진심은…… 참으로 깨끗했다. 티끌만 한 속내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마음의 번민을 털어내고 싶어 라온의 행방을 묻고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영이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지금 쫓기고 있다.”내뱉는 영의 말에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일순, 윤성은 숨을 멈추고 말았다. 동시에 흐릿하게 풀려 있던 표정도 딱딱하게 굳었다.
“할아버지께서…… 하신 일입니까?”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래.”역시, 돌아오는 대답은 참담했다.
“……그렇군요.”단단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다시 허물어졌다.
윤성은 마치 바람을 끌어안은 듯 헛헛한 눈으로 영을 바라보았다.
“결국, 할아버지께서 결단을 내리셨군요. 그렇게 되지 않도록 그리 애썼건만.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군요.”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역모라는 망령에게서 그녀를 떼어내기 위해, 참으로 부단히 노력했다. 할아버지의 일을 도왔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영과 맞섰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노력이 허망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쓸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던 윤성이 다시 물었다.
“하여, 그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윤성의 물음에 잠시 망설이던 영이 종이 위에 붓을 가져갔다.
<운악산>
라온의 행방이 알려주는 세 글자가 윤성의 눈동자에 박혔다.
“그런데 저하, 제가 이대로 할아버지께 고해바칠 거란 생각은 안 하신 겁니까?”“넌 그러지 않을 것이다.”“어찌 그리 확신하십니까?”“네가 그런 눈빛을 하고 있었을 땐, 단 한 번도 넌 나를 실망하게 한 적이 없었다.”신뢰가 담긴 영의 대답에 윤성은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모두가 변한 줄 알았습니다. 제가 변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모두 세월의 더께만큼 변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틀렸습니다. 저만 변했던 겁니다.”“…….”“저하와 난고는 예전과 다름없었습니다. 어릴 적 저와 어울리던 그 모습 그대로였습니다.”윤성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다 문득 소맷자락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이게 무엇이냐?”윤성이 내미는 커다란 검은 구슬을 내려다보며 영이 물었다.
“기억나지 않습니까? 어릴 적, 저하와 제가 우정의 징표로 나눠 가졌던 구슬입니다. 다시…… 받아주지 않으시겠습니까?”“…….”“역시…… 다시 돌아가기엔 제가 너무 많이 와 버린 것이겠지요?”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윤성은 고개를 숙였다.
그때, 영의 차가운 목소리가 그의 목덜미로 떨어졌다.
“이런 징표 같은 것이 없어도 너는 나의 벗이다.”“……저하, 그거 아십니까?”“……?”“사실, 제가 저하를 많이 좋아했었습니다.”부러웠습니다.
저하의 당당한 모습이.
그 빛나는 재능이.
당신을 닮기 위해 참으로 많이 노력했었습니다.
고개를 드는 윤성의 얼굴에 웃음이 맺혀 있었다.
“싱거운 녀석.”서둘러 중희당을 나서는 윤성의 뒷모습을 보며 영은 검은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
“저하, 그건 무엇이옵니까?”“뭐라 하였느냐?”최 내관의 목소리가 상념에 빠진 영을 흔들어 깨웠다.
“못 보던 구슬이옵니다. 그건 무엇이옵니까?”“오랜만에 다시 돌아온 벗이 주고 간 것이다.”영은 버릇처럼 검은 구슬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벗이라 하시었사옵니까?”최 내관은 고개를 갸웃했다.
벗? 대체 저하의 벗이 뉘시지?
의문에 휩싸인 최 내관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영은 먼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녀석들, 지금쯤 만났으려나?”
* * *
문틈으로 파고든 겨울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암자의 작은 방으로 들어온 병연은 윤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옷깃을 여몄다.
“말해 봐. 여긴 무슨 일이야?”“아까 말하지 않았습니까? 좋은 술이 생겨 한잔하러 왔다고요.”윤성의 말에 병연은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잠시 후.
병연은 빈 술병을 내려놓았다.
“그 독한 것을 그리 마시다니. 역시 난고는 대단합니다.”윤성이 너스레를 떨며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입에 발린 말은 그만하고. 이제 볼일도 끝났으니. 그만 가 보아라.”단호한 축객령에 윤성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거둬들이며 라온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 남았습니다.”“…….”“고민 상담할 것이 있습니다. 이곳에 남의 고민을 잘 해결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왔습니다.”갑작스러운 고민 상담에 라온이 멍한 표정이 되었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윤성이 다가갔다.
“아무리 생각하고, 번민해도 이 고민이 해결되지 않으니. 마음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은 잘 알지만 제 고민 좀 해결해 주십시오.”“그게…….”당황한 라온이 말을 더듬었다.
그때,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병연이 불현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 형, 어디 가십니까?”“너도 듣지 않았어? 저 녀석이 고민을 상담하고 싶다잖아. 난…… 남의 고민 같은 거 들어 줄 능력이 없어서.”“하지만…….”“밖에 있을 거다. 저 녀석이 무에 이상한 행동이라도 하면 소리 질러라. 바람처럼 들어올 것이니.”라온에게 하는 말이었지만 사실은 윤성에게 건네는 엄포였다.
행여 무슨 불미스러운 짓 했다간 가만두지 않으리라.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윤성을 노려보던 병연이 방을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윤성과 라온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흠흠. 그럼 참의영감, 어떤 고민이신지 말씀해 보십시오.”라온이 낮게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처음으로 마음이 설레는 여인을 만났습니다. 하여, 그 사람을 연모하였습니다. 보지 못한 날은 그리워 심장이 오그라들 정도였지요.”“…….”“나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습니다. 매달려도 보고,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내게 오게 하려고 그 사람이 연모하는 이를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안 되더이다. 그래서 잊으려 합니다. 그런데…… 잊는 것도 되질 않습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그 사람 얼굴만은 또렷합니다.”잠시 말을 멈춘 윤성이 라온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지금이라도 그 사람이 내게 손 내밀어 주면 좋겠습니다. 그리만 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그 사람이 안고 있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 사람의 운명에 족쇄처럼 채워진 역적의 자식이라는 형벌을 영원히 지워줄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라온은 고개를 들어 윤성과 눈을 마주쳤다.
“아마도 그 여인은 그리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참의영감께서도 그 여인을 그리 만들 수 없을 겁니다.”“어째서요? 어째서 저는 안 되는 겁니까?”“이미 그 여인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차 있는 것은 언제고 비워지기 마련입니다. 비워지지 않는 마음이라면…… 비워버리게 하면 되질 않겠습니까?”“그리 강제로 비워내 버린다면…… 아마도 그 여인은 살아있는 평생 불행할 겁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참의영감 또한 마음이 편치 않을 것입니다.”“그럼 나는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제가 예전에 고민 상담을 했던 분 중엔 홀로 짝사랑하는 분이 많았습니다. 그중에 다행히 사랑이 이뤄지신 분도 있었지만, 사랑이 이뤄지지 않은 분들도 많았습니다.”“그 사람들은 어찌 되었습니까?”잠시 윤성을 바라보던 라온이 검지를 추켜세웠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세월이 약이라고 하셨습니다.”“세월이 약?”“네. 그 사람이 없으면 당장 죽을 것 같고, 미칠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괴로운 마음도 잊혀질 거라고 하셨습니다.”사랑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다.
느닷없이 나타나 미처 대비할 여유조차 주지 않은 채, 멋대로 깊은 흔적을 새겼다.
뜨겁고, 아프고, 괴로웠다.
아무리 태연한 척 애를 써도 지워지지 않는 연(戀)의 인(印)
“정말 세월이 흐르면 이 고통이 사라지겠습니까?”“지금의 고통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거름이 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일상으로 돌아가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아프고 괴롭더라도 견디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 아픈 마음도 비워질 것입니다.”“그렇군요.”윤성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쩌면 시간이 약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도 고통스럽습니다. 이 마음이 변할 수 있을지 짐작도 하지 못하겠습니다.”“참의영감…….”“처음으로 제게 사심 없이 환하게 웃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너무 좋은 사람이라 섣불리 손을 내밀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잃어버렸으니,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그 공허함은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어떤 사람을 만나도 이 간절한 그리움과 욕심은 채워지지 않겠지요.
“그리 말씀하지 마십시오. 참의영감께선 언제가 꼭 좋은 사람을 만나실 겁니다.”“저 같은 사람에게 그런 날이 올까요?”“네, 걱정하지 마십시오. 꼭 올 겁니다. 왜냐하면…… 참의는 정말 좋은 분이니까요.”“저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그 누가 뭐라고 해도 제겐 좋은 분입니다. 그거 아십니까?”윤성이 라온을 바라보았다.
“참의께서 다시 웃으시니 정말 좋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웃으시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저는 참의께서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라온이 윤성을 향해 하얗게 웃음을 보였다.
순간, 팽팽하게 유지하던 인내의 끈이 툭하고 끊어져 버렸다.
가질 수 없는 연모는 너무도 서러웠다.
처음으로 가슴 설레었던 미소가 제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밤은 고통으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으면 무뎌질 상처라지만…… 그래서 이 사람을 잊게 된다면 차라리 이리 고통스러운 것이 나으리라.
이리 고통스럽더라도 이 여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이 여인 하나를 얻어 열을 잃는다 하여도 그는 그녀를 얻고 싶었다.
이 사람을 얻어 백을 잃게 된다고 하여도 윤성은…… 라온의 사내이고 싶었다.
서러운 열망.
미련한 욕심.
사랑은 잔인했고, 그래서 더 아름다웠다.
걷잡을 수 없는 감정에 윤성은 라온을 꽉 끌어안았다.
“참의영감.”서러운 사내의 마음이 떨리는 팔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라온은 윤성을 밀어내던 팔에 힘을 뺐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토닥토닥 등을 다독거렸다.
“참의영감. 그동안 정말 고마웠습니다.”“…….”“그리고 미안합니다.”“그 말을 기어이 하고야 마시는군요.”“미안합니다.”“……됐습니다. 이제 모두 되었습니다.”낮게 읊조리던 윤성은 품 안에 가두고 있던 라온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잔향처럼 남은 온기를 애써 뿌리친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보겠습니다.”윤성의 얼굴에 쓸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문득 시선을 내려 제 손을 바라보았다.
저 여인을 얻기 위해 세상을 가지려 했다.
그토록 더 많은 것을 가지려 발버둥을 쳤건만…… 결국, 손안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기분이 좋았다.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자꾸만 가슴이 간질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윤성은 웃음 띤 얼굴로 라온을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라온에겐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는 부디 아무것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 *
방을 나선 윤성은 휘적휘적 어둠을 향해 걸어갔다.
“어딜 가느냐? 밤이 늦었다. 괜찮으면 예서 묵고 날이 밝으면 가거라.”암자 앞, 커다란 노송에 기대고 있던 병연이 그의 곁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아닙니다.”윤성은 라온이 있는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엔 제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이 마음도 조금은 옅어진다고 하니……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을 자신이 없습니다.”싱긋, 미소 지은 윤성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좋아 보인다.”그의 등 뒤에서 병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네 웃음 말이다. 예전엔 가면이라도 쓴 것처럼 거짓으로 보이더니. 지금의 네 웃음은 어릴 적 내가 알던 그 웃음과 똑같구나.”“…….”“보기 좋다.”병연의 말에 하얗게 이를 드러내며 윤성이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러는 난고도…….”“…….”“아주 보기 좋습니다.”병연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인 윤성이 휘청거리며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터덜터덜, 어둠을 벗 삼은 윤성의 입에서 흥얼흥얼 노랫가락이 흘러나왔다.
“연모하는 내 님은 끝내 이 마음을 아니 받아주시니…… 이제 어찌한다? 가슴은 찢어지고, 하소연할 달님도 오늘 밤엔 자취를 감추었으니…… 이제 무얼 한다?”문득 걸음을 멈추고 라온이 있는 암자를 올려다보던 윤성이 웃음을 지었다.
“그래. 멀리 떠나시는 내 님을 위해 마지막 선물이라도 드리고 가야겠구나.”그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마치 모든 것을 털어낸 듯 산을 내려가는 윤성의 걸음이 구름처럼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