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저와 한잔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별점10.02,233명 참여 | 댓글215
2014.10.10
저녁 무렵이 되자 하늘이 맑게 개였다.
온종일 눈발을 흩뿌리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얼굴을 드러냈다.
시린 겨울 별이 저녁 하늘을 하나둘 수놓기 시작했다. 잔뜩 옷깃을 여민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퇴궐한 안동김씨 일문들이 향한 곳은 집이 아니라 부원군 김조순의 저택이었다.
“하하하, 하하하.”사잇문을 모두 거둬 올린 김조순의 사랑채에서는 연신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하하하, 정말로 통쾌했습니다.”형조판서 김익수가 일순 웃음을 멈추고 주위를 돌아보았다.
“오늘 저하의 얼굴을 보시었소?”“보다마다요. 벌레라도 씹으신 듯한 표정이었습니다.”병조판서 윤상일이 맞장구를 쳤다.
“앞으로 저하께서도 지금처럼 일을 처리하지는 못할 것이외다.”호언장담하는 김익수의 말에 방 안에 모인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일부 걱정하는 무리도 끼어 있었다.
“허나 형판 대감. 저하께서는 주상전하와는 다른 분입니다. 혹여 이번 일로 불똥이 튀지는 않을까 걱정됩니다.”예조판서의 말에 김익수가 낮게 혀를 찼다.
“예판께서는 어찌 그리 새가슴이오? 사내 배포가 그리 작아서 어디에 쓰겠소?”“그런 것이 아니라…….”“예판이 걱정하는 것도 나름의 일리가 있네.”그때 묵묵히 침묵하던 김조순이 끼어들었다.
“부원군 대감, 무슨 말씀이십니까?”김조순의 곁으로 바싹 다가간 앉은 김익수가 그의 술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오늘 세자저하의 모습은 그야말로 꼬리 내린 호랑이 같았다. 고분고분 이쪽의 요구를 받아주는 모습이 어찌나 통쾌하던지.
그런데 그 누구보다도 기뻐해야 할 부원군 대감께서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어째 이러실까?
김익수의 속내를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술잔에 입을 담그던 김조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세자 저하께서 우리가 하는 일을 족족 막으셨으니. 예판께서 걱정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이 모든 것이 모두 이 늙은이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니. 내 그대들을 볼 낯이 없음이네.”“대감. 그 무슨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옵니까?”김익수가 잔망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로 저하를 지탱하던 기반이 흔들렸습니다. 무결하던 저하께도 흠결이 생겼으니. 조정 대신들도 지금까지처럼 마냥 그분의 말씀을 따르지만은 않을 겁니다.”김익수의 말에 눈치를 살피던 형조판서가 맞장구를 쳤다.
“병판의 말씀이 옳습니다. 이제 저하께서 하시는 일이 예전처럼 순탄하지 않을 것입니다.”“말해 무엇하겠소?”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을 시작으로 방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 목이 터져라 웃었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김조순은 그들과 웃을 수가 없었다.
저들의 말이 맞았다.
이번 일로 세자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신뢰를 잃었다.
분명 기쁜 일이고, 기뻐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했다.
“지나치게 수월하게 넘어갔어.”이리 쉽게 수긍하고 무너질 분이 아닌데.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무얼까?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마냥 기쁜 마음이 들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이리 걸리는 것일까? 타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부나방이 된 기분이었다.
“승기를 잡았음에도 도리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니. 과연 세자저하가 아니신가. 하지만 이제 더는 기회가 없을 것이네. 내, 이번 기회에 저하의 기반이 완전히 무너뜨릴 터이니.”김조순이 낮게 혼잣말을 뇌까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곁에 있던 김익수가 고개를 기울였다.
“부원군 대감, 지금 무어라고 하시었습니까?”“이번 기회에 저들의 기반을 완전히 무너뜨려야겠다고 하였네.”“묘안이라도 있으십니까?”“한 사람만 찾아오면 되는 걸세.”눈치 빠른 김익수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사람이 혹 이번 역모 사건과 관련이 있는 자이옵니까?”“하하하, 사람을 보냈으니 곧 좋은 소식을 갖고 올 것이야.”“어떤 소식일지 벌써 기대가 되는군요.”“기대해도 실망하지 않을 것이야. 약속하지. 내 곧 예전의 권세를 자네들에게 다시 돌려줌세.”좌중을 향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내어놓은 김조순은 술잔을 기울였다. 먼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 속에 서늘한 이채가 스며들었다.
“저하께서도 기대하세요.”혀끝에 감도는 술맛을 음미하며 김조순은 낮게 중얼거렸다.
* * *
밤 깊은 시각.
바싹 얼어붙은 운악산 기슭의 주막으로 한 무리의 사내들이 들어섰다.
“어쩐 일이래? 간밤에 돼지꿈을 꿨나? 오늘은 손님이 어찌 이리 많다냐?”부엌에 앉아 아궁이 불을 뒤적거리던 주모는 신이 난 얼굴로 주막 마당으로 나왔다.
“어서들 오십시오. 꽤 춥지요?”때마침 주막 안으로 들어서던 선비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건네 왔다.
“죽을 만큼 춥네. 주모, 여기 탁배기랑 국밥 한 사발만 주게나.”“네네.”“얼어 죽겠구먼.”“봉놋방에 불 뜨뜻하게 지펴놨으니. 어서 들어가세요. 아이고, 다들 사람이 아니라 얼음장입니다요, 얼음장.”“내 말이 그 말일세.”몸을 부르르 떨던 선비와 그 일행들은 주모가 안내한 봉놋방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아이고, 이제야 살겠네.”따뜻한 기운이 궁둥이에 닿자 얼어붙었던 숨이 그제야 쉬어지는 듯했다. 모두 풀린 얼굴로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 사이, 후다닥 상을 차린 주모가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다들 이 밤에 어딜 가는 길입니까요?”상을 내려놓으며 주모가 붙임성 있게 물어왔다.
“말도 말게나. 급히 찾는 물건이 있어 한양에서 오는 길이라네.”김이 하얗게 올라오는 국밥을 허겁지겁 퍼먹으며 선비가 말했다.
“아, 그렇군요. 한양에서 예까지. 무슨 물건을 찾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참으로 고생이겠습니다요.”“그런데 주모.”문득 생각났다는 듯 선비가 숟가락질을 멈추고 주모를 바라보았다.
“네, 선비님.”“혹여 이 길로 먼저 간 사람이 있는가?”“먼저 간 사람이요?”잠시 턱을 괴고 생각하던 주모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점심 무렵에 선비님처럼 먼 길 온 것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지요.”“그래? 그들이 몇이나 되었는가?”“한 예닐곱 명쯤 된 것 같습니다요.”“예닐곱?”“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십니까요?”“어쩌다 일행과 떨어졌다네. 혹여 일행들이 먼저 이 길을 지나간 것은 아닌지 궁금해서 묻네. 주모, 그들이 어떤 행색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나는가?”“기억나다뿐입니까요. 아주 생생합니다.”“그래? 어떤 행색을 하고 있었는가?”“그러니까…… 일행 중 두 명은 아주 잘생긴 사내였습지요. 한 사내는 여리여리한 것이 계집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아주 고운 사내였습지요. 다른 한 사내는…….”말을 하던 주모의 얼굴이 나이에 맞지 않게 발그레 붉어졌다.
“아이고, 나도 참. 주책없네.”사내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리 좋은지 주모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로 얼굴을 훔쳤다.
“그래, 다른 사내는 어찌 생겼는가?”선비의 재촉에 주모가 다시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 잘생긴 사내는 처음 봤습지요. 처음에 봤을 때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하늘 태자인 줄 알았습니다요.”“나머지는? 나머지 일행들은 어땠는가?”“나머지 두 사람은 여인이고, 나이 든 노인이 셋이 있었는데…… 그게 참 이런 말을 해도 되려는지.”“말해보게.”“그 노인들 말입니다요.”“왜? 그 자들이 이상했는가?”“그게…….”주모는 연신 사내의 눈치를 살피며 주저했다.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때, 주모의 속내를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선비가 말했다.
“왜? 사내도 계집도 아닌 것 같지 않던가?”“아이고, 맞습니다. 어찌 그리 아십니까?”“헤어진 일행이 맞는 거 같으이. 그들이 어디로 가던가?”“운악산 방향으로 갔습지요.”“그런가? 고맙네. 덕분에 놓쳤던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으이.”선비의 얼굴이 한결 가뿐해졌다.
그는 다시 국밥 그릇에 얼굴을 묻고 남은 국밥을 서둘러 입안에 퍼 넣었다.
“그런데 주모. 이 뒤로 넘어가는 길이 운악산 방향 하나밖에 없는가?”“아이고, 아닙니다. 이 근방은 산세가 험하고 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습지요. 운악산과 매봉산도 이쪽으로 가고, 아래쪽 길은 계곡으로 이어집니다.”“그래? 주모가 아니었으면 우리도 꽤 헤맬 뻔했군. 그런데 참 한적한 곳에 주막을 꾸렸네, 그려.”“원래는 미련퉁이 같긴 했지만 제법 의지가 되는 지아비가 있었습지요. 그런데 이년의 팔자가 박복해서 그런지. 십 년 전에 미련퉁이 같은 사람이 그만 저세상 사람이 되었지 뭡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혼자…….”“저런. 안됐군. 혼자 지내면 무섭지는 않은가?”“무섭기는요. 쇤네가 이 길목에서 국밥집을 한 게 벌써 삼십 년입니다. 이제는 발걸음 소리만 들어도 어느 마을의 뉘인지도 알 지경입니다요.”“하하하, 그러는가? 이거 정말 잘 먹었네.”금세 국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선비가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곁에 있던 일행들도 선비를 따라 몸을 일으켰다.
“설마 지금 가시게요? 시간이 많이 늦었는데, 차라리 하루 이곳에서 쉬시고, 날이 밝으면 떠나시는 것이…….”“한시가 바쁘다네.”“그래도 지금 나갔다가 산속에서 길이라도 잃으면 죽습니다요.”“하하하, 걱정하지 말게. 여기 얼마인가?” “국밥 다섯 그릇에 탁배기까지 해서 모두 두 냥이긴 한데…… 정말 가시려고 하십니까요?”“그렇다네. 자, 여기 세 냥일세.”부르는 값보다 한 냥 더 얹어주는 선비의 선심에 주모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아이고, 감사합니다.”“내가 더 고맙다네.”말과 함께 선비와 그 일행들이 봉놋방을 나섰다.
주모가 아쉬운 얼굴로 사립문 앞까지 배웅했다.
“살펴 가십시오.”선비는 주모에게 처음 보았던 그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양반들, 고집도. 저러다 큰일 나지. 아이고, 춥다. 얼른 들어가자.”눈앞에서 천천히 멀어지는 선비와 그 일행들을 지켜보던 주모는 서둘러 주막등을 끄고 방 안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때였다.
“이런이런, 내 정신을 보게나. 주모.”무슨 일인지 선비가 되돌아왔다.
“네, 선비님. 뭐 잊은 거라도 있으십니까요?”“그렇다네. 내가 깜빡하고 이걸 잊었지 뭔가.”“뭘 놓고 가셨습니까요?”궁금해하는 찰나.
쓱, 날카로운 칼날이 주모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사람의 목을 베어버린 선비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검을 검집에 갈무리했다.
그리고는 앞으로 기울여지는 주모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다음에 태어나거든 이런 곳에 살지 말게.”“선, 선비님…… 왜, 왜……?”베인 목에서 검붉은 핏물이 콸콸 솟구쳤다.
핏물은 저고리 앞섶을 적시고 금세 치맛자락을 흥건하게 만들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박만충은 여전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주모가 주모 입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이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주모의 눈과 귀를 속이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다고 말일세.”“그…… 그게 왜…… 컥! 컥!”피를 토하던 주모는 급기야 차가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박만충은 바닥에 쓰러진 주모의 등을 한 발로 지그시 눌렀다.
“도망친 자들을 도와줄 자들이 내 뒤를 쫓아올지 모른다네. 주모만 없으면 앞으로 올 사람들은 우리가 어디로 향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어쩌겠는가? 수고스럽지만 이리할 수밖에.”“…….”“잘 가시게. 다 큰일을 위해 하는 것이니. 그리 이해하고 넘어가게. 그리고 이건 저승 가는 노잣돈으로 쓰게.”큰 선심 쓰듯 엽전 하나를 주모에게 던진 박만충은 운악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멀리서 밤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얗게 내린 눈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고운 보석가루처럼 반짝거리는 그 빛을 조족등 삼아 겨울 숲을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의 숨결이 유독 거칠었다.
“단희야, 힘들지.”라온은 턱 끝까지 숨이 차오른 단희를 걱정하며 옆에서 부축했다.
“아니에요. 언니. 저는 괜찮아요.”씩씩한 대답과 달리 단희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이리 기대. 언니가 부축해줄게.”“언니도 힘들잖아요. 나는 걱정 말고…….”그때였다.
서로를 걱정하는 두 사람 사이로 불쑥 검은 그림자가 파고들었다.
라온과 단희가 느닷없는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단단한 팔이 어느새 단희의 작은 몸을 달랑 들어 올렸다.
“오라버니!”병연이었다.
두 사람의 뒤를 묵묵히 쫓아오던 병연이 힘들어하는 단희를 안아 올린 것이다.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려 주시어요.”단희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러나 병연은 무심한 표정으로 고갯짓을 했다.
“괜찮다. 저 고개만 넘으면 된다.”“우리 짐에, 저까지. 오라버니께서 힘이 드십니다. 그러니 어서 내려주시어요.”“별로 힘들지 않으니 상관 마라.”불퉁한 한 마디를 내뱉은 병연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김 형, 고맙습니다.”그의 너른 등을 향해 라온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녀석, 그런 말은 꼬박꼬박 하지 않아도 된다.”그때, 뒤에서 힘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보게, 이보게. 그리 힘이 좋으면 나도 좀 도와주게.”그르륵, 가래 낀 음성.
라온은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라온을 궁으로 들여보냈던 박두용과 한상익이 헉헉대며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라온의 환관 시술을 맡았던 엄공 채천수가 술병을 기울이며 따라왔다.
“시끄럽다, 한가야. 그런 소릴 할 기운 있으면 한 발짝이라도 더 옮겨라.”“시끄럽다니? 시끄럽다니? 내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는데? 이게 네놈 탓이 아니더냐?”“그게 어떻게 내 탓이더냐?”“네놈이 저놈을…….”한상익과 라온을 번갈아 손가락질하던 박두용이 얼른 말을 고쳤다.
“아니지, 놈이 아니지. 저 계집을 궁에 들여보내지만 않았어도 내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 되지 않았을 거 아니냐?”“세자저하께서 마음 두실 곳을 찾았다며 웃었던 주둥이가 이 주둥이가 아니냐? 그런 주둥이가 이제는 뭐라고 하는 게야? 그리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게 어디 내 탓이냐?”한상익이 라온을 흘겨보았다.
“저 녀석이 여인인 것을 숨기고 궁에 들어간 것이 아니더냐?”“저 고연 놈. 아니, 그보다…….”박두용의 매서운 눈이 이번에는 묵묵히 뒤따르는 채천수를 흘겼다.
“이 망할 놈의 엄공 놈아. 네놈 눈은 멋으로 뚫려 있는 것이냐? 아니면 얼굴 가죽이 모자라 뚫린 것이야? 천하제일의 엄공? 지나가는 개미가 웃겠구나. 아니, 어떻게 하면 환관 시술을 하는 놈이 계집인지 사내인지 구별도 못 할 수가 있는 거냐?”“그 계집을 환관으로 만들어 달라며 보낸 네놈 눈깔은 제대로 된 눈깔이냐?”채천수의 반박에 박두용이 이가 몽창 빠진 잇몸을 앙다물었다.
“이놈이! 죽고 싶은 게냐?”“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라.”“오냐. 그렇지 않아도 몸이 꿉꿉했는데. 오랜만에 몸 한번 풀어보자.”소맷자락을 거둬 올린 박두용이 채천수를 향해 죽기 살기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툭!
채천수의 가벼운 주먹질 한 방에 박두용은 가을 낙엽처럼 바닥을 데굴데굴 나뒹구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채가, 네가 정말 죽고 싶은 게로구나.”“흥, 네깟 놈 손에 죽었으면 천 번은 더 죽었을 몸이다.”귀찮다는 듯 중얼거리는 채천수를 보며 박두용은 더욱 방방 뛰었다.
“이 망할 놈의 엄공 놈아, 지금이라도 잘못 했다고 빌어라. 그러지 않으면 오랜 수련으로 다져진 내 발길질이 너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엄공 놈아, 어서 썩 용서를 구하지 못할까? 나 발 올린다? 응? 이대로 찬다? 응? 발 차?”“차고 싶으면 찰 것이지, 언제까지 모기처럼 앵앵거리기만 할 테냐?”“이 엄공 놈이, 주둥이만 살았구나. 네가 아직 매서운 맛을 못 봐서 그러지. 좋다, 네 기어코 내 발차기 맛을 봐야겠구나. 이얍!”잠든 숲을 깨우는 듯한 소란이 이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흘렀을까?
이제는 다툴 기운도 없는 듯 박두용이 진 빠진 얼굴로 병연을 돌아보았다.
“이보게, 도대체 언제까지 올라가는 겐가? 이러다 해 뜨겠네. 설마, 밤새도록 걸어야 하는 건 아니겠지?”그때 병연이 우뚝 멈춰선 채 노인을 돌아보았다.
“다 왔습니다.”“응? 다 와?”“네. 여기다 여장을 풀면 될 겁니다.”“…….”일순, 세 노인의 시선이 한데로 모였다.
“뭐라고 했는가?”박두용은 혹시 뭘 잘못 들었나 해서 귀를 후비적거리며 다시 물었다.
아무리 봐도 주위엔 어두운 숲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뿐이었다.
설마 이 추운 날, 이런 삭막한 곳에서 한뎃잠을 자자는 건 아니겠지?
“다 왔다고 했습니다.”박두용을 비롯한 노인들은 병연이 가리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숲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암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노인들의 얼굴에 들어찬 것은 기쁨이 아니라 분노였다.
한상익이 바닥을 쿵쿵 차며 소리쳤다.
“아니, 무슨 놈의 암자를 이런 깊은 골짜기에 지어놨대? 사람이 찾아오라고 지은 거야? 아니면 찾지 못하라고 지은 거야? 대체 이런 곳에 암자를 지은 얼빠진 인간은 누구야?”“세자저하십니다.”“뭐?”병연의 무뚝뚝한 대답이 다시 이어졌다.
“세자저하께서 지은 암자라 했습니다.”한상익이 갑자기 손바닥을 마주쳤다.
“역시! 우리 저하께서는 선견지명이 있으시다니까.”박두용이 양 엄지를 위로 추켜세우며 동참했다.
“그렇지.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미리 이런 곳을 마련하시다니. 역시 우리 저하시라니까.”
* * *
고단했던지 최 씨와 단희는 암자에 여장을 풀기 무섭게 금세 잠이 들었다. 옆방에서는 세 노인의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들은 잠결에도 연신 티격태격했다. 귀 기울이던 라온은 살풋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세 노인은 시간만 나면 서로 잡아먹을 듯 싸우곤 했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서로를 생각해 주는 사람들이었다.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벗의 모습이리라.
벗, 진정한 벗.
문득 자신을 벗이라 부르던 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와 소소하게 말다툼을 하던 그 시절이 그리웠다. 처음 그를 만났던 날의 기억이, 내 사람이 되라 하던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떠올랐다.
순간, 알알한 아픔이 심장에 얼음처럼 박혔다.
목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기운에 라온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자정이 훌쩍 넘긴 시각.
달빛에 잠긴 겨울 숲은 고요했다.
차가운 고요 속으로 발을 디딘 라온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뿜는 숨결에 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그리운 마음도…….
유백색 달을 보는 순간, 잠시 묻어두었던 아픔이 새순처럼 돋아났다.
꼭 데리러 오겠다는 영의 약조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분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무얼 그리 생각하는 거야?”어느새 뒤따라 나온 병연이 곁에 서며 물었다.
“아, 김 형. 안 주무십니까?”“너는 어찌하여 안 자는 거야?”“그냥요.”바위 위에 앉으며 라온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경치가 참으로 좋습니다.”“그래.”“달빛도 정말 좋습니다.”“그렇구나.”“저리 고운 달빛, 그분도 보고 계시겠지요?”“…….”뉘라 말하지 않아도 그 마음에 담긴 사람을 어찌 모를까.
지켜보는 병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가슴의 격통을 애써 갈무리한 병연은 톡톡, 라온의 어깨를 위로하듯 두드렸다.
“걱정 마라. 세상 누구보다 강하신 분이다.”“알고 있습니다. 그래도…….”걱정됩니다. 걱정되고 그리워 숨이 딱 멎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내색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병연이 볼세라 라온은 얼른 눈가에 맺힌 물기를 지웠다.
“그거 아십니까? 이런 날이면 저는 자선당에서 술잔을 나누던 때가 기억납니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제 짧은 생을 통틀어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습니다. 이리 달빛이 고운데, 다시 한자리에 모여 술잔을 기울이면 얼마나 좋을까요?”그런 날이 다시 오면 얼마나 좋을까요?
라온은 가슴에 맴도는 그리움을 애써 삼켰다.
그때였다.
“그리 좋은 달빛이라면, 그립던 분은 아니지만…… 이 불청객과 한잔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어두운 언덕 아래에서 긴 그림자가 다가왔다.